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意成身(manomaya-kāya)이란 색계를 가리킨다.
♦ 198. “etadaggaṃ, bhikkhave, mama sāvakānaṃ bhikkhūnaṃ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inantānaṃ yadidaṃ cūḷapanthako” .
2-1. “비구들이여, 마음으로 만들어진 몸을 창조하는 나의 비구제자들 가운데서
쭐라빤타까88)가 으뜸이다.”
88) 쭐라빤타까(Culla-Panthaka) 존자는 라자가하의 부유한 상인의 딸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하인과 눈이 맞아서 라자가하를 도망 나가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형은 마하빤타까라 불린다. 두 형제는 길(pantha)에서 태어났기 때문에(jātattā) 빤타까(Panthaka)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와 하인이 도망 다니면서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후에 형과 함께 외갓집으로 보내져서 양육되었다. 그의 형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을 뵈러 다녔기 때문에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도 형의 권유로 출가하여 형이 준 게송(A.iii.239)을 넉 달이나 외웠지만 외울 수 없었다. 그는 승단에서 바보 빤타까로 알려질 정도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천 조각을 주시면서 '먼지 닦기(rajo-haraṇa), 먼지 닦기'라고 반복해서 외우라 하셨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무애해와 육신통을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왜 마음으로 만들어진 몸을 창조하는 자(manomayaṃ kāyaṃ abhinimminanta)들 가운데서 으뜸인지는 『청정도론』 XII장 SS60~67에 잘 나타나 있다.
♦ atha kho uggo gahapati vesāliko aparena samayena kālamakāsi.
kālaṅkato ca uggo gahapati vesāliko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jji.
그 후에 웨살리에 사는 욱가 장자는 임종을 하였다.
웨살리의 욱가장자는 임종을 하여 어떤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94)을 받았다.
94) “禪의 마음(jhāna-mano, 禪에 든 마음)으로 정거천(Suddhāvāsa) 가운데 한 곳에 태어났다는 뜻이다.”(AA.iii.254)
♦ 100.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kosambiyaṃ viharati ghositārāme.
tena kho pana samayena kakudho nāma koliyaputto āyasmato mahāmoggallānassa upaṭṭhāko
adhunākālaṅkato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o.
tassa evarūpo attabhāvapaṭilābho hoti —
seyyathāpi nāma dve vā tīṇi vā māgadhakāni gāmakkhettāni.
so tena attabhāvapaṭilābhena neva attānaṃ no paraṃ byābādheti.
1. 한때 세존께서는 고삼비에서 고시따 원림193)에 머무셨다.
그 무렵에 마하목갈라나 존자194)의 시자였던 꼴리야의 아들 까꾸다195)가
바로 그때 임종하여 마음으로 만든 몸196)을 얻었다.
그는 두세 개의 마가다의 마을과 들판에 해당하는 몸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과 남에게 해를 초래하진 않았다.
193) 꼬삼비(Kosambi)와 고시따 원림(Ghositārāma)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깜보자 경」 (A4:80)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194)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존자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하나의 모음」(A1:14:1-3)의 주해를 참조할 것.
195) 꼴리야의 아들 까꾸다(Kakudha Koliyaputta)는 본경에 나타나듯이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시자였으며 죽어서 범천에 태어났다. 『상윳따 니까야』 「까꾸다 경」(S2:18)도 까꾸다와 세존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석서에 의하면(SA.i.112) 그도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시자였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본경의 까꾸다와 일치한다. 한편 본경의 내용은 율장 소품(Vin.ii.185)에도 나타나고 있다.
196)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에는 '마음으로 만든 몸(manomaya kāya)'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상윳따 니까야』 「까꾸다 경」 (S2:18)에 해당하는 주석서에서 까꾸다는 죽어서 범천의 세상(brahmaloka)에 태어나서 거기서도 까꾸다 범천(brahmā)이라고 불리었다고 적고 있으므로(SA.i.112) 범천의 몸을 뜻한다고 하겠다.
no ce diṭṭheva dhamme aññaṃ ārādheyya,
atikkammeva kabaḷīkārāhārabhakkh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o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eyyāpi vuṭṭhaheyyāpi — atthetaṃ ṭhānan”ti.
만일 지금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면310)
욕계 신들311)의 동료가 되는 것을 뛰어넘어 어떤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312)을 얻어
상수멸에 들 수도 있고 출정할 수도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310) “만약 지금 이 몸에서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다면 이라는 뜻이다.”(AA.iii.298)
311) '욕계 신들로 의역을 한 원문은 kabaḷīkārāhāra-bhakkhā devā의 역어인데 직역하면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신들'이라는 뜻으로 욕계 신들(kāmāvacara-devā)을 말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의역을 하였다. (Ibid)
312) “여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manomaya kāya)이란 禪의 마음으로 만들어 낸 정거천의 범천의 몸(suddhāvāsa-brahmakāya)을 뜻한다.”(Ibid)
♦ atha kho bhagavā āyasmantaṃ udāyiṃ āmantesi —
“kaṃ pana tvaṃ, udāyi, manomayaṃ kāyaṃ paccesī”ti?
“ye te, bhante, devā arūpino saññāmayā”ti.
그때 세존께서는 우다이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우다이여, 그대는 누가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세존이시여, 인식으로 이루어진 무색계의 신들입니다.”
“kiṃ nu kho tuyhaṃ, udāyi, bālassa abyattassa bhaṇitena!
tvampi nāma bhaṇitabbaṃ maññasī”ti!
“우다이여, 그대 같이 어리석고 불분명한 사람의 말이 뭐 필요하겠는가?
그대가 발언할 만하다고 생각하는가?”
atha kho bhagavā āyasmantaṃ ānandaṃ āmantesi —
“atthi nāma, ānanda, theraṃ bhikkhuṃ vihesiyamānaṃ ajjhupekkhissatha .
na hi nāma, ānanda, kāruññampi bhavissati theramhi bhikkhumhi vihesiyamānamhī”ti.
5. 그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그대는 난처해진 장로 비구에 대해서 이토록 무관심하게 대해도 되는가?
아난다여, 난처해진 장로 비구로부터 [도반들에 대한] 연민이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 “mama saṅkappamaññāya, satthā loke anuttaro.
♦ manomayena kāyena, iddhiyā upasaṅkami.
♦ “yathā me ahu saṅkappo, tato uttari desayi.
33. “세상의 위없는 스승께서는
나의 사유를 잘 아신 뒤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신통으로써 내게 다가오셔서
나의 사유와 그것을 넘어선
[여덟 번째 사유를] 말씀하셨도다.
