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부산진구에 있는 전통사찰은 '선암사(부암동)'와 '광명사(범천동)' 등 2곳이다.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에 동양초등학교가 있다.
예전에 이곳에 동양고무(기차표 고무신 ?)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창마을은 태화고무(말표 고무신 ?) 직원들이 삶의 보금자리로 삼았다고 한다.
부암동과 당감동은 어지간히 개발이 끝나서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안창마을은 처음 갔지만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60~70년대 모습이다.
2022년 1월 22일 이 2곳을 다 방문하였다.
쇠미산 선암사(仙巖寺) / 전통사찰
- 부산시 부산진구 부암동
675년(신라 문무왕 15) 원효(元曉)가 창건. 창건 당시 '견강사(見江寺)'라 불렀다.
절 뒷산 절벽 위에서 화랑들이 무술을 닦으면서 '선암사'로 바꿨다고 한다.
절이 있는 당감(堂甘)은 본디 제의를 올리는 신성한 곳, 당은 신이 내리는 신성한 나무를 모시는 집, 감은 감로수를 뜻하는 말.
1483년(조선 성종 14) 각초가 중창하면서 바꿨다고도 한다. 1568년(선조 1) 신연(信衍), 1718년(숙종 44) 선오가 각각 중수했고 1918년에는 동운(東雲)이, 1955년에는 혜수(慧修)가 중수한 바 있다.
(다음 - 대한민국구석구석 발췌, 정리함)
선암사기에 따르면,
고려말 왜구가 불상을 약탈,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재앙이 잦아지면서 비명으로 목숨을 잃는 자가 많았다.
그 불상을 다시 고려 땅 웅천(지금 창원시 웅천동) '성흥사'에 모시고 공양을 올렸다.
이 일을 우연히 전해들은 동평현 사람 손성민이 경상도 관영에 아뢰고 승려와 함께 웅포 성흥사로 가서 그 불상을
가져와 선암사 경내(현재 극락전)에 모시게 되었는데 기도를 올리면 영험이 수승하였다고 한다.
조선 성종 14년(1483)에 각초(覺招)선사가 중창, 선조 원년(1568)에는 신연(信衍)이 중수,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숙종 44년(1718)에 선오(禪悟)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세 선지식으로 유명한 혜월선사, 석암 등이 주석하시면서 지금의 사격을 이루었다.
혜월선사께서 소림선원을 개원하였고 지원, 성철, 석암, 향곡, 서옹 등이 이곳에서 수행하였다.
(선암사 안내문에 적힌 내용)
일주문은 공사 중이다.
공사 중인 일주문을 지나면 추모관이 보인다.
공사 중인 일주문, 2월 말이나 3월 초에 볼 수 있겠다. 조감도로 만족하여야겠다.
가파른 계단, 이 대문이 천왕문을 대신하고 있다.
천왕문이나 만세루 등이 없다. 이 문이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좌로 측문, 관음전이 보인다.
우로 측문, 요사채인 모양이다.
대웅전 뒤에는 나이든 동백이 여러 그루가 있다. 동백 필 때 보기 좋겠다.
오후 1시 45분 경, 오후 2시부터 대웅전에서 법회가 열렸다. 내가 나올 때까지 법회는 끝나지 않았다. 오후 3시.
대웅전 내부
관음전
명부전
명부전, 지장보살과 시왕상은 모두 깨끗하다. 근래 조각하여 봉안한 것 같다.
선암사 옛 터는 극락전이 있는 곳으로 그곳은 공간이 협소하다.
현재 대웅전, 명부전, 범종각, 요사채 등 건물은 근래 지은 것 같다. 공간이 나누어진 것 같다.
범종루 앞에서 본 극락전
범종루
용왕전
극락전 앞에서 본 경치, 멀리 금련산과 황령산이 보인다.
극락전 옆에 두레박을 이용한 우물이 있다. 이곳은 아래 대웅전보다 오래된 곳 같다.
칠성각 뒤엔 산신각이다.
극락전, 대웅전 공간이 생기기 전에는 극락전이 본전 역할을 하였을 것 같다.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일괄 /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95호
복장유물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을 테다.
산신각, 이 전각 뒤는 절벽이다.
선암사 삼층석탑 /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53호
고려시대 조성한 작은 석탑으로 기단부와 탑신석, 상륜부는 소실, 옥개석만 남아있다.
조사전, 칠성각 뒤 절벽 위에 있다.
