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기념성당'도 있다는데인권과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광주 북동성당과 남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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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으로 만든 순교자의 기도상. 순교자 기념 성당인 나주성당에 설치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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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곳이 절집이다. 산중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절집은 분위기가 고즈넉해서 좋다. 오랜 전통의 문화재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아름다운 계곡도 끼고 있다. 하여, 절집은 사철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에 속한다.
성탄의 아침. 코로나19 탓에 어느 해보다 조용하게 맞이한 성탄이다. 모처럼 성당에 관심을 가져본다. 불교의 유구한 역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의미 깊은 성당이 주변에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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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백 숲이 아름다운 광주대교구청. 오래 된 캠퍼스답게 사철 아름다운 숲으로 시민들을 불러 모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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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는 옛 광주가톨릭대학 건물을 쓰고 있는 광주대교구청을 먼저 꼽을 수 있다. 1962년에 건립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다. 오래된 캠퍼스답게, 편백과 목백합나무 어우러진 숲이 사철 아름다운 곳이다.
그 풍경으로 시민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산책과 운동을 목적으로 인근지역 주민들도 즐겨 찾는 대교구청이다. 하지만 지금은 계속 확산하는 코로나19 탓에 문을 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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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북동성당 전경. 광주천주교 선교의 태 자리이면서 광주 천주교 신자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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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주교의 역사는 북동성당과 남동성당이 더 깊다. 시민들과도 더 친근하다. 북동성당은 1938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광주천주교 선교의 태 자리이다. 광주 천주교 신자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다.
한국농민운동사의 큰 획을 그었던 함평고구마 사건과도 엮이는 북동성당이다. 당시 피해 농민들이 농성 20개월 만에 보상을 받아내는 데, 성당과 신자들이 큰 힘을 보탰다.
80년대에 5·18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항거가 줄을 잇는다. 전남도청의 시민군이 계엄군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사흘 뒤, 5월 30일 서울시내에서 광주학살을 알리는 전단을 뿌리며 온몸을 던진 젊은이가 있었다. 당시 서강대 학생 김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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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시내 구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북동성당. 한국농민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함평고구마 사건과도 엮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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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5월묘지에 잠들어 있는 김의기 열사. 80년대 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에 불을 댕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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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열사하고도 엮이는 곳이 북동성당이다. 김의기 열사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서강대에 다니던 김의기는 80년 5월 19일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인 함평 고구마 농민투쟁 승리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하루 전날인 18일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다. 광주의 상황을 직접 보고 분노하면서 24일 어쩔 수 없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사흘 뒤인 5월 30일 김의기는 서울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학살을 알리는 전단을 뿌리며 온몸을 던진다. 5월 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에 불을 댕겼다.
2017년 3월엔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후 진도 팽목항에 들렀다가 광주로 와서 미사에 참석했던 성당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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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남동성당 전경. 5월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를 이어오면서 ‘5·18기념성당’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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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동성당은 5월항쟁 직후부터 희생자와 구속자를 위한 월요미사와 5·18추도 미사를 봉헌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사진은 81년 1주기 추모 미사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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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성당은 5·18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성당이다. 80년 5.18 항쟁 때 당시 남동성당의 김성용 주임신부가 광주를 탈출해서 서울로 올라가 광주의 실상을 알렸다. 5·18 당시 수습대책을 논의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남동성당은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5월 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를 이어오면서 '5·18 기념성당'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남동성당은 1949년 12월 들어섰다. 지리적으로 전남도청과도 가까워 5·18의 한가운데에 섰다. 5·18 이전부터 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거리 행진 등을 함께했다.
5·18 기간엔 지역의 인사와 성직자들이 만나서 대책을 협의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천주교 인사들과 홍남순 변호사 등이 전투교육사령부를 방문해 협의한 결과를 놓고 대책을 논의했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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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동성당 앞에 세워진 5·18사적지 표지석. 성당의 정문 왼쪽에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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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성당의 진가는 5월 항쟁 이후에 더욱 빛났다. 5월 항쟁 직후인 7월부터 희생자와 구속자를 위한 월요미사를 열었다. 해마다 5·18추도 미사를 봉헌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항쟁의 의미도 되새기고 있다. 82년엔 옥중 단식으로 사망한 박관현 열사의 장례 빈소를 성당에 차렸다. 이른바 '광주비디오'를 상영하며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도 앞장섰다.
87년 6월 항쟁을 이끈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 결성식도 남동성당에서 했다. 5월 항쟁과 이후 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선 남동성당이다. 남동성당은 5·18사적지 25호로 지정돼 있다. 사적지 표지석이 정문 왼쪽에 세워져 있다.
광주의 성당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면서 비장함이 묻어난다. 불의에 맞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도 그랬다. 나라의 민주와 인권, 평화에 큰 역할을 했다. 반면 전라남도의 성당은 순교자와 엮이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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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상징인 석탑과 어우러진 곡성성당. 종교의 차이를 떠나 모두와 함께 하는 성당이란 이미지를 심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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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있었던 정해박해의 진원지에 들어선 곡성성당이 먼저 꼽힌다. 을해박해를 피해 곡성으로 숨어든 신자들이 옹기를 빚으며 살고 있었다. 여기서 일어난 사소한 다툼을 빌미로 천주교인 검거 선풍이 일어난다. 곡성에서 전라도, 경상도·충청도와 서울까지 검거 바람이 몰아친다.
이때 천주교인들을 잡아 가둔 감옥 자리에 들어선 성당이 곡성성당이다. 감옥 자리에 들어선 성당이라고 '옥터 성지'라고 부른다. 성당은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섰다. 성당 안에 어린 양이 새겨진 십자가와 예수님의 갈비뼈를 형상화한 벽이 눈길을 끈다.
성당 뒤쪽에 옛 감옥과 형틀도 복원돼 있다. 성당의 뒷마당에 불교의 상징인 석탑도 세워져 있다. 종교의 차이를 떠나서 모두와 함께하는 성당이란 이미지를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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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성당의 순교 기념문. 4개의 칼 모양이 순교자 4명을 가리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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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성당에 복원돼 있는 한국 까리따스 수녀회의 첫 본원. 나주성당이 한국 까리다스 수녀회의 태 자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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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성당의 느티나무에는 절집에서 흔히 보이는 작은 종, 풍경이 걸려 있다. 영광성당은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화백 등 4명을 기리는 순교자 기념성당이다. 순교기념문이 4개의 칼 모양을 하고 있다.
나주성당도 순교자 기념성당이다. 병인박해 때 나주감옥에 갇혔다가 무학당에서 순교한 3명을 기리고 있다. 당시 무학당의 주춧돌을 그대로 활용해서 기념조형물의 주춧돌과 전시물로 썼다.
본당에 빈 무덤 형태의 순교자 기념 경당이 만들어져 있다. 청동으로 만든 순교자의 기도상도 설치돼 있다. 한국 까리따스 수녀회의 첫 본원도 복원돼 있다. 여기가 수녀회의 태 자리이다.
노안성당도 나주에서 빼놓을 수 없다. 나주지역 최초의 천주교회이다. 옛 성당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00년이 넘은 역사와 건축학적 가치까지 인정받아 건축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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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노안성당 전경. 옛 성당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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