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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틀담 광장을 벗어나 세느강변 길을 따라 하류 쪽으로 걸어 내려간다. 파리의 시작이자 뿌리였던 시테 섬(Ile de la Cite)에는 아직 꼭 찾아 보아야 할 역사적인 명소들이 여럿 남아있기 때문이다.
노틀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Paris)이 세계적 명소가 된 것은 우선, 최초는 아니었지만 고딕 양식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적용해 그 특징을 가장 잘 살린 하나의 교과서적인 아름다운 대표적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고딕양식의 최고 정수가 바로 노틀담 대성당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로마 카톨릭) 내에서 그 가치를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만치 귀중한 성유물이 보관된 장소로서의 중요성 또한 크게 뒷바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성유물(聖遺物) 이란,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12 제자)나 성인으로 추대된 사람들과 관련되었다 사려되는 유품을 주로 가리킨다. 물론 성유물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모든 종파가 모두 같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전제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유럽에 가보면 유명한 여러 성당이나 박물관에서 다양한 형태의 성유물을 만날 수 있다. 때론 충격으로 때론 어떤 짙은 의구심으로 적어도 나에게는 다가오곤 했다. 유럽 사람 절대 다수의 종교적 신심 저변에는 성유물이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어서 악귀를 쫓거나 병을 고치는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이유로 성유물을 간직한 교회와 가지지 못한 교회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실제로 작용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영화로 만들어진 <다빈치 코드>나 <인디아나 존스>에서 처럼 (성배) 내지는 (성유물)을 찾아내 그 신비로운 힘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정서가 유럽인들의 생각과 관심 저변에는 짙게 깔려 있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실제로 성유물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약속만으로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부족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성유물에 대한 맹신은 우상숭배가 아니란 말인가?
깜깜 무소식인 구세주에 대한 허망한 기대 보다는 차라리........ 눈 앞에 성유물이라고 놓여있는 물건이 구원의 약속보다 당장 시급하게 효험이 있을것 같애서?
종교에 관하여 아주 약간의 지식이라도 가진 사람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유럽 사람들의 종교 인식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여려운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한단 말인가? 적어도 유럽인들을 문명 선진국이나 기독교가 먼저 확실하게 뿌리 내린 선각자들 이라고 인식해 왔는데....... 실제로 가만히 살펴보면 순전히 우리나라 삼국시대 원시 토테미즘 신앙과 별반 다를것이 없어 보인다. 이는 나의 솔직한 신앙고백 이다. 내가 두 번째 유럽 방문에서 받았던 충격은......... '기독교의 민낯이 겨우 이런 허잡한 잡신들의 저잣거리 역사였단 말인가?' 라고 까지 넋두리를 늘어놓게 만들었다. 그때 가진 의구심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거북스러움은 지금 이순간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대한민국 안에서 툭하면 '우상숭배'로 인한 불협화음과 다툼과 사건 사고가 적지않게 끊임없이 빈발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우상숭배(偶像崇拜)' 이고, 무엇이 '이단(異端)'인가?
'성유물(聖遺物)'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 하면서 찾아가는 성스러운 교회 생트 샤펠(Saint-Chapelle)
세느 강변을 따라 오흐페브흐 가를 향해 아래로 내겨가면 좌측으로 생 미셀 다리가 보이고, 우리가 잠시 몸을 녹였던 멋진 카페가 보인다. 시테섬 인근의 모든 강변에는 낭만의 도시 파리를 한층 더 낭만스럽게 만들어 주는 아주 멋진 풍경이 우리를 맞이한다. 바로 고서적을 판매하는 길거리 헌책방이다. 부키니스트(bouquiniste)라 불리는 길거리 헌책방은 다소 허접해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아주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생 미셀 다리 건너편의 라틴 지구가 중세 시대에 이미 대학이 들어섰던 유럽 전체를 통털어서도 아주 유서가 깊은 학문의 요람이었다. 공부를 하자면 책(도서)이 반듯이 필요한데, 르네상스 이후에 들어서서 인쇄술이 발달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책은 아주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다. 대학을 마친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면서 형편이 넉넉치 않은 학생들은 귀중한 책을 서점에 내다 팔았다. 라틴 지역에 고서적상이 크게 발달한 이유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새책을 거듭거듭 살 수는 없었기에 중고서적이 활성화 될 수 밖에 없었다. 핵생들의 손을 거쳐가다보면 책이 낡거나 훼손되었고, 누군가는 비싼 책을 사지 못해서 빌려다가 필사본으로 만들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런 결과로 라틴 지구의 책방에서 거래될 수 없는 헌책들이 하나 둘씩 강변의 노점상들에 의해서 거래가 되기 시작하게 되었다. 노점상이 활기를 띠게되자 라틴지구의 책방들이 들고 일어났다. 자신들은 정식으로 세금을 내면서 장사를 하는만큼 불법 노점상들을 단속해 달라는 요구였다. 1649년 파리 시당국은 대대적인 불법 노점상 단속에 나서서 퐁네프 다리 인근의 헌책방을 완전히 철거 시켜 버렸다. 이어서 무자비한 단속이 언제까지고 계속 되었다. '빈익빈 부인부' 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할까?
그렇다면 라틴 지구의 정식 허가업체인 책방들은 그후로 장사가 잘 되었느냐?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무자비한 노점상 단속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데모와 함께 불매운동에 나선 것이다. 학업에 대한 간절한 의지는 불타오르지만 나름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비싼 책을 구입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서 저렴하게 헌책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갔다는 것이 이유였다. 심지어 학생들이 단합하여 책값을 한데 모아서 이탈리아나 비인 등지에서 한꺼번에 전문도서를 구입하겠다고 작정하고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중계 루트(중계 상인)에 외국에서 헌책을 구해다가 그동안 팔아왔던 부키니스트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결국 정식 인가받은 책방 연합은 항복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파리 시 당국의 중재 아래 상호간에 공존을 위한 절충안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길거리 헌책방은 아주 적은 비용을 매년 파리시에 납부함으로써 정식으로 노점상을 운영할 수 있는 허가를 얻게 되었다. 시테 섬 인근의 세느강변 양쪽으로 약 2.4km 라는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노점 영업이 정식으로 허용되었다. 이들의 영업 시간도 제약이 뒤따라 아침 해가 뜰때부터 저녁에 일몰까지만 영업이 허가되었다. 부키니스트(노점상) 에게는 1인당 1개씩의 코너가 주어지는데, 그 코너의 기준은 길이 2m에 폭이 0,75m의 녹색 나무상자의 크기로 제한된다. 시대가 변하고 부키니스트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자 노점상을 접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현재는 한 사람이 두개나 세개의 코너를 운영하기도 한다. 현재에도 약 300 여개의 부키니스트가 운영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거의 모든 코너에서 유사하게 고서적과 다양한 저널 잡지들과 우표와 팜플렛이나 포스터와 회화로 장식된 소품이나 기념 카드를 판매하고 있다.
길거리 행인들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며, 지면으로 부터의 높이도 정해져 있고, 상자 뚜껑을 열어 지붕으로 사용할 때의 높이 또한 행인들에게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2,1m 이상을 꼭 준수하게끔 규정이 되어 있다.
노틀담 광장에서 하류로 한 블럭을 내려가면 생 미셀 다리를 건너 온 빨레가(도로명)가 시테 섬을 관통해 나가는 중간에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샤펠 성당이 위치해 있다. 저만치 올려다 보이는 샤펠 성당을 뒤로하고 우리는 마저 시테 섬의 아래쪽 끝자락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곳에 내가 아주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과 그가 연루된 사건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노틀담 성당의 정반대쪽인 하류의 뾰족한 끝자락은 아주 작고 협소한 지형이랄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대단히 많은 영욕의 사건들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곳이다. 파리 현지인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데이트 코스로 정평이 나있는 곳이지만, 외지의 여행자들에게는 다소 낯설은 장소라 할 수 있겠다. 여행자들에게 시테 섬의 마지막은 바로 위쪽의 퐁네프 다리에서 끝난다고 여겨질 것이다.
퐁네프 다리(Pont Neuf)는 '새로운 다리(new)'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현재 세느 강 위에 건설된 많은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가 바로 퐁네프 라는 아이러니를 간직하고 있는 다리라 하겠다. 여러 영화에 등장하고 특히 사랑하는 연인들이 찾는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아름다운 퐁네프 다리가 시테 섬의 꽁지 자락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퐁네프 다리 아래로 설치된 계단을 내려가면 세느 강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모래톱이 쌓여서 만들어진 낮고 협소한 장소에 꾸며진 공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베르갈랑 광장(Square du Vert-Galant) 으로, 이곳의 주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공원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청동상으로 보아 앙리 4세(Henry 4) 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언제 혹 기회가 있으면 심도있게 다루어 볼 수 있겠지만....... 앙리 4세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난세를 기적처럼 극복해 나간 놀라운 기지의 소유자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제 한 목숨 살겠다고 이쪽 저쪽 옮겨다니면서 혼돈을 야기시킨 기회주의자라고 해야할까? 어찌되었건 그의 결혼식을 핑계로 성 바톨로메오 데이 대학살이 벌어져 약 30.000명의 인명이 무참하게 학살되었으니...... 그의 인생이 어찌 평범하다 할 수 있을까마는...... 어려서 카톨릭에서 세례를 받았던 앙리 4세는 성장하면서 신교도(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신.구교 간에 극한의 대립이 벌어지자 일단 위기에서 목숨부터 구하고, 다음으로는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이번엔 소신을 버리고 구교(카톨릭)으로 다시 개종을 단행했다. 이 종교 대립과 마찰은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전쟁을 방불케 했다. 신교와 구교 사이에 엎치락 덥치락 권력이 오고가는 상황에서 그는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이는 구교에는 거짓말쟁이 찬탈자로 신교에는 배신자로 낙인 찍히는 결과를 초래했고....... 최후에 그는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어쨌거나 앙리 4세는 프랑스 인이라면 그 누구든 결코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참으로 멋진 유훈을 남기신 출륭한 어른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길 네 왕국의 모든 백성들이 매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닭고기를 먹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를 적극 실행에 옮겨라.' 라고 왕명을 내렸던 성군(?)이 바로 앙리 4세 였다. '매 주 일 인 일 닭의 프랑스'를 야심차게 기획했던 인물이었다. 하여 그때부터 프랑스 하면 숫닭이 상징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프랑스는 닭의 나라다.
하지만, 내가 여기를 찾은 이유는 헨리 4세를 만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동상을 지나 공원 한가운데 작은 분수로 향하면서 가만히 살펴보면 화강암 벽면에 붙여 놓은 작은 청동 팻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의 비슷한 크기에 동판이 퐁네프 다리 건너서 여기 이 광장을 한 눈에 건너다 볼 수 있는 장소에도 설치되어 있다.
청동 팻말에는 자크 드 몰레이(Jacques de Molay) 라고 적혀 있다.