윤필거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 없다. 동 시대 인물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향일암과 관련 윤필거사가 나오는데 원효(와 의상은 거의 비슷한 연배)와는 약 300년 차이가 난다.
나는 문경 대승사 윤필암이 생각이 났지만 그 윤필암과는 전혀 관련 없는 분이다.
두운선사, 영주 희방사와 관련한 승려 같다. 좀 더 검색하여 봐야겠다.
우측 그림은 중국 선종 5대 조인가 그 분의 이야기를 그린 것 같다.
매화가 피었다.
별도 설명은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봤다. 오래 세월이 지난 부도는 1기 정도 있다.
이 부도 1기가 100여 년 이상된 것 같다.
팔금산 광명사 / 전통사찰
-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안창마을)
안창마을이 영주동이나 초량 등 산동네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처음으로 안창마을에 와 봤다.
광명사는 전통사찰이지만 사적은 뚜렷이 남은 게 없다. 이렇다할 문화재도 없다. 그런데 전통사찰이다.
비구니 사찰.
주변이 어수선하다.
광명사 교육원, 멀리 보각사 간판이 보인다.
보각사는 불교티브에 나와 "술술 풀릴 것입니다." 하고 법문하는 승려가 있는 곳이다.
사찰 입구이다. 팔금산 광명사.
대웅전
지장전
요사채
칠성각
범종각
지장전에 들어가려고 하니 요사채에서 나온 이가 어떻게 왔냐고 묻는다.
취미로 전통사찰을 보러 다니고, 불교 문화재를 보고 있다고 답했다.
미리 이야기하여 승락을 받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불교신도가 아니라서 그런 게 쉽지 않아 눈에 보이는 외관만 촬영한다고 했다.
불교 신도도 아닌데 왜 절에 다니냐고 한다.
우리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함과 절이 주는 평온함 때문이라고 했다.
민주당 정부의 종교 편향과 어제 벌어진 승려대회를 들먹이면서 내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았다.
(여러 말이 오갔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니, 내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짜증을 낸다.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상대를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하면 어떠하냐고 따졌다.
요사채에서 늙은 비구니가 나와 나를 쫒아낸다. 짜증을 내면서.
나는 말이 정리되어 가는 중이니 할 이야기는 서로 하고 좋게 가야하는 것 아니냐 하니 더 짜증을 내며 나를 민다. 가라고.
화가 난다.
내가 어리석었다.
뭐 모르는 신도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동의하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속이고 싶지 않은 미련함이 있다.
나를 쫓아낸 비구니, 그 나이까지 뭘 공부했지?
돌부처도 돌아 앉을 일이다.
침이 나온다.
부처 얼굴 보러와서 기분 좋게 가야지 이게 뭐람?
마른 침이 자꾸 나와 뱉는다.
내가 처음으로 1천 원 시주한 절이다.
화장실 사용한 비용으로.
불교티브를 보니 108 참회 내용 중에 이런 게 있다. (대충 아래 내용)
"나와 견해를 달리 하는 사람의 말을 경청할 수 있기를 바라며 참회합니다."
안창마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그 절을 지났다.
내가 절 이름을 바꾸었다.
광명사(光明寺)가 아닌 음암사(陰暗寺)로. 물론 나에게만 해당한다.
나도 어리석었지만 그 절 여신도와 늙은 비구니도 모두 부처의 얼굴에 주름을 새겼다.
보살, 보살이 아니다. 왜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기를 강요하는가?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면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가? 참 못났다.
기분 잡친 저녁이 되었다.
안창마을(호랭이마을)
골을 따라 올랐다. 안창마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기는 처음이다.
놀랐다. 내가 살았던 영주동 산만디(산중턱) 마을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그렇지 않다.
범냇골에 수십 층의 빌딩과 아파트, 여긴....... .
브라질의 부자 동네와 빈민 동네를 보는 것과 같다.
춘해유치원, 범냇골 로타리에 있는 춘해병원에서 지어서 운영하는 모양이다.
범내골, 범이 사는 골짜기란 의미. 범천동(凡川洞)
이 동네와 통일교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속으로 한 말이 있지만 적을 순 없다.
선암사가 있는 백양산, 그 아래 즐비한 아파트들. 오른편으로 금정산이 보인다.
산중턱에 우뚝 솟은 건물, 동의대학교 건물이다. 그럼 저 넘어는 주례란 말인가?
범내골, 서면 방향이겠다. 저 동네와 이곳은 별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