♦ “hoti so, bhikkhave, samayo yaṃ ayaṃ loko saṃvaṭṭati.
saṃvaṭṭamāne, bhikkhav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saṃvattanikā bhavanti.
te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e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nti.
saṃvaṭṭamāne, bhikkhave, loke ābhassarā devā aggamakkhāyanti.
ābhassarānampi kho, bhikkhave, devānaṃ attheva aññathattaṃ atthi vipariṇāmo.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tasmimpi nibbindati .
tasmiṃ nibbindanto agge virajjati, pageva hīnasmiṃ.
3 “비구들이여, 세상이 수축하는 그런 때가 온다.
세상이 수축할 때 대부분의91) 중생들은 광음천92)에 나게 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93)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오랜 세월 산다.
비구들이여, 세상이 수축할 때 광음천의 신들은 최고라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이러한 광음천의 신들에게도 변화가 있고 죽음이 있다.
이와 같이 보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에 대해 염오한다.
그것을 염오하면서 최고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나니 하물며 저열한 것에 대해서이랴.”
91) “'대부분의(yebhuyyena)'라는 것은 범천보다 위의 세상(upari-brahma-loka)이나 무색계(arūpa)에 태어난 자들을 제외한 신들을 두고 한 말이다.”(DA.i.110)
92) '광음천(Ābhassarā)'은 색계 2선천(二禪天)의 세 번째 천상이다. 광음천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다른 점 경」 1(A4:123)의 주해를 참조할 것.
93) “'마음으로 이루어진(manomayā)'이란 禪의 힘으로 그곳에 태어난다는 말이다.”(Ibid)
♦ “puna caparaṃ tvaṃ, nandiya, devatā anussareyyāsi —
‘yā devatā atikkammeva kabaḷīkārāhārabhakkhānaṃ devatānaṃ sahabyataṃ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ā,
tā karaṇīyaṃ attano na samanupassanti katassa vā paticayaṃ.
8 “다시 난디야여, 그대는 다음과 같이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덩어리 음식을 먹는 신들의 동료를 넘어서서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다시 태어난 신들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한 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보지 못한다.
♦ 39. “hoti kho so, bhikkhave,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saṃvaṭṭati.
saṃ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saṃvattanikā honti.
te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nti.
2.2. “비구들이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수축한다.
세상이 수축할 때 대부분의97) 중생들은 광음천98)에 나게 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99)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긴 세월을 산다.”
97) “대부분의(yebhuyyena)라는 것은 범천보다 위의 세상(uparibrahmaloka)이나 무색계(arūpa)에 태어난 자들을 제외한 신들을 두고 한 말이다.”(DA.i.110) 주석서(DA.i.380 등)에서는 禪을 닦아서 도달하는 색계와 무색계를 범천의 세상(brahma-loka)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수승한 신들은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98) 광음천(Ābhassarā)은 색계 2선천(二禪天)의 세 번째 천상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6의 해설 1과 본서 제2권「대인연경」(D15) §33의 주해를 참조할 것.
99) “禪에 든 마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루어졌다(manomaya)고 한다.” (DA.i.110)
♦ 40. “hoti kho so, bhikkhave,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vivaṭṭati.
vivaṭṭamāne loke suññaṃ brahmavimānaṃ pātubhavati.
atha kho aññataro satto āyukkhayā vā puññakkhayā vā ābhassarakāyā cavitvā
suññaṃ brahmavimānaṃ upapajjati.
so tattha hoti manomayo pītibhakkho sayaṃpabho antalikkhacaro subhaṭṭhāyī,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ti.
2.3. “비구들이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다시] 팽창한다.
세상이 팽창할 때 텅 빈 범천의 궁전100)이 출현한다.
그때 어떤 중생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텅 빈 범천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도 역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긴 세월을 살게 된다.”
100) “텅 빈(suñña) 범천의 궁전(brahmavimāna)이란 아직 태어난 중생들이 아무도 없는 자연적(pakati)으로 생긴 곳이기 때문에 텅 빈 범중천(brahmakāyika)의 세상(bhūmi)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곳을 만들었기나 만들게 한 자는 아무도 없다. 『청정도론』 (XX.29)에서 설명한 대로 업을 조건한 온도에서 생긴 보배로 된 곳(ratana-bhūmi)이다.”(DA.i.110) 즉 이 범천의 궁전은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업을 조건한 온도에서 생긴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업, 마음, 온도, 영양분에서 생긴다고 한다.(『아비담마 길라잡이』 6장 §§9~13을 참조할 것.)
♦ 41. “tassa tattha ekakassa dīgharattaṃ nivusitattā anabhirati paritassanā upapajjati —
‘aho vata aññepi sattā itthattaṃ āgaccheyyun’ti.
atha aññepi sattā āyukkhayā vā puññakkhayā vā ābhassarakāyā cavitvā
brahmavimānaṃ upapajjanti tassa sattassa sahabyataṃ.
tepi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nti.
2.4.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싫증과 초조함101)이 생겨,
‘오, 다른 중생들이 여기에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갈망하였다].
그러자 다른 중생들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해서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
범천의 궁전에 태어나 그 중생의 동료가 되었다.
그들도 역시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긴 세월을 살게 된다.”
101) “초조함(paritassana)이란 혼란스러움과 안절부절 못함을 뜻한다. 이것은 네 가지가 있다. 초조함에 의한 초조함, 갈애에 의한 초조함, 사견(邪見)에 의한 초조함, 지혜에 의한 초조함이다. … 여기서는 갈애에 의한 초조함과 사견에 의한 초조함을 말한다.” (DA.i.111)
♦ 42. “tatra, bhikkhave, yo so satto paṭhamaṃ upapanno tassa evaṃ hoti —
‘ahamasm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ṃ.
mayā ime sattā nimmitā. taṃ kissa hetu? mamañhi pubbe etadahosi —
“aho vata aññepi sattā itthattaṃ āgaccheyyun”ti.
iti mama ca manopaṇidhi, ime ca sattā itthattaṃ āgatā’ti.
2.5. “비구들이여, 그러자 그곳에 먼저 태어난 중생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102)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 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나야말로 이 중생들의 창조자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전에 내게 '오, 다른 중생들이 여기에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러한 내 마음의 염원 때문에 이 중생들이 여기에 생겨났기 때문이다.'103)
102) 원문은 tassa evaṃ hoti로 직역하면 '그에게 이러한 것이 있었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뽓타빠다 경」 (D9)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103) 여기서 보다시피 창조자라는 것은 그곳에 먼저 태어나서 혼자됨에 싫증이 나고 초조하던 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다.
♦ “yepi te sattā pacchā upapannā, tesampi evaṃ hoti —
‘ayaṃ kho bhavaṃ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ṃ.
iminā mayaṃ bhotā brahmunā nimmitā. taṃ kissa hetu?
imañhi mayaṃ addasāma idha paṭhamaṃ upapannaṃ, mayaṃ panamha pacchā upapannā’ti.
