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백운산 용궁사 원문보기 글쓴이: 덕산
{ 기도 성취의 지름길 }
일타 큰스님(조계종 원로위원)
사람의 한평생 가운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란 지극히 적다. 우선 머리 속이 갖가지 생각들로 얽히고 얽혀 있으니 혼돈이 지극하고, 말과 행동으로 지은 업들이 ‘나’의 앞길을 막고 있으니 마음먹은 대로 살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걱정들, 자기 걱정, 가족 걱정, 남에 대한 걱정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기 마련이요, 돈과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애착과 모든 욕심을 남김없이 비우고 사는 것 또한 용이하지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버릇 때문에 비우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비우지도 못하고 내 마음대로도 되지 않을 때, 그리고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도 ‘나’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냥 가만히 앉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오히려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업(業)만큼은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꼭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부처님이나 큰 힘을 지닌 보살님께서 세운 행원력(行願力), ‘고통 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행원력에 의지하여 간절히 소원을 비는 기도법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 기도인의자세 }
우리 불자들은 기도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기도는 ‘마음을 비우고 해야 한다’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소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을 자주 듣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급한 소원이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또, 일체 중생을 위한 기도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해탈과 관련이 있으니, 따지고 보면 자신을 위하지 않는 기도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도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 기도는 비는 것이다. “도와 달라”고 비는 것이 기도이다.
어떤 사람이든 힘이 있고 자신이 있을 때는 신심(信心), 곧 자기 자신의 의지로써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나약하고 자신이 없을 때는 의지할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신앙(信仰)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신앙이다. 신심이 아니라 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매달려야 한다. 내 마음대로도 남의 도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불보살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특별히 두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자 한다.
{ 간절한 기도 }
기도를 할 때는 지극한 마음, 간절한 마음 하나면 족하다. 복잡한 형식이나 고차원적인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간절하게 부처님을 생각하고 지극한 마음을 전하면 되는 것이다.
더 쉽게 이야기해 보자.
간절하다는 것은 마음을 한결같이 갖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소원이 있기 마련이고,
그 소원을 이룩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뭉쳐야 한다.
“잘 되게 하소서. 잘 되게 해주소서.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마음을 하나로 모아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신라의 원효스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이야기하면서,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 생각을 하지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져도 먹을 생각을 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얼어 죽든 굶어 죽든 상관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밥 생각, 불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를 하다 보면 처음 얼마 동안은 마음이 잘 모이지만, 조금 지나면 갖가지 잡념들이 더욱 많이 일어나게 된다.
몸이 고단하다는 생각, 내가 올바른 방법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공연한 기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이 기도를 망쳐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억지로 없애려 한다고 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없애려고 하면 더욱더 일어나는 것이 번뇌 망상의 속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회의가 생기고 잡념이 일어나는 고비를 만나면, 거듭 소원을 곧게 세우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빠져들게 되고,
잠깐이라도 깊은 기도 삼매에 빠져들면 불보살의 가피력을 입어 소원을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북 영천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50대 초반의 처사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수년 전, 그 처사는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며 굴신(屈伸)조차 할 수 없는 허릿병에 걸리고 말았다.
처사는 들것에 실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고,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다니며 침도 맞고
한약도 달여 먹었지만 전혀 효험이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구니 스님이 된 처사의 여동생이 찾아왔고,
여동생은 관세음보살 기도를 할 것을 청하였다.
“오라버니, 관세음보살님을 지극정성 부르면 죽을병도 능히 고칩니다. 그까짓 허릿병 하나 못 고치겠습니까?
누워서 특별히 할 일도 없을 것이니, ‘노시는 입에 염불한다.’고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외우십시오.”
얼마 동안 처사는 동생이 시키는 대로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그러나 깊은 믿음이 없었던 그는
열심히 외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영영 불구자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염불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져 버렸다.
‘관세음보살을 외운다고 어찌 허리 병이 나을까 보냐? 나도 참 바보지. 일은커녕 걷지도 못하고
방구석에만 누워 있어야 하는 이내 신세……. 아, 차라리 콱 죽어 버리자.’
그는 가족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도 못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 먹고 죽어 버리게 농약 가져오너라. 빨리 가져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족들을 향해 ‘농약 먹고 죽어 버리겠다.’고 소리치자,
견디다 못한 가족들은 다시 동생 비구니 스님을 청하였다.
“오라버니,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러 보세요.
틀림없이 허리가 나아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병원에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관세음보살이 어떻게 고쳐?
여러 소리 말고 농약이나 가져와! 콱 죽어 버리게.”
“그렇게 농약 먹고 발광하다 죽고 싶소?”
“그래, 이제 사는 것도 지겹다. 빨리 농약이나 가져오너라.”
헛간으로 뛰어간 동생 비구니는 농약 한 바가지를 푹 퍼 가지고 와서 오라버니의 입 앞에 갖다 대며
소리 쳤다.
“자, 입을 벌려요. 내가 부어 넣어 줄 테니까.”
“......”
“뭘 망설여요? ‘아’ 하라는데......”
처사는 여동생의 당돌한 행동에 깜짝 놀라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농약을 먹지 않으려거든 지금부터 관세음보살을 부지런히 외우세요. 부지런히 외워
꿈속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외우게 되면, 묘한 약이 생기기도 하고 용한 의사를 만나 병이 금방 낫게 될 것입니다.”
여동생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처사는 그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은 불렀다.
소리 내어 관세음보살을 찾기가 쑥스러워 마음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를 7일째 되던 날 저녁, 처사는 문득 꿈을 꾸었다.
처사가 사는 동네에 의사 한 명과 세 명의 간호사가 갑자기 찾아와서,
‘악성 전염병이 돌고 있으니 모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동네 사람 모두를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처사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의사 앞으로 가자, 의사는 다른 사람은 거들떠볼 생각도 않고
처사를 끌어당겨 청진기로 진찰을 하는 것이었다.
“보통 예방주사로는 당신 병을 고칠 수가 없소, 저 침대 위에 누우시오.”
처사가 침대 위에 눕기 바쁘게 의사는 맥주병만 한 큰 주사기를 가져와서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허리에 꽉 찌르는 것이었다.
“아야!”
처사는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고, 꿈에서 깨어나서 보니 자신이 벌떡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불편한 곳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구제 불능의 허리 병이 완전히 나아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 처사가 조급증과 무기력 속에 잠겼을 때 영영 기도를 그만두었다면
어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을 수 있었겠는가? 여동생 스님의 적절한 방편으로 처사는
관세음보살을 찾는 기도를 마음속으로라도 할 수 있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허리 병이 완쾌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수많은 생각들을 잘 단속하여야 한다.
오히려 잡생각이 일어날 때일수록 마음을 곧게 다져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나를 속일 불보살은 없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더욱 부지런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불자들이여, 요긴하게 마음에 새겨라. 기도 성취의 비결이 ‘간절 절(切)’이 한 글자 속에 있음을!
물체의 형상이 길면 그림자도 길고 소리가 크면 메아리도 크듯이, 내가 드리는 정성이 크면 클수록
불보살의 감응(感應)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간절 切’이 한 그림자가 온몸에 사무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삼매에 빠져들어 반드시 불보살의 가피력을 크게 입게 된다.
부디 지극한 마음, 간절하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당부 드린다.
{ 기도인의자세 }
우리 불자들은 기도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기도는 ‘마음을 비우고 해야 한다’ 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소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을 자주 듣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급한 소원이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또, 일체 중생을 위한 기도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해탈과 관련이 있으니, 따지고 보면 자신을 위하지 않는 기도가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도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쉽게 말해, 기도는 비는 것이다. “도와 달라”고 비는 것이 기도이다.
어떤 사람이든 힘이 있고 자신이 있을 때는 신심(信心), 곧 자기 자신의 의지로써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나약하고 자신이 없을 때는 의지할 것이 있어야 한다. 곧 신앙(信仰)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신앙이다. 신심이 아니라 신앙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매달려야 한다. 내 마음대로도 남의 도움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불보살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지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특별히 두 가지 사항을 강조하고자 한다
{ 기도 성취의 지름길 }
일타 큰스님(조계종 원로위원)
사람의 한평생 가운데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란 지극히 적다. 우선 머리 속이 갖가지 생각들로 얽히고 얽혀 있으니 혼돈이 지극하고, 말과 행동으로 지은 업들이 ‘나’의 앞길을 막고 있으니 마음먹은 대로 살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걱정들, 자기 걱정, 가족 걱정, 남에 대한 걱정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기 마련이요, 돈과 명예와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애착과 모든 욕심을 남김없이 비우고 사는 것 또한 용이하지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살아온 버릇 때문에 비우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비우지도 못하고 내 마음대로도 되지 않을 때, 그리고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도 ‘나’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냥 가만히 앉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오히려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업(業)만큼은 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꼭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부처님이나 큰 힘을 지닌 보살님께서 세운 행원력(行願力), ‘고통 받는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하겠다.’는 행원력에 의지하여 간절히 소원을 비는 기도법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 윤회 }
모든 종교들은 극락(천국)과 지옥을 이야기 한다.
어느 종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며 그 결정은 유일자에게 복종하느냐 불복종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불복종의 대가는 죽어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며 복종은 부활로서 영원한 천국의 안락을 보장 한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삶과 죽음이 하나요, 극락과 지옥이 오직 그대의 한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라" 하시었다.
나는 내가 젖먹이 유아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 더욱 어머니 양수에서의 삶은 논외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할 수 없는 삶은 현재 나와 무관한 것인가? 그리고 향후 형편없이 늙어버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은 현재 나와 무관한 것인가? 인생이란 지평에서 현재 그대로의 모습이 모든 과거를 함축한 진실하고 유일한 모습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의 과거의 생도, 현재 생도, 미래의 생도, 순간에서 영원으로 이어져(전생)가는 포지션에 있음이며 순간마다 그 현실에 미혹 되어가는 의식의 변화에 도착된 어리석은 자아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의식을 컴퓨터에 비유한다면 퍼스널 컴퓨터의 프로그램 운용체계인 m.s.(dos) 는 처음 360kb(kila byte) 짜리 5.25인치 디스켓에 담긴 1,0버전이었다. 그 후 1.44mb짜리 3.5인치에 담긴 6x버전이 생산 되었으며 곧이어 원도우로 발전했다. 향후 컴퓨터 발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초고속 단계를 예고하고 있으나 이렇게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버전별로 계속 발전하여 출시된다 해도 기초 때부터 발전되어 가는 모든 정보들이 현재 컴퓨터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이 수억 만년전 인류가 출현할 때부터 진행되어 온 모든 의식들이 현재의식에 함장하고 있음과 같다하겠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나의 과거생의 모든 정보가 업그래이드 된 소프트웨어로서 최신의 최고 버전인 샘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난 모든 생이 낯선 것처럼 다가올 매래의 모든 생도 낮설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전생의 그 어떤 존재였을때나 어머니 양수에서의 생이었을때나 늙어버린 자신의 생에서나 미래에서 그 어떤 생을 받을때나 생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음을 알자. 순간순간 변화해가는 외형적 존재는 자기라고 인정하면서 전생과 현생, 그리고 미래 생을 연출하는 본질적인 생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리자.
