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壬午일
편인 태지, 상관 록지. 지살.
처음 겪는 영해의 여름, 그 진면목이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늘 한 점 없는 거리에 건조하고 쨍한 햇볕이 작렬한다.
5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등줄기로 땀이 쪼르르 흐른다.
필터링 되지 않은 순수 자외선이 전신에 꽂힌다.
오후 5시를 넘어가자 서릿발 같던 햇살이 살짝 부드러워졌고 곧바로 행장을 차려 또 나섰다.
대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거리엔 오가는 사람도 퍽 줄었다. 나에겐 감사한 일.
대진가는 외줄기 길에서 첫 번째 삼거리를 타고 올라가면 관어대 가는 길.
하지만 상대산 정상에 있는 정자, 관어대로 가는 급오르막 데크길은 오늘도 패스다.
길들은 모두 이웃사촌. 좀 돌아가거나 질러가거나 모두 통하게 마련이다.
통하지 않으면 빽하면 그만. 목적에도 시간에도 쫓기지 않는데, 제로 셋팅해서 못 돌아나올 이유가 없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뭘 하든 시행착오는 여전하지만 나를 채근하거나 질책하지 않으니 삶이 그저 가볍다.
관대길 고개를 쭉 따라가다보면 내리막에서 훅 장면 전환이 일어난다.
하양, 빨강 두 개의 등대가 반겨주는 대진2리의 바다가 찻잔처럼 찰랑이는 풍경이라니...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 한 컷 같다.
대진항으로 내려와 빨간 등대를 향해 방파제 길을 걷는다.
주말 휴일엔 각자 포지션을 정하고 낚싯대를 드리운 꾼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눈에 띄는 건 분리대에 붙어있는 경고팻말 ‘넘어가지 마시요’... 오타다.
지적질 하던 습성이 아직도 남았나보다.
참고로 ‘넘어가지 마시요’는 ‘넘어가지 마시오’가 맞는 표기다.
‘~요’는 연결어미, 종결어미는 ‘~오’다.
등대 방파제 옆 바위 위엔 전각이 하나 서있다.
별 생각 없이 올라섰는데 이런.. 바로 옆 방파제 끝에서 본 바다와는 완연 다른
짙푸르게 멍든 거친 물구비가 암초에 부딪쳐 소용돌이치며 용울음을 운다.
거칠게 출렁이는 파도가 슬프고 아프고 애달프다.
‘여긴 뭐지’ 하며 살펴보니 비석이 보인다.
1914년 차디찬 동짓달 새벽, 벽산 김도현이란 선비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시퍼런 바다 속으로 사라졌단다.
그래서 이 거친 물결이 그리 아프고 시렸나보다... 등골이 찌르르 했다.
추모단을 내려와 좀 더 걸으면 대일회식당이 나온다.
지금도 누군가에겐 그리움이고, 누군가에겐 징그런 시간, 누군가에겐 손 아픈 기억일지 모를,
망한 식당의 전형, '바다오형제 식당'이 있던 자리다.
개업 전 매주 오형제가 직접 칠한 흰색 건물. 삼겹살 구워먹었다던 2층 좁은 베란다도 그대로다.
그 2층에서 바라본 대진 바다가 그리 좋았다.
국물 대신 얼음을 곱게 갈아 올린 눈꽃 물회도 특출했다. 빙수 같은 얼음이 녹으면 거기 밥 말아먹는 것도 별미였다.
한번 맛본 것이 서울에서도 간간히 생각나곤 했다.
눈꽃 물회와 함께 초밥에 튀김, 또띠아까지 힘준 에피타이저로 차별화를 삼았던, 너무 앞서간 식당.
결국 다음해 여름을 기약하지 못하고 기억 속에서나 소환해낼 전설의 맛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 길 건너 가로등, 방파제 앞에 놓인 벤치도 그대로인데...
한 시절 함께 어깨 걸고 먹고살 길 열어보자 했던 형제들은 뿔뿔이 다 흩어졌다.
시간은 지나갔고 추억은 다르게 읽히고 저장된다. 각자의 일용할 양식, 몫이 되었다.
속 시린 ‘바다오형제’ 자리를 떠나 걸어 내려오면 곧 대진해수욕장 백사장으로 이어진다.
고운 모래가 서걱서걱 운동화를 다 채우도록 해변을 걸어서 도보와 자전거 전용도로로 올라서니 또 해가 저문다.
여기서부터 우리 마을까지 이어진 길 위에서 해는 완전히 묘지에 들고, 그 자리에 놀이 번지고...
결국 어둠에 잠식되는 전 과정이 천천히 진행된다.
지상의 어떤 화가도 그려낼 수 없는 매일 다른 풍경화가 펼쳐진다.
블루로드도 끝나고 논두렁 길이 완전히 어두워져 먼 인가의 불빛만 의지해야할 때 왈칵 두려움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매일 저녁 다르게 상영되는 이 퍼포먼스를 포기하기 힘들다.
영해에 살며 매일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선물상자를 받는 기분...
오늘도 2시간 10.87킬로미터를 걸으며 이번 생이 행복하다 난생처음 말해보았다.
첫댓글 2시간을 함께 걸은 듯 해요~ㅎㅎ
바다 오형제의 짧지만 강렬했던 역사?도 모두모두 너무 생생하게 전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