자크 드 몰레이는 교회(교황)로 부터 아주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의 이름이다.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 밤에 사악하면서도 극도로 교활한 의도를 품은 교황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 붙잡혀 개처럼 끌려 갔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온갖 수모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장장 7년 동안이나 고문과 온갖 악행을 서슴치 않더니 끝내는 파리고 끌려와 바로 이곳........ 시테 섬의 끝자락 하중도 모래톱에서 화형해 처해졌다. 모진 고문을 통해 빈번히 자백이 번복되었지만.......... 나는 그가 왜 무슨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져야만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은 새롭고 날카로운 시각으로 자크 드 몰레이의 죽음에 대해 상당히 가까이 접근 했었지만, 반대편의 이해당사자였던 펠리페 4세 프랑스 국왕이나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역활과 책임도 반듯이 따지고 물어서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리고 죄가 있다면 그에 응분하는 죗값을 치르게 해야만 그제야 비로소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몰레이를 고문하면서 수도 없이 교황과 국왕은 사탄과 교류했다고 시인하라며 다그쳤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시인하고 번복하기를 거듭하면서 틈틈히 몰레이는 교황과 국왕을 향해 '너희들이야 말로 악마다' 라고 호통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결론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둘 중에 하나는 틀림없는 악마거나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사실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억울한 천사가 아니겠는가? 고문을 가하는 교황과 국왕이 악마인가? 아니면 피해자 고스푸레를 하고 있는 몰레이가 악마의 하수인인가?
어차피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보탠다면......... 세상 모든 만물들을 살피시며 모두 알고 계시며 모든것을 주관하시는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그분께서는 분명 답을 알고 계실텐데 왜 아무런 답변도 조처도 내리시지 않으신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혹, 악마가 그 분이 아끼시는 부하?
유럽의 역사를 탐구하다 보면 신화나 전설을 뛰어넘는 수많은 무용담과 미스테리를 간직한 신비로운 단체가 등장한다. 역사는 그들을 성전 기사단 이라고 적었다. 영문으로는 템플 기사단(Ordre des Templiers. Knights Templar) 이라고 불리는 단체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크 드 몰레이는 바로 이 템플 기사단을 이끌었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최고 사령관) 였다. 템플 기사단은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 밤에 야습을 감행한 거대 세력에 의해서 한 순간에 몰락해 역사에서 사라졌다. 아니 철저하게 고의로 지워버렸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들을 몰락시킨 거대 세력의 배후엔 교황 클레멘스 5세와 프랑스 국왕 펠리페 4세가 있었다. 체포된 템플 기사단 전원은 종교재판에 17개의 죄목으로 회부 되었으며, 죄목의 대부분은 신성모독과 이단으로 결집되었다. 모든 기사들이 하나같이 이같은 죄목에 대해 강하게 부정을 하고 저항하자 그때부터 종교재판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무자비한 온갖 고문이 자행되었다. 불에 지지고 살을 베어내고도 모자라 뼈를 깍아내기도 했다. 거대 세력은 고문을 견디지 못한 허위 자백을 근거로 마녀 사냥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두를 화형장으로 끌고가 불에 태워 죽여 버렸다. 그 마지막 화형식이 바로 여기 시테 섬의 하중도에서 벌어진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 자크 드 몰레이의 화형식이었던 것이다.
템플 기사단은 그 흔적 조차도 남기지 않고 모두 형장의 이슬로 모두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거대 세력의 배후였던 교황과 국왕은 이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무엇을 얻었을까?
템플 기사단은 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기사였던 위그 파양스가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1118년에 처음 그의 친척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극히 소수의 단체였다. 그 지방의 최고 종교지도자였던 성 베르나르두스의 후원으로 교황청에 보고 되었고, 교황 호노리오 2세의 명에 의해서 정식으로 공인(1128년)을 받았다.
교황이 승인한 템플 기사단이라는 것이 위그 피앙스를 중심으로 일가 친척중에서 뽑은 불과 9명의 기사로만 구성된 단체였던 것이다. 유럽에서 소아시아 지역을 거쳐 성지 예루살렘까지 오가는 그 멀고 먼 아득한 여정의 순례자들을 이들 9명의 기사들로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조차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교황을 알현하고 교황으로 부터 허가증과 모종의 명령서를 수령한 기사단은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당시의 예루살렘 상황은 허접하게 대충 꾸려서 떠났던 제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얼떨결에 어찌되었던 간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1099년)하고 난 이후로 30년이나 지난 시기였다. 십자군을 파견하면서 교황(교회)는 참으로 원대한 꿈을 꾸었었나 보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면 예루살렘은 물론 예루살렘이 이르기까지 거쳐가면서 정복한 모든 영토와 재산이 고스란히 교황의 손에 들어오는 것이라는 참으로 야무진 꿈을 실컷 꾸었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엉뚱하게 돌아갔다. 재주는 곰(십자군 원정대)이 부리고 돈은 교황이 모두 차지한다는 이치에 맞지않는 행태에 대해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제 1차 십자군 원정대 지휘부는 단합하여 회의를 거친 결과로 자신들이 정복한 성지에 자신들의 나라인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면서 교황과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을 감행 한 것이다. 분노한 교황은 십자군 원정대 전부를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렸고,이단 행위를 자행한 배교자로 낙인 찍었으며, 이어서 앞 선 십자군 원정대를 토벌하기 위한 새로운 십자군(제 2차 십자군 원정대)를 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어디에도 성스러운 명분이나 정당성은 없었다. 그저 쉬운말로 하자면......... 개판(犬)이요 아수라장 난장판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지옥이 바로 성스러움으로 가득 치장된 교회였던 것이다.
바로 그 와중인(1129년)에 9명으로 구성되어 성지 순례단을 보호하겠다던 템플 기사단이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성채에는 외부인이 절대 출입을 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왕국이 기거하는 왕궁과 솔로몬 성전이 있는 절대 신성의 지역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교황의 명령서를 들이밀며 끝내 솔로몬 성전터의 금지구역 안에 자신들이 기거할 사무실을 차렸던 것이다.
아홉 명의 템플 기사단원 중에서 이따금씩 한 두명이 성 밖으로 외출을 하기는 했지만, 이 신비의 기사단은 오로지 자신들의 사무실 안에서 움직일줄을 몰랐다. 성지순례단의 보호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흉내래도 내거나 실행에 옮길 준비로 새로운 기사단원을 충원하지도 않은 채 오로지 9명이서만 지속적으로 은둔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거지?
교황의 명령서엔 무엇이 적혀 있는거야? 별도 지시가 있을때까지 마냥 짱밖혀 있으라는 것이 전부야?
혹, 예루살렘 왕국에 언제까지고 숨어 있다가 기회를 봐서 왕을 암살하고 쿠데타라도 일으키라고 해서 보낸걸까?
기사단이 솔로몬 성전 영역에 사무실을 차리고 들어앉아 쳐박힌지 정확히 일년 반이 지난 어느날, 느닷없이 갑자기 9명 전원이 귀국길에 올랐던 것이다. 올 때처럼 변함없이 9명의 기사단이 전부였고 오가는 길고 먼 여정에 필요한 보급품을 잔뜩 실은 당나귀들을 끌고 보부도 당당하게 한꺼번에 예루살렘 성문을 나섰다. 의심을 살만한 아무런 이상함이나 변동 사항이 전혀 없었다. 그저 귀찮은 사람들이 제 스스로 떠난다는 사실에 예루살렘 왕국측은 대단히 기쁘고 다행스럽게만 생각했을 뿐이다.
정작 이상한 것은 그 다음부터 벌어졌다.
지중해 연안에 도착한 이들은 뱃편을 통해 바다를 건너 귀국을 감행 하였는데........ 놀랍게도 로마로 교황을 먼저 찾아가 그간의 보고를 드렸던 것이 아니라, 전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프랑스 상파뉴로 돌아갔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이들은 교황에게 어떤 보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들끼리만 연실 모여서 무엇인가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었을 뿐이었다.
교황청으로 부터 연이어 특사들이 파견되어 왔다. 그리고 이내 그들은 빈 손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템플 기사단은 본격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과감하게 사업을 벌여 나갔다. 엄청난 부와 권력이 그들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교황의 부와 권위에 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여타의 한 국가나 군왕들 보다는 훨씬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하루아침에 거머쥐게된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일들이 연실 템플 기사단 주변에서 일어났다. 그 원천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대략 86년 동안이나 감히 교황이나 군왕 조차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차지하며 버젓이 역사속에서 실재했던 템플 기사단은 결국 어느 불운한 13일의 금요일을 기점으로 20대 그랜드 마스터인 자크 드 몰레이가 종교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해지면서 막을 내리게 되고 말았다.
도무지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만을 숱하게 남겨 놓은 채 말이다.
20세기 초에 들어서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지역을 발굴 복원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템플 기사단이 머물렀던 사무실에서 솔로몬 성전의 지하에 이르는 비밀 땅굴이 발견된 것이다. 인위적으로 땅을 파서 만든 땅굴은 또 누군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파괴된 상태였다. 땅굴의 존재를 감추고자 심형을 기울여 노력한 결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왜? 도대체 누가?
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분명하고도 매우 확실하다.
템플 기사단원 9명이 일 년반 동안 은밀하게 이 땅굴을 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땅굴을 통해 결국 솔로몬 성전에 침입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왜? 무엇을 얻으려고?
암튼, 그들은 솔로몬 성전에서 그들이 원했던, 아니면 교황이 원해서 명령을 했던, 그들이 원한 것들과 대단히 값진것들을 꽤나 많이 꺼낼을 것이라는 가정이 땅굴 존재의 배후를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확보한 무엇인가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무사히 가지고 나가려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과 차림으로 나서야만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이들은 땅굴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이 모든 상황이 영원히 비밀속에 감추어 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치밀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는 끌고왔던 보급품 수송 말 잔등에 보급품이 아닌 솔로몬 신전에서 수집한 고귀한 물품들을 잘 갈무리 해서 싣고 당당하게 왔을 때 처럼 떠나간 것이다. 중간 중간에 외출했던 기사단원이 사전에 중간 중간 지역의 모처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확보해 두었던 것이다.
그들의 사전 계획과 실행은 모든것이 완벽했으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결과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그들이 꺼내 가지고 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온갖 추측과 의문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어찌되었건 템플 기사단이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의 무엇인가를 상당히 많이 가져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들이 실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어쨌거나 상당부분 사실로 받아들여 진다.
다만, 그럼 그것들이 과연 무엇 무엇이냐 하는 대목에서..........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과 함께 어떤 민망함만이 남게 된다는 사실이다.
추측 예상되는 유물들이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그중 어느것 하나라도 그것이 확실한 사실로 입증되게 된다면...... 거기서 파생되는 엄청난 파장들을 나는 과연...... 우리 사회는........ 기독교(종교)는 과연 감당 할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나는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선, 성배(聖杯)가 템플 기사단이 가져간 유물중의 하나 일 것이라는 가설이 가장 힘을 받았고 유명한 일화로 많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어떤 가설 중에는....... 예수의 시신이거나, 예수가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어떤 결정적 증거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사태 이후로 교황(교회)측이 이를 두려워 하여 감히 기사단을 박해 하거나 섣불리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기사단에게 엄청난 재화와 무리한 요구에 끌려다녔다고 보는 시선이 소수지만 분명히 있다. 이 가설의 진위는 기독교 자체의 존립에 치명적인 작용을 할 수 있기에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외부에 숨겨놓은 보물지도 이야기도 나오고, 어떤...... 예수 그리스도의 후계자가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 였다는 나름의 구체성을 가진 어떤 물증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많이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여기에는 오로지 로마 카톨릭의 존폐가 달린 문제일 수 있겠다.