뒤에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존자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 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시다.
이 존귀하신 범천이야말로 우리들의 창조자이시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는 이분이 여기에 먼저 계신 것을 보았고 우리는 후에 생겨났기 때문이다.'라고”
♦ 43. “tatra, bhikkhave, yo so satto paṭhamaṃ upapanno,
so dīghāyukataro ca hoti vaṇṇavantataro ca mahesakkhataro ca.
ye pana te sattā pacchā upapannā, te appāyukatarā ca honti dubbaṇṇatarā ca appesakkhatarā ca.
2.6. “비구들이여, 거기서 먼저 태어난 그 중생은 수명이 더 길고 더 아름답고 더 힘이 세었으며
뒤에 태어난 중생들은 수명이 더 짧았고 더 못생겼으며 더 힘이 약하였다.
♦ 44. “ṭhānaṃ kho panetaṃ, bhikkhave, vijjati,
yaṃ aññataro satto tamhā kāyā cavitvā itthattaṃ āgacchati.
itthattaṃ āgato samāno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ati.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ito samāno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ti, tato paraṃ nānussarati.
비구들이여, 그런데 그 중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죽어서 이곳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태어나서는 집을 떠나 출가한다.
집을 떠나 출가하여 애를 쓰고 노력하고 몰두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닦아서
마음이 삼매에 들어 바로 그 전생의 삶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한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104)
104) 앞의 영속론자들보다 삼매의 힘으로 기억하는 정도가 현저하게 떨어져서단지 한 생 앞만 기억하고 있다.
♦ “so evamāha — ‘yo kho so bhavaṃ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vasī pitā bhūtabhabyānaṃ,
yena mayaṃ bhotā brahmunā nimmitā,
so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ti.
ye pana mayaṃ ahumhā tena bhotā brahmunā nimmitā,
te mayaṃ aniccā addhuvā appāyukā cavanadhammā itthattaṃ āgatā’ti.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존자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시다.
이 존귀하신 범천이 우리들의 창조자이시다.
그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마련이며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그렇게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 존자 범천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런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수명이 짧고 죽기 마련이며 이곳에 태어났다.'라고.
idaṃ kho, bhikkhave, paṭhamaṃ ṭhānaṃ,
yaṃ āgamma yaṃ ārabbha eke samaṇabrāhmaṇā ekaccasassatikā ekaccāsassatikā
ekaccaṃ sassataṃ ekaccaṃ asassataṃ attānañca lokañca paññapenti.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일부영속 일부비영속을 설하는자가 되어
자아와 세상이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다고 천명한다.”
♦ 87. “tamañño evamāha — ‘atthi kho, bho, eso attā, yaṃ tvaṃ vadesi, neso natthīti vadāmi;
no ca kho, bho, ayaṃ attā ettāvatā sammā samucchinno hoti.
atthi kho, bho, añño attā dibbo rūpī manomayo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taṃ tvaṃ na jānāsi na passasi. tamahaṃ jānāmi passāmi.
so kho, bho, attā yato kāyassa bhedā ucchijjati vinassati, na hoti paraṃ maraṇā,
ettāvatā kho, bho, ayaṃ attā sammā samucchinno hotī’ti.
ittheke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apenti.
3.12. “③ 이것을 두고 다른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참으로 존재합니다. 나는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대가 설한] 자아가 실로 그렇게 철저하게 단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자여, 참으로 다른 자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천상에 있고 형상을 가졌고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졌으며 감각기능[根]이 구족합니다.150)
그것을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바로 이런 자아야말로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고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자여, 이런 까닭에 이 자아는 실로 철저하게 단멸합니다.'라고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중생의 단과 파멸과 없어짐을 천명한다."
150) “마음으로 이루어졌고(manomaya)라는 것은 禪의 마음(jhāna-mano)에 의해서 태어났음을 뜻한다. 범천의 세상에 존재하는 자들과 다른 경지 즉 [색계 천상]에 있는 자를 두고 한 말이다.” (Ibid) 이것은 색계 천상에 태어난 중생들이 색계 천상에서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는 견해를 가지는 경우이다.
♦ 88. “tamañño evamāha — ‘atthi kho, bho, eso attā, yaṃ tvaṃ vadesi, neso natthīti vadāmi;
no ca kho, bho, ayaṃ attā ettāvatā sammā samucchinno hoti.
atthi kho, bho, añño attā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ūpago.
taṃ tvaṃ na jānāsi na passasi. tamahaṃ jānāmi passāmi.
so kho, bho, attā yato kāyassa bhedā ucchijjati vinassati, na hoti paraṃ maraṇā,
ettāvatā kho, bho, ayaṃ attā sammā samucchinno hotī’ti.
ittheke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apenti.
3.13. “④ 이것을 두고 다른 사람은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참으로 존재합니다. 나는 그것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대가 설한] 자아가 실로 그렇게 철저하게 단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자여, 참으로 다른 자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151)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공무변처(空無邊處)152)를 얻은 자의 자아입니다.
그것을 그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바로 이런 자아야말로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고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자여, 이런 까닭에 이 자아는 실로 철저하게 단멸합니다.'라고,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중생의 단멸과 파멸과 없어짐을 천명한다."
151) 부딪힘의 인식에서 부딪힘으로 옮긴 paṭigha는 보통 '적의' 혹은 '적대감'으로 옮기는 술어이다. 그러나 이 공무변처의 문맥에서 나타날 때는 prati(대하여)+√han(to strike, to kill)이라는 어원에 입각해서 '부딪힘'으로 옮긴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부딪힘 즉 접촉이 있지만 물질이 제거되면 부딪힘 즉 접촉도 없기 때문이다. 냐나몰리 스님도 『청정도론』에서 'sensory impingement' 로 옮기고 있다.
152) 이하 공부변처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사처(四處)에 대한 설명은『아비담마 길라잡이』 1 장 §22와 9장 §12에 정리되어 있으며 이것을 증득하는 방법은 『청정도론』 X장에 상세하게 나타난다.
♦ manomayiddhiñāṇaṃ (DN 2) 마음으로 만든 신통의 지혜(manomayiddhi-ñāṇa)
♦ 236.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ā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85.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음으로 만든 몸253)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so imamhā kāyā aññaṃ kāyaṃ abhinimmināti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그는 이 몸으로부터 형상을 가지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냅니다.”
253)『청정도론, XII.25에서는 “[자기의] 몸 안에서 마음으로 만든 [다른] 몸을 생기게 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드는(manomaya) 신통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청정도론』 XII.135에서는 이 정형구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결의하는 마음『청정도론』 XI.57 이하 참조)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이것은 눈, 귀 등의 형상으로 설했다. 그러나 창조된 형상에 감성(感性, 『아비담마 길라잡이』 6장 83의 해설 2 참조)은 없다.”