그대의 금생이 고달프다면 그대는 그대의 과거 생에서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인색한 삶을 살았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금생이 어리석어 탐욕스럽고 인색할 진대 그대의 미래 생이
불을 보듯 확연하다. 우리모두 환희롭고 빛나는 본인의 미래 생을 위해 인색함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모든 이웃들에게 넉넉한 배품을 투자하자.
{ 원행 }
우리는 날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원願을 세우고 그 원을 실현시키려는 삶行을 살아가도 있다.
세상에 원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이 사람마다 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딱히 개인적인 자유 의지인듯 보이지만 가시적인 이 자유 의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무의식(알라야식)의 세계에 근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이 무의식의 생성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과거 인류의 태동기때부터 이루어져 왔던 윤회전생 의식을 축적한 농축 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의상스님은 법성계에서 "일념 즉시 무량겁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자신이 세우는 원행(작용)이 지극할 때 그 과보(반작용)가 분명하게 선善 보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는 점을 직시하자.
물질계에서 작용과 반작용은 물리법칙이듯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응보의 법칙은 생의 윤회전생의 철칙인 것이다. 인因에 연緣한 업行은 과보가 되는 것이며 이 과보는 다시 생의 원인으로 자신의 운명에 작용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다시는 업을 짓지 않겠다는 원, 이것이 열반심涅槃心 이요, 해탈심解脫心인 것이다. 이 열반심과 해탈심은 자아自我라고 하는 아집이 없어질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세우는 원은 우리 스스로를 고苦의 과보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니 이제 이 원인을 바꾸어 일체중생(생명)을 행복으로 이끌겠다고 하는 원을 세워 위대한 삶(보살의 삶)을 살아가고자 할때 그 원행은 선업으로 공덕이 되는 것이다. 온갖 이기적인 탐욕의 쓰레기들을 자비의 용광로에 담아 녹여 버리자. 이 세상 어느곳에도 어느 누구도 선,악을 가름하고 심판하는 기준이 없음을 알자.
그래서 어느 부처도 어느 창조주도 작용과 반작용(인과응보)의 법칙에 관여할 수 없다. 오직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법칙에 준한 인과 응보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천국과 지옥은 윤회전생의 선상에서 원행(작용)에 연한 과보(반작용)임을 인지覺知하고 이에 의한 최선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고통(악업)이 되는가. 아니면 기쁨(선업)이 될 것인가?
{ 보리 }
보리菩提는 범어 bodhi를 음역한 것으로 覺 각,知지,智지,道도 라고 하기도 한다. 지도론에 "보살이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발심하는 것을 발심보리發心菩提, 번뇌를 제어하고 대승을 실천하는 것을 복심보리伏心菩提, 모든 현상을 이해한 것을 명심보리明心菩提, 일체의 앎에 통달한 것을 출도보리出到菩提, 부처님 경지를 요달한 것을 무상보리無上菩提 라한다. 하였다.
보리는 지혜이자 즐거움이요, 영원 그 자체다. 우리들은 일생을 살아가며 부단히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추구하는 즐거움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욕망을 하나 더 충족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음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욕망 중에는 물질적 욕망, 감각적 욕망 그리고 관능적 욕망 등이 있다.
재물을 탐하고 색욕을 탐하고, 명예를 탐하여 얻는 욕망의 끝은 무엇인가? 소유와 지배, 그리고 감각과 관능의 향유, 이러한 것들이 생의 행복이고 목적인가? 이렇게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이 충족된다 해도 더 불안하고, 더 고독하고 더 허전함은 무엇 때문인가? 이 모든 욕망들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보리의 눈으로 잘 관찰해 보면 모두가 환상임을 알 수 있다.
환상을 좇는 일은 그 결과가 허무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깨서는 "중생들이여, 꿈을 깨라." 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보리지혜를 깨달아 어리석은 환상의 추구를 제어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진리의 추구를 증장해야 하겠다.
부처를 믿는 일보다 부처가 되는 것이 모든 불교인들의 목표임을 알자.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후 "아! 기이하고 기이하다. "세상만유가 부처아님이 없구나 "하시였다.
이 세상 만유가 독점 소유가 아니라, 세계 어느 누구에게도, 아니 유정무정 구분할 것 없이 일체 중생들에게 똑같이 청장한 성품으로 충만해 있음이다. 그래서 불교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러한 사람은 지혜보리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한마디로 지옥이 가까워질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종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못함은 무작정 자기 자신의 탐욕과 아집만을 증장시키는 어리석은 믿음에 기인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자.
믿지 않아 지옥가는 이것이 아니라"어리석음으로 자기와 남을 속일때 지옥에 간다."하신 부처님 말씀을 되새겨 볼 일이다.
"문종성번뇌단 聞種聲煩腦斷, 지혜장보리생 智慧長菩提生,
이지옥출삼계 離地獄出三界,원성불도중생 願成佛度衆生"
이 종소리에 모든 중생들의 번뇌가 끊어져서 지혜는 늘어나고 보리 마음 생겨나 지옥을 떠나고 삼계를 벗어나 일체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여지기를 간절히 발원하나이다.
{ 등불 }
무량수경 종요에서 원효스님은 이르시되"운반하지 못하고 싣지 못하는 바가 없는데다 일체를 모두 남김없이 들어가게 하므로 이를 일러 대승이라 한다. 그리고 끝없는 중생이 헤아릴 수 없고 삼세가 가없기 때문에 생사가 처음과 끝이 없고 중생이 처음과 끝이 없고 부처님 또한 처음과 끝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살아가는 화두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는가하는 문제인 것이 같다. 그것도 어떻게 하면 쉽게 벌 것인가, 그래서 복권, 증권, 장사가 잘 된다고 한다.
몇 억만분의 기대속에서 한번만 하는 도박심리다. 돈도 많고 명예도 얻고 오래살고 싶어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하나같은 소원이건만 그것이 그리쉽지 않다. 오히려 고통과 번민과 슬픔이 갑자기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오기도 한다. 무슨 이유에서 인가? 이를 부처님께서는 인연의 관계인 인과응보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저금 한 일도 없이 은행에 찾아가 돈 내놓으라하면 미친 사람이라 할 것이다.
더더욱 칼을 들이대고 내 놓으라 한다면 이는 강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어놓은 것도 없이 복만 많이 받겠다고 한다면 이도 강도와 같은 심보임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들의 인식으로 알 수 없는 전생은 차치하고 금생에 태어나 내가 살아오면서 무슨 짓을 했는지 돌이켜 보면 자기의 지금이 원망스러워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밝은 지혜의 등불을 켤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불탄일이 돌아오고 사람들도 등불을 켤 것이다. 부처님, "복 많이 주십시오"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등불만 켠다고 복이 이루어진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등불을 켜는 중요한 의미는 진리를 일러주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내가 배워 남김없이 이 사회에 실천하겠다고하는 서원이 따라야 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선혜보살로 수행하고 계실 때 연등燃燈 부처님전 다섯송이 연꽃을 공양하시고 또한 머리털을 진흙길에 깔아 연등부처님께서 지나가시도록 공양하시었다. 이때 연등부처님으로부터 너는 미래세에 성불하여 부처가 되리라하시는 수기를 받으시고 다생겁을 정진 하신끝에 금생에 왕자로 태어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수행하여 일체중생의 스승이신 부처가 되신바를 되새겨 우리 모두 자기자신의 어두운 마음에 밝고 밝은 지혜의 연등을 밝히자.
그리해서 大乘 의 반야선에 올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자.
{ 참회 }
육조스님은 단경참회에 이르시기를 "그대들이여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어 윤회 전생하는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을 참懺이라 하고 종신토록 지은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않을것을 다짐하는 것을,회悔라 하나니 나쁜 죄업을 마음에서 항상 버리지 못한다면 종신토록 부처를 입으로 말하여도 이익됨이 없으리라. 잘못을 몰록 끊어서 다시는 짖지 않음을 이름하여 참회라 하는 것이니 다시는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하시었다.
불교가 제시하는 종교의 가치관은 자비의 실천이요 기독교는 사랑의 실천이라 하겠다. 지난 3월 12일 로마 교황청에서는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미사집전에서 기독교가 2000년 역사속에서 인류에게 범했던각종 범죄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날 과거범죄 "회상과 화해"라는 미사를 통해 1095년 교황 우르반2세의 칙령에 따라 시작된 십자군 전쟁의 첫원정에서 예루살렘에서 7만명의 주민을 학살하였으며 6차례 원정기간동안 콘스탄티노풀과 베이루트를 약탈하고 주민을 살륙한 점,4세기 교부 크리소스토므스의 유태인을 백정이라 칭하고 영원한 저주를 내렸으며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량학살(홀로코스트)에도 침묵했던점, 12세기교황 이노센스 4세에 의해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도입된 고문과 화형식 인정으로 말미암아 15세기 유럽의 마녀사냥과 화형식으로 600여만명이 마녀라는 이름으로 화형에 처해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전 유렵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점, 교황 알랙산더 6세에 의해 신대륙 정복과정에서 선교와 이문화 척결칙령으로 원주민 학살을 자행했으니 이 과정에서 도미니크와 프란체스코 수사들에 의해 16세기 맥시코 정복 당시 1,200여 만명의 원주민을 학살한 행위등을 예를들어 고백하고 미래의 화해를 제시했다. 정말 충격의 고백이 아닐 수없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때로는 죄업을 저지르는 줄 알면서도 자행하는 때가 허다하다.
죄는 누가 대신 짖거나 받거나 사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참회 역시 누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행하는 것이다.우리에게 있어 탐욕貪,성냄嗔,어리석음痴은 죄업의 근본이다.
이를 다같이 참회하고 나와 너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오늘을 살자!
{ 마귀 }
영가 스님께서 말씀하시되 "몸이 장애를 받은 즉 마魔요 마음이 장애를 받은 즉 귀鬼다.
라고 하셨으니 내 몸과 마음이 동시에 장애를 받은 즉 이것이 다름아닌 마귀魔鬼인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의 성품 魔性은 그 근본이 밝지 못한 의혹심[無明感]이니 이 무명심 즉 탐욕스러운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貪嗔痴]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마귀가 되는 것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그 마귀가 나타나는 것이 몸과 마음의 병病인 것이다.
영원히 밝고 맑아서 어느 곳에도 물들지 아니한 신령스러운 한마음이 탐,진,치,
삼독의 어두운 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몸과 마음에 사백사병四百四病을 일으키고 있으니
땅, 물, 불, 바람의 네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몸과 마음은 들숨 날숨으로
공기空氣를 취(息)하여 마음의 평안을 얻고 곡기地氣을 취(食)하여 몸의 바름을 얻는 것이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을 편안히하여 생명을 유지(安心立命)해야함에도
마음의 과욕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불균형(安心不調)인 귀의 병을 얻는 것이요.
몸의 과탐으로 말미암아 몸의 불균형(飮食不調)인 마의 병을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몸을 기르는 것은 식이요, 마음을 기르는 것도 식이니(息)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들이 몸과 마음을 통하여 스스로 하는것과 저절로 되는 것이 상호 걸림없는 활동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빛나는 생명(열반)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내가 섭취한 음식이 체내에서
발효하면 神이 되는 것이요, 부폐하면 魔가 되는 것이다. 또 다시 스님의 말씀에
무명의 실다운 성품이 참 부처님 성품이요(無明實性 眞佛性) 허깨비같이
빈 몸이 곧 진리의 몸[幻化空身則法身]이라 하셨으니 이 우주 그대로가
부처의 성품이요,부처의 몸임을 알겠다. 이러한 연고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대로 불성이요, 법신인 것이다. 이러한 불성법신을 여의고 우치 무명한 한 마음이
진애사음하면 지옥이요, 간탐불실하면 아귀요, 우치암폐하면 축생이요,
아만공고하면 수라며 오계수지하면 인간이요, 십선수행하면 천상이라.