이런 여러 사안에 따라 벌어질 수 있는 아주 민감한 후폭풍들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한 시점에서....... 과연 타임머신을 발명 해서라도 그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나로서도 솔직히 여간 망설여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반면에......... 솔직히 몹시 궁금하기는 하다. 무척이나....... 알아가면 알아 갈 수록 더욱 더 간절하게 그 진실이 궁금해 진다.
템플 기사단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기사단을 파견하면서 교황이 명령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기사단은 솔로몬 성전에서 무엇을 꺼내 온 것일까?
그 이후로 교황과 기사단 사이에 오고 간 다툼과 논쟁의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쨌든...... 이 사태에 등장했다고 추측되는 유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자크 드 몰리에씨. 지금이라도 당신의 이름이 적혀 진 동판 뒤에서 훌쩍 나와서 나에게 속 시원하게 짧게라도 대충 이야기 좀 해주면 안될까? 이단이자 악마의 후예로 낙인찍혀 억울하게 죽어야만 했던 원한이라도 나에게 하소연 처럼 해 주시구려. 교황이 당신에게 도대체 뭘 원했습니까?'
어쨌거나 자크 드 몰레이의 처형과 함께 템플 기사단의 역사는 결국 미스텔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성배를 포함한 성유물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전혀 수르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점점 뜨겁게 타오르게 된다.
그런 와중에 바로 여기 시테 섬에서 템플 기사단의 몰락에 약 40년 앞서서 전 유럽을 한바탕 떠들석하게 만드는 또 한 번의 성유물 사건이 벌어졌다.
이제 우리는 그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성스러운 예배당' 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트 샤펠(Saint-Chapelle)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야망(?)을 위해서 매우 다급하게 서둘러 불과 33개월 이라는 짧은 시간에 시테 궁전의 한구석에 완공한 아주 작고 예쁜 왕실 예배당이다. 하여 생트 샤펠이란 이름 에는 영국으로 치면 로열(Royal)이, 스페인으로 치자면 레알(Real)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유일한 왕실전용 교회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상징적인 이유로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들이 앞다투어 서둘러 점령했고, 혁파의 대상이었던 왕정의 흔적을 털어내고 지우기 위하여 가장 참혹하게 약탈되고 파괴되어야 했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겨 간직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광기에 휩쓸려 날뛰던 혁명세력이 어떤 영문인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끝내 불태우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랬음에도 생트 샤펠은 프랑스를 찾는 여행자들에겐 노틀담 대성당이나 루브르 박물관 못지 않게 반듯이 꼭 찾아가 보아야 하는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굳이 이유를 들라면 생트 샤펠은 샤르트르 대성당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가진 종교 건축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성당이기 때문이다. 두 성당을 놓고 누가 최고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가진 성당인가를 놓고 파리를 여행하는 여행자들 사이에선 종종 판가름을 내자고 설전을 벌이는데........ 그건 나로서도 참으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겠다. 또 그런 판가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우열을 전제로 두 성당의 비교를 물어온다면....... 적어도 나는 이런 부연 설명을 먼저 해 주었을 것이다.
'고딕 건축의 백미는 우선 높은 천장에 있고, 벽면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채용해 실내를 밝히는 것은 물론 그 빛을 통해 수많은 이야기(성경. 성인)를 전달하는 참으로 이루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놀랍고도 눈부신 아름다움에 있다. 그런가 하면 새롭게 등장한 건축 양식을 대변하듯이 하늘을 향해서 끝도 없이 솟아오른 종탑과 첨탑이 이런 고딕양식의 상징이자 특징이 된 것이다. 교과서적인 가장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건축물로 흔히들 노틀담 대성당을 꼽지만, 고딕 양식의 기본이자 철학인 라틴 십자가 형태의 기반 위에 기둥을 높게 세워서 천장을 극한까지 높이고, 그 결과로 여유를 가진 벽면에 아치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우고 지붕 위로 뽀족하지만 각기 다른 형태를 가진 두 개의 종탑을 세워서 올린 사르트르 대성당이야 말로 진정한 고딕 양식의 최고봉이라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사르트르 대성당의 내부로 들어가 사방으로 둘러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빛이 펼쳐내는 향연을 한 번 올려다 보라. 신비로움을 넘어서 어떤 성스러움이 그 공간 가득 흐르고 있다. 반면에....... 스테인드글라스가 고딕양식의 특징중에 하나라고 친다면, 스테인드글라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껴보고자 한다면 당연히 생트 샤펠을 가장 먼저 찾아가라. 생트 샤펠을 보지 않고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하여 어떤 결론도 내리지 마라. 사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고딕 건축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져 걸려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 숲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 위에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살짝 덮어놓은 것이 바로 생트 샤펠이라고 감히 나는 말하고 싶다.'
이것이 내가 해주고 싶은 대답이다.
최고의 고딕 건축을 보기 위해서 샤르트르 대성당을 찾으면 덤으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지만,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진수를 느껴보기 위해 생트 샤펠을 찾는다면, 아마도 작고 예쁜 고딕 양식의 문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찬란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숲을 만날 수 있게될 것이다.
루이 9세의 요청으로 허겁지겁 서둘러 완공한 시테 궁전 한쪽 구석에 놓인 작고 예쁜 성당을 올려다 보면......... 사실 외관으로도 아예 벽은 없다시피 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를 지탱해 주는 철제들만이 전체 건물의 골격을 이루며 상부의 하중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성당은 2층 구조로 나뉘어 있는데 1층은 집무실이자 왕실에 딸린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로 쓰였고, 진짜 왕실 예배당은 바로 2층에 설치되었다. 바로 여기 2층 예배당 벽면을 온통 빼곡히 가득 채우고 있는것이 높이가 15m나 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진 창들이다. 모두 1134개의 장면들로 꾸며진 화려한 창문을 우리 방법의 셈으로 치자면 유리 면적만 200평이 넘는다. 시간에 따라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의 방향에 따라 빛의 향연도 수시로 변하지만, 얼핏 눈부시게 빛나는 빨강과 반짝거리는 파랑이 유독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어쩌면 이 작은 예배당 자체가 하나의 귀한 보석상자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생겨날 정도이다. 통로나 다른 부속 건축물이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로 애초부터 아예 부벽이 없이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사이를 온통 창문으로 만들어 거기에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을 첨가한 것이다. 그렇게 빛이 무한정 쏟아져 들어오는 공간이 전체 벽면의 75%를 차지하고 있으니 가히 투명 예배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애초의 설계와 건축이 완벽했던 이유로 7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찬연한 품위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의 파괴와 세월의 풍파가 할퀴고 지나간 여파로 생트 샤펠은 이미 여러차례의 복원 공사를 통해서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었으며, 우리가 찾아간 그 순간에도 장막이 쳐지고 휀스로 가로막은 채 여전히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일부 장소와 멋진 외관을 직접 만나 볼 수는 없어서 매우 아쉬웠던 파리여행의 가장 인상적인 장소 중의 하나였다.
앞에서 거듭 설명했던것 처럼 생트 샤펠(Saint-Chapelle)은 성유물(Rekliquiae)을 보관할 목적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의해서 세워진 예배당이다.
프랑스에서 성유물로 분류될 수 있는 물품을 처음 소유하게 된것 또한 루이 9세에 의해서 였으며 기록에 남겨져 있는 정확한 시기는 124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 약 200년에 걸쳐 8차례 벌어졌던 십자군 전쟁의 6차 원정(1228~1229)이 끝났고, 훗날 다시 벌어지는 7차 원정(1248~1254)의 직전이라고 해도 무방했을 그런 시기였다. 당시 28세의 젊은 왕인 루이 9세가 커다란 야망을 가지고 바야흐로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발돋음 시켜나가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복잡한 전후 사정이야 차차 거론하게 되겠지만........ 1242년 국왕 루이 9세는 그토록 열망해 왔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성유물(聖遺物)을 마침내 가지게 되었다. '성유물만 가질 수 있다면 내가 가진것을 포함하여 무엇으로든 그에 걸맞는 댓가를 치루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절치부심하던 루이 9세는 '어쩌다 잘만 된다면 성유물을 가질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는 뜬소문 같은 보고를 받고는 지체없이 실로 어마어마한 돈을 누군가에게 즉시 송금했다. 중세시대인 13 세기 당시의 액면가로 정확히 13만 오천 루불을 아무런 조건이나 계약서나 담보도 없이 누군가에게 보내 준 것이다. 당시의 시세를 따져 본다면 1루불은 황금 8.271g 이었다. 하여 여기에다가 송금한 135.000 루불을 곱하면 황금 1116.585t 이라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오게 된다. 이걸 다시 요즘 시세로 환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금 1돈을 6g으로 치니까........ 황금 1116.585t을 6g으로 나누어서, 다시 여기에다 요즘음 연일 상한가를 치고있는 금 시세로 다시 곱하면 되겠는데......... 더 이상 머리아픈 무한대의 계산은 내가 가진 뇌세포의 한계를 감안하여 이쯤에서 생략하기로 해야겠다.
암튼, 아무런 어떤 확실한 보장도 없이 그냥 귀가 솔깃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무작정 투자(?)를 해놓고(1239년) 나서도 3년 동안을 마냥 기다려야만 했었느니......... '저게(루이 9세) 과연 사람이여? 아니면 맹추여. 저런걸 등신이라고 하는거여? 일국의 왕이라는게........'
그렇게 그렇게 오매불망 생가슴앓이를 하면서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느닷없이 '성유물이 지금 파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라는 보고를 받았으니....... 헐!!!!!! 왕의 심정이 어떠했을지가 어렴풋이 상상이 되기는 한다.
마차에 싣고 오다가 혹여 바퀴에 이상이라도 생겨서 유물이 내동댕이라도 쳐진다면........ 유물의 정체를 알아 챈 주변국의 침입이나 도적떼가 가로채기라도 한다면........ 폭우로 불어난 강을 건너다가 마차가 빠지기라도 한다면......... 조바심을 견디다 못한 왕은 부랴부랴 세느 강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젖게해서 파리 상류 100km 지점에 있는 생스(Sens)에서 처음 성유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 정도의 지극정성으로 성유물을 모시고는 다시 뱃길을 돌려 파리로 돌아 왔다. 루이 9세는 1241년 8월 19일에 지극히 검소한 서민적 옷을 입고 맨발 차림으로 성유물을 모시고 노틀담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성대한 미사와 함께 성유물을 대성당에 안치했던 것이다. 당시 대성당은 정면 파사드 위에 두 개의 종탑까지 완성된 상태로 지붕위에 뾰족하게 세워질 첨탑 부문만이 미완성인 상태였기에 대성당으로서의 기능이나 성유물의 보관 장소로는 가히 최적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프랑스는 명실상부하게 성유물을 소유한 위대한 국가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서게 된 것이다.
파리 시민들 뿐만이 아니라, 프랑스를 넘어서 유럽 전역에서 성유물을 보기 위하여 엄청난 인파가 연일 대성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멀고 먼 예루살렘 성지까지는 차마 순례를 찾아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 물가가 턱없이 비싸고 각종 규제가 너무 심해서 기피할 수 밖에 없었던 두 번째 성지인 성 베드로 대성당(로마. 현 바티칸)을 갈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제 노틀담 대성당은 새로운 성지로 연일 순례자들이 발길이 이어졌던 것이다.