♦ 237. “seyyathāpi, mahārāja, puriso muñjamhā īsikaṃ pavāheyya .
tassa evamassa — ‘ayaṃ muñjo, ayaṃ īsikā, añño muñjo, aññā īsikā,
muñjamhā tveva īsikā pavāḷhā’ti .
seyyathā vā pana, mahārāja, puriso asiṃ kosiyā pavāheyya.
tassa evamassa — ‘ayaṃ asi, ayaṃ kosi, añño asi, aññā kosi, kosiyā tveva asi pavāḷho”ti.
seyyathā vā pana, mahārāja, puriso ahiṃ karaṇḍā uddhareyya.
tassa evamassa —
‘ayaṃ ahi, ayaṃ karaṇḍo. añño ahi, añño karaṇḍo, karaṇḍā tveva ahi ubbhato’ti .
6. “대왕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문자 풀로부터 갈대를 골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 풀이고 이것은 갈대이다. 문자 풀과 갈대는 다르다.
문자 풀로부터 갈대가 제거되었다.'라고.
대왕이여, 다시 예를 들면 사람이 칼을 칼집에서 끄집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칼이고 이것은 칼집이다. 칼과 칼집은 다르다.
칼집으로부터 칼은 끄집어내졌다.'라고.
대왕이여, 다시 예를 들면 사람이 뱀을 개미집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개미집이다. 뱀과 개미집은 다르다.
개미집으로부터 뱀은 끄집어내졌다.'라고.
evameva kho, mahārāja, bhikkhu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ā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so imamhā kāyā aññaṃ kāyaṃ abhinimmināti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형상을 가지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냅니다.
idampi kho, mahārāja, sandiṭṭhikaṃ sāmaññaphalaṃ
purimehi sandiṭṭhikehi sāmaññaphalehi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대왕이여, 이것 역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이니 앞에서 설명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들보다 더 뛰어나고 더 수승한 것입니다.”
♦ 418. “manomayaṃ kho ahaṃ, bhante, attānaṃ paccemi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n”ti.
22. “세존이시여, 저는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것을 자아라고 이해합니다.511)
511) 여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진이란 禪의 마음(jhānamanaso)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DAȚ.i.488) 그러므로 이것은 초선부터 4선까지의 색계선의 경지이다. 이것은 본서 「사문과경」 (D2) §85의 마음으로 만든 몸(manomayakāya)'의 정형구와 같다.
“manomayo ca hi te, poṭṭhapāda, attā abhavissa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evaṃ santampi kho te, poṭṭhapāda, aññāva saññā bhavissati añño attā.
tadamināpetaṃ, poṭṭhapāda,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aññāva saññā bhavissati añño attā.
tiṭṭhateva sāyaṃ, poṭṭhapāda, manomayo attā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atha imassa purisassa aññā ca saññā uppajjanti, aññā ca saññā nirujjhanti.
imināpi kho etaṃ, poṭṭhapāda,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aññāva saññā bhavissati añño attā”ti.
“뽓타빠다여, 그대가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것을 자아라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그대에게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를 것이다.
뽓타빠다여, 그런 방식에 의한다면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나니,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서 이 결여되지 않은
자아가 머물러 있는데도
이 사람에게는 그것과는 다른 인식이 생기고 그것과는 다른 인식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뽓타빠다여,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는 '인식과 자아는 서로 다르게 되고 만다.'고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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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yo attapaṭilābhā (DN 9) 세 가지 자아의 획득
♦ 428. “tayo kho me,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ā —
oḷāriko attapaṭilābho,
manomayo attapaṭilābho,
arūpo attapaṭilābho.
30. “뽓타빠다여, 나는 세 가지 자아의 획득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① 거친 자아의 획득
②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
③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이다.533)
533) “① 거친 자아의 획득이란 무간지옥에서부터 타화자재천에 이르는 욕계의 존재를 보여 주신 것이다. ②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란 초선의 경지[초선천]로부터 시작해서 색구경천의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색계의 존재를 보여 주신 것이다. ③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이란 공무변처의 범천의 세상에서부터 비상비비상처의 범천의 세상까지 무색계의 존재를 보여 주신 것이다.”(DA.i.380) 주석서에서는 禪을 닦아서 도달하는 색계와 무색계를 이처럼 범천의 세상(brahma-loka)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색계 초선천의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과 혼돈하지 말기 바란다.
katamo ca, poṭṭhapāda, oḷāriko attapaṭilābho?
rūpī cātumahābhūtiko kabaḷīkārāhārabhakkho , ayaṃ oḷāriko attapaṭilābho.
뽓타빠다여, 그러면 무엇이 ① 거친 자아의 획득인가?
거칠고 물질로 되었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졌고 덩어리로 된 음식을 먹고 사는 것 -
이것이 거친 자아의 획득이다.
katamo manomayo attapaṭilābho?
rūpī manomayo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ayaṃ manomayo attapaṭilābho.
무엇이 ②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인가?
물질을 가졌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것 -
이것이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다.
katamo arūpo attapaṭilābho?
arūpī saññāmayo, ayaṃ arūpo attapaṭilābho.
무엇이 ③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인가?
무색이요, 인식으로 이루어진 것 - 이것이 무색의 자아의 획득이다.”
♦ 429. “oḷārikassapi kho ahaṃ,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assa pahānāya dhammaṃ desemi —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40. “뽓타빠다여, 나는 거친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한다.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534)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535)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534) “오염된 법들(saṃkilesikā dhammā)이란 12가지 해로운 마음(akusala-citta, 不善心)의 일어남이다.”(DA.ii.380) 열두 가지 해로운 마음은『아비담마 길라잡이』 1 장 §4(111쪽) 이하를 참조할 것.
535) “깨끗한 법들(vodāniyā dhammā)이란 사마타[止]과 위빳사나[觀]이다.”(DA.i.380)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1의 주해들과 1장 색계 마음(145쪽 이하)을 참조할 것.
siyā kho pana te, poṭṭhapāda, evamassa —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dukkho ca kho vihāroti,
na kho panetaṃ, poṭṭhapāda, evaṃ daṭṭhabbaṃ.
뽓타빠다여, 그런데 그대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머묾은 괴로움일 것이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결코 그렇게 여겨서는 안된다.
saṃkilesikā ceva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ca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pāmujjaṃ ceva bhavissati pīti ca passaddhi ca sati ca sampajaññañca sukho ca vihāro.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환희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경안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 430. “manomayassapi kho ahaṃ,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assa pahānāya dhammaṃ desemi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
siyā kho pana te, poṭṭhapāda, evamassa —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dukkho ca kho vihāro’ti,
na kho panetaṃ, poṭṭhapāda, evaṃ daṭṭhabbaṃ.
saṃkilesikā ceva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ca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pāmujjaṃ ceva bhavissati pīti ca passaddhi ca sati ca sampajaññañca sukho ca vihāro.
