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ason
육바라밀(六波羅密)
육바라밀(六波羅密)에서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의 'paramita'를 발음 그대로 옮긴 것으로 그 의미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처음에는 도피안(到彼岸)의 뜻으로
'피안에 이른다'와 도(度)의 뜻으로 '구제한다'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번역되었지만,
최근에는 '성취' '최상' '완성'이라는 의미로 많이 번역된다.
바라밀행(波羅蜜行), 그리고 무아(無我)를 실천하는 길은
나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존재인 보살의 삶의 방식이다.
즉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팔정도의 개인적 수행법의 차원에서
사회적 책임까지도 강조하는 의미를 포함한 육바라밀이 보살의 수행법이 된다.
무아를 실천하는 길이다.
바라밀은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6가지로
보살의 수행 실천덕목이다.
(1)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dana-paramita)은
자기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아함의 교설에서도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로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보시는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시여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 "보살은 마땅히 법에 주(住)함이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주함이 없이 베풀어주어야 한다."고 설해져 있다.
베풀어주어도 준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보시에는 "세 가지가 청정하나니,
주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주는 물건(施物)의 셋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품반야 권 7>
(2)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sala-paramita)은
계율을 잘 지니는 것을 뜻한다.
국가에는 법률이 있고 사회에는 도덕이 있다.
불교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로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오계가 있고,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각각 250계, 348계라는 구족계(具足戒)가 있다.
지계바라밀은 이러한 법과 계율들을 잘 지키는 것인데,
이때도 계율을 지킨다는 부담감이나 자만심이 있어서는 안된다.
죄(罪)와 부죄(不罪)를 얻을 수가 없는 불가득의 공관에서
자연스럽고 자율적인 준법 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품반야 권 1>
(3)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ksanti-paramita)은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安受苦忍 안수고인)이다.
우리는 조금만 욕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곧 좌절되기 쉽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경우에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이니,
제법(諸法)이 본래 불생(不生)임을 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전생담을 설하고 계신다.
"옛날 가리(Kaling-a)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잘랐을 때
만일 내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진한(瞋恨)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러한 상이 없었느니라."
(4)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virya-paramita)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법을 증장시키는 데에 있어 정진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아함교설의 여러 가지 행법(三十七助道品 삼십칠조도품)에는
정진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임하였을 때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 방일하지 말라.
불방일로써 나는 정각에 이르렀으며 무량한 선을 낳은 것도 불방일이니라."고
유촉하고 계신다.
공관(空觀)의 실천을 무사안일에 빠지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5)선정바라밀(禪靜波羅密dhyana-paramita)에서
선(禪)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靜盧정려)을 뜻한다.
신(god)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불교처럼 존재의 실상을 밝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무지를 타파하려는 종교에서
선은 특히 중요한 행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원시불교에서도 사선(四禪)의 행법이 설해져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도 육바라밀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머무름이 없는 법(不住法) 속에서 행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6)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prajna-paramita)에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바라밀은 보시에서 선정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의 주도자이며 그들의 성립 기반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섯 바라밀은 모두가 반야공관의 입장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지에 씨앗을 뿌리면 인연 화합하여 생장이 있게 되는데,
이때 땅을 의지하지 않고는 생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속에 머물러 증장함을 얻는다.
<소품반야 권2>
간심(인색함)·범계심(犯戒心)·진심(瞋心)·해태심(懈怠心)·산란심(散亂心)·무지심(無智心)이 있을 때
큰 자비(maitri-karuna)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의 공에 상응하는 까닭에
능히 대자대비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대품반야 권 1>
반야바라밀다는 이렇게 모든 분별 방념을 초월하여 말할 수 없이 청정한 것이며,
모든 선법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며,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할 때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놀람이 없고 거꾸로 생각을 멀리 떠나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고 반야심경은 설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가 무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도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다.
<반야심경> 소승불교의 출세간적인 종교적 행위는
대승불교의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지극히 적극적인
종교적 행위로 지양된 것을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