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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귀”에 대한 논쟁부터 해명하고 가자면 독일의 예술사가인 ‘한스 카우프만’과 ‘리타 빌데간스’는 그들의 저서 ‘고흐의 귀: 폴 고갱과 침묵의 서약’이라는 책에서, 고흐의 귀를 자른 범인은 고갱인데 처벌을 피하려는 고갱과 우정을 지키려는 고흐가 ‘침묵 협정’을 맺고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비밀로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고흐와 다투던 고갱이 펜싱 검으로 고흐의 귀를 쳐서 잘랐고 고흐의 귀에 난 상처가 지그재그로 난 것이 그 증거랍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네덜란드의 고흐 전문가들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일축하였고,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고흐와 고갱이 서양미술사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이야기되면서도, 두 사람의 성격은 물과 불같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갱이 태어난 1848년, 프랑스는 ‘2월 혁명’과 ‘6월 폭동’의 격동에 시절이었습니다. 시가전가지 벌인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 왕은 영국으로 도피하여하였고, 부르주아지 온건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혁명정부를 구성하여 노동권, 노동자들의 결사의 자유, 실업자를 위한 국립공장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개혁은 도시민과 농민의 반발을 사고 헌법제정을 위한 선거 결과 온건 공화파가 주도권을 잡아 사회주의 세력이 축출되었습니다. 여기에 반발한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6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는 34살로, 『르 나시오날 Le Nationale』지의 정치부 기자이자 자유주의자, 6월 폭동이 실패할 즈음에 돌도 지나지 않은 고갱 등 가족과 페루로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아버지 클로비는 도착도 하기 전에 10월 30일에 동맥류파열로 배에서 사망했습니다.
비록 아버지를 잃었지만 어머니 ‘알린’의 나라 페루에 도착한 고갱의 가족은 부유한 외가에 의탁해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냅니다. 아마 고갱에게는 어린 시절 피부가 다른 아이들과 같이 행복한 시기를 보낸 경험이 그의 작품에도 많이 반영되었고, 타히티 생활을 결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5년여의 페루 생활은 외할아버지의 사망과 프랑스의 친할아버지의 사망으로 끝을 맺고, 1854년 말 고갱의 어머니는 고갱 남매를 데리고 프랑스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유산을 상속받아 생활하게 됩니다. 고갱은 여기에서 학교에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우게 됩니다.
11살 즈음에 유산은 바닥이 났고 그의 어머니는 ‘리세’로 이주해 모자 공장을 다니며 가족을 지켜냅니다. 고갱은 어머니의 노력으로 학교를 마치고, 다시 해군이 되기 위한 예비학교에 진학했으나, 예비학교의 규칙을 어겨 제때에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예비학교를 졸업하였으나 해군사관학교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고, 1865년 17살의 나이로 ‘상선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습니다. 1866년 2급 항해사가 된 고갱은 13개월 동안 남미와 지중해 등을 돌아다니다, 1867년 인도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The Artist's Mother (예술가의 어머니) 1889, oil on canvas, 33 x 41cm Staatsgalerie, Stuttgart
고갱이 어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을 보고 이 초상화를 그렸는데, 페루 출신의 어머니의 이국미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은 고갱이 자기 신념을 굽히질 않는 것을 걱정해 ‘주위사람과 대립으로 고립되기 쉬우니 모든 일에 정진하라’였다고 합니다. 유언의 내용으로 보아 고갱의 고집과 이기적인 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드셌던 모양입니다.
고갱은 1868년 해군에 입대하여 1871년 제대하게 되는데 그 시기는 프랑스가 전쟁에 패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거기다 그의 집도 불타버린 상황에서 그는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그의 대부 ‘귀스타브 아로사’의 도움으로 은행에서 주식중개 일을 하게 되고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아 생활도 안정되게 되었습니다. 또 25살에 아로사의 소개로 1873년 11월 22일, 23살의 덴마크 여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도 하게 됩니다. 메테는 자유분방하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결혼을 할 때까지 고갱이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는지, 작품 수집에 취미가 있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고갱과 메테는 1874년 첫 아들 ‘에밀’을, 1877년에 딸을 낳았는데 어머니 이름을 따라 ‘알린’으로 지었고, 1879년에 태어난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클로비’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1881년에 ‘장 르네’를, 1883년에 ‘폴 롤라’을 더 낳아 모두 다섯 자녀를 두게 됩니다. 고갱은 이중에서 특히 알린을 특히 아꼈으며 타히티에 살던 1897년에 알린이 요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울었다고 합니다.