41. “뽓타빠다여, 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한다.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런데 그대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머묾은 괴로움일 것이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결코 그렇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환희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경안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 431. “arūpassapi kho ahaṃ,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assa pahānāya dhammaṃ desemi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siyā kho pana te, poṭṭhapāda, evamassa —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dukkho ca kho vihāro’ti,
na kho panetaṃ, poṭṭhapāda, evaṃ daṭṭhabbaṃ.
saṃkilesikā ceva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ca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pāmujjaṃ ceva bhavissati pīti ca passaddhi ca sati ca sampajaññañca sukho ca vihāro.
42. “뽓타빠다여, 나는 물질이 아닌[無色] 자아의 획득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한다.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런데 그대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머묾은 괴로움일 것이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결코 그렇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환희가 있을 것이고 희열과 경안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있을 것이다.
그런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 432. “pare ce, poṭṭhapāda, amhe evaṃ puccheyyuṃ —
‘katamo pana so, āvuso, oḷāriko attapaṭilābho, yassa tumhe pahānāya dhammaṃ deseth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43. 뽓타빠다여, 만일 다른 자들이 나에게 묻기를,
'도반이여, 어떤 것이 그 거친 자아의 획득이기에 그대는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며,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라고 합니까?'라고 한다면, 이렇게 묻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이다.
tesaṃ mayaṃ evaṃ puṭṭhā evaṃ byākareyyāma —
‘ayaṃ vā so, āvuso, oḷāriko attapaṭilābho, yassa mayaṃ pahānāya dhammaṃ desem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도반들이여, 이것이 바로 그 거친 자아의 획득인데 나는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며,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오.'라고.”
♦ 433. “pare ce, poṭṭhapāda, amhe evaṃ puccheyyuṃ —
‘katamo pana so, āvuso, manomayo attapaṭilābho, yassa tumhe pahānāya dhammaṃ deseth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tesaṃ mayaṃ evaṃ puṭṭhā evaṃ byākareyyāma —
‘ayaṃ vā so, āvuso, manomayo attapaṭilābho yassa mayaṃ pahānāya dhammaṃ desem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44. “뽓타빠다여, 만일 다른 자들이 나에게 묻기를,
'도반이여, 어떤 것이 그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기에
그대는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며,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라고 합니까?'라고 한다면, 이렇게 묻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바로 그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인데
나는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며,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오.'라고.”
♦ 434. “pare ce, poṭṭhapāda, amhe evaṃ puccheyyuṃ —
‘katamo pana so, āvuso, arūpo attapaṭilābho, yassa tumhe pahānāya dhammaṃ deseth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tesaṃ mayaṃ evaṃ puṭṭhā evaṃ byākareyyāma —
‘ayaṃ vā so, āvuso, arūpo attapaṭilābho yassa mayaṃ pahānāya dhammaṃ desem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45. “뽓타빠다여, 만일 다른 자들이 나에게 묻기를,
'도반이여, 어떤 것이 그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기에
그대는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며,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라고 합니까?'라고 한다면, 이렇게 묻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이 설명할 것이다.
'도반들이여, 이것이 바로 그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인데
나는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며,
그대들이 이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된 법들을 버리게 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을 증장하게 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오.'라고.”
yasmiṃ, bhante, samaye manomayo attapaṭilābho hoti,
moghassa tasmiṃ samaye oḷāriko attapaṭilābho hoti, mogho arūpo attapaṭilābho hoti;
manomayo vāssa attapaṭilābho tasmiṃ samaye sacco hoti.
세존이시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에는
그에게 거친 자아의 획득은 헛된 것이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도 헛된 것이며
그때에는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입니다.
yasmiṃ, citta, samaye manomayo attapaṭilābho hoti,
neva tasmiṃ samaye oḷārik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na arūp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manomayo attapaṭilābhotveva tasmiṃ samaye saṅkhaṃ gacchati.
찟따여,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에는
거친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을 결코 얻을 수가 없고
물질이 아닌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도 결코 얻을 수가 없으며
그때에는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 자아의 획득이라는 명칭만을 얻게 된다.
imā kho citta, lokasamaññā lokaniruttiyo lokavohārā lokapaññattiyo,
yāhi tathāgato voharati aparāmasan”ti.
찟따여, 이런 [자아의 획득]들은 세상의 일반적인 표현이며 세상의 언어이며
세상의 인습적 표현이며 세상의 개념이다.
여래는 이런 것을 통해서 집착하지 않고 표현할 뿐이다.538)”
♦ 473.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ā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so imamhā kāyā aññaṃ kāyaṃ abhinimmināti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2.23. “바라문 학도여, 비구가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형상을 가지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낸다.
♦ “seyyathāpi, māṇava, puriso muñjamhā īsikaṃ pavāheyya. tassa evamassa —
‘ayaṃ muñjo ayaṃ īsikā; añño muñjo aññā īsikā; muñjamhā tveva īsikā pavāḷhā’ti.
seyyathā vā pana, māṇava, puriso asiṃ kosiyā pavāheyya. tassa evamassa —
‘ayaṃ asi, ayaṃ kosi; añño asi, aññā kosi; kosiyā tveva asi pavāḷho’ti.
seyyathā vā pana, māṇava, puriso ahiṃ karaṇḍā uddhareyya. tassa evamassa —
‘ayaṃ ahi, ayaṃ karaṇḍo; añño ahi, añño karaṇḍo; karaṇḍā tveva ahi ubbhato’ti .
evameva kho, māṇava, bhikkhu ... pe ...
yampi, māṇava, bhikkhu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ā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 pe ....
idampissa hoti paññāya.
바라문 학도여, 예를 들면 사람이 문자 풀로부터 갈대를 골라내는 것과 같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은 문자 풀이고 이것은 갈대이다.
문자 풀과 갈대는 다르다. 문자 풀로부터 갈대가 제거되었다.'라고.
바라문 학도여, 다시 예를 들면 사람이 칼을 칼집에서 끄집어내는 것과 같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은 칼이고 이것은 칼집이다. 칼과 칼집은 다르다.
칼집으로부터 칼은 끄집어내어졌다.'라고.
바라문 학도여, 다시 예를 들면 사람이 뱀을 개미집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것과 같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개미집이다. 뱀과 개미집은 다르다.
개미집으로부터 뱀은 끄집어내졌다.'라고.
바라문 학도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형상을 가지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낸다.