해가 바뀌었음에도 날로 늘어만 가는 순례 행렬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루이 9세의 뇌리에 문득 '내가 순례자들이나 받으려고 기를 써서 성유물을 가져 온것이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 말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 루이 9세가 그토록 성유물을 갈망했던 이유가 분명히 따로 있었다는 의미가 가득 담긴 푸념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냥 '루이 왕' 하면 그것은 곳 '루이 9세'를 가리키는 지극히 일상적인 당연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인다. 프랑스 카페 왕조(987~1328)가 후기에 들어 줄줄이 아들을 얻지 못해서 결국 발루아 왕조(1328~1589)로 왕권을 넘기게 되었지만, 루이 9세에 앞서서도 루이라는 이름의 왕들이 여럿 있었고 부르봉 왕조(1589~1789)로 넘어가서도 같은 이름은 계속 이어져서 태양왕 이라 불렸던 '루이 14세'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어저면 마지막 봉건 군주였던 '루이 16세' 까지도 모두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태양 왕 조차도 '14세' 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야만 그의 존재가 그제야 확실해 지는 것이다.
그렇게 똑같은 이름을 가진 왕들이 많이 있음에도 왜 '루이 왕' 하면 하나의 고유 명사처럼 당연하게 '루이 9세'를 가리키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프랑스 역사를 통털어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군주가 바로 '루이 9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다 유럽의 기독교(로마 카톨릭) 역사에서는 그런 '루이 9세'에게 또 하나의 아주 특별한 이름을 선사했다. '생 루이(Saint Louis)' 라는 성스러운 존칭 또한 루이 왕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프랑스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군주(王) 중에서 유일하게 성인으로 추대된 인물이 바로 '루이 9세' 이다. 기독교에 커다랗게 공헌한 콘스탄티누스 왕이나 샤를마뉴 왕 조차도 대제(大帝) 라는 호칭 증정 선에서 머물렀는데, 루이 9세는 정식으로 서품을 받고 성인 반열에 오른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자면......... 기독교를 위해서 절대적인 공헌을 해야만 하고, 거기에 어떤 신의 은총이 있어야 가능할 수 있는 신비로운 기적(奇蹟)을 실현 했어야 하며, 차후에 거런 모든것에 그의 성품과 행적등을 평가 조사한 결과로 위원회의 심사 기준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성인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그런데 루이 9세는 그 과정을 모두 통과하였고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정식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내가 한동안 '생 루이(Saint Louis)' 라는 성인에 대해서 나름 깊은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파고 또 파고 들어가 보아도....... 나는 무엇때문에 그가 성인에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알아내지 못하였고 도무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소(牛)나 개(犬)나 돈 좀 있고 빽 좀 있으며 허접떼기 둘러리 몇 명 포섭해서 대충 둘러대면 성인 자리라고 오르지 못하는 법은 없는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런 결과를 얻은 시점에서 서재 유리창에 <루이 9세 = 루이 왕 = 생 루이> 라고 사인펜으로 써놓고 몇 일 동안 드나들며 쳐다보노라니........ 참 '루이 왕'이란 존재가 신비롭다 못해 무척이나 재미있는 존재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루이 왕의 일생에서 가장 크게 이룬 업적은 단 하나로......... 성유물(聖遺物)을 과정이나 방법이야 어찌되었든지 결과적으로 프랑스로 들여 와 노틀담 대성당에 안치시켰다는 일이다. 그 외에는 여러가지 공적과 업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들이 기독교에 특별하게 공헌 했다거나 프랑스 역사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친 업적이라고 보기에는 좀 부족하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반면에 실책도 많았고 또 그것을 지금에 업적이라고 내세운다면 오히려 뭇매를 맞을 수도 있는 과(過)도 많이 있었다. 더군다나 마지막에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그게 종교적 은총을 받은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영 아니올씨다 라고 해야 하겠다. 그의 인생에 기적이 있었나? 혹 성유물을 유럽 영토에 안착시킨것을 기적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어찌되었건 <루이 9세 -----> 성인 ------> 성유물 ------> 생트 샤펠>의 공식이 성립된다.
루이 왕이 왕궁 밖으로 행차를 나서면 사방에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어 '루이 만세' '성군 루이'를 외쳐댔다.
가히 태평성대라고 해도 무방했을 정도로 루이왕이 집권하고있던 당시의프랑스 왕국은 안정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것이 성유물을 가지고 오게되면서 부터 어떤 신의 은총이 프랑스를 지켜주고 있으며, 신께서 특별하게 보내 주신 성군 루이 왕이 성정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프랑스는 스페인이나 독일을 앞지르고 있으며 이젠 굳이 이탈리아를 부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새로운 자신감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최고로 귀한 성유물을 가진 프랑스의 미래는 그야말로 찬란하고도 위대할 것이라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루이 왕 자신만은 그런 소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루이 왕이 생각하는 성유물의 놀라운 은총에 대한 기대는 프랑스 사람들의 기대보다 훨씬 크고 원대했기 때문이다.
루이 왕은 관료들을 전원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국가 중대사가 벌어졌을때나 벌어지는 전체 관료회의 였다. 관료들이 모두 참석한 회의에서 왕이 제시한 안건은 한마디로 모든 신하들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놀랍고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에투알 예배당(Notre-Dame de Etoile)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생각이요. 당대에 가장 훌륭한 건축가를 책임자로 임명해 공사 전반을 맡기려 하니 서슴치 말고 추천해 주기를 바라겠소.'
'지금의 왕실 예배당을 헐어내고 새로운 예배당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렇소.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귀중한 보물을 보관할 수 있는 작고 예쁜 왕실 예배당을 가져야만 하겠소.'
'폐하. 지금의 왕실 예배당이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왕조의 전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아주 소중한 예배당 아니겠습니까. 유지 보수도 완벽을 기해 왔기에 폐하께서 어떤것을 부족하게 생각하시는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울러 왕실 수도원인 생 드니 성당이 새로운 양식으로 완공된 이후로...... 지금 노틀담 대성당과 샤르트르 성당의 건축이 막바지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또 새로운 예배당이 당장 꼭 필요한 것일까 의문이 드옵니다. 더군다나 에투알 예배당으로 치자면..........'
'총리의 말씀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당장 지금의 왕실 예배당이 어디 보통의 예배당이겠습니까? 위그 카페께서 지금의 왕조를 세우셨고, 아드님이신 로베르께서 대대적으로 궁전을 개축하시면서 카페 왕조의 전용 예배당으로 세우신 에투알 예배당이 아니겠습니까. 200년이 넘도록 왕실 예배당으로서의 제 역활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은 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꿈과 더 큰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서 새로운 예배당을 가질때가 되었다고 짐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예배당을 세워야만 하겠습니다.'
'작고 예쁜 예배당이라 하셨으니......... 기존 예배당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하시면....... 어떤것에 주안점을 두시고 계획을 하셨는지........ 혹여, 개축이나 증축을 생각하시는지.........'
'헐어내고 완전히 새로 짓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을 그곳에 보관하고자 하니 그에 걸맞고 합당한 수준의 건축이 뒤따라야만 하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하시면........ 신들이 기억하고 아는 바로는 노틀담 대성당에 안치된 성유물 보다 더 귀한것은 온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되는데 혹시........'
'맞추셨습니다. 새로운 왕실 예배당을 짓는대로 성유물을 그리로 옮겨서 모실 것입니다. 성유물을 보관하고 모실 수 있어야 하니 당연히 그에 걸맞는 품격을 갖춘 예배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 같이 멍하니 입만 벌리고 끝도 모를 적막속에 서로의 표정만 살피는 모습들이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넋이 빠져나간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말이 좋아서 회의였지, 이것은 왕이 하달 하고자 하는 명령을 신하들을 모두 불러다 놓고 직접 통보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협박과도 같은 처사가 아니겠는가. 어쩌겠는가? 최종 결론 같은 명령은 이미 내려졌고, 그 명령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익히 모두 잘 알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어떤 설명이나 질문도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다. 실로 이 엄청난 명령이 와전되어 세상에 잘못 알려지면 적지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터라 회의장을 빠져나온 총리는 모든 신하들에게 엄중하게 당분간 비밀을 철저하게 지킬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하고 있었다. 모든 신하들의 가슴속에 똑같이 새겨진 의문은 딱 한 가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게 완성되고 있는 노틀담 대성당에 루이 왕 자신이 맨발로 최고의 정성을 다해 스스로 성유물을 안치시켰으면서, 왜 지금 갑자기 그 성유물을 또다시 왕실 예배당으로 옮기겠다고 하는가? 왜?' 하지만 차마 그 누구도 그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말았다.
루이 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왜 굳이 성유물을 다시 옮겨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 내막을 밝혀 보고자 한다면........ 드러내지 않는 루이 왕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짐작해 보려면....... 아무래도 이쯤에서 어쩔 수 없이 '루이 19세'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그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가막히게 좋은 환경과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을 일컬어 흔히들 금수저 출신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런 금수저로도 모자라 하늘에서 가진 온갖 축복을 보태주면서 까지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다이아몬드 수저라고 부를만 하다 하겠다. 루이 왕이 바로 그런 다이아몬드 수저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루이 8세의 네 자녀 중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루이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품과 총명함으로 뭇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한몸에 가득 받고 있었다. 루이 왕자의 이름 앞에는 항상 '더없이 빼어난 미남자' 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였다. 유달리 큰 키에 호리호리하고 모습이었지만 우아함과 기품이 늘 흘러넘쳤다. 온화한 눈빛에 매우 친근한 말솜씨를 지녔으며 상대에 대한 예의과 배려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총명함으로 왕실에서 가르치는 모든 학문에 있어서 눈에 뛸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으면서도 언제나 겸손하였고, 카톨릭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데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상남자 중에서도 최고 상남자였다. 책을 많이 읽고 사색을 즐기는 통에 부친은 혹 내성적인 남자일까 걱정을 하였는데.......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로서 가질 수 있는 지나친 우려였다. 이 깜찍한 작은 왕자가 실은 최고로 관심을 가지고 또 최고로 자신있는 분야가 바로 전쟁과 군대와 영웅이었던 것이다. 온갖 병법서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특별히 시간을 내어 왕실 근위대와 함께 병정놀이를 통해 전략과 전술을 실험해 보기도 했다. 근위대 장교들 조차를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탁월한 재주가 왕자에게 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검술과 기마술에도 어느새 일가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왕자가 총사령관이 되어서 직접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정복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면 유럽 왕조들의 지도가 바뀌게 될것이라고 그를 지켜보는 근위병들은 수군거렸다. 만약 조물주께서 최고의 통치자(군주)를 양성할 목적으로 사관학교를 세우게 된다면 아마도 최고 점수의 수석 자리는 루이 왕자의 몫일 것이라고 그를 지켜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카페 왕조를 위해서, 나아가 프랑스 왕국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하늘에서 특별히 점지해서 내려보내신 미카엘 대천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였다. 심지어 왕궁을 드나드는 신하들은 루이 왕자를 바라보면서 '왕자가 알지 못하거나 해내지 못할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왕자의 약점은 과연 무엇일까?'를 놓고 내기를 벌일 정도로......... 루이 왕자는 하늘이 내린 왕재(王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랴? 루이 왕자는 루이 8세의 둘 째 아들이었으니 왕위 서열에서 밀리고, 아직은 불과 12세의 어린 청소년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리오!