인공득각하면 성문이며 반연성리하면 연각이요, 육도 봉행하면 보살이요,
자비평등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니 즐겁고 행복한 오늘을 위해 지금 나를 애워싸고 있는
모든 의혹과 집착들을 훌훌털어 버리고 편하기 그지없는 큰 마음으로 하루를 살자
{ 방하착 }
요즈음 신문,라디오,티비 등 모든 홍보매체들이 새로운 천년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천년 첫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위해 동해안으로 가는 열차표를 발매했는데 발매시작 10초 만에 1,000매의 차표가 매진되고 해안 숙박시설이 3.4곱의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다고 아우성이요 모든 관광버스들이 해돋이 관광예약이 끝난 상태라 한다.
새로운 천년 첫날 동해안 어디쯤인가가 모여든 인파로 인해 바다 속으로 가라앉지나 않을런지? 걱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그날의 태양이 만년전의 태양과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태양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 태양을 바라보는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바로 각자 각자의 의식의 변화만이 있을뿐이다. 어떻든 지금까지 발전시켜 온 인류의 문명은 새로운 대 전환을 시도해야하는 세기적 시점에 있음이다. 지금까지 주도해 온 종속문화, 지배문화는 과감하게 파기해야 한다. 금세기 인류의 모든 가차관이 사회를 산업사회화 했으며 대량생산, 대량판매, 대량소비구조로 이끌어 물질적 부는 축적하게 했을지라도 이로 인한 인간의 정신적 황폐화, 자원파괴, 공해유발 등,스스로 생명을 보장받을길 없는 한계상황에 놓이게 하고 말았다. 이제 유일자의 창조성인 권위와 권능이 무너져 내리는 인류문명사적 전환점에서 그 대안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정보, 바로 우주의 소식이다. 眞空妙有(진공묘유)로서 진리(정보)가 이미 우주에 충만해 있음을 부처님께서는 2500년 전에 깨달으시고 인간만의 편견으로 고착된 의식을 "놓아버려라"하시었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을 넘어선 "직관력"만이 인류미래의 대안인 것이다.
첫째, 연속성으로서 우리는 지금 시간이라고 하는 통일성 위에서 삶과 죽음을 이분법으로 사량분별하여 두려워하고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 분별심을 버리는 방법은 시간과 공간의 양극을 통일시켜 연속성 위에서 바라보는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직관만이 우리에게 있어 삶과 죽음을 무분별한 것이 되게 한다.
둘째, 조화성으로서 일즉다 一卽多의 회통의 원리다. 다양성과보편성이 상호 작용하면서 충돌하지 않을때 인류공동체는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현재에 다 포함되어 있으며 세계의 일체 모든 법칙들이 헝크러진듯 해도 낱낱이 성품과 모양이 뚜렷이 드러나 있음을 보는 혜안은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셋째, 창조성으로서 주체성의 확립이다. 이는 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유심만법유식) 이요 心外無法胡用別求(심외무법호용별구)로다(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의식뿐 마음밖에 법이 없거늘 어찌 따로이 법을구하랴) 하신 원효스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 마음은 생명이며 생명의 본질은 창조성이라는 점이다. 이 마음이 현실적인 역사창조에 참여해야 하는 일이니 새로운 세계의 변화를 위해 우리 모두 발상을 전환하자. 그리해서 직관력(깨달음)을 이루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여 일체의 망견을 놓아버려라.
{ 참생명 }
부처님께서 화엄경에 이르시되 "온 우주가 오직 한 마음(三界唯一心)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능가경에서는 마음은 온갖 것을 만드시는 기술자와 같다 (心如功伎兒) 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 이라고 하는 것이 사물을 분별하는 인식력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는 근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상의 창조가 오직 하나인 인격적 신神에 의해서
창조 되었다고 하는 설과 정반대 개념인 것이다. 이렇게 창조의 근원인 스스로의 마음은 이 세상의 선善이다,
악惡이다, 지옥地獄이다, 극락極樂이다, 성현聖賢, 범부凡夫, 물질物質, 비물질非物質, 행幸,
불행不幸, 신神, 부처佛등. 일체 모든 것을 창조 해 내고 있음이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외적
대상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는 눈뜸이 있을때 우리들의 참생명은 나타날 것이며
이 참 생명은 영원한 역사의 창조자로서 원인原因되어질 것이고 이 인은 일체의 연緣에
동참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마음이 청정하면 천상의 세계가
창조될 것이고 한 마음이 미혹하면 축생의 세계가 창조되며 한 마음이 대립 갈등한다면
아수라의 세계가 창조된다는 것을 깨닫자.
이렇게 우리 모두는 순간에서 순간으로 수천만의 세계를 창조함과 동시에 소멸하면서 생이라고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은 능동인과 수동인으로서 세계의 모든 것들과
인과 연으로서 연기상태에서 창조를 거듭함이니 이를 되돌아 검증하는 것이 수행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수행(보살)을 통해 행복한 삶(보살 마하살)을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이 세상의 법과 다르지 않음이니 만약 우리가 스스로의 한마음을
평온하고 청정하게하여 세상을 관조한다면 그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둘이 아님을
부처님과 역대 조사스님들께서 거듭 말씀하셨던 것이다. 보살계경에 이르시기를
"일체 만법이 스스로 성품 가운데 있거늘 어찌 진여본성을 단박에 드러내지 못하는가?
일체 중생의 마음이 본래 맑고 깨끗하나니 마음을 깨달아 성품을 본다면 스스로 부처의 지견을 성취함을 알라.
그대들이여! 확연히 깨달아 본래 성품을 찾으라" 하시었다.
우리 모두 올 한해는 큰 참회와 원력의 서원을 드리고 행복한 생명의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다같이 정진하자.
{ 하생 }
도심의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아도 네온불에 눈멀어 무심히 보낸다.
지난 달, 무등문화기행단에서 제10차 문화기행을 무박 2일간으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 적멸보궁, 비로봉등반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꿈결같은 정선의 강변길과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을 순례하였다. 이날 오대산 월정사에서 새벽예불을 올린후 신선하고 상쾌함으로 가득한 새벽녁 뜨락에서 하늘 가득히 흩뿌려진 별들의 함박웃음과 속삭임이 쏟아져 내리고 있음을 보았다.
법화경 방편품중에서 부처님은 "탐내고 애착하여 어리석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덮어 눈멀고 어두워 보이는 바가 없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시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재물과 명예와 높은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서 성공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 이러한 기득권을 확보했을 때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한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
먼저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우수하다고 하는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한다. 무엇이 좋은 직장인가?
남보다 편하게 일하고 돈은 많이 받는 곳 이런 곳이 좋은 직장이라 한다. 이렇게 해서 주위사람보다 더 많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소유해서 주위사람보다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 한다. 이런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얻지 못하고 재물을 소비하지도 못할 때 사람들은 좌절과 불행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이를 일신하기 위해 사기, 강도, 폭력, 비리와 부정도 서슴치 않는다. 이렇게 재물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무엇이든지 남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하고 이를 위해 모든 더러운 수단과 방법을 불사하면서 살아가며, 또 그 방법을 자식에게도 강요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다.
내가 추구하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무엇이든지간에 다른 사람의 희생과 불행을 담보로 해야하는 삶의 현실 속에서 상호 갈등과 경쟁이 증가되고 속이고 훔치고 빼았고 강탈하며 더욱 타인을 죽여서라도 획득하고자 하는 정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타인보다 많이 소유할 때 행복이 증대된다고 하는 전도된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그래서 소유의 독점과 확대가 행복이라고 하는 환상에서 깨어나자. 무엇이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하는가? 끝없는 탐욕으로부터 해방! 이것만이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끝없는 탐욕으로부터 행방되었을 때 다시는 악업을 짖지 않으니 내가 행복해지고 타인을 위한 삶이니 타인이 행복해지고 모두 같이하는 세상이니 모두가 행복한 극락정토가 되는 것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되 "그대들이여,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하는가. 마땅히 그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하여 허공과 같이하라." 하시었다. 찬이슬 맺힌 새벽녘 진주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본다.
주인공아 !
예.
속지마라 !
예....
{ 일즉다 }
옥수수 할베가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수수 할매와 소근소근 만추담을 나누는 들녁, 잔디 위에 누어 팔베개하니, 파란 하늘에 뭉게 구름 둥실 떠간다. 구름 위에 올라가 세상을 보자. 크다하니 작아지고 작다하니 어느센가 커다랗게 변해버린다.
이렇게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잠시도 자기 본성을 지키는바 없이 서로서로 연관하여 일어나고 스러짐을 보라 그래서 의상스님은 그의 게송에서 "하나의 먼지 속에도 우주가 있고 무량한 우주를 포함하여 무량한 중생과 무량한 부처가 두루하되 모자람도 남음도 없다. 크다면 큰 것이요 작다면 작은 것이어서 하나의 먼지 속에서 온 우주가 작음이 되고 우주를 가지고 하나의 먼지를 헤아리므로 하나의 먼지가 큼이 되는 것이니 이는 만유만상들이 본래 스스로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하고 했다.
이렇게 아무리 작은 것 속에도 우주 전체가 다 들어가 있고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결코 우주 전체일 수는 없다. 그런 즉 스스로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본질이나 속성을 지녔다고 할 만한 것이 이 우주내에 없음을 알자. 너도, 나도, 하나도, 여럿도 자기자성을 내세울바 없는 철저한 비실체로서의 존재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모두는 스스로 성품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떠나 이루어진다"하고 하였다.
우리가 철저한게 인식해야 할 바는 하나가 결코 모든 것의 능동인도 질료인도 아니라는 점을 알자. 이 우주는 낳은 자(生者)도 이루는 자(成者)도 없애는 자도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자.
"一 則 多 " 의 묘연의 세계, 이를 알았을 때 세상은 충만함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성품들은 가득참 속에서 스스로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상태를 공(空)이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임(如 如) 일 뿐이다.
그러나 서양사상은 철저하게 하나에서 모두가 발생된다고 하는 발생적 인식으로서 절대인 하나는 모든 다자를 창조하였고 창조된 모든 다자들은 절대적인 하나에 영원토록 복종이 강요되며 이렇게 강요된 복종속에서 구원과 영생을 추구한다.
한편 다자들의 힘으로 일자의 독재를 구축하고 (혁명) 절대인 일자에서 해방되었을 때 자유라는 이름으로 다자들의 방종과 살육이 얼마나 많이 역사 속에서 자행 되었던가.
중생이 제도를 받는데 중생 밖의 또 다른 힘에 의해서 제도를 받는다면 병을 약으로 치료함과 같이 약에 의한 병이 생겨서 약의 약이 또 있어야 할 것이다. 중생은 자신이 본래 부처이므로 중생자신의 힘으로 제도되어져야한다. 그래서 보조스님은 "땅으로 넘어진자 땅으로 인하여 일어서라" 하신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 들을 귀 있는 자 만이 들어서 알뿐이다"
휘영청 달 밝은 밤 지새우는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이 깊어가는데 " 대 그림자 섬돌을 쓸되 먼지 일지 않고 달빛 못바닥 뚫되 물에 흔적 없구나///
{ 시공 }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는 무엇을 인류에게 제시하고 계시는가?