2.24. “바라문 학도여, 비구가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여,
그가 이 몸으로부터 형상을 가지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내는 것 - 이것 역시 그의 통찰지에 속한다."
광음천에서 온 중생들
♦ 119. “hoti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saṃvaṭṭati.
saṃ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saṃvattanikā honti.
te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nti.
10. “와셋타여, 참으로133)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수축하는 그런 시기가 있다.134)
세상이 수축할 때 대부분의135) 중생들은 광음천136)에 나게 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오랜 세월 산다.
133) 이제 여기서부터 본경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기원(aggañña)에 대한 가르침이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세존께서는 와셋타와의 대화를 통해서 중생은 범천이나 어떤 특정 인격체가 다스리거나 지배하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 법(dhamma)에 의해서 그 법칙에 따라 나고 죽고를 거듭하며, 이 세상도 이러한 법칙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면서 유장하게 흐르고 흘러간다고 본경에서 담담하게 설명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법을 따르고 법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그대로 이 세계와 중생의 수명에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134) '그런 시기가 있다.’로 옮긴 원어는 hoti kho so samayo인데 직역하면
'있다 참으로 그 시기가’이다. 여기서 핵심단어는 samaya인데 일반적으로 ‘시간, 기간, 때' 등으로 옮기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아비담마에서도 yasmiṃ samaye cittaṃ uppanaṃ hoti로 쓰여서 마음이 일어나는 특정 순간이나 시점을 뜻하는 술어로 사용되었으며 이것이 아비담마 주석서 문헌들에서는 찰나(khaṇa, khaṇika)의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청정도론』서문 §12 상좌부불교의 발전단계 참조) 세존께서는 항상 이처럼 논의의 특정시점을 samaya로 제시하시면서 말씀을 전개하신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부처님께서는 이런 samaya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태초니 하는 우주의 최초의 시점을 부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특정시점 즉 samaya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본경을 통해서 부처님께서는 우주는 수축과 팽창을 무수히 반복하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제시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주가 수축하는 특정시점을 시작점으로 삼아서 어떻게 중생이 타락과 향상을 거듭하는가를 보여 주고 계신다.
135) “‘대부분(yebhuyyena)'이라는 것은 범천 이상의 세상이나 무색계에 태어난 자들을 제외한 신들을 두고 한 말이다.”(DA.1.110) 禪을 닦아서 색계와 무색계에 도달한 수승한 신들은 우주의 팽창과 수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136) 이 정형구는 본서 제1권「범망경」(D1) §2.2를 참조하고 광음천(Ābhassarā)에 대해서는 제2권 「대인연경」(D15) §33의 주해를 참조할 것.
♦ “hoti kho so, vāseṭṭha,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vivaṭṭati.
vi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kāyā cavitvā itthattaṃ āgacchanti.
ted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nti.
와셋타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팽창하는 그런 시기가 있다.
세상이 팽창할 때 대부분의 중생들은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이곳 [인간계로]오게 된다.137)
그들은 여기서도 역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오랜 세월 살게 된다.”
137) “이곳으로 오게 된다.(itthattaṃ āgacchanti)'라는 것은 여기에 인간이 되어(manussatta) 오게 된다는 말이다.”(DA.iii.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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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sapathavipātubhāvo (DN 27) 달콤한 땅의 출현
♦ 120. “ekodakībhūtaṃ kho pana, vāseṭṭha, tena samayena hoti andhakāro andhakāratimisā .
na candimasūriyā paññāyanti, na nakkhattāni tārakarūpāni paññāyanti, na rattindivā paññāyanti,
na māsaḍḍhamāsā paññāyanti, na utusaṃvaccharā paññāyanti, na itthipumā paññāyanti,
sattā sattātveva saṅkhyaṃ gacchanti.
11. “와셋타여, 그런 시기에는 완전히 하나인 물만으로 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암흑과 칠흑 같은 어두움만이 있다.
태양과 달도 알려지지 않고 별들도 알려지지 않고 별의 무리들도 알려지지 않고
밤과 낮도 알려지지 않고 한 달과 보름도 알려지지 않고 계절과 연도도 알려지지 않고
여자와 남자도 알려지지 않고 중생들은 다만 중생이라는 용어로 불릴 뿐이다.138)
138) 이것이 우주가 팽창하는 어떤 겁의 태초 인간계의 모습이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의 물 혹은 액체로 된(ekodakībhūta) 세상이다.
atha kho tesaṃ, vāseṭṭha, sattān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rasapathavī udakasmiṃ samatani ;
seyyathāpi nāma payaso tattassa nibbāyamānassa upari santānakaṃ hoti, evameva pāturahosi.
sā ahosi vaṇṇasampannā gandhasampannā rasasampannā,
seyyathāpi nāma sampannaṃ vā sappi sampannaṃ vā navanītaṃ evaṃvaṇṇā ahosi.
seyyathāpi nāma khuddamadhuṃ aneḷakaṃ , evamassādā ahosi.
와셋타여, 그러자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달콤한 땅이 물 위에 퍼지게 되었다.
마치 끓인 우유가 식으면 그 위에 엷은 막이 생기는 것처럼 그와 같이 나타났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향기를 갖추었고 맛을 갖추었다.
마치 정제된 버터기름과 정제된 생 버터처럼 그와 같은 색깔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순수한 벌꿀처럼 그러한 맛을 가졌다.139)
139)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 물 혹은 액체가 점점 굳어져 ‘달콤한 땅(rasa paṭhavī)'이 되고 그것을 먹어본 사람들에게는 마침내 탐심이 생기게(lolajātika) 된다. 이렇게 탐심(lola)이 근본이 되어 신과 같던 인간은 물질의 세상과 섞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점점 인간은 타락해갔다.
atha kho, vāseṭṭha, aññataro satto lolajātiko —
‘ambho, kimevidaṃ bhavissatī’ti rasapathaviṃ aṅguliyā sāyi.
tassa rasapathaviṃ aṅguliyā sāyato acchādesi, taṇhā cassa okkami.
aññepi kho, vāseṭṭha, sattā tassa sattassa
diṭṭhānugatiṃ āpajjamānā rasapathaviṃ aṅguliyā sāyiṃsu.
tesaṃ rasapathaviṃ aṅguliyā sāyataṃ acchādesi, taṇhā ca tesaṃ okkami.
12. “와셋타여, 그러자 어떤 중생에게 ‘오, 참으로 이것이 무엇일까?'라는 탐심이 생겼다.
그는 손가락으로 달콤한 땅을 맛보았는데 그 맛은 그를 뒤덮었고 갈애가 엄습해왔다.
와셋타여, 다른 중생들도 그 중생을 본보기로 따라하여 손가락으로 달콤한 땅을 맛보았는데
그 맛은 그들을 뒤덮었고 갈애가 엄습해왔다.
