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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대구교회 가을집회
<그리스도인의 자유>
1. 생명의 자유
2017. 10. 6. 오전 김치현 목사
이번 집회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주제로 갈라디아서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1:1~1: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연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국지적인 운동에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12제자만 있었다면 예수님과 생선을 같이 구워먹었다거나 어디를 같이 갔다거나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져보았다는 이야기를 주로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경험하여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서 발견되게 하고 예수 안에 포함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를 주관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생명력이었습니다. 각자 다 자기 자신으로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그것을 내놓기 때문에, 마치 뷔페 잔칫상이 가득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똑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들리는 것이 다릅니다. 들리는 부분이 다르고, 알아듣는 이해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열 사람이 간증하면 열 사람이 간증이 다 다릅니다. 체험과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양하기 때문에 풍성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다양하기 때문에 도를 넘는 사람도 생깁니다. 초대교회도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디까지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해야 되는지 울타리를 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자 정하여 교리와 신조를 만들고 객관화시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없어질 수 있는데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문제를 없애려 하다 보면 귀중한 것까지도 손상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라지가 있지만 가라지를 뽑지 말고 추수 때까지 두라. 알곡까지 해할까 한다. 알곡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가라지가 다소 있지만 그냥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맞는 것이고 필요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너무 경직되면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장 왕성했던 중세 1000년이 암흑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에서생명으로
복음은 율법에서 생명으로 옮겨 간 것이다. 복음은 율법의 노력에서 은혜와 생명으로 돌아서게 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내가 하는 모든 수고가 내려놓아 지는 경험입니다. 복음은 내가 어떻게 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았고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살았다는 역사를 바탕으로 쓴 것이지만, 역사와 다른 것은 인간사가 아니고 인간사를 통해서 개입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말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뭘 했느냐를 알려하면 헷갈리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 해놓으면 타락하고, 겨우 건져 놓으면 또 우상을 섬기는 일을 되풀이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했느냐를 보면 성경은 지저분한 역사이고, 여기서 무엇을 건질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게 되면 자신의 수고를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지켜만 봐도 우리에게 넘치는 풍성이 오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성경 말씀이 들리면, “하나님이 시작하셨구나.” “내 인생에 주권이 없구나.” “내가 잘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구나.” 이 말씀만 들려도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내려놓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이것을 붙잡고 고민하던 모든 문제가 이 한 말씀만 들려도 모두 내려놓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신부)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는 이 말씀이 들린다면, “주님이 나를 깨끗하게 하시는구나.” “내가 나를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할 일이 아니구나.” 이 말씀만 들려도 나를 고치고 개선하려는 모든 수고를 내려놓게 됩니다.
우리는 다 자신을 다듬고 고치고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는 말씀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쓴 책입니다. 율법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해지려고 하고,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린다면 수고로부터 해방되게 되고, 내가 나를 고치려는 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지난주에 변경룡 형님이 출애굽기 말씀을 하셨는데, 나를 위해서 하신 말씀으로 깊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고 불이 계속 타고 있는 기이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볼 때 나와 전혀 무관한 말씀이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 말씀이 들리고 또 그런 것이 보여 집니다.
그것은 모세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타고 타서 더 이상 탈 것이 없는 상태가 모세의 80세입니다. 모세는 이제 누가 와서 불을 지펴도 더 탈 것이 없고, 누가 부추겨도 부추겨질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온전한 복음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조금 무엇을 더하면 될 것 같은 가능성 속에 삽니다. 좀 다듬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혀 나한테 가능성이 없어야 우리에게서 여호와의 불이 탈 수 있습니다. 나한테서는 탈 것이 없어야 합니다. 숯이라도 되면 그래도 탈 것이 남아 있는데, 80세의 모세는 숯이 아니고 재가 된 사람입니다. 더 탈 것이 없는 사람, 거기서 불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거나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경우 자기가 타는 불, 자기를 불사르려는 사람의 의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대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했는데, 자기를 불사르게 내주면 사랑인줄 알지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말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요엘2:13).”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애통함과 절박함을 표현할 때, 자기 옷을 찢으면서 자기 진실을 보이려고 합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할 때, 옷을 찢으면서 스데반에 대해서 분개했습니다. 그런데 옷을 찢는 것이, 마음을 찢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옷을 찢으며 자기를 불사르게 내주려는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불사를 것이 없는 사람, 부추겨도 부추겨지지 않는 사람, 찢을래야 찢을 것이 없는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가장 온전하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 복음입니다. 우리 주제 파악만 되면 누구에게라도 나타날 수 있는 복음입니다.