그 근본은 깨달음(해탈)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으신 것인가?
부처님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문제는 생(生),노(老),병(病),사(死)였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원초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행정진하신 뒤 문제의 해결을 하신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생노병사의 문제는 나의 문제요, 너의 문제며 우리 모두의 문제며, 나아가 전 인류의 문제인 것이니 이러한 영원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신 부처님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며, 흠모가 따르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부처님을 향해서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바쳐 귀의하고 있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깨달음의 본질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로써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언제나 과거에서 현재을 거쳐 미래를 향해 진행하고 있고 공간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가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못해서 고통이요, 공간적으로 항상하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은 항상 변화되지 않는 절대로써 자체의 본질이 외부의 어떤 것에라도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여 정지 상태로 존재할 것을 기대하는 절대공간성과 그 어느 것과도 관계없이 나의 존재가 항상하기를 바라는 절대시간성의 착각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틀 속에서 우리는 불행과 고통의 윤회 전변의 행로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이니 이제 우리 모두 타성에 젖은 인식의 틀을 과감히 허물자. 그리해서 이 우주 어디에도 나를 구원할 정지된 기준점이 없음을 알자.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해야 할 시간이 없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며, 항상 동일한 상태로 있어주어야 할 공간의 없음을 깨닫자.
이러한 깨달음이 이루어질때 우리는 자량(慈量)으로 모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비량(悲量)으로 불행한 이웃과 함께 할수 있는 것이다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네가 불행할 때 내가 불행해 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같이 인식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정토가 될 것이며, 우리가 말하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 무량심 }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 그 마음은 한량없는 지혜의 마음이요,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이라고 한다. 내가 누려야 할 즐거움을 모두 같이 누리도록 하는 자(慈) 무량심, 이웃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고 같이하는 비(悲) 무량심, 고통을 여의고 낙을 얻어 기쁨을 주는 희(喜) 무량심, 밉다 곱다하는 차별심을 버려 모두에게 봉사하는 사(捨)무량심,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마음이다.
이 마음은 우리 모두가 증득하고 실천해야 하는 종교 윤리적 덕목이요,생의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웃과 이웃이 단절되어 누가 살아가는지조차 관심없어하는 몰인정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아 가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가 계속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하기야 한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고, 부부마저도 대화가 없는 마당에 이웃과의 관계단절을 입에 올려 무엇하겠는가?
고도로 정보가 분업화된 사회, 모든 사람이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산업사회, 미증유의 기계기술 문명속에서 거대한 기계속의 부품들로 변해버린 그리해서 문명의 고도에 유리되어 표류하고 있는 오늘의 인간사회속에서 간절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모와 친지, 부부와 자식, 이웃과 친우, 스승과 제자, 지역과 지역, 정부와 국민간에 원만한 상호관계가 이루어질 것을 간구하며, 이때에 사회와 가정 그리고 국가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작금 종교.정치.경제.문화등 모든 분야에서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모든 분들이 한결같이 대승적임을 말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 하나 대승의 실천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이다.
이는 모두가 자아중심에 기인한 이기주의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행복한 삶의 실천이야 말로 대승이다. 대승의 실천자를 보살(菩薩) 이라 한다.
보살은 적어도 모든 일에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무량한 자. 비.희.사.정신과 삶은 이 사회에 희망과 행복이 넘치는 사회로 만들겠다고 하는 원력과 염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메마른 세상에 단비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렇게 대승 보살은 티끌만한 공덕이라도 이웃에게 돌려줄 것을 기원한다. "잘못은 부하에게, 잘 한것은 자기 공으로" 돌리려 하는 파렴치한 세상에 당연히 내게 돌아올 이익까지 모든 이에게 회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천도인 것이니, 우란분절에 올리는 천도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산자와 망자들이 다같이 깨달음을 이루어 질 것을 갈구하는 일념으로 우란분절을 맞이하자
{ 감로수 }
아함경에 이르시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계곡물이 되고 계곡의 물들이 모여 강물이 되고 강물이 모여 바다가 이루어 지듯 이 중생들의 무명이 모여 탐욕의 계곡이 되고 진노와 어리석음의 강물이 되어 마침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고통의 바다에서 생사유전하고 있나니라." 하시었다.
그리스 철학자 헤라 클래이토스는 "만물은 물로서 유전한다."하고 했고 노자는 "물은 최고의 선이다."하고 했다. 이렇게 철학적인 용어의 물이 아니더라도 지구상에서 생태계를 순환시키는 물은 일체의 존재와 더불어 상호관계 속에서 언제나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볼수 있다. 세상에 출현한 모든 생명체들은 과학적으로 바다물에서 유기물의 생성과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기세인본경" 에 "일체의 생명이 광음천에서 생존을 버리고 욕계(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출현할때 어둠에 둘러쌓인 물이 근본을 이루었다." 고 하시었다. 이렇게 물과 더불어 지구상의 생명체체들의 태어남과 늙음 그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되풀이가 시작되었으니 이들 생명체들은 알에서, 모태에서, 습기에서, 변화해서 태어나는 4가지 출생방식과 모양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등의 4가지 출생형태로 태어난다고 "금강경" 에서 밝히시고 있다.
이러한 생명탄생중에서 우리 인간은 모태라는 양수의 바다에서 출생하고 있음을 상기할때 우리 인간들의 생명의 고향이 어디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생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동안 윤회전생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흘린 눈물이 저 대양의 물에 비유할바가 아니다. 수천만겁을 지나 오면서 흘린 눈물이 계곡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를 이루었음을 알라." 이렇게 우리의 눈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고 그 바다는 다시 생류를 잉태하여 끝없는 윤회의 생사바다를 이루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이러한 생사의 바다에서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땟목에 의지하여 자유자재한 수증기 같은 마음을 이루고 여실지견한 삼매의 증발을 거쳐 원만청정한 해탈(청정무구)의 하늘에 올라 영원한 열반(생명)의 세계와 하나됨을 이루자. 이제 올 여름 삼복의 초입에서 새삼 시원한 물이 그리워 질때다. 타는 한증같은 삼복 속세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물을 마셔야 할까? 그러나 한모금의 물을 마시면서 각종 중금속과 오폐물로 오염된 물을 걱정해야하는 요즈음 환경세태는 무엇에 기이한 것인가? 이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의 어리석음과 각자 각자의 탐욕으로 기인한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원인 물이 썩어 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일이다
{ 행사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권력을 위해?
부를 위해?
명예를 위해?
권력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면 이 나라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보다 더한 권력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통령을 역임한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백담사 또는 교도소에도 가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심기가 아주 불편한 면목으로 지방을 다니면서 발언하는 것을 보건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해도 과히 행복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또 인생이 부를 위해사는 것이라면 이 나라 재벌총수들 이상 부를 누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 중에서도 왕총수는 그 부로 인해서 극락에 사는 것과 같이 즐거워야 할텐데도 그렇지도 않는 것 같다.
이와는 반대로 일생 동안 버리고 또 버려서 버릴 것 마저도 없어져 버린 역대 모든 선지식들께서 그렇게 인생을 평안해하고 행복해 하셨음을 볼때 매일 매일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구하기 휘해 발버둥치는 우리의 삶이 정말 잘못된 것임을 알수 있겠다.지금 당장에야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리 자신의 임종 앞에서 일생을 통해 목숨을 걸고 구하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보면 이제 우리가 정녕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본래 항상함이 없이 순간순간 변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고정된 무엇에 집착한다는 그 자체가 어리석고 허망한 것임을 알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허망이 진정한 허망인 줄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밖으로 향하여 구하고자 하는 전도된 가치관을 버리고 안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버리는 이를 일러 行捨라하는 것이다.
권력이 낮아 언제나 몸살하는 사람은 정작 그에게 권력이 주어질 때 어떤 일을 하는지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으며 지금도 권력을 구걸해서 얻은 몇몇 분들의 행태를 혐오하고 있음이다. 직위의 높낮이에 연연하지 않는사람, 이렇게 사심이 없는 사람은 오늘도 진정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
부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어 세상을 살아 갈수 없는 사람이 돈을 원하는 만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해 질까? 아니다 그 사람은 그 돈으로 말미암아 더 불행해질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타인의 부를 편취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수 있다. 부를 편취하는 일이 아닌 남의 돈을 훔치는 좀도둑쯤이야 약과다. 다수의 부와 행복을 교묘한 수단으로 탈취해서 거들먹거리는 간교한 知者들은 참회할지어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버리고 버려서 버릴것마저 없는 사람은 성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행사각지, 이 한말씀 잘 새겨들을 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처님 오신 날 삼가 봉축의 밝은 등을 올린다.
부처님전 행사각지로 충만한 청정한 등을 우리 모두 밝힐 것을 기원한다
{ 발고 }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苦海'(고해) 고통의 바다다 라고 했을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건대 고통 아닌 것이 무엇인가? 병든 사람은 병이 있어 고통이요,가난한 사람은 가난이 고통이요, 부자는 금고 지키는 것이 고통이요, 직위가 낮은 사람은 직위가 낮아 고통이요, 높은 사람은 떨어질까 고통, 자식없는 사람은 자식없어 고통이요,자식많은 사람은 그 자식으로 말미암아 고통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생을 부여받은 그 순간부터 늙어야 하니 늙음이 고통이요,병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 고통이다. 이 생,로,병,사의 원초적인 고통은 직위에 관계없이 명예에 관계없이 부에 관계없이 능력에 관계없이 인연이 다하면 끝을 내는 숙명이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을 당연한 것으로 하기에는 너무도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늙고 병들어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이여,그대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 과거의 업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괴로움을 받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생' 은 고라하는 것이며 '노' 또한 고라 하는 것이며 '사' 또한 고라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러한 생.로.병.사의 원초적인 괴로움 외에 우리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주.객관적 애증 (怨憎會苦,원증회고)의 괴로움과 즐기고 반기는 일체의 상황과 조건에서 격리 (愛別離苦,애별이고) 되어야 하는 괴로움 소망하는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이룰 수 없는 (求不得苦,구불득고) 괴로움, 그리고 육체와 정신적으로 쌓이는 (五陰盛苦,오음성고) 갈등 등, 이 모든 상황들이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이여, 마땅히 알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항상함이 없나니 근심과 걱정하며 마음아파하지 말라. 오직 부지런히 힘써 해탈(영원한 생명)을 구하라." 하신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의 밝음으로 모든 어두움과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실천덕목으로써 고통스러운 이웃을 위해 나눔의 생활로서 어리석음의 종자를 끊고 인내하여 잘 참는 것으로 분노의 종자를 제가 하는 일이다.
이렇게 부지런히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고요하고 안정되어 평화로워질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밝은 지혜와 자비가 솟아나는 것이니 대승사에 동참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 이 예토(고통의 세상)를 바꾸어 정토(행복한 세상)를 일구어가는 일에 전심전력할 일이다.
이것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주는 "발고여락"인 것이다
{ 사백사병(四百四病)}
병病을 불교 의학에서는 “중생들이 전생과 이생에서 지어낸 탐·진·치인 무명 망심의 업보(행위)로 말미암아
몸에 생리적인 신진대사 작용에 이상이 생기고 마음을 순환하는 오행의 기氣가
실조하여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이러한 현상을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 이르시되 “모든 사람이 탐욕과 분노와 우치와 교만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에
사백사병이 생기는 것이니라” 하시었다.