♦ candimasūriyādipātubhāvo (DN 27) 달과 태양 등의 출현
♦ 121.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ṃ hatthehi
āluppakārakaṃ upakkamiṃsu paribhuñjituṃ.
yato kho te ,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ṃ hatthehi āluppakārakaṃ upakkamiṃsu paribhuñjituṃ.
atha tesaṃ sattānaṃ sayaṃpabhā antaradhāyi.
sayaṃpabhāya antarahitāya candimasūriyā pāturahesuṃ.
candimasūriyesu pātubhūtesu nakkhattāni tārakarūpāni pāturahesuṃ.
nakkhattesu tārakarūpesu pātubhūtesu rattindivā paññāyiṃsu.
rattindivesu paññāyamānesu māsaḍḍhamāsā paññāyiṃsu.
māsaḍḍhamāsesu paññāyamānesu utusaṃvaccharā paññāyiṃsu.
ettāvatā kho, vāseṭṭha, ayaṃ loko puna vivaṭṭo hoti.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달콤한 땅을 손으로 한 덩어리씩 깨어서 먹기 시작했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이 달콤한 땅을 손으로 한 덩어리씩 깨어서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이 본래 타고난 광채가 사라져 버렸다.
본래 타고난 광채가 사라지자 태양과 달이 드러났다.
태양과 달이 드러나자 별들과 별의 무리들도 드러났다.
별들과 별의 무리들이 드러나자 낮과 밤이 알려지게 되었다.
낮과 밤이 알려지자 한 달과 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한달과 보름이 알려지자 계절과 연도가 알려지게 되었다.
와셋타여, 이렇게 하여 이 세상은 다시 팽창하는 것이다.”
♦ 122. “atha kho te,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ṃ paribhuñjantā
taṃbhakkhā tadāhārā ciraṃ dīghamaddhānaṃ aṭṭhaṃsu.
yathā yathā kho te, vāseṭṭha, sattā rasapathaviṃ paribhuñjantā taṃbhakkhā
tadāhārā ciraṃ dīghamaddhānaṃ aṭṭhaṃsu,
tathā tathā tesaṃ sattānaṃ (rasapathaviṃ paribhuñjantānaṃ) kharattañceva kāyasmiṃ okkami,
vaṇṇavevaṇṇatā ca paññāyittha.
13. “와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달콤한 땅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었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이 달콤한 땅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중생들의 몸은 견고하게 되었고 잘생기고 못생긴 용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ekidaṃ sattā vaṇṇavanto honti, ekidaṃ sattā dubbaṇṇā.
tattha ye te sattā vaṇṇavanto, te dubbaṇṇe satte atimaññanti —
‘mayametehi vaṇṇavantatarā, amhehete dubbaṇṇatarā’ti.
tesaṃ vaṇṇātimānapaccayā mānātimānajātikānaṃ rasapathavī antaradhāyi.
rasāya pathaviyā antarahitāya sannipatiṃsu.
sannipatitvā anutthuniṃsu — ‘aho rasaṃ, aho rasan’ti!
어떤 중생들은 잘생기게 되고 어떤 중생들은 못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잘생긴 중생들은 못생긴 중생들에게
‘우리는 이들보다 잘생겼다. 이들은 우리보다 못생겼다.'라고 거만을 떨었다.
그들이 잘생긴 것으로 거만을 떠는 것을 반연하여
자만과 거만이 생기자 달콤한 땅은 사라져 버렸다.
달콤한 땅이 사라지자 그들은 함께 모여서
'오, 달콤한 것이여. 오, 달콤한 것이여.'라고 소리 내어 울었다.
tadetarahipi manussā kañcideva surasaṃ labhitvā evamāhaṃsu — ‘aho rasaṃ, aho rasan’ti!
tadeva porāṇaṃ aggaññaṃ akkharaṃ anusaranti, na tvevassa atthaṃ ājānanti.
그래서 지금도 인간들은 아주 맛난 것을 얻은 뒤 '오, 달콤한 것! 오, 달콤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태고적 세상의 기원과 관계된 단어를 기억하기 때문인데 그 뜻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natthi sabbaso āruppā’ti, idaṃ me adiṭṭhaṃ;
yep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atthi sabbaso āruppā’ti, idaṃ me aviditaṃ.
ahañceva kho pana ajānanto apassanto ekaṃsena ādāya vohareyyaṃ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na metaṃ assa patirūpaṃ.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natthi sabbaso āruppā’ti,
sace tesaṃ bhavataṃ samaṇabrāhmaṇānaṃ saccaṃ vacanaṃ, ṭhānametaṃ vijjati —
ye te devā rūpino manomayā, apaṇṇakaṃ me tatrūpapatti bhavissati.
ye pan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atthi sabbaso āruppā’ti,
sace tesaṃ bhavataṃ samaṇabrāhmaṇānaṃ saccaṃ vacanaṃ, ṭhānametaṃ vijjati —
ye te devā arūpino saññāmayā, apaṇṇakaṃ me tatrūpapatti bhavissati.
dissanti kho pana rūpādhikaraṇaṃ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natthi kho panetaṃ sabbaso arūpe’”ti.
so iti paṭisaṅkhāya rūpānaṃyev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31. “장자들이여, 여기서 지자는 이처럼 숙고한다.
'이들 사문 · 바라문 존자들은 절대로 무색계는 없다.'라는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본 적이 없다.
이들 사문 · 바라문 존자들은 '반드시 무색계는 있다.'라는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것에 대해 한 면만 취하여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적절하지 않다.
만일 '절대로 무색계는 없다.'라는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 · 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마음으로 이루어진603) 색계 신들이 있는 그곳에 틀림없이 내가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만일 '반드시 무색계는 있다.'라는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 · 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인식으로 이루어진604) 무색계의 신들이 있는 그곳에 틀림없이 내가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물질에 근거하여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투쟁하고, 분쟁하고, 논쟁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생기지만, 무색계에서는 이들이 전혀 없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하면서 물질들을 염오하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 도를 닦는다.” 605)
603) “'마음으로 이루어졌다(mano-mayā).'는 것은 [색계]禪의 마음(jhāna-citta)으로 이루어진 것이다.”(MA.iii.122)
604) “'인식으로 이루어졌다(saññā-māya)'는 것은 무색계의의 인식(arūpa-jihāna-saññ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MA.iii.122)
605) “'물질들을 염오하고 그것에 대해 욕망을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 도를 닦는다(rūpānaṃ yev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는 것은 ① [禪을] 얻은 사람(lābhī)이거나 ② 그것을 사유하는 사람(takkī)이 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① [禪을] 얻은 사람이란 색계禪을 얻은 사람(rūpāvacara-jjhāna-lābhi)이다. 그는 색계에 관한 한 의심이 없지만 무색계에 관한 한 그렇지 않다. 그 는 '나는 무색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듣고 무색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듣지만 실제로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색계 제4선을 기초 (pada-ṭṭhāna)로 삼아 무색계선을 증득하리라. 만약 무색계가 있다면 내가 그곳에 태어날 것이고, 만약 없다면 색계 범천의 세상(rūpāvacara-brahma-loka)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가르침(apaṇṇaka dhamma)은 틀림없이 내게 확실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도를 닦는다.