이것을 모세는 기이한 광경이라고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것만으로도 축복입니다. 모세가 지금 어떤 사람을 말하고 있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복인 것입니다. “모세가 이 사람을 말하고 있었구나.” 우리가 이런 사람을 아는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아브라함의 100세, 야곱의 130세, 모세의 80세, 처녀가 아들을 낳은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다 그런 사람인데 내가 무엇이 될 줄 알고, 우리가 가능성이 있는 줄로 속아서 이 사람을 버린 것입니다.
복음이 들렸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가 들리고 보인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했다는 이야기만 자꾸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예수 앞에 나와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했습니다(마7:22).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것을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재가 되어서 탈래야 탈 수 없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을 마칠 때,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하셨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서 율법에서 복음으로 옮겨진 사람은 나를 고치고 개선하고 자기를 세우려는 모든 수고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어떻게 바꾸느냐 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 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과 하나님의 일이 늘 맞물려 돌아가지만, 우리 사정을 넘어서 우리 처지를 이용하여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율법주의를 경계함
갈라디아서 말씀은 율법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쓴 책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꼭 십계명이나 구약성경을 가지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한다는 것만이 아니고, 옳은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당당해지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1장 1절에서 이 복음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까? 어떤 것이 사람의 일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사무엘상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했습니다(삼상16:6). 외모라는 것이 꼭 우리의 생김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는 것은 다 외모입니다. 사람이 아는 것이 다 외모입니다. 사람의 지식과 종교와 성향, 등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 외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 하나님이 보시는 그것이 중심입니다. 마음만 해도 개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사람이 마음이 어떻다거나 내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말로도 할 수 있습니다. 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보다도 더 깊은 근원이니까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 사람의 일은 외모를 바꾸는 것입니다. 행동을 바꾸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다 행위의 문제입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생각합니다. 뜻밖의 좋은 일이 나에게 생기면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농담이긴 하지만 여자가 정말 기가 막힌 남자를 만났을 때, 전생에 나라를 2번 구했나 그런 말을 합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매사에 내가 무엇을 해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잘해서 이런 좋은 결과가 왔고, 잘못해서 이런 좋지 않은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인과관계가 따져지지 않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거나, 내가 도무지 잘한 것이 없는데 나에게 행운이 왔을 때, 전생에 무엇을 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삶의 결과를 말하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다 외모와 관계되어 있지만 하나님 일은 중심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생명을 바꾸는 일입니다.
행위는 마음이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계명을 만들어서 지키라고 하면 오히려 그것이 쉬운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지만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규정대로 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같은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라고 해놓으면 그것만 지키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모든 행동마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하니까 실제로 더 어렵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나를 가지고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100% 떳떳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옛날에 꽤나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는다고 했는데, 항상 마음에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다니엘서에 벨사살 왕이 환상을 보았는데, 다니엘이 환상 속에 나타난 글을 해석하니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단5:27) 라는 글이었습니다.
제게도 그 말이 항상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울에 달아보니까 부족함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늘 내 속에서 누군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느낌입니다. 율법 아래 살면 누군가 나를 항상 감찰하는 것 같습니다. 겸손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나는 왜 안 되는가?” 이런 생각도 다 우리의 행위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합니다. 행위가 없다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존재로 설 때만 우리가 무엇이 되었다 안 되었다, 잘했다 못했다는 이런 모든 판단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천하게 쓰일 수도 있고 귀하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금 그릇으로 쓰일 수도 있고 질그릇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행위를 생각하기 때문에 꼭 금 그릇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쓰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쓰심만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인생의 어떤 것도 쓰시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약함과 부끄러움과 죽음까지라도 쓰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2) 인공물을 경계함
두 번째로는 인공물을 경계하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역사의 결론은 바벨탑이 무너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한 사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창세기 11장에 무너졌던 그 바벨탑이 요한계시록에 가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땅에서 쌓아 올라간 성입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만든 인공물을 상징합니다. “돌 대신 벽돌을 쓰고, 흙 대신 역청을 쓰자.”는 말은 사람의 노력으로 하늘에 이르려는 정신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역사의 결론을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인공물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이 허물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자랑하고 싶은 그것, 나라고 표방하고 싶은 그것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것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일은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는 있습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고 사람을 많이 모을 수도 있고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생명의 자유를 잃게 됩니다.