또 유마거사도 “중생의 병은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로부터 생기며 중생들이 병들었으므로
나 또한 병들었다. 중생들의 병이 없어진다면 내 병도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에 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병病이라는 글을 해석해 보면 밝을 병炳에 병들 역疫을 더해 만들어진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람의 병은 몸으로 과식, 과음, 과로하고 마음으로 과욕, 과만, 과탐하여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은 업보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한 생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결국 죽어야하는 것이니 이러한 순환은 그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이러한 병고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의 역사는 처절한 몸부림을 기울여
근자에는 의학과 의약의 발달과 식생활의 개선으로 몸의 질병과 수명이 다소 연장되었다고 하나
원초적 두려움과 고통을 수반하는 사망은 해결할 방법이 없음과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사회적 병리현상인 불안, 공포, 좌절이 주는 자기상실인 정신적 질병은 전 인류의 대 재앙을 예고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중아함경에 이르시되 “나병환자가 허물어지는 자기 몸의 부스럼을 긁어 헤치고
불 속에 몸을 넣어 환부를 태운다면 부스럼은 더욱 커지고 병은 점점 깊어지지만
그는 오히려 그로부터 즐거움을 찾는 것처럼 중생은 탐·진·치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즐거운 오욕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고 생·노·병·사의 윤회 고에서 해매는 것 이니라”하시었다.
이제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사백사병의 근본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를 깊이 반추하고
스스로 병고로부터 해방하여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 사랑 }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전에서는 “상대편을 존중하여 정성을 다하는 마음. 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 일정한 사물을 즐기거나 좋아하는 마음을 사랑 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이라는 말을 부처님께서는 무어라 하셨을까? 잡아함 조소경에 “너희 비구들은 바른 믿음으로 집을 나와 집이 없이 도를 배운다. 마땅히 사랑하는 마음을 닦고 또한 사랑하는 마음의 공덕을 찬탄하여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또 한용운 스님은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거울은 비추는 사물의 형상이 나타난다. 비추어도 사물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는 거울이 아니다.
사람도 사랑하면 상대가 그리워진다. 그리움이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라즈니쉬 저서 “그대 잠에서 깨어나라”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어떤 수행자가 위대한 스승 라마누자를 찾아가서 “스승님 저는 진리를 깨닫고 싶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스승은 말했다. “너는 사람을 사랑해 본 일이 있느냐?” 수행자가 “저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오직 진리만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하니 이에 스승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어떤 여자나 어린 아이라도 사랑해 본 일이 없느냐? 그러자 수행자는 다시 말했다. 저는 지고를 추구하는 종교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을뿐, 그 어느것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니 스승 라마누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진리를 깨닫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돌아가 먼저 누구인가를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라. 이것이 진리를 향한 첫 걸음이니라. 이러한 기본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진리를 깨달으려 하느냐”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모든 사람은 누구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사랑으로 수태되어 사랑으로 양육되고 사랑하다 떠나는 인생,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누구인가를 희생하는 사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의 개인적인 사랑을 일체중생을 향한 큰 사랑으로 회향 할 것을 요구하신다. 불교의 수행은 믿음과 깨달음의 종자인 사랑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듯이 사랑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려함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불보살의 능력을 간구하는 기도를 하자.
* 복 단 일. (伏 斷 日)
日. (일) 자 (子). 사 (巳).
月. (월) 미 (未).
火. (화) 인 (寅). 유 (酉).
水. (수) 진 (辰). 해 (亥).
木. (목) 축 (丑). 오 (午).
金. (금) 신 (申).
土. (토) 묘 (卯). 술 (戌).
* 일요일에 자일. 사일. 이면 복단일이 된다.
* 월요일에 미일. " " "
* 화요일에 인일. 유일. " " "
* 수요일에 진일. 해일. " " "
* 목요일에 축일. 오일. " " "
* 금요일에 신일. " " "
* 토요일에 묘일. 술일. " " "
* 복단일에는 모든일을 쉬는것이 좋다.
{ 목련경(目連經)}
《목련경(目連經)》은 석존의 십대제자 중 신통제일로 알려진 목련(목건련) 존자의 지옥순례기이다.
서양에는 단테의 《신곡(神曲)》이 있지만 불교에는 《목련경》이 있다. 《목련경》은 불교판 '신곡'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구성과 묘사가 세밀할 뿐만 아니라 무거운 업장을 짊어지고 지옥의 고통을 겪는 어머니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지옥을 순례하는 아들 목련존자의 효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본 경전은 《우란분경(盂蘭盆經)》, 《부모은중경》과 함께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인간구원의 문제과 결부시켜 설하고 있는 대중 경전이라고 할수 있다.
===================================================================================================
◆ 청제부인의 악행
옛날 왕사성에 한 장자(長者)1)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부상(傅相)이라 했다.
그는 큰 부자여서 낙타, 코끼리, 말이 산과 들을 덮을 만큼 많았으며 창고에는 비단과 진주가 가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빌려준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말했으며 인정을 거슬림이 없어서 항상 육바라밀(六波羅蜜)2)을 닦았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들 부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나복(羅卜)이었다. 나복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삼 년 동안의 복(服)3)을 벗고 나서 어머니께 여쭈었다.
'아버님이 계실 때에는 돈과 재물이 한없이 많았습니다만 지금은 창고가 비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라건대 돈을 가지고 외국에 가서 장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하인 익리(益利)에게 창고의 돈을 가져오게 하여 계산해보니 삼천 관의 돈이 남아있었다. 이를 셋으로 나누어 천 관은 어머님께 드려 집안 일을 보전케 하고 또 천 관도 어머님께 드려 삼보(三보)4)를 공양하며 매일 백 명의 스님께 공양을 올리도록 하였다.
나머지 천관은 자신이 가지고 금지국(金地國)에 가서 여러 가지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떠난 후 모든 하인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잘 들어라. 우리집은 큰 부자이다. 만약 스님들이 우리집에 와서 교화를 펴려고 하면 몽둥이로 쳐서 목숨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하여라.'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들이 삼보를 공양하라고 준 돈으로 돼지, 양, 거위, 오리, 닭, 개를 널리 사들여서 배불리 먹여 살찌운 후, 양은 기둥에 매어 피를 받고, 돼지는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리니 슬픈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부인은 여러 짐승들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즐거움으로 누리고 있었다. 아들 내복은 일천 관을 가지고 외국에 간지 삼 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사십 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여 성서쪽의 버드나무 밑에서 잠시 쉬면서, 하인 익리에게 집으로 먼저 돌아가 어머니께 말씀드리도록 했다.
'만일 착한 인연을 지으셨다면 내가 이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공양을 드리겠고 또 만일 악업을 지으셨다면 나는 이 돈으로 어머니를 위해서 널리 보시하는데 쓰겠습니다.' 익리가 집으로 오는 것을 보자 하인 금지(金地)가 멀리서 보고 청제부인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지금 서방님께서 돌아오시고 계십니다.'
청제부인이 물었다.
'네가 어떻게 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아느냐?'
'익리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서방님께서 돌아오신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인이 금지에게 말했다.
'너는 즉시 나가서 문을 걸어닫고 익리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곧 창고에 들어가 당번(幢幡)5)을 꺼내어 후원에 늘어놓고 삼보께 공양 올린 모양을 꾸며놓거든 그때를 기다려 문을 열고 익리가 들어오도록 하여라.'
이윽고 익리가 집에 들어오자 부인은 말했다.
'나는 너의 내 아들이 함께 떠난 이후 집에서 날마다 오백승재(五百승齎)6)를 지냈다. 만약 믿을 수 없거든 후원 불당(?堂)으로 가서 내가 재를 올린 것을 보아라.'
익리가 후원 불당에 가 보니 수저는 이리저리 흩어져있고 향불의 연기는 아직도 타오르고 있었으며 사발과 대접들은 아직도 설거지가 안된 채로 쌓여 있었다.
익리는 급히 나복에게 달려가 말했다.
'마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마님께서는 날마다 오백승재를 올리고 계셨습니다.'
나복이 익리에게 물었다.
'그대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
'제가 집에 들어가 보니 수저가 이지저리 흩어져 있고 향을 사른 연기는 아직도 자욱하고
스님들도 방금 떠나신 듯 그릇들의 설거지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복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멀리 어머니를 향해 일천 배의 절을 하리라.'
나복은 집을 향해 일천 배의 절을 하고 있었다. 이때 동, 서 마을의 이웃과 친척들이 나복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성문 밖까지 나왔다.
그들은 나복이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지금 이곳에는 부처님도 안 계시고 스님도 안 보이는데 무슨 절을 그렇게 하는가?'
나복이 대답했다.
'나는 어머님께 부끄럽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집에 계시면서 삼보를 공경하고 매일 오백승재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말했다.
'그대의 어머니는 그대가 집을 떠난 후 집에 스님들이 오면 몽둥이로 때려서 쫓았다.
또 공양을 올리라는 돈으로 돼지와 양, 거위, 오리, 닭, 개를 사서 잘 먹여 살찌게 한 다음 양은 기둥에 매달아 피를 흘리게 하여 동이에 받았고, 돼지는 묶어서 때리고 끊는 물로 튀기니, 그 비명소리가 사방을 진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짐승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환락을 삼았다네.'
나복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일으켜 땅에 부딪치니 온 몸에서 피가 흐르고 마침내 기절하여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성 밖으로 그를 맞으러 왔다.
아들이 땅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들이 손을 잡고 말했다.
'아들아, 내가 맹세하는 말을 들어 보아라. 강물이 저렇게 넓고 커도 그 위에 출렁이는 파도가 있는 것처럼, 사람을 성공케 하는 사람은 적고 실패하게 만드는 사람은 많다.
만약 네가 집을 떠난 뒤로 너를 위하여 삼보께 오백승재를 지내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중병을 얻어 칠 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서 아비대지옥(阿鼻大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나복은 어머니의 맹세가 너무 진실함을 믿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중병에 걸려 칠 일 만에 죽고 말았다.
나복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후 산소에 초암을 짓고 삼년 동안 고행을 닦았다. 낮에는 삼태기로 흙을 담아다가 어머니의 무덤에 흙을 더하고 밤에는 대승경전을 읽으니 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복의 효성이 지극하여 아홉 가지 빛이 나는 사슴이 무덤 앞을 지나가기도 하고, 흰 학이 나타나 상서로움을 나타내며, 자오(慈烏,까마귀)8) 는 두 눈에서 피가 흐르기도 했으며, 여러 가지 새들이 흙을 물어다가 무덤 만드는 일을 돕기도 했다.
나복은 새들이 흙을 물어 오는 것을 보고 기뻐하여 사람을 불러다가 불상을 조성하고 삼 년 동안 공양하다가 복(服)을 마치고 어머니의 무덤에 하직인사를 한 후 떠났다.
◆ 목련의 지옥 순례
나복은 그 길로 기사굴산(耆蛇窟山)9) 으로 가 세존(世尊)10)을 뵙고 말씀을 올렸다.