② 사유하는 사람이란 아직 禪을 얻지 못한 사람(appaṭiladdha-jjhāna)이다. 그 사람도 색계에 관한 한 의심(kaṅkhā)이 없지만 무색계에 관한 한 그렇지 않다. 그는 '나는 무색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듣고 무색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듣지만 실제로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까시나의 준비 (kasiṇa-parikamma)를 지어 색계 제4선을 증득하여, 그것을 기초로 삼아 무색계선을 증득하리라. 만약 무색계가 있다면 내가 그곳에 태어날 것이고, 만약 없다면 색계 범천의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가르침은 틀림없이 내게 확실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도를 닦는다.” (MA.iii.122~123)
⑬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드는 신통(manomay-iddhi)
♦ 253. “puna caparaṃ, udāyi, akkhātā mayā sāvakānaṃ paṭipadā,
yathāpaṭipannā me sāvakā imamhā kāyā aññaṃ kāyaṃ abhinimminanti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30. “다시 우다이여,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도닦음을 설했다.
그들은 그렇게 행하여 이 몸으로부터 형색을 갖추었고 마음으로 만들어졌고
모든 수족을 다 갖추었고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낸다.
seyyathāpi, udāyi, puriso muñjamhā īsikaṃ pabbāheyya; tassa evamassa —
‘ayaṃ muñjo, ayaṃ īsikā; añño muñjo, aññā īsikā; muñjamhātveva īsikā pabbāḷhā’ti.
seyyathā vā panudāyi, puriso asiṃ kosiyā pabbāheyya; tassa evamassa —
‘ayaṃ asi, ayaṃ kosi; añño asi aññā kosi; kosiyātveva asi pabbāḷho’ti.
seyyathā vā, panudāyi, puriso ahiṃ karaṇḍā uddhareyya; tassa evamassa —
‘ayaṃ ahi, ayaṃ karaṇḍo; añño ahi, añño karaṇḍo; karaṇḍātveva ahi ubbhato’ti.
evameva kho, udāyi, akkhātā mayā sāvakānaṃ paṭipadā,
yathāpaṭipannā me sāvakā imamhā kāyā aññaṃ kāyaṃ abhinimminanti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tatra ca pana me sāvakā bahū abhiññāvosānapāramippattā viharanti.
우다이여, 예를 들면 사람이 문자 풀에서 갈대를 골라낸다고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은 문자 풀이고 이것은 갈대이다. 문자 풀과 갈대는 다르다.
문자 풀에서 갈대가 제거되었다.'라고,
우다이여, 다시 예를 들면 사람이 칼을 칼집에서 빼낸다고 하자.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은 칼이고 이것은 칼집이다. 칼과 칼집은 다르다. 칼은 칼집에서 빼내어졌다.'라고. [18]
우다이여, 다시 예를 들면 사람이 뱀을 뱀허물에서 끄집어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뱀허물이다. 뱀과 뱀허물은 다르다. 뱀은 뱀허물에서 끄집어내졌다.'라고,
우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도닦음을 설했다.
그들은 그렇게 행하여 이 몸으로부터 형색을 갖추었고 마음으로 만들어졌고
모든 수족을 다 갖추었고 감각기능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많은 나의 제자들은 최상의 지혜의 완결과 완성을 성취하여 머문다.”
“abhijānāti nu kho, bhante, bhagavā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abhijānāmi khvāhaṃ, ānanda,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3.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신통에 의해서 마음으로 만든 몸70)으로
범천의 세상에 가신 것71)을 알고 계십니까?”
“아난다여, 나는 신통에 의해서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범천의 세상에 간 것을 알고 있다.”
70) '마음으로 만든 몸(manomaya kāya)'은 『디가 니까야』「사문과경」 (D2) §85에서 “그는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이 몸으로부터 그는 형색을 가지고,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수족이 다 갖추어지고,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다른 몸을 만들어냅니다.” 라는 문맥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4선에 능통한 수행자가 자신의 몸으로부터 만들어낸 다른 미묘한 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Hamilton, Identity and Experience, pp. 155~164도 참조할 것.
한편 『청정도론』 XII.25에서는 “[자기의] 몸 안에서 마음으로 만든 [다른] 몸을 생기게 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다른] 몸을 만드는(manomaya) 신통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청정도론』 XII.135에서는 위의 「사문과경」(D2)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단어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결의하는 마음(『청정도론』 XII.57 이하 참조)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감각기능[根]이 결여되지 않은: 이것은 눈, 귀 등의 형상으로 설했다. 그러나 창조된 형상에는 감성(感性, 『아비담마 길라잡이』 6장 $3의 해설 2 참조)은 없다.”
71) '가신'으로 옮긴 upasaṅkamitā에 대한 문법적인 접근은 von Hinüber, “Pāli as an Artificial Language”, pp.135~137을 참조할 것. 히뉘버 교수는 여기서 이 단어는 행위자 명사(true agent noun)가 아니라 잘못 만들어진 절대사(misconstrued absolutive)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Sk. upasaṅ-kramitṛ가 아니라 upasaṅkramya 대신에 upasaṅkramitvā로 잘못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범어문법 일반에서 접두어가 없는 절대사를 만들 때는 '-tva' 를 붙이고 접두어가 있는 절대사를 만들 때는 '-(i)ya'를 붙인다. 이 단어는 upa+saṃ이라는 두 개의 접두어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upasaṅkramya의 빠알리어인 upasaṅkamma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upasaṅkramitvā의 빠알리어인 upasaṅkramitā로 나타나기 때문에 잘못 만들어진 절대사라 부르는 것이다.
“abhijānāti pana, bhante, bhagavā
iminā cātumahābhūtikena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
“abhijānāmi khvāhaṃ, ānanda,
iminā cātumahābhūtikena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4. “세존이시여, 그런데 세존께서는 네 가지 근본물질로 된 이 몸72)으로 신통에 의해서
범천의 세상에 가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난다여, 나는 네 가지 근본물질로 된 이 몸으로 신통에 의해서
범천의 세상에 간 것을 알고 있다.”
72) 여기서 '몸(kāya)'은 신통으로 만든 몸이 아니라 자연적인 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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