하늘은 루이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 핸디 캡 까지도 미리미리 다 대처할 수 있는 예비책을 마련해 놓고 내려 보내셨는지도..........
루이의 형인 왕세자가 워낙 병약하여 시름시름 하더니만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루이 8세가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 툴르즈를 중심으로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이단으로 판정받은 카타리 파를 정벌하기 위하여 알비 십자군을 결성해 원정을 떠난 것이다.(카타리 파가 왜 이단인지, 알비 십자군의 역활은 무엇이었는지, 그런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심도있게 살펴 볼 생각임)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어졌다. 아니 토벌이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무차별 학살이었다.
제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그 안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환영하며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이 성지탈환은 곧바로 무차별 대학살로 이어졌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이슬람 교도는 물론 유대교인과 그리스 정교회 신자와 심지어 성지 순례를 왔던 같은 카톨릭 신자에 이르기 까지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의 절대 다수는 유대인 이었다. 한 마디로 유대인을 씨를 말리려고 자행한 집단 살인 이었다. 무차별 살인은 삼일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 안의 모든 곳을 철저히 뒤져 가면서 마구잡이로 행해 졌다. 그 3일 동안 약 2만 오천명이 살해 되었다. 왜 그런 비극이 벌어졌을까? 살인자들은 그 성스러운 전투가 모두 교황 우루바노 2세의 명령에 의해서 였다고 대답했다.
프랑스 남부 알비 지역에서 새로운 종교 단체가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위리고 받아들인 교황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이들을 제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들의 안중에는 애초부터 교회나 교황이 없었다. 그럼에서 세력이 불어나더니 이내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 지방에서 까지 카타리 파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황은 거듭 교황 특사를 파견해 이들을 회유하면서 세력 확장을 저지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카타리 파는 지중해 건너 멀리 있는 예루살렘의 이슬람 세력 보다도 더 무서운 가까운 곳을 차지한 악마들 처럼 받아들여 졌다. 위기를 느낀 교황은 카타리 파를 이단으로 낙인 찍어서 불구덩이에 쳐 넣을 사탄으로 규정해 버렸다. 사탄의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면서 카타리 파를 정벌하기 위한 십자군 모집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미 여섯 차례의 십자가 원정에 징발되어 엄청난 손실과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던 유럽의 모든 왕조들은 이런 교황의 명령을 외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들어 빠져나갔다. 진노한 교황은 왕들에 행태를 사납게 질책하였으나 작금의 상황이 그 이상 닥달을 하기에는 전반적으로 여의치 않게되자, 꽁수를 부려서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에게 모종의 음모가 가득한 편지를 써서 특사를 파견하였다.
유럽의 모든 왕국이 어떻게든 교황의 술수에서 빠져나가려 안달인 가운데 느닷없이 루이 8세가 나서서는 프랑스 군대만으로 십자군을 꾸려서, 알비 지역의 카타리 파를 징벌하는 것이 목적인만큼 원정대의 이름을 알비 십자군으로 붙이고 루이 8세가 직접 친정을 치루겠다고 7만의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한 것이다. 알비에 도착한 루이 8세의 십자군은 이전에 예루살렘 성에서 벌인 대학살 처럼 다짜고짜 무차별적으로 대규모 학살에 돌입한 것이다.
카타리 파는 단 한 자루의 칼이나 창 조차 들지 않은 순수한 농부들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교황의 명령이 배후에 있었다. 그 지역을 차단하고 사람이면 무조건 죽여 없애서 씨를 말려라. 혹 살아남아 도망치는 자가 생기면 차후에 언제 어디서 또다시 카타리 신도가 다시 생겨날지로 모른다는 가정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카타리 파만이 아니라 이곳을 지나가는 여행자나 교황에게 충성을 하는 수도사나 카톨릭 신자까지, 알비 지역에서 카타리 파와 같은 공기로 숨을 쉬었다는 것이 죄라면 죽어야 할 죄였던 것이다. 여기 알비 지역은 랑그독 지방의 중심지인 툴르즈 영주 권역이었다.
중세 봉건시대에 프랑스 왕은 루이 8세 이지만, 프랑스 전역에는 수많은 봉건 영주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모든 영주들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세금을 내고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영토에서는 영주 또한 작은 왕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 못지 않은 모든 권한이 영주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부과된 세금을 바치고, 국가가 외부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면 영주는 자신의 군대를 몰고 왕의 휘하에 배속되어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는 것만이 이들에게 부여된 책무이자 권리였던 것이다.
툴루즈 영주 레이먼드 7세는 분명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왕이 군대를 몰고 느닷없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여 카타리 파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영주의 백성들까지 무차별 학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분개하며 군대를 이끌고 이를 막아야 겠다고 출정했다. 사실 그는 그동안에 카타리 파에 대해서 대단히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해 온 사람이었다. 레이먼드 자신은 엄연한 로마 카톨릭 신자로서 그동안 교황의 지시에 순응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타리 신자들의 신앙 활동과 생활 모습을 지켜 보면서 사실은......... 지금의 교회가 엄청나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겨났던 것이다. 더군다나 교황이 하는 처사를 보니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지 교황의 탈을 쓴 사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던 것이다. 루이 왕의 군대가 카타리 파를 척결하기 위하여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을때 부터 이미 그는 십자가 앞에 엎드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주여.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카타리 사람들이 사탄의 앞잡이라면 지금 저에게 확신을 내려 주십시요. 제가 먼저 나서서 처리 하겠습니다. 하지만 혹여........ 그들이 정말로 선한 사람들이라면........ 제가 나서서 그들을 끝가지 지켜 낼까 합니다. 그것이 주 께서 제게 내려주신 가르침이 아니겠습니까? 약하고 선한 사람들을 악과 죽음으로 부터 지켜내겠습니다.'
알비 지역에 들이닥친 루이 8세의 군대는 무차별 학살의 결과로 이들 역시 약 2만 오천명을 학살하고는 잔존 세력을 축출하러 다시 길을 나섰다.
어쨌거나 시간이 좀 더 걸려서 루이 9세에 의해서 카타리 파와 연계된 반란(?)은 끝내 종지부를 찍기는 찍는다. 알비 지역의 중심에 알비 십자군 사령부 막사를 지어놓고 온갖 방법을 통해 카타리 파 색출과 몰살에 심혈을 쏟아붓게 된다. 이후로도 장장 20년을 더 군대가 상주하면서 말이다.
루이 8세는 서쪽 산악지역으로 진격 했다. 카르카손 성에 십자군 주둔지를 확보하고 카타리 수색을 강화했다. 그러자 마침내 툴루즈 영주 레이먼드 7세가 자신의 군대를 몰아 막아서는 바람에 이제 전쟁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시간이 제법 걸리기는 했지만 사방에서 지원군을 모집한 십자군 측이 마침내 툴르즈 성을 점령 했다. 그렇다고 전쟁이 마침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카타리 신도들과 레이먼드의 군대는 뿔뿔히 흩어져 깊은 산악지대로 숨어들면서 산정 높은 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장기적인 게릴라전에 돌입한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토벌은 쉽게 끝나지 않고...... 그렇다고 군왕이 마냥 왕궁을 비워 둘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파리를 잠시 다녀와야겠다고 장도에 올랐던 루이 8세는 도중에 느닷없이 이질에 걸려서 시름시름 하더니 오베르뉴의 몽펜시 성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전해 내려오는 야사에 따르자면, 몽펜시 성에서 잠시 쉬어가려던 중에 누군가에 의해서 독살되었다고 전한다. 역사 학자들은 후자의 독살설에 훨씬 무게를 두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 의한 살인이었을까? 그 또한 나는 매우 궁금하다.
왕세자였던 형이 죽고 없는 마당에 느닷없이 갑자기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어찌되었건 사망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둘째 왕자 루이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나이 열 세살때의 일이었다.
루이가 아무리 타고 난 왕재(王材) 였다고는 하지만.......... 열 세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럼 이제부터 당장 어떻게 해야만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모든것이 지나친 기우였다. 하늘이 무엇인가 뜻이 있어서 특정한 사람을 세상에 나오게 한다는 것은 사전에 매사에 이미 대비를 해 두었다는 뜻이었으며......... 루이 왕자는 은수저도 아니고 금수저도 아닌 타고난 팔자의 끝판왕인 다이아몬드수저 였으니까 말이다. 하늘이 예배해둔 대비책은 아주 간단했다.
전해 내려오는 인류 문명사가 가진 한 가지 불변의 진리에는 '엄마는 위대하다!' 라는 명제가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엄마는 언제든지 초능력을 발휘하는 슈퍼우먼이 될 수 있다'는 만고불변의 가치를 지닌 바로 그 진리를 말함이다.
루이 8세가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블랑슈 드 카스틸레(Blanche de Castille) 왕비는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 남편의 시신을 옮겨다가 장례를 치루기 이전부터 벌써 온갖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왕이 누군가에 의해 암살된것 같다는 소문이었다. 이제까지 누려 온 모든 권세는 오로지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떠나간 지금 자신은 물론 자식들의 안위와 왕실의 권위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낳은 장남을 잃은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직전에 태어난 막내 아들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두 아들과 딸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이 난관을 극복해야만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루이 8세가 워낙 상남자로서 왕궁의 안밖을 쏘다니면서 활발하게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일에 매진했던 관계로 카스틸레 왕비는 조용히 자식들이나 키우면서 궁전 내부의 안살림에만 신경을 쓰면서 살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느닷없이 남편이 쓰러졌으니....... 당장 세상 일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몰라서 우왕좌왕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위기를 극복해 내지 못한다면 권력의 오랜 속성상 신하와 우군의 탈을 벗어던진 정적들이 자식들을 해치고자 덤벼들지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그녀는 마냥 주저앉아서 슬퍼할 수만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루이 8세 왕의 시신이 마침내 시테 궁전으로 운송되어 왔다. 동시에 국왕의 장례 절차가 엄숙하게 시작되었는데.........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든 파리 시민들의 탄식속에 왕의 시신을 담은 관이 왕궁을 떠나 왕실 묘지인 생 드니 수도원으로 막 출발하려는 순간......... 카스틸레 왕비가 돌계단에 올라서서 구름떼처럼 모여든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백성들이여. 이제 눈물을 거두고 고개를 드세요. 남편은 자나깨나 오로지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고 추위에 떨지않는 그런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고 노력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이 노력이 이만하면 되었다 싶으셔서 이제 그만 쉬라고 데려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언젠가 이런날이 올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는 위대한 프랑스가 그렇게 단번에 이루어 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늘 말해왔으니까요. 그래서 남편은 늘 어린 루이 왕자에게 누차 신신당부를 해왔습니다. 이제부턴 너의 몫이라고......... 프랑스를 부탁 한다고......... 그리고 나의 백성들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반듯이 이루어 달라고 말입니다. 지금 나의 남편은....... 여러분들의 왕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싸늘한 죽음으로 누워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가졌던 반듯이 위대한 프랑스를 만들겠다던 꿈과 자신의 백성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꺼지지 않는 열정만은....... 지금 남편의 시신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루이 왕자의 가슴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남편이 그토록 간절히 열망했던 그 위대한 프랑스에 대한 꿈을 여러분들도 똑같이 나누어 꾸고 있다면......... 우리는 오래지 않아 꼭 그런 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은 모든것을 루이 왕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기필코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않고 이룩해 낼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제부터 쉬지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내 남편의 헌신과 노력을 기억한다면........ 내 아들이 이루어갈 위대한 미래를 진정으로 기대한다면........이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새로운 왕에게 신명을 받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 남편이 프랑스에게 간절히 바라는 유언이며...... 기꺼이 주님께서 이미 모두 아시고 너그러이 허락하신 일일 것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카스틸레 여왕은 계단에서 내려와 마차 앞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아들의 뒤에 정중하게 무릎꿇고 엎드렸다.