'부처님이시여, 저는 부모가 이미 다 돌아가시고 복(服) 입기를 마쳤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고자 하옵니다. 어떠한 공덕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복이여, 잘 왔도다. 만약 남염부제(南閻浮提)11)에서 한 사람의 남자, 한 사람의 여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팔만사천의 부도(浮도)와 보탑을 조성하는 것보다도 훌륭하다. 이로써 이 세상에 살아있는 부모는 백 년 동안 복락을 누리며 칠대를 거슬러 올라간 조상까지도 마땅히 정토에 태어날진대 하물며 그대는 스스로 보리심을 발하였구나.'
부처님은 곧 아난에게 명하여 나복의 머리와 수염을 깎게하고 몸소 머리를 만져 수기(受記)13)를 하시고 이름을 고쳐 대목건련(大目?連)14)이라 부르시고 나의 십대제자 가운데 신통이 제일 이였다고 말씀하셨다.
목련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탑(보塔)을 넓고 크게 세운다면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목련이여, 보탑이 높고 크며 처마와 처마가 맞닿아서 범천까지 통할지라도 백 년 후에 부처님의 얼굴에 비가 새게 되면 당장 죄를 얻게 되지만, 출가의 공덕은 금강(金剛)과 같이 무너지지 않는 몸을 얻게 되느니라.'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지금 부처님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고자 합니다.'
'목련이여, 그대가 도를 닦고자 할진대 다른 곳에 가지말고 나를 따라 기사굴산에서 도를 닦도록 함이 어떤가?'
'부처님이시여, 산 속에 무슨 양식이 있어서 도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목련이여, 산 속에는 호랑이와 새들이 있어서 매일 향기나는 광일을 물어다 공양해 주느니라.' 목련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발우를 던져 공중에 솟아올라 기사굴산의 빈발라암으로 갔다. 목련은 왼쪽 다리로 오른쪽 다리를 누르고 오른쪽 다리로 왼쪽다리를 누르며 혀를 입천장에 받치고 삼십삼천을 관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화락천궁(化樂天宮)에서 하늘의 복을 누리고 있음을 보았으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목련은 돌아와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제 어머니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날마다 오백승재를 올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어서 마땅히 화락천궁에 태어나셨을 것인데 천궁에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옵니까?'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목련이여, 그대의 어머니는 세상에 있을 때 삼보를 공양하지 않고 욕심을 부렸으며 수미산만큼이나 많은 악업을 쌓았기 때문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느니라.'
목련은 이 말을 듣고 땅에 몸을 던지며 슬피 울다가 일어나 여러 지옥으로 돌아다니며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목련이 한곳의 지옥을 보니 남염부제의 중생들이 큰 방아에 찧여 몸이 천 토막으로 끊겨지며 피와 가죽이 어지럽게 흩어져서 하루에 만 번 죽고 만 번 살아나곤 했다. 목련이 슬퍼하면서 옥주(獄主)에게 물었다.
'이 지옥에 있는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한 괴로움을 받는가?'
옥주가 말했다.
'이들은 모두 남염부제의 사람으로서 생전에 많은 중생들을 잘라 죽이고 남녀들이 함께 모여앉아 그 음식을 먹으면서 입으로는 그 맛이 좋다고 떠들고 즐기다가, 이제 지옥에 떨어져서 그 죄업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이 다시 검수지옥(劍樹地獄)16) 에 이르러 보니 남염부제의 중생들이 칼이 돋아 있는 나무 끝에 매달려 손으로 칼나무를 붙잡으니 온 몸이 모두 갈라지고 또 발로 칼날을 밟으니 사지가 모두 갈라졌다.
목련은 슬퍼하며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에 있는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이러한 괴로움을 받고 있는가?' 옥주가 말했다.
'이곳은 남염부제의 중생들이 인과를 믿지 않고 갖가지 중생들을 꼬챙이에 꿰어 구워서 남녀가 모여 함께 앉아 먹으면서 맛있다고 소리치다가 이제 지옥의 수중에 떨어져서 그 죄업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이 다시 한 지옥에 이르러보니 그곳은 석합지옥(石합地獄)17)이었다. 두 덩어리의 큰 돌이 모든 죄인들을 갈아서 피와 살덩이가 흩어지고 있었다.
목련은 슬퍼하면서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에 있는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이러한 고통을 받고 있는가?'
옥주가 말했다.
'이곳은 개미와 벌레들을 많이 죽인 남염부제의 중생들이 지옥의 수중에 떨어져서 그 죄업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다가 한 무리의 아귀(餓鬼)18)를 보았다.
그들의 머리는 태산만큼이나 크고 배는 수미산처럼 불렀다. 그러나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가늘었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오백 대의 수레가 구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목련은 그 아귀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아귀가 대답했다.
'저는 전생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재를 올리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고 삼보를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 겁 동안 좁쌀조차도 못 먹고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목련이 다시 회하지옥(灰河地獄)19)에 이르러서 보니 셀 수없이 많은 남염부제의 중생들이 잿물 속에서 밀려다니고 있었는데 온 몸이 데어서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 중생들이 동쪽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동쪽 문으로 헤엄쳐 가면, 문득 동쪽 문이 닫히고서쪽문이 열린 것을 보고 서쪽 문으로 헤엄쳐 가면, 문득 서쪽 문이 닫혔다.
다시 남쪽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남쪽 문으로 헤엄쳐 가면 문득 남쪽 문이 닫히고, 북쪽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북쪽 문으로 헤엄쳐 가면 문득 북쪽 문이 닫혔다.
이렇게 물결을 따라 표류하면서 잠시도 쉬지 못했다.
목련이 슬퍼하면서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
옥주가 대답했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전생에 달걀을 많이 삶아 먹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고통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이 다시 한 지옥에 이르러 보니 그곳은 확탕지옥(?湯地獄)20)이었다. 남염부제의 중생들이 펄펄 끊고 있는 물속에 삶기고 있었다.
목련이 슬퍼하며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
옥주가 대답했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남염부제의 중생들로서 삼보를 공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큰 부잣집에 태어나서 뭇 생명 있는 목숨들을 삶아 먹었기 때문에 지금 지옥의 수중에 떨어져 그 죄업의 고통을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이 다시 한 지옥에 이르러 보니 그곳은 화분지옥(火盆地獄)이었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머리에 불이 가득 담긴 동이를 이고 두개골의 백 마디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목련은 슬퍼하며 옥주에게 물었다.
'이 지옥의 중생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와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
옥주가 대답했다.
'이곳의 남염부제 중생들은 생전에 짐승들의 골수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달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목련은 크게 소리를 내어 어머니를 부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날마다 오백승재를 열고 꽃과 음식을 정중하게 공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셨으니, 돌아가셔서는 마땅히 화락천궁에 태어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천궁에도 보이지 않고 지옥에라도 계신다면 만나야 할 텐데 지옥에도 보이지 않으십니까?'
이때 지옥 속에 있던 팔만사천 명의 우두옥졸(牛頭獄卒)들이 서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문 앞에 산 사람의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이는 반드시 남염부제에서 새로 죄인들을 보내온 것이다. 내가 쇠창을 가지고 나가서 가슴을 찔러 잡아오리라.'
지옥문 앞에 있던 목련은 문득 깨달음이 있어 좌선 삼매에 들어 있었다. 옥주가 몇 번이나소리쳐서 부르자 선정으로부터 깨어났다.
'스님은 누구이기에 우리 지옥문 앞에 와 있는 것입니까?'
목련이 대답했다.
'저에게 화내지 마시오. 제가 여기에 온 까닭은 우리 어머니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옥주가 다시 물었다.
'누가 그대의 어머니가 이곳에 있다고 말했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이곳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스님은 무슨 관계이십니까?'
목련이 대답했다.
'그분은 우리 스승이시며 나는 그분의 제자 대목건련 입니다.'
옥졸이 이 말을 듣고 철창을 내던지며 예배하면서 말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저는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어머니는 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스님을 위해서 옥중에 있는 죄인들의 명부를 찾아보겠습니다.'
옥졸이 들어가 명단을 살펴보았으나 목련의 어머니의 이름이 없었다.
옥졸은 다시 목련에게 말했다.
'방금 옥중에 가서 죄인들의 명단을 살펴보았으나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 이 앞에 아비지옥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보십시오.'
목련이 다시 앞으로 가다 보니 커다란 지옥이 있었다.
담의 높이는 만길이나 되고 검은 벽은 만 겹이나 둘러쳐져 있었다. 철망으로 지붕을 덮었고 그 위에는 네 마리의 큰 구리개가 있어서 입으로 항상 뜨거운 불길을 토하고 그 화염이 하늘로 무럭무럭 타오르고 있었다. 목련은 그 지옥의 문 앞에 가서 소리를 질러 천 번이나 불러 보았어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목련은 다시 돌아가 옥졸에게 말했다.
'앞에 큰 지옥이 있습니다만 담의 높이가 만 길이며 검은 벽이 겹으로 둘러쳐져 있고 지붕은 철망으로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대답하는 이가 없습니다.
옥졸이 대답했다.
'그것은 스님의 법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문이 열리게 하려면 부처님께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그것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목련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발우를 던지고 하늘로 솟아올라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
그는 부처님께 문안드리고 나서 물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큰 지옥에 가서 보니 담의 높이가 만 길이나 되고 검은 벽은 만 겹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대답하는 이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했다.
'그대가 나의 열두 고리가 달린 석장(錫杖)23)를 짚고 내 가사(袈裟)24)를 입고, 내 발우를 들고 그 지옥문 앞에 가서 주장자를 세 번 흔들면 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자물쇠가 저절조 떨어지며 옥중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내가 짚던 주장자 소리를 듣고 잠시의 휴식을 얻을 것이다.'
목련이 부처님의 가사를 받아서 입고 손에는 부처님의 주장자를 짚고 지옥문 앞에 이르러 주장자의 고리를 세 번 흔들어 소리를 냈다. 소리가 나자 지옥문이 저절로 열리고 자물쇠도 떨어졌다. 목련이 아비지옥 속으로 들어가자 옥졸들이 막으며 말했다.
'스님은 누구시기에 마음대로 이 문을 열었습니까? 이 문은 여러 겁 동안 열리지 않던 문입니다.
목련이 옥주에게 물었다.
'문을 열지 않는다면 죄인이 어느 곳으로 들어옵니까?'
옥주가 말했다.
'남염부제 중생들은 불효를 많이 행하며 오역죄(五逆罪)25)를 수없이 범하고 삼보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이 다 한 후에는 업의 바람[業風]에 불려와서 거꾸로 떨어져 내려올 뿐
문으로는 들어오지 못합니다.'
옥주가 다시 물었다.
'스님은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특별히 이곳에 온 이유는 우리 어머니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 스님의 어머니가 이곳에 왔다고 했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이곳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스님은 무슨 관계입니까?'
'바로 나의 스승이십니다.'
'스님의 어머니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안으로 들어가 명단을 살펴보겠습니다.'
목련이 대답했다.
'왕사성에 살던 부상장자의 부인 청제부인으로서 이름은 유제사(劉第四)입니다.'
옥주는 지옥으로 들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왕사성에 살던 청제부인 유제사여! 문 앞에 부처님의 제자로서 법명이 대목건련이라는 아들이 와 있다. 그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있으니 만일 그 스님이 네 아들이라면 오래지 않아 지옥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 지옥에서 어머니를 만나다
옥주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왕사성에 살던 청제부인이여!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그때 비로소 죄인이 대답했다.