비록 효율적이지는 않고 크고 위대하고 놀랍게 무엇이 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도록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회, 위로부터 내려오는 그 신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것, 이것을 보았을 때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들을 볼 때 백옥 같고 수정 같이 맑다고 말하는 것은 인공적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3) 굳어짐을 경계함
세 번째로 생명 안에 있다면 굳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굳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규정하면, 말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유하심을 잃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어떨 때는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겠다고 맹세했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니까 그것을 원인무효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데 고리가 네 개 달렸고 막대기를 끼워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법궤가 블레셋으로 갔다가 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일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한 곳에 있어야 되지만 법궤는 사람이 들고 움직이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그대로 딱 규정되어 있는 분이라면 법궤가 움직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촛대를 옮기리라는 말도 나오고, 유대인의 하나님에서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있을 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이 살아있을 때는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이라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듯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에도 고정될 수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의 특성은 생명의 유연함에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생명으로, 내가 무엇을 하는가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가를 늘 지켜보는 사람으로 산다면, 우리는 굳어질 수 없습니다.
캐나다 산 지 벌써 23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갔을 때는 97년도에 누가 왔고 98년도에 누가 왔고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쯤 되니까 필름이 엉키기 시작하여 최근 일인데도 그 때 일인지 저 때 일인지 자꾸 헷갈립니다.
왜 그런가 생각을 해보니 살다 보면 생활패턴이 생기게 되어 그렇습니다. 매일 똑 같은 일상을 반복하게 됩니다. 1년을 살아도 똑 같은 날의 반복이고 똑 같은 하루입니다. 1년을 살아도 하루를 산 것 같고, 10년을 살아도 하루가 지나 간 것 같습니다.
생활패턴 속에 갇히게 될 때 그렇게 돼버립니다. 새로운 것도 없고, 매일매일 눈 뜨면 하는 일이 똑같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생긴 것입니다. 규정해놓고 나면 편합니다. 눈 뜨면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훨씬 편한 것입니다.
백수가 얼마나 바쁜지 아십니까?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깁니다. 그날그날 무엇을 해야 되는 일이 생각지 않게 주어지기 때문에 백수는 항상 바쁩니다. 루틴이 정해지면 사람은 쉽게 가는데, 하루의 패턴이 없으면 더 힘들고 더 바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으로 있다면, 내 인생의 어떤 패턴이나 틀을 만들어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자유함입니다. 가지가 어디로 솟을지 모르듯 생명의 일은 규정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눈을 뜨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하실 일이 있으신지 기대가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가 굳어지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4) 절대화의 함정을 경계함
마지막으로 절대화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알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내 이해를 거친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말하게 될 때, 그것은 내 경험과 내 이해를 거쳐서 말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직접 역사하신다고 해도 내가 이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님이 말씀하셔도 나만큼 알아듣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으로 갈 때 어떤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가 사람마다 다 다르게 들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뇌성벽력 소리 같다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빛 같아서 눈이 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청년에게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들렸다는 것입니다(행9:4~5). 그것은 이미 사울이라는 사람의 이해를 거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토론을 해보면 답답한 것이 자기가 아는 지극히 편협한 것을 절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다 그 사람만큼 이해한 것인데, 내 이해를 거쳤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에 자기 아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맞다 틀리다로 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경험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알고 있다.” 라고만 말해도 맞다 틀렸다 하며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와 다르구나.” 이렇게 하고 말 것입니다.
‘절대’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맹세하지 말라고 했는데 맹세한다는 것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화하는 것은 종교 유아기적인 현상입니다.
어릴 때는 자기 아빠가 최고이고 자기 집이 최고일 수가 있습니다. 성숙해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내가 경험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한 점에 불과하구나 그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이시지만 사람이 하는 일은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내가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감당하는 것이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 인생에 너무나 복되고 너무나 완전하고 내 인생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값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때 내 복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아는 것을 절대적이라 하면 사람은 우선 거부반응부터 일으킵니다. 그런데 내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질그릇으로서 보화를 가졌기 때문에 누구나 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은혜를 누린다면 누구라도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복음이 나에게 복이 되었다면 누구에게라도 복이 되게 전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늘 내 가능성을 믿고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복음이 들려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우리에게 보여 졌습니다. 나는 더 이상 탈 것도 없고 부추겨질 것도 없고 내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 보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복음 안에서 자신으로부터 자유 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따라 가며 주님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