'새로운 프랑스의 왕이시여. 당신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 하나이다.'
그 장면을 목격한 마차를 호위하던 완전 무장한 근위병이 무기를 내려놓고 엎드리면서 충성 맹세를 했다. 이어서 신하들도 하나 둘을 엎드리기 시작했다. 누구인들....... 혹 엉뚱하게 쿠데타 음모를 가진 반란 음모자였다손 치더라도 이번 분위기에서 어찌 엎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티가 확 나게 생겼는데 말이다. 왕궁 앞에 모였던 모든 사람이 땅바닦에 엎드려 얼떨결에 충성 맹세를 하는 씨츄에이션이 삽시간에 벌어지고 만 것이다.
카스틸레 왕비의 놀라운 기지와 연출력의 덕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루이 왕자는 카페 왕조의 정통성에 입각하고 만백성의 추대하에 명명백백하게 정식으로 새로운 프랑스 국왕에 등극하게 된 것이다.
왕통이 우왕좌왕 휩쓸리게 되면 혼란이 야기되고 쿠데타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어 있다.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이 늘 그렇다. 그런 우려를 일시에 불식시켜 버린 것이다. 누가 보아도 이미 새로운 왕은 분명하게 등극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가 없게된 것이다.
루이 왕자는 이제 바야흐로 정식 프랑스의 국왕이었지만...... 국왕 취임식은 오년 후에나 치뤄지게 된다. 그가 성인이 되면서 즉위한다.
카스틸레 왕비가 섭정으로 그때까지 대리 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 야무지게 당차고 슬기로운 왕비는 언제나 함부로 앞에 나서지 않고, 고르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서 결론을 추렴해 내는 지혜로움으로 왕국의 현상유지를 그런대로 썩 잘 유지해 나갔다. 급격한 변화와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은 어디까지나 성년이 되는 새로운 왕의 몫이라는 전제하에 자신은 지금 프랑스의 상황을 유지해 나가는데만 힘썼다. 그런 이유로 남편의 죽음과 연관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툴르즈의 레이먼드 7세를 중심으로 하는 카타리 파 반란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토벌을 유지하기는 하되, 대대적인 전쟁으로 확산하지도 않고 마냥 장기적인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카스틸레 왕비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거의 대부분이 루이 왕에게 다양하고도 실질적인 최고의 교육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군왕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덕목에 있어서 최고의 교육과 다양한 경험을 체득하는 것에 최대한 주안점을 두었다. 그렇게 아들이 성장하기까지 자신은 제국에 아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현상 유지만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 바램대로 모든것이 원만하게 진행되어 갔다.
이 와중에 루이 왕의 미래는 물론 프랑스와 유럽의 역사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놀라운 사건의 발단이 시작된다.
이제까지의 루이 왕에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서문(에필로그)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아주 중요한 본론은 여기에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시대 이후로 시테 섬은 크게 구분해 본다면 2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노틀담 대성당의 구역이다. 노틀담 대성당을 비롯해 광장과 주변의 묘지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유적지를 모두 포함해서 이다.
다른 하나는 서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쉽게 그냥 시테 궁전 영역이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성을 둘러 치고 군왕이 거주하는 궁전이 세워 졌다. 중앙에 시테 궁전이 들어섰고, 동쪽 성문 앞에 전반적으로 왕국의 모든 통치 행위를 관장하는 헌법재판소 건물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옆에 이제 새로운 왕실 예배당인 생트 샤펠이 건설되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북쪽 강변쪽으로 아주 커다란 위용을 자랑하는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는 왕의 집사가 일을 보던 건물이라고 하는데, 요즘 식으로 다시 하자면 궁전의 부속 건물로서 여러 비서실이 들어선 건물이라고 보면 되겠다. 왕궁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감시 통제하고, 왕궁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내가고 들여오며, 왕실의 살림살이 전반을 이곳에서 총괄 관리하였으니 말이다.
시대가 변천하면서 루브르 궁전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레 시테 궁전은 뒷전으로 밀려 났고, 좀 더 훗날은 태양왕 루이 14세에 의해서 멀린 떨어진 시골에 베르사이유 궁전이 세워지면서 파리 영내의 건축물들은 다양한 형태로 퇴보하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다시 조성되어갔다. 시테 궁전은 오래전에 궁전으로서의 가치와 필요성을 상실했고,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상당부분 소실되기도 했다. 생트 샤펠이 살아 남았고, 콩시에르주리가 새로운 시테 궁전 자리의 주인이 되어버린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콩시에르주리의 정문을 지나치다 보면 아주 아주 낮익은 듯한, 다소 뜻밖의 포스터를 만나게 되는데......... 마리 앙트와네트가 등장하는 포스터다.
루이 14세의 왕비이자 신성 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왕녀였던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봉건 왕조가 급격하게 쇠락하고 끝내 몰락하는데 지대하게 공헌(?)을 했다고 알려지는 비운의 왕비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4세와 왕비는 해외로 망명하려고 극비리에 북쪽 항구까지 도망쳤는데....... 한심하게도 몰래 도망치는 처지에 화려함에 극치를 이루는 황금마차를 타고 행차를 하셨다가, 시골 어촌에 등장한 황금마차의 화려함을 보고 수상하게 여긴 경찰에 의해서 발각되었고, 혁명 세력에 의해서 다시 파리로 강제 연행되어서 왕은 파리 외곽의 성에, 앙트와네트는 여기 콩시에르주리에 갇혀 지내다가....... 재판을 통해서 반혁명분자로 사형 언도를 받고, 끝내는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 끌려가서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 마리 앙트와네트의 흔적과 발자취를 추적해 보는 콩시에르주리 탐방 상품이 여행자들에게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니........ 살아 있을때 좀 잘 하시지. 빵을 달라고 외치는 군중들 앞에서 '빵이 왜 없어? 바보들.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잖아.' 라고 했다니 참....... 어이가 없다.
생트 샤펠 옆의 헌법재판소 건물은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해 보인다.
마침 이날은 우리나라 대학 졸업식 같은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가까이 접근하는게 허락되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현재 이 건물은 파리 변호사 협회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추측컨데....... 법대를 마치고 고시를 패스 했거나, 아니면 일정 수준의 학점을 취득함으로 자격을 갖추면 졸업과 동시에 자동으로 변호가 자격이 주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저들의 앞날에 정의가 실현되고 사람들 삶의 질이 향상되는데 기여하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루이 왕을 비롯한 카페 왕조의 남자들에게는 전통적으로 한 가지 묘한 내력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터를 누비며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는 진정한 영웅에 대한 강렬한 로망을 모두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냥 태평성대를 이루는 성군으로만은 성이 차지가 않았다. 적어도 왕이라면 전쟁을 통해 전대미문의 공적을 세운 사나이 중에 진짜 사나이 같은 용맹함으로 후대에 영원히 명성을 떨쳐야만 된다고 생각을 했다. 하긴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왕들치고 그런 무용담을 통해 진짜 영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은 왕이 어디 있었겠느냐 만은...... 여왕들은 그렇지 않았는지 까지는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루이 왕을 배출한 카페 왕조의 남자들은 좀 더 그런 증상이 심했던 것 같다.
아 참! 여기에서의 카페는 우리가 흔히 마시는 커피(Cafe) 종류나 커피를 마시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이쯤에서 분명하게 밝혀 두어야만 하겠다. 여기에서의 카페(Capetiens)는 분명 철자부터가 다르며, 라틴어 카풋(Caput)에서 유래 되었다. 카풋에는 '수장' '총사령관'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전임 왕조였던 프랑크 왕국 카를로스 왕조에 후사(아들)가 없어서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자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통해 왕국을 다스려줄 사람을 공개적으로 선출하였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평화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사람이 위그 카페(Hugues Capet) 였다. 그는 선출직 왕으로써 카를로스 왕조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계승 발전 시키는데 공헌 했으며, 그의 본래 직책이 총사령관이었던 만큼 왕국 안팎으로의 모든 분쟁에 직접 출정하여 눈부신 용맹을 드러냈다. 그가 사망에 이르자 위그 카페가 본래 선출직 왕이었던 만큼 차기 왕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든데, 그동안에 이룩한 위그 카페의 업적이 적지 않았음으로 사람들은 왕위가 그의 아들 로베르에게 물려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이유를 달지 못했다. 이렇게 왕이가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세습이 되지 그제서야 비로소 카페 왕조가 성립되었다고 보게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카페 왕조의 왕위는 마침내 루이 왕에게 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었는데....... 가문의 유전병과도 같았던 '영웅 숭배'가 할아버지인 필립 2세(Philip 2)에 이르러 아주 심각할 지경에 까지 이르더니, 그런 용맹한 무사에 대한 동경이 끝내는 아버지(루이 8세)를 비명 횡사하게끔 만들고 말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인 카스틸레 왕비는 이런 가문의 내막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어린 루이 왕의 교욱에 있어서 가문의 잘못된 유전인자가 발병하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철투철미하게 미연에 방지하는 조처들을 해왔다. 그런데 어머니의 기대처럼 되지가 않았다.
핏줄속에 스며들어 내려온다는 유전인자 라는 것이 그렇게 감추고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유사 이래 전해 내려온 고금의 진리가 아니었던가.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효자였기에 지금은 그냥 꾹 참고 마음속 깊은곳에 숨겨두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이미 벌써....... 루이 자신이야 말로 어느 누구보다 더 훌륭한 위대한 용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자신의 시대를 간절하게 열망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루이의 가슴 속에 새겨진 영웅은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결코 아니었다. 그 영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프랑스 왕국의 오랜 숙적인 바로 잉글랜드의 왕이었다.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고 기독교를 지켜내기 위하여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까지 출정하여, 비록 적장이지만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용맹했던 위대한 술탄 살라딘을 상대로 막상막하의 전설적인 숱한 무용담을 만들어 낸 희대의 영웅을 루이 왕은 자신의 롤 모델로 오래전 부터 삼았고 그를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영웅을 라이언 하트(Lionheart)라고 불렀고 역사에도 그렇게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 라고 기록되었다. 그 이상 더 어떤 찬양과 칭송이 필요하단 말인가? 적어도 이제까지의 유럽 역사를 통 털어서도 그런 진정한 영웅은 어디에도 없었다 라고 루이 왕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딱 한 사람이 사자왕(Richard 1 of England)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루이 왕의 이런 야심을 눈치재지 못했고, 바야흐로 이때부터 루이 왕은 사자 왕 보다도 더 위대한 영웅이 사실은 또 더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목표를 새롭게 수정하게되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하루는 루이가 정원을 산책하던 주에 근위 장교로부터 암거래 시장에 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암거래는 당연히 불법이었으며 법에 의해 엄벌해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암거래는 어디선가 매우 은밀하게 계속되어 왔다. 세상에는 다 드러 내놓고 사고 팔지 못할 대단히 은밀한 물건들과 팔고자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듯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이 비밀스런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은 흔히들 훔친 장물이거나, 차마 이런 물건까지 내다 팔아야 하는 몰락해 가는 가문이거나, 아니면 법으로 판매 금지된 위험한 물건들 까지 매우 다양한 사연을 가진 물품들이 주로 포함되었다. 아울러 그런 위험 부담이 반듯이 따르는 만큼 암시장의 거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싼 물건들이 흔하게 거래 되었다.