'옥주께서 저를 불러 다시 더 고통이 심한 곳으로 옮길 것이 두려워서 감히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죄인에게는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만 스님이 된 적도 없고 이름도 대목건련이 아닙니다.'
옥주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목련에게 말했다.
'청제부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아들이 스님이 된 적도 없고 이름도 대목건련이 아니라고 합니다.'
목련이 말했다.
'옥주께서는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제 어머니가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어 주십시오.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내 이름은 나복 이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신 뒤 저는 부처님께 나아가 스님이 되어 불도를 깨닫고 이름을 대목건련이라고 고쳤습니다.'
옥주가 다시 목련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오늘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면 장차 무엇으로 우리의 은혜를 갚겠습니까?'
'오늘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여러 보살들을 모셔다가 대승경전의 법문을 설하여 옥주의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옥주는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 청제부인에게 말했다.
'기뻐하라. 문 앞에 찾아 온 사람은 바로 나복이다.'
청제부인이 말했다.
'나복이라면 바로 제가 이 작은 뱃속에 품었던 자식입니다.'
이때 옥주가 쇠창으로 죄인을 찔러 일으켜 세우고 못을 박아 땅에 쓰러지게 하자 온 몸의 털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옥주는 다시 쇠칼을 씌우고 칼로 몸을 에워싸서 끌고 나와 아들과 서로 보게 한 후에 목련에게 물었다.
'어머니를 알아보겠습니까?'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옥주가 다시 말했다.
'바로 저 온 몸에 모진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이 스님의 어머니입니다.'
목련이 어머니를 알아보고 크게 부르짖었다.
'어머니! 어머니시여! 살아계실 때에는 날마다 오백승재를 올려 향화와 음식을 모두 법답게 했다고 말씀하셨으니, 돌아가셔서는 마땅히 화락천궁에 나셔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천궁에 계시지 않고 지옥의 고통 속에 계십니까? 소자는 날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어머니께 올렸건만 어머니의 얼굴은 어찌하여 그렇게 야위셨습니까?'
어머니가 목련을 부르며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앞으로 영원히 너를 만나보지 못 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오늘 이 지옥문 앞에서 만나게 되었구나. 이 어미는 지옥에서 벌을 받기가 몹시 괴롭단다. 배가 고프면 밥 대신 쇠구슬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 대신 구리즙을 마시면서 지내왔단다.'
말을 채 마치지도 전에 옥졸이 와서 청제부인을 불들어 세우고 긴 부젓가락으로 몸을 찔러 온 몸이 타들어가게 했다. 이때 같은 지옥에 있는 모든 죄인들이 말했다.
'제 어미와 아들은 서로 만나보게 되었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그럴 기약이 없는가?'
옥주가 목련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죄인과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스님의 어머니는 다시 죄를 받을 시간입니다. 스님이 만일 어머니를 놓지 않으신다면 청제부인의 가슴을 철장으로 찔러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목련의 어머니는 옥주에게 끌려 지옥으로 들어가면서 소리쳐 말했다.
'내 아들아! 나는 지옥의 고통을 참기가 무척 괴롭다. 부디 나를 지옥에서 구해다오.'
이때 목련의 왼발은 지옥 문지방 안에 두고 오른발은 밖에 둔 채 서 있다가 어머니가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참을 수 없어서 머리를 기둥에 부딪치니 살과 피가 낭자했다.
목련이 옥주에게 말했다.
'차라리 내가 어머니를 대신해 지옥의 고통을 달게 받고자 합니다.'
옥주가 대답했다.
'스님의 어머니는 업력이 무거워서 비록 모자간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님께 고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목련은 이 말을 듣고 발우를 하늘로 던지고 높이 솟아올라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의 어머니가 지금 지옥에 떨어져 참지 못할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의 어머니를 지옥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세존께서 말했다.
'목련이여, 내가 그대의 어머니를 구하겠노라. 내가 만일 그대의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다면 내가 오랜 겁 동안 지옥에 들어가 그대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리라.'
이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比丘)26), 비구니(比丘尼)27), 우바새(優바塞)28), 우바이(優바夷)29)등 무수한 억만 명에 둘러싸여 허공에 몸을 나투시니 그 높이가 일곱 다라수(多羅樹)30)만 했다.
부처님이 미간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광명을 발하여 지옥의 어둠을 깨뜨리자 철상지옥(畛床地獄)은 변해서 연화좌(蓮華坐)가 되고, 검수지옥(劍樹地獄)은 변해서 백옥으로 만든 사다리가 되었으며, 확탕지옥(?湯地獄)은 변해서 부용지(芙蓉地)가 되었다.
◆ 우란분재의 구원력
그때 염라대왕(閻羅大王)31)이 찬탄하여 말했다.
'참으로 거룩하도다. 이제 내가 친히 부처님께 예배하고 향을 사를 수 있겠구나! 어찌 이 세상에 부처님이 계심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염라대왕은 옥졸들에게 분부하여 죄 갚음을 한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고 하늘에 나게 하였다. 목련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모든 죄인들이 하늘에 태어났습니다만 저의 어머니는 어느 곳에 탁생(托生)32)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했다.
'그대의 어머니는 생전에 죄업이 깊고 무거우며 업장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므로 대지옥에서는 나왔으나 다시 소흑암지옥(小紺闇地獄)33)에 떨어졌느니라. 여러 보살이 재를 올리고 남은 밥 한 발우를 그대에게 줄 테니 지옥으로 가서 어머니께 드리도록 하여라.'
목련은 발우를 들고 지옥으로 갔다.
발우 속에 담긴 밥을 본 목련의 어머니는 탐하는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오른손으로는 사람들을 막으면서 왼손으로 밥을 움겨 먹었으나 그 밥은 변하여 모진 불덩이가 되었다.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하면 저의 어머니를 흑암지옥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의 어머니를 흑암지옥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여러 보살들을 청해다가 대승경전을 읽고 외워야만 하리라.'
목련은 즉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여러 보살들을 청해다가 대승경전을 외웠다.
대승경전을 외우자 목련의 어머니는 흑암지옥에서 벗어나 다시 아귀로 태어나게 되었다.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의 어머니를 흑암지옥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 태어났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옥에서 벗어나 아귀로 태어났느니라.'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머니께서 지옥에 계신 날이 오래 되었으므로 어머니를 모시고 향하수(향河水)가에 가서 물을 마시게 해드리고 배를 씻겨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들이 물을 마시면 그것은 마치 향기로운 젖과 같고 스님들이 마시면 마치 단 이슬 같고, 십선인(十善人)34)이 마시면 능히 갈증을 면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어머니가 마시면 그 물이 뱃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불덩이로 변해서 뱃 속을 모두 불태우고 말 것이다.'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저의 어머니가 어귀의 과보를 면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보살들을 청하여 마흔 아홉 개의 등(등)을 켜며 뭇 산목숨을 놓아주고 당번(幢幡)을 만들어 장엄하면 그대의 어머니는 아귀의 과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목련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 보살들을 청하여 마흔 아홉 개의 등을 켜고 뭇 생명을 놓아주며 당번을 만들어서 어머니가 아귀의 몸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귀의 몸을 벗고 어느 곳에 태어나셨습니까?'
'그대의 어머니가 비록 아귀의 몸을 벗기는 했으나 지금은 왕사성에 태어나 어미 개가되었느니라.'
목련은 곧 발우를 들고 왕사성으로 가서 그 개를 찾았다.
그 개는 멀리서 목련을 보자 달려와 뛰어 오르면서 말했다.
'내가 너의 어미이고 너는 내 아들이다.'
목련은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개의 몸이 되어 고생을 하시는데 그전에 지옥에서 받던 고통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개가 목련에게 말했다.
'내가 차라리 앞으로도 계속 개의 몸이 되어 사람의 음식 찌꺼기를 먹고살지언정 지옥이란 소리는 듣기조차도 두렵단다.'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머니가 개의 몸을 받아 고생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개의 몸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목련이여, 칠월 보름날에 우란분재(盂蘭盆齎)35)를 베풀면 어머니는 개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목련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무슨 까닭에 십삼일, 십사일은 택하지 않고 반드시 칠월 십오일을 택하십니까?' '목련이여, 칠월 십오일은 스님들이 여름 결제(하안거)를 해제하는 날이다. 기뻐하면서 한 곳에 모여 그대의 어머니를 제도하여 정토(淨土)에 나게 할 것이다.'
목련은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시장에 나가 버들잎과 잣나무 가지를 사다가 우란분재를 베풀고 어머니를 개의 몸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오백계(五百戒)_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하옵건대 어머니는 삿된 마음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가시옵소서'라고 발원했다. 이와같이 목련의 효심은 천모(天母)를 감동시켜 목련의 어머니를 영접하여 도리천궁(?利天宮)36)에 태어나게 하여 모든 즐거움을 받게 하였다.
또 목련은 효심을 드러내는 설법으로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였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서사하거나 받아 지니고 독송하면 삼세의 선망 부모와 칠대의 조상이 곧 정토에 왕생할 것이며 입고 먹는 것이 자연스럽게 갖추어지며 장수하고 부귀를 누릴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해 마치시자 천룡팔부(天룡八部)37)와 인비인(人非人)39)등은 크게 기뻐하며 믿는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며 예배하고 물러갔다.
◆ 목련경 역주
1) 장자(長子, Sresthin) : 부호, 자산가로서 불교에 귀의하여 마음이 진실하고 언행이 바른 사람.
2) 육바라밀(六波羅蜜) : 대승불교의 수행자(보살)가 실천하는 여섯 가지 수행덕목, 바라밀은 범어 paramita의 음역으로서 지도(智度), 도피안(渡彼岸)이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저 언덕 (열반의 세계)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육바라밀이란 ① 공(空)의 이법을 체득하여 일체 중생에게 헌신하는 보시바라밀(布施바羅蜜) ② 불교의 윤리를 실천하는 지계바라밀(持戒 바羅蜜) ③ 인내하고 용서하는 마음의 수행인 인욕바라밀(忍辱바羅蜜) ④ 끊임없는 신심 과 끈기인 정진바라밀(精進바羅蜜) ⑤ 선(선)으로의 길, 선정바라밀(선定바羅蜜) ⑥ 지혜 의 완성, 반야바라밀(般若바羅蜜)이다.
3) 삼 년 동안의 복(服) : 삼 년 동안 상복을 입고 부모의 묘소 곁에 초막을 짓고 묘를 돌봄.
4) 삼보(三보) : 불교 신앙의 삼대 중심인 불법승(불法승)을 세 가지 보물에 비유한 것, 불교 신자가 신앙의 중심인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라고 한다.
5) 당번(幢幡) : 법당을 장식하는 장엄도구. 당은 장대 끝을 용머리 형상으로 꾸미고 비단 깃발을 다는 것. 불보살의 지혜와 공덕을 나타내고 중생들을 이끌어 마군들을 굴복시킨 다는 표치. 번은 갖가지 교리를 상징하는 장엄물을 매달아 법당 안에 설치하는 장엄도구.
6) 오백승재(五百승齎) : 시주가 오백 명의 스님들을 아무런 차별없이 청하여 음식공양을 올 리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많이 행해졌으며 반승재(飯승齎)라고 한다.
