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도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시편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시편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사랑받았던 대표적인 본문인데 오늘과 다음주에 우리가 시편을 함께 보면서 시편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을 보시면 유대인들은 성경을 3개의 장르로 구분했는데 하나가 토라이고 또 하나가 예언서이고 또 하나가 성문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세 개의 장르로 나누면서 이것을 성막과 비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모두가 다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 거룩한 말씀 가운데 토라가 가장 거룩한 말씀이고 예언서가 그다음 거룩한 말씀이고 그다음에 성문서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장소가 어디죠? 성막입니다. 성막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장소이지만 가장 거룩한 장소가 지성소이고 그다음 거룩한 장소가 성소이고 그다음 거룩한 장소를 뜰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성막을 어떻게 비교했냐면 토라를 지성소, 예언서를 성소와 성문서를 뜰과 연관시켰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가장 거룩한 말씀을 앞부분에 배치한 겁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토라가 제일 앞부분에 나오고 예언서가 그다음에 나오고 성문서가 그다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정경으로 확정된 시점도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토라가 정경이 된 것은 주전 400년경입니다. 그다음에 예언서가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주전 200년경입니다. 그리고 성문서가 최종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AD 90년입니다.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있는거냐면 토라와 예언서와 성문서, 즉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성경이 최종 확정된 것은 AD 90년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라와 예언서와 성문서가 동일하게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토라가 주전 400년경, 예언서가 주전 200년경, 성문서가 AD 90년경에 정경으로 확정된 겁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뭐냐면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하실 때 이때가 AD 20년대말부터 30년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누가복음 24장 44절에 보시면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이것이 토라입니다. 그다음에 “선지자의 글” 이것이 예언서입니다. 그리고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셔서 뭐라고 하시냐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는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거냐면 AD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있는 것이 뭐냐면 모세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이라는 겁니다. 모세의 율법은 주전 400년경에 이미 정경으로 확정되었고 예언자의 글도 주전 200년경에 정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문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종 확정된 것은 AD 90년입니다. 우리가 뭘 알 수 있는 거냐면 이미 AD 20년대 말에도 유대 공동체 안에서 시편은 정경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문서가 정경으로 최종 확정된 것은 90년이지만 이미 20년대 말 30년대 초에 시편은 유대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성문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정경적 권위를 획득한 본문이 시편인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성경 배치도 보면 토라가 제일 앞에 나오고 예언서가 그다음에 나오고 성문서가 그 다음에 나온다고 할 때 성문서 가운데 제일 앞에 나와 있는 것이 시편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일찍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았던 본문이 시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시편에 나와 있는 많은 말씀들이 나의 노래와 나의 기도로 인식되어짐으로 인해 신앙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본문이 시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성경은 방향성과 관련해서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라고 할 때 토라와 예언서 같은 경우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모세나 예언자라고 하는 중간 매개자를 통해서 이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 토라와 예언서입니다. 토라와 예언서의 방향성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직접 또는 중간 매개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토라와 예언서에 나와 있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선포해주신 말씀이 토라와 예언서이기에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시편은 반대입니다.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올려드린 찬양, 간구, 탄식 이것이 시편입니다. 방향성이 어떻게 되는거죠? 율법과 예언서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향하고 있다면 시편은 땅으로부터 하늘로 향하고 있는 겁니다. 방향성이 전혀 다르죠.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도 아닌데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린 인간의 탄식이고 인간의 간구이고 인간의 찬양인데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무엇도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토해 낸,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린 그것을 하나님이 경청하고 열납하실 때 그것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예언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하나님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시편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는 땅에 있는 백성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올려드린 거지만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말, 인간의 찬양, 인간의 간구, 인간의 탄식을 경청하시고 열납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무엇도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경청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이후에 보게 될 지혜 문학, 또는 신약 성경에 나와 있는 무수한 서신서를 보시면 방향성이 어떻게 되는 거냐면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말씀도 아니고 땅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린 인간의 말도 아닙니다. 모든 서신서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전달된 겁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 이것은 다 지혜 문학입니다. 지혜 문학이라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전달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지혜 문학과 서신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인간에게 보낸 것인데 우리는 뭐를 믿고 있는 거냐면 인간이 인간에게 건넨 말이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보낸 글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인간의 말과 인간의 글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정리해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말씀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의 방향과 관련해서 크게 3가지의 모습을 띄고 있다, 첫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선포한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뭐냐면 토라와 예언서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시편 같은 겁니다. 시편은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토해낸 인간의 말, 인간의 간구, 인간의 찬양, 인간의 탄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렸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경청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수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경청하시고 열납하시고 수용하시는 것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는 겁니다. 또 하나가 전도서, 잠언, 아가 또는 신약에 나와 있는 무수한 서신서처럼 인간이 인간에게 보낸 글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건넨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말, 인간의 편지라고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유가 뭐죠? 인간이 인간에게 건넨 말과 글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인간의 말과 인간의 글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모든 말씀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땅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린 인간의 말과 글도 있고 또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에게 전달된 인간의 말과 글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선포하신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경청하시고 열납하시고 수용하신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인간의 말과 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믿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은 1편부터 150편 전체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주어진 계시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께 올려드린 인간의 말, 인간의 간구, 인간의 찬양, 인간의 탄식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경청하시고 열납하시고 수용하셨다, 하나님이 경청하시고 열납하시고 수용하시는 것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겁니다.
시편은 구약 시대의 찬양 모음집입니다. 시편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까 우리가 시편은 시집이야, 시들의 모음이야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1차적으로 시편은 찬양입니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고려 시대의 시조 배우실 때 보면 고려 시대 시조들은 그 당시의 시임과 동시에 그 당시의 대중가요인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근대 이전에는 시와 노래라고 하는 것이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시가 노래입니다. 지금은 시, 노래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지만 이런 구분이 명확하게 이뤄진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고려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시가 곧 그 시대의 대표적인 대중음악인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시조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은 단순히 시가 아니라 성전과 지방 성소에서 불리어 지던 찬양입니다. 성전과 성소에서 불리어 지던 찬양을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수집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집해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처럼 150편의 시편으로 최종 편집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시편에 나와 있는 모든 것들은 1차적으로 구약 시대 예루살렘 성전과 지방 성소에서 불리어 지던 찬양들이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지금의 형태로 최종 수집되고 편집 되어졌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시편에 나와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찬양이라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찬양을 많이 하는데 이 찬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뭐냐면 곡조가 있는 기도입니다. 찬양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찬양은 곡조가 있는 기도입니다. 곡조가 있는 기도라는 말은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에다가 곡을 붙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찬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이유가 그런 겁니다. 여기 시편에는 다양한 저자들이 나옵니다. 이 저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 기도에 곡을 붙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인데 이 시편이 사랑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여기 시인이 하나님께 토해내고 있는 그 기도가 나의 기도로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편 23장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구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람들이 이 시편을 사랑하는 이유가 뭡니까? 거기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꽂히는 거거든요. 왜냐 하면 어떤 사람도 인생의 여정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편의 내용이 너무나 공감이 됩니다. 나의 노래로 다가옵니다. 나의 탄식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시편이 오랜 세월 사랑받았던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여기 시편에 나와 있는 무수한 시인들의 찬양, 노래, 기도가 단순히 시인의 찬양과 탄식과 기도가 아니라 나의 노래, 나의 기도, 나의 찬양으로 공감이 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시편이 많은 신앙인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께 찬양을 많이 합니까? 그다음에 한국 교회가 얼마나 찬양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곡조가 있는 기도인데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 자체가 사실은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양과 기도 사이에 괴리가 많이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