루이 가슴에 상당한 호기심이 작동했다. 하여 루이는 소박한 평복으로 갈아입고 해가 질녁에 수집된 정보에 따라서 저잣거리 한구석에 은밀하게 개설된 한 골동품 가계를 찾았다. 근위 장교를 뒤를 따라 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한참이나 돌고 돈 끝에 마침내 목기며 광주리며 둘둘 말아놓은 새끼줄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커다란 마차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드나드는 문만 빼꼼히 겨우 열려있는 철저하게 위장된 공동품 가계에 도착했다. 어지나 은밀하게 위장을 잘 해놓았음인지 누구라도 무심코 지나치게 되면 이곳이 암거래가 이루어지는 점포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루이가 안으로 들어서자 흰 옷을 입고 터번을 눌러 쓴 중년의 아랍인 손님을 맞이했다. 점포 안에는 다양하게 온갖 목제 그릇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목기 공방으로 위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것을 필요로 하십니까?'
'농장 관리인 위베르의 소개로 찾아 왔네. 여기에 내놓고 팔지 못하는 것들을 구경하고 싶어서 왔네. 안된다면 위베르와 함께 다시 오겠네.'
왕실 소유의 농장 관리인인 위베르는 차라리 파렴치한 범죄자라고 해야하는 옳은 처사일 것있다. 작은 키에 돼지처럼 살이 찐 그는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착취를 일삼으면서도 모자라 왕실 재산인 세금을 훔치는 인간 말종이었다. 거기다 반반한 하층민 여자만 보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취 유인 강간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하층민들의 처지로 농장 관리인 이라는 그의 직책과 권위에 누구도 감히 맞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 보이면 농장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고, 저잣거리 일반 평민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무뢰배들을 동원하여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심하게는 방화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에 늘 그는 모두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그런 위베르의 악행이 너무도 심하다 보니 마침내 궁정으로 투서가 날아들었고 그동안 은밀하게 내사가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루이는 웨베르의 처리를 조만간 단행할 결심을 이미 굳힌 상태였다. 그런 위베르가 귀족과 부자들 흉내내기에 폭 빠져서 암시장을 통해 비사고 희귀한 물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욕심쟁이가 여기 암시장에서 원만한 거래를 해왔을리가 만무했다. 징징대고 물건의 흠을 찾아서 물고 늘어지고, 모자라면 공갈 협박을 일삼는....... 한마디로 아주 짜증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소개로 찾아 왔는는 나이 어린 손님은 영 딴판이 아닌가? 어딘가 모르게 젊잖고 기품이 흘러 넘치며 딱 보아도 엄청 부자라는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판에 나중에 위베르를 앞세우고 다시 찾아 온다면....... 그날은 또 장사를 홀랑 망치는 날이 될 것이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아랍인은 서둘러 루이를 안쪽의 중앙 정원을 가로질러 환하게 채광이 쏟아져 들어오는 너른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하얀 광목 천을 뺑 둘러친 별도의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도자기들이며 고급의 비단이며 화병과 조각상들과 여러가지 보석류들과 번쩍이는 기사들의 칼과 함께 다양한 물건들이 흡사 어느 귀족이나 왕족의 거실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처럼 잘 정리된 채 놓여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여기가 암시장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하지만 더 놀란것은 아랍인이었다. 이 나이어린 손님의 표정에선 그 어떤 동요나 감흥도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심퉁한 표정이 전부였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궁전에서 나서 먹고 자란 루이에게는 모든것이 그저 그런정도의 허접한 장식품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정리된 물품에서 짝퉁 내지는 부러 골동품 처럼 허접해 보이도록 만든 흔적들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니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정도가 전부라면 내 차라리 안본것만 못하니 이만 돌아가겠네.'
'이런 정도라니요? 이것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한것인 줄을 잘 모르시나 본데.......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아랍인은 허겁지겁 안족에서 나무 상자를 하나 꺼내 오더니 그 안에서 하얀 광목에 둘둘 말려 싸여있던 은 붙이를 하나 꺼내 가지고 왔다.
'사자왕이 십자군 원정에서 썼던 왕관입니다.'
순간 이제껏 정색을 지켜왔던 루이의 입에서 비아냥 거림이 가득 담긴 푸념이 터져 나왔다. 참으로 같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손에 받아 든 사자왕의 왕관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재료가 모두 은인 것은 딱 보아도 알만했다. 은을 흔한 못 보다는 조금 굵은 굵기로 길게 만들어 하나의 커다란 고리처럼 끝을 서로 맞대어 녹여 붙였고, 뺑 돌려 장식이라고 새끼 손가락 마디 크기의 월계수 잎을 몇 개 만들어서 여기저기 붙여 장식한 것이 전부였다. 소재가 은이라는 것을 빼고는 너무나도 조악해 보이는 이것이 바로 사자왕이 십자군 원정에서 머리에 썼던 왕관이라고 지금 아랍인이 거듭거듭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속에서 부아가 치밀고 있는 것을 루이는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적어도 사자왕이었다면 장식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황금으로 된 왕관을 서야하지 않았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공자께서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이 나라 프랑스의 왕 필립을 보십시요. 번쩍이는 황금 갑옷에 화려한 황금 왕관을 쓰고 사자왕을 뒤쫓아 부랴부랴 십자군 원정에 따라나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작 예루살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왕비의 치마폭 속으로 줄행랑을 치지 않았습니까? 전쟁터를 놀이터로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온갖 똥폼이나 잡으면서 무슨 전투를 한다고 그 많은 부하들을 먼곳까지 끌고가서 개고생을 시킨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사자왕은 달랐습니다. 사자왕은 그를 따르는 군사들과 똑같이 검소한 복장으로 군사들과 똑같이 행군을 계속 했습니다. 그러자 한 군사가 나서서 왕이 우리와 똑같이 움직이시니 우리의 왕이 지금 어디에 계신지를 알 수 없지 않느냐? 우리가 누구의 명령을 받고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를 알게 하려면 왕의 표식을 만들어 이동하는 무리중에서 우리의 왕을 구분이라도 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왕관입니다. 현지에서 이동하면서 급하게 만들어진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위대한 왕관인 것이지요. 실제로 머리에 쓰고 전투에 임하자면 이렇게 만들 수 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루이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 졌다. 무언가 엄청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방금 아랍인이 능멸한 필립왕과 왕비가 바로 루이 왕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였으니 진노할 만하지 않았겠는가? 할아버지를 능멸한 것은 카페 왕조를 능멸한 것이 되고 이는 다시 아버지와 루이 자신까지도 비겁한 왕의 후손이라고 능멸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당장 못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린 아랍인을 끌어다가 저잣거리에서 몸을 갈기갈기 찟어 죽여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루이 왕의 침묵은 상당히 길었다. 침통해 하는 그의 깊은 상념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마냥 아랍인은 안절부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좋네. 사자왕의 왕관을 내가 사겠네. 얼마인가?'
오랜 침묵 끝에 루이가 뱉은 말은 진노가 아니라 허접한 은관을 지금 사겠다는 제의였다. 그는 어느새 평정을 되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남의 속도 모른 채 당황한 것은 아랍인이었다. 전혀 거래를 기대하지 않은 참으로 묘한 분위기 속에서 선뜻 가격을 물어오니........ 갑자기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을 되짚어 본다손 쳐도, 어찌되었던 이미 사자왕의 귀한 유물이라고 결정을 내린 마당에 평상시 처럼 가격을 먹일 수도 없는 느릇이었다. 하여 아랍인은 많이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엄청나게 높은 가격을 제기했다. 실로 황망한 가격이었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던 루이가 허리춤에서 허리춤에서 흔히 동전을 담아두는 주머니를 꺼내 유대인 앞으로 던졌다.
'그것이면 충분할 것일세.'
허겁지겁 주머니를 열어본 아랍인은 놀라서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않아 버렸다. 주머니 안에는 한 움큼의 동전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가 번쩍거리는 황금이었던 것이다.
'이 허접한 은 붙이의 값으로 지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듯이 기억해 주게. 그 돈은 이 가짜에 담겨 있는 자네의 그 이야기 값일세. 누구에게 들었던 꾸며냈던 그 이야기가 무엇보다 내게는 중요했다고 해야하겠지.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오겠네. 이번엔 진짜 귀한 것을 가져다 내게 보여주게. 나는 진실한 이야기가 무수히 많이 담겨 있는 그런 진짜 물건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네.'
루이 왕은 방금 구입한 은붙이를 들고 태연하게 되돌아 나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않는 듯 근위 장교가 황망함 속에 뒤를 쫓았다.
하지만, 정작 유대인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도 이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같은 시간에 루이 왕은 다시 그 가계를 찾아갔다. 오늘은 근위 장교 대신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루이 왕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어머니가 초청한 노년의 자애로운 학자와 함께였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점포의 문이 닫혀 있었다. 점포를 위장하기 위하여 앞을 가리기 위해 가로막고 서있던 마차 조차도 텅 비어 있었다. 다행스러움 것은 마침 그 마차에 어제의 아랍인이 누구를 기다리기라고 하고 있는 것처럼 걸터 앉아 있는 것이었다. 다가서는 루이를 눈치 챈 아랍인이 얼떨결에 알아 보고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 왔다.
'공자님 오늘은 점포를 열지 않습니다. 그냥 돌아가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러신가? 그럼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오겠네.'
씨크하게 루이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자 당항한 아랍인이 화급하게 돌아 선 루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앞으로도 점포는 다시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허튼 발걸음을 다시 하시지 않는 것이.........'
'어제 분명히 나는 다시 올 것이라고 했고 또 무엇이든 다시 구입을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갔네. 문을 닫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네. 그러니 쌍방간에 거래에 대한 약속은 분명히 있었던 것이라 해야겠지. 하루를 하던 이틀을 하던 장사는 약속이고 그 약속은 반듯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내가 믿는 종교나 자네가 믿는 종교에서나 약속을 저버리거나 거짓은 하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먼저 한 약속은 끝까지 지켜야만 하겠네. 그러니 내일 다시 오겠네.'
나이 어린 귀공자가 꼬박고박 하대를 하는 모양새였지만, 나이 지긋한 아랍인은 당장 어찌할 바를 몰라 애간장만 태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닫혔던 점포의 문이 열리면서 아랍인 복장을 하고 잿빛 수염이 가득 얼굴을 뒤덥은 노인이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약속은 지켜져야만 하지요. 폐점을 준비하고 있으나 아직 완결을 짓지 못한 거래가 한 가지 남아 있어서 폐점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처지로 그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은 제가 이 점포의 주인입니다. 이렇게 인사드리게 된 점을 결례라 생각치 않으신다면 귀공자님을 안으로 모시고 차나 한 잔 나누고 싶습니다.'