7) 아비대지옥(阿鼻大地獄, Avici-raurava) : 아비는 쉴 틈이 없이 계속 고통받는다는 의미 에서 무간(無間)이라는 뜻. 즉 무간지옥이다. 가장 고통이 극심한 지옥으로서 이 지옥의 중생들이 고통에 못이겨 지르는 소리를 아비규환(阿鼻叫喚)이라고 하여 요즘 우리말에서 도 쓰이고 있다.
8) 자오(慈烏) : 자오는 까마귀를 가르킨다. 까마귀 새끼는 자라서 그 부모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므로 효성이 지극한 새라고 한다. 백거이(白居易)의 시(詩) 자오야제시(慈烏夜 啼詩)에는 '그 어미를 잃은 까마귀 까악까악 슬픈 소리를 토하네 (慈烏失具母 棍棍吐哀音) 라는 구절이 있다.
9) 기사굴산(耆사窟山, Grdhrakuta) : 석존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 부근에 있던 산. 이 산에는 독수리가 많이 살았으므로 취봉(鷲峰), 영취산(靈鷲山)이라 한다. 석존이 법화경을 설한 곳.
10) 세존(世尊, Bhagavat) : 부처님의 지혜와 덕을 나타내는 10대 명호의 하나로서 세간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 부처님의 10대 명호는 다음과 같다. ① 여래(如來) ② 응공 (?供) ③ 정변지(正邊知) ④ 명행족(明行足) ⑤ 선서(善逝) ⑥ 세간해(世間解) ⑦ 무상사(無上士) ⑧ 조어장부(調御丈夫) ⑨ 천인사(天人師) ⑩ 불세존(불世尊).
11) 남염부제(南閻浮提, Jambuvipa) :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인도인은 이 세계가 수미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산의 주변에는 구산(九山)과 팔해(八海)가 있고 그 일곱 번째 산의 주위에는 바다로 둘러싸인 네 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이 네 개의 섬을 사대주(四大洲)라고 한다. 동쪽에는 동승신주(東勝神州), 서쪽에는 서우화주(西牛貨 州), 북쪽에는 복구로주(北俱盧州), 남쪽에는 남섬부주(南贍部洲)가 있다고 한다. 이 남 섬부주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라고 한다.
12) 부도(浮도) :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하는 석종(石鐘) 모양의 탑. 부도는 붓다를 가리 키는 범어 붓다(Buddha)의 전음(전音)으로서 후세에는 원래 탑을 뜻하는 스투파(Stupa) 의 의미로 사용되었음.
13) 수기(受記) : 부처님 또는 덕이 높은 보살이 중생에게 언제 꼭 성불하게 되리라는 예언 을 주는 것. 법화경 권3에 수기품(受記品)이 있다.
14) 대목건련(大目?蓮, Maha-maudglayana) :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제일 뛰 어났으므로 신통제일로 불리운다. 사리불과 함깨 부처님의 쌍수제자로 불리우는 그는 신 통력으로 많은 중생을 교화하였으나 그에게 적의를 품은 의도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신통력이 뛰어난 그였지만 전세의 숙업으로 그 과보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목련경의 중심인물인 목건련은 초기불교 교단의 대목건련과는 다른 인물로도 보이는 데 목건련은 부처님의 시자 아난보다도 일찍 출가하여 교단의 중요 인물이 되었으므로 이 경에서 '아난에게 명하여 나복의 머리와 수염을 깎게 하고( )'는 앞뒤가 맞 지 않다. 또한 '세존께서 머리를 만져 수기(受記)를 하시고 이름을 고쳐 대목건련(大目?蓮)이라 부르시고 나의 십대제자 가운데 신통이 제일이었다고 말씀하셨다라는 본 경의 서술로 보 아 원래의 대목건련의 법명을 이은 제2의 목건련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경의 내용과 같이 수많은 지옥을 드나들며 효성과 부처님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반드시 뛰어난 신통력을 가진 주인공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본경에서의 목건련은 적어도 신통제일의 대목건련이 가진 특성을 그대로 수용 하고 있는 인물이다. 화락천궁(化樂天宮, Nirmanarataya) : 육욕천(六欲天) 중의 제5천. 모든 것이 자연히 즐 거움으로 변화하는 하늘. ≪지도론(智度論)≫ 권9. ≪인왕경(仁王經)≫권 上. ≪구사론(俱 舍論)≫ 권11에서 설해지고 있다.
15) 검수지옥(劍樹地獄) : 대아비지옥에 속하는 18부지옥(副地獄) 중의 하나. 사방이 날카로 운 칼날로 뒤덮힌 나무에 매달려 고통받는다는 지옥.
16) 석합지옥(石합地獄) : 8지옥 중의 제3지옥인 중합지옥(衆合地獄)을 가리킴. 맷돌로 죄인 을 갈아 고통을 준다는 지옥. 석합지옥(石割地獄)이라고도 한다.
17) 아귀(餓鬼, Preta) : 생전의 탐욕으로 인한 과보로서 중생이 윤회하는 여섯 세계(六道 :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중의 한 세계. 무엇을 먹더라도 곧 불덩이로 변해서 끊임 없는 기갈에 시달리며 그 생김새는 배는 큰데 비하여 목구멍은 바늘만 하다고 한다. 또 아귀에는 세 종류의 아귀가 있다고 한다. ① 아무것도 전혀 먹을 수 없는 무재아귀(無 財餓鬼) ② 인간이 버린 부정한 것만 조금씩 먹을 수 있는 소재아귀(小財餓鬼) ③ 호화 로운 건물이나 풍요로운 곳에서 인간과 함께 살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허덕이는, 영원히 불만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유재아귀(有財餓鬼).
18) 희하지옥(희河地獄) : 대아비지옥에 속하는 18부지옥(副地獄) 중의 하나. 잿물의 바다에 서 표류하며 구원의 기대가 늘 좌절되는 고통을 받는다는 지옥.
19) 화탕지옥(火湯地獄) : 대아비지옥에 속하는 18부지옥(副地獄) 중의 하나. 큰 가마솥에 삶 겨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
20) 화분지옥(火盆地獄) : 8대지옥 중 제6 초열지옥(焦熱地獄)의 다른 이름. 무시무시한 불길 이 온 몸을 태우며 죄인은 항상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이 담긴 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어 야 한다고 함.
21) 우도옥졸(牛頭獄卒) : 소머리에 사람의 형상을 한 지옥의 간수. 소를 잡아 식용하는 인 류의 업보를 경계하고 터부를 상징한다.
22) 석장(錫杖) : 주장자라고도 하며 불교 수행자가 소지하는 지팡이의 일종. 길을 갈 때 물 의 깊이를 재거나 보행의 편리를 위해서 사용되었으나 금속으로 윗부분을 장식하고 고 리를 달아 소리를 냄으로써 벌레나 짐승들이 보행자의 발길에 희생되지 않도록 하는 구 실도 했음. 또는 스님의 위엄을 갖추는 장엄도구로써 사용된다.
23) 가사(袈裟, kasaya) : 스님의 법복으로서 복전의(福田依), 공덕의(功德依), 간색의(間色 依), 이진복(?塵服), 연화복(蓮華服)이라고 한다. 화려한 색깔의 천을 사용하지 않고 헌 헝겊을 주워다가 꿰매어 만들었으므로 분소의(糞掃衣)라고 한다. 가사에는 내의(內衣), 하의(下衣)를 뜻하는 안타회(安陀회)와 상의(上衣), 법의(法衣)를 뜻하는 울다라승(?多 羅승), 그리고 대의(大衣), 합의(合衣)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스님이 법문이나 포살, 외 출시에는 입는 정식법복인 승가리(승伽梨)가 기본으로서 여기에 발우(鉢盂)를 더해 삼 의일발(三衣一鉢)이라고 부른다. 삼의일발은 스님의 기본 소지품이다.
24) 오역죄(五逆罪) :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큰 죄악. 부친을 살해하고, 모친을 살 해하며, 아라한을 해치고,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며, 화합승단을 파괴하는 행위.
25) 비구(比丘) : 범어 빅쿠 bhiksu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얻어 먹는다'( 士)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비구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로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한 정식 스님이다. 구족계 는 비구계라고도 하며 전부 250가지의 계율이 있다.
26) 비구니(比丘尼, bhiksuni) : 이십 세 이상의 여성으로서 348계를 수지한 여성수행자.
27) 우바새(優바塞, upasaka) :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살면서 불교에 귀의한 남자 신도.
28) 우바이(優바夷, upasika) :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살면서 불교에 귀의한 여자 신도.
29) 다라수(多羅樹) : 종려과에 속하는 식물,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등지에서 자란다. 나무 의 높이는 70∼80척으로서 고대 인도에서는 이 나무로 척도의 단위를 삼았다. 이 나무 의 잎은 넓고 단단하여 종이 대신으로 쓰였다. 여기에 경전을 썼으며 이를 패엽경(貝葉經)이라고 한다.
30)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은 자의 세계, 즉 지옥의 세계를 지배하는 죽음의 신. 염라는 범 어 야마(Yama)의 음역.
31) 탁생(托生) : 어머니의 태에 의탁하여 태어나는 것. 또는 극락세계의 연화대를 태로 삼 아 극락에 왕생하는 것.
32) 소흑암지옥(小黑闇地獄) : 대아비지옥에 속하는 18부지옥(副地獄)의 하나. 칠흙 같은 어 둠 속에서 고통받는다는 지옥.
33) 십선인(十善人) : 몸과 말, 뜻〔身口意〕으로 열 가지 약을 범하지 않고 열 가지 선을 행하는 사람. 열 가지 선이란 ① 불살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邪淫) ④ 불망어(不忘語) ⑤ 불양설(不兩舌) ⑥ 불악구(不惡口) ⑦ 불기어(不綺語) ⑧ 불탐욕( 不貪慾) ⑨불진에(不瞋?) ⑩ 불사견(不邪見)을 가리킨다.
34) 우란분재(盂蘭盆齎) : 음력 칠월 보름 선망부모와 유주무주(有主無主)의 외로운 혼의 극 락왕생을 발원하며 베푸는 영가 천도의식. 우란분재는 거꾸로 매달린 듯한 고통을 받는 영가들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의식이다. 또한 우란분재는 백중, 백종이라고도 하며 불가의 사대명절 중의 하나이다. 음력 7월 15일은 승단의 하안거를 해제하는 날이며 대중 앞에서 그동안의 수행을 점검 하는 포살의 날이다. 이 우란분재를 지내는 음력 칠월 보름은 하루내내 절에서 목탁소 리가 끊이지 않고 올려나오는 날이다. 우란분재는 우리가 여러 생을 윤희하면서 기쁘고 슬픈 인연을 선망부모, 친지와 유주, 무주의 외로운 혼들의 명복을 빌고 감사함을 표시 하는 날인 것이다.
35) 도리천궁(?利天宮, Trayastrimsa) : 남섬부주 위의 수미산 제일 정상에 있다는 하늘. 33천이라고도 한다.
36) 천룡팔부(天龍八部) :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부류의 무리,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 달바(乾?바), 가루라(迦樓羅), 아수라(阿修羅), 마후라가(摩喉羅迦), 긴나라(緊那羅).
37) 인비인(人非人) : 사람과 사람 아닌 것. 여기선 부처님의 법회에 모인 대중을 천룡팔부 (天룡八部)와 인간을 가려서 부른 호칭이다. 한역 불전에서 인비인(人非人)이라고 번역되는 긴나라(緊那羅)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관음경(觀音經)에서도 긴나라(緊那羅)와 인비인(人非人)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