'못다한 거래를 마무리 하기 위해서라면 좋습니다.'
어제의 암거래를 위해 장막이 둘러쳐졌던 공간은 말끔하게 치워진 채 정리되어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허름한 목재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아랍인이 괴일이 담긴 쟁반과 함께 유리잔에 뜨거운 붉은 홍차 따라 건넸다. 루이는 이슬람의 홍차를 이미 여러번 마셔 본 경험이 있었다. 비잔틴에서 온 노년의 학자에게 홍차는 그저 일상의 자연스런 음료였을 뿐이었다. 학자가 참지 못하고 홍차의 향을 음미하더니 미시기 시작했다. 군주의 음료에 혹시나 독이라도 들었을까 먼저 시음하는 듯한 의도를 알아채고는 루이도 머뭇거리지 않고 홍차를 즐겼다.
시간이 제법 흘러가고 있었다.
홍차를 거의 마셔가려는 참에서 그제서야 수염이 가득한 노년의 아랍인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손님을 마냥 기다리시게 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고는 마주한 자리에 앉았다. 비단 보따리 하나를 가즈런히 탁자 모서리에 올려 놓고는 노년의 아랍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귀공자 께서 지극히 신분이 높으신 분으로 생각되어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여쭙지 않겠습니다. 저 또한 상거래의 이해당사자 이기는 하나 거래 특성상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점은 이해야여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모르겠는지라 제가 그냥 흔한 장사꾼이 오니 간단하게 마숑(Marchad) 이라고만 제 자신을 소개 드리겠습니다.'
그때 젊은 아랍인이 다시 데워진 홍차를 내와 따르자 잠시 홍차로 입을 축인 스스로를 마숑이라고 소개한 아랍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돌아와서 조카로 부터 공자님과의 거래에 대해서 소상하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다분히 부적절 하고 부당한 거래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다시 오시겠다는 언질이 있으셨다고 하기에 혹시나 어제의 거래를 되물리실 생각이 있으신지 의향이 궁금하여 차마 문을 닫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조카라 불린 젊은 아랍인이 어제 루이가 내밀었던 금화 주머니를 가져와 탁자 올려 놓고 있었다.
루이는 탁자에 바짝 다가가 마숑을 빤히 건네다 보면서 지극히 평온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거래였습니다. 제가 받은 물건에 걸맞는 합당한 가격이었다는 데에 대하여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저는 새로운 거래를 하고자 다시 찾아 온 것이지, 거래를 되물리려고 찾아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거래는 다신 없을 것입니다. 다만, 어제 이미 벌어진 거래에 대하여......... 너무 과분한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되물리는 것을 바랬는데 공자께서 그것도 안된다 하시면....... 제가 소중하게 아껴 온 것을 더하여 드림으로써 조금이라도 보상을 해 드리는 차원에서 어제의 거래를 확실하게 마무리 했으면 합니다. 공자님의 크신 배려에 제가 드리는 작은 정성이라고 여기시고 부디 받아 주시고 거래를 종결해 주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미 분명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어제의 거래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으며 원만하게 끝났다고 말입니다. 이제 나는 우리 사이의 새로운 거래를 원합니다.'
서로의 의견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수긍하고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이 생각이 없었다.
마숑 노인이 비단 보자기를 당겨서 풀어 헤쳤다. 그 안에 나온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마숑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그 책보따리를 루이 앞쪽으로 내밀었다. 루이는 한동안 멍하니 책보따리를 마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책 표지에 분명 글짜인지 그림인지가 쓰여져 있었는데 루이가 일거나 알아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연스레 루이 왕의 당혹스런 눈빛이 옆에 앉아있는 노학자에게 쏠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떻하면 좋단 말인가? 일그러질 대로 잔쯕 일그러진 표정의 노학자 표정을 보니 어떤 충격에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지 몰라 서둘러 부축하거나 어디 의사라도 급히 불러야 하는 정도의 위기가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루이는 손을 뻗어서 노학자의 옆구리를 쿡 쿡 찔렀다. 그제서야 상황을 눈치 챈 노학자가 황급히 루이의 귓전에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오르가논(Organon) 이라는 책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 텔레스가 썼다고 이야기만 전해 내려오는 책입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란 이름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오르가논은 처음 들어봅니다. 그리고 왜 나는 읽을 수가 없는 거지요?'
'저 책은 지금 아랍어로 번역되어 쓰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가논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번역본은 어디 없습니까? 왜 그동안 아무도 아리스토 텔레스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노학자는 반대편에 앉아서 이 상황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마숑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자신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루이는 분명 한 나라의 국왕이었던 것이다. 국왕이 지금 자신에게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는 그 질문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답변을 해야만 하는 어떤 의무감이 가슴을 온통 무겁게 짓누루고 있었던 것이다.
'오르가논이란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생전에 펴냈던 여러가지의 책들을 하나로 모아서 완성한 책 묶음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은 소문으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예루살렘 인근 팔레스타인 지역의 어느 수도원엔가 보존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그리스 지역의 어느 외딴 섬에 있는 수도원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이를 증명한 사람이 없기에 그 내용을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의 기독교(로마 카톨릭) 입장에서 철저히 금지하는 목록에 올라 있는지라 구할 수도 그 내용에 관하여 공부할 수도 없는 처지라 하겠습니다.'
'여기 이렇게 버젓이 그 책이 있지를 않습니까?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이 책이 말입니다.'
루이는 보자기를 당겨서 책을 펼쳐서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글씨인지 그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아랍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저 역시도 지금 처음 접하는 지라 그 내용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젊어서 공부할때 다른 후대의 그리스 문헌 여기저기에서 인용하거나 논의가 있기는 하였으며, 저를 가르친 스승께서 고대 그리스 역사와 문학에 심취하셨던 이유로 조금은 아리스토 텔레스에 대하여 공부를 하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억 조차도 아득히 가물가물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니, 아무래도 좀 시간을 가지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본 후에야만 질문에 대답을 드릴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지금 당장은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귀한 책이라는 말씀이지요?'
묵묵히 이 모둔 정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숑이 노학자를 대신하여 말했다.
'방금 말씀하신 바 대로 위대한 철학자 께서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셨습니다. 범주론(Categoriae)과 명제론( De Interpretatione)과 분석론(Analytica Priora)을전서와 후서로 나뉘어 집필하였고, 가장 유명한 토피카(Topica)와 소피스트적 논박(De Sophisticis Elenchis) 까지를 추가하여 오르가논(Organon) 하나로 집대성 하신 것이지요. 제가 지금 건네드린 책은 표지에는 오르가논이라 써 있으나 실제 내용은 그 중의 일부인 토피카 부분만 해당됩니다. 누군가가 오르가논 전체를 아랍어로 번역하였고 이를 다시 필사본 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다보니 저에게 토피카 부분만이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토피카 내용을 함축 시켜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세상은 사람들이 이래저래 얽히고 섥혀서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저절로 수많은 논쟁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 논쟁에서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 논쟁에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해답을 가르쳐 주는 책이 바로 토피카 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이라?' 누구도 이런 학문이 따로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다시 생각을 해 본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얼마나 더 있단 말인가?
'어떠십니까? 공자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제 작은 성의로 이 책을 드림으로써 이번 거래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만.........'
'마숑께서는 이 책을 여러번 읽으셨습니까?'
'가까이 두고 자주 꺼내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심오한 진리를 모두 깨우치셨겠군요?'
'제가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그저 제가 읽을 수 있는 문자로 쓰여졌기에 여러 번 읽어 본것 뿐입니다.'
'그것 입니다. 더 없이 귀한 것을 저에게 주셨는데 저는 읽어 볼 수 조차 없음입니다. 당장은 제게 무용지물이란 말씀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아무런 쓸모가 전혀 없는 것을 마숑께서는 지금 저에게 건네시며 이것으로 우리의 거래가 모두 끝났다고 강요하시는 것입니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 드리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 귀한 책을 쓸모 있게 만들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 드리면 그 책이 귀하게 되겠습니까?'
'제가 이 책의 내용을 깨달을 수 있게 가르쳐 주신다면 더 없이 귀한 책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학자가 아닙니다. 가르침을 드릴만큼 깨달음이 없는 흔한 장사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 책을 읽을 수는 있지 않습니까? 좋습니다. 저에게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요구 하겠습니다. 매일 아침에 해가뜨면 가장 먼저 서둘러 여기로 찾아 오겠습니다. 저를 위해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토피카를 읽어 주세요. 제가 알아 들을 수 있게 당연히 아랍어 내용을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번역해서 들려 주셔야 합니다. 강의는 해주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그냥 내용을 알아 들을 수 있게 읽어만 주세요. 몇 날이 걸리든 시작에서 끝까지 책 읽기가 모두 끝나게 되면 그땐 우리의 거래가 원만하게 끝난 것으로 약속하겠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비용이 추가로 필요해 진다면 당연히 제가 부담을 하겠습니다.'
당돌한 루이는 자리에서 벌덕 일어나 밖으로 도망치듯 나섰다.
혹, 루이가 꿈 속에서라도 천사에게 토피카 개인 교습을 받은것은 아니었을까? 수도 없이 토피카를 읽었던 먀숑을 꼼짝달싹 못하게 단숨에 제압해 버렸으니 말이다. 하긴...... 그가 어디 보통 수저인가? 하늘이 예비하신 다이아몬드 수저가 아니었던가! 잠시 깜빡 했다. 그런 사실을.......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루이는 정시에 출근 했고....... 이는 앞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석달이나 계속 이어졌다.
석 달이 지나고 나면서 부터........
루이 왕의 이상과 목표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젠 더 이상 사자왕 리챠드 1세가 그의 영원한 우상이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헤라클레스에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를 거쳐 바람처럼 나타나 온 세상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영웅 계보가 현재에 이르러 자신 루이 왕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부활 할 것이며 찬란한 신화를 써 내려갈 것임을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매일 밤 눈을 감으면 그의 눈 앞에는 죽어라 살겠다고 도망치는 적장을 향해 용맹하게 추격하고 있는 알렉산더 모습을 한 자신이 떠 올랐다. 나일강을 건너서 스핑크스의 옆을 지나 피라미드 뒷쪽으로 죽어라 도망치는 이교도의 영웅 살라딘을 루이 왕은 날이 밝아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쫓고 또 쫓아 갔다. 이집트까지 그의 발 아래 놓일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 되뇌이다가 잠에서 깨고는 했다.
마지막 책 읽기를 끄내고 나서 돌아서던 루이가 발걸음을 멈추고 더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마숑에게 말했다.
'저 에게는 아주 큰 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이루는데 마숑님의 도움이 아주 절실하게 필요해요.'
'아직도 부족한게 있으십니까? 말씀해 보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나서서 돕겠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 꿈을 실현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아주 귀중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숑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평생 세상을 빠진곳 없이 떠돌아 다닌 처지로 무엇이든 말씀하시면 구해다 드리던가, 아니면 그 방법이라도 알려 드릴것입니다.'
'가시 면류관이 필요해요.'
-- 너무 길어진 이야기 탓에 아무래도 나누어서 마저 써 내려가야만 할 것같습니다. (생트 샤펠과 루브르 2부)에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