Aline Gauguin and One of Her Brothers 1883 oil on canvas 31 x 47.5 cm Private collection
고갱이 처음을 유채로 풍경을 그린 것은 1871년, 해군제대 후 아로사의 딸 마그리트와 회화를 배울 때였습니다. 그리고 은행에 근무하면서고 주말에는 동료인 아마추어 화가와 교외로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고,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관람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시회에는 모네, 드가, 세잔, 피사로 등의 작품 165점이 전시 되었습니다. 고갱은 한편으로 르네상스 시절의 화가들의 그림을 연구하고 루소의 책등을 열독하는 등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림을 수집하면서 많은 돈을 지출하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델을 집으로 데려오면서 아내 메테와 갈등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림을 향한 그의 열정은 멈출 수 없었습니다. 결혼한 다음 해인 1874년 그는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장 훌륭한 미술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피사로의 아틀리에에서 본격적인 인상주의 기교를 배우게 되었고, 평생 가깝게 지낸 아홉 살 연상의 동지 세잔도 여기에서 만나게 됩니다. 드디어 1876년 센 강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으로 살롱 전에 입선하게 되며 아마추어화가로서는 엄청난 고무를 받게 됩니다.
Apple Trees at l'Hermitage 1879 oil on canvas Philadelphia Museum of Art (United States)
1879년은 아마추어 화가 고갱에게는 아주 중요한 해였습니다. 그해 4월에 열린 인상주의 그룹전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이미 화가로써 입지를 세운 전업화가들의 전시회에 초대를 받았으니 영광스럽기도 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자부심도 컸을 것입니다. 고갱은 이 전시회에 자신의 그림과 자신이 수집했던 피사로의 그림 세 점을 빌려주었습니다. 고갱은 1880년 이후에도 인상주의 전시회에도 초대되어 전업화가들과 나란히 그림을 전시하게 되어 아마추어지만 화가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하였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못하였습니다.
나부습작(裸婦習作) Study of a Nude (Suzanne Sewing), 1880, Ny Glyptotek, Copenhagen
이 작품은 1881년 제6회 인상파전(印象派展)에 출품된 것으로 굉장히 사실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Banks of the Oise 1881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경제적으로 어렵던 프랑스는 1882년 11월 주식시장이 붕괴되었고 고갱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고갱은 이 시기에 전업화가로의 전향을 선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가 아니면 전문화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고갱의 자신감이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생업을 위한 전향이었다고도 평가하지만 어느 편이든 고갱의 일생에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고갱이 35살에 화가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Abandoned Garden, Rouen 1884 oil on canvas 65 x 54 cm Private collection
[야회복을 입은 매트 고갱] Madame Mette Gauguin in Evening Dress, 1884,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slo.
폴 롤라를 출산한 아내 메테는 고갱의 이런 결정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지만 심한 다툼으로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얼마지 않아 모아놓은 동도 바닥나고 이들은, 1884년 1월 생활비가 적게 드는 ‘루앙’으로 이사하고, 그곳에서 고갱은 다시 주식중개 일을 해보려하지만 경기침체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메테’는 루앙으로 이사 온 지 6개월 만에 코펜하겐의 친정으로 가버리고, 다음 달에 고갱도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로 갈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하고, 처가에서 직장을 소개하지만 이마저도 마땅치 못하고 처가사람들과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이대 그린 그림이 자화상 <이젤 앞의 고갱>인데 상당히 우울한 표정입니다.
Self-Portrait, 1885 Oil on canvas, 65.2 x 54.3 cm Kimbell Art Museum, Fort Worth, Texas
Bare Trees 1885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1885년 6월, 고갱은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여섯 살 난 ‘클로비’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약속은 평생 지켜지질 못합니다. 그해 겨울에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는데 병원비 20프랑이 없다며 아내 메테에게 돈을 요청하는 편지를 하는가 하면 스스로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서 5프랑을 벌기도 하지만, 그 후로도 경제적 여건은 나아지지 않아 클로비를 다시 메테에게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클로비는 21살 때 수술후유증으로 패혈증을 앓다 사망하는데 레테가 고갱에게 이야기하지 않아 고갱은 평생 아들의 죽음을 몰랐다고 합니다.
Clovis 1886 oil on canvas Newark Museum (United States)
고갱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고 다음해인 1886년 제8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디에페의 일광욕하는 사람들> 등 19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다행히 몇 점이 팔려 당장의 끼니 걱정은 면하게 됩니다만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가난과 고난은 계속되었고 오히려 밤을 새우는 작품 활동을 하며 건강도 악화되었습니다.
Still Life with Profile of Laval 1886, Oil on canvas, 46 x 38 cm Josefowitz Collection
1886년 전시회를 거치며 고갱은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과 기법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갱은 프랑스의 북서부 지역인 대서양 연안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옮겨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그림을 보면서 색채의 표현 가능성이 무한함을 보면서 색채연구를 해가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14개월 동안 체류하며, 전통의상을 입은 <브르통의 네 소녀>, <목욕하는 브르통 소년들 >, <목욕하는 두 소녀 > 등 2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여전히 인상주의적이지만 인물의 묘사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에 비해 세밀하여 기존 화풍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Autumn Landscape (aka Farm and Pond) 1877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reton Girls Dancing, Pont-Aven 1888 Oil on canvas 71.4 x 92.8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Breton Boy by the Aven River 1888 oil on canvas Musee de Grenoble (France)
Breton Boys Wrestling 1888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lue Trees 1888, Oil on canvas, 92 x 73 cm The Ordrupgaard Collection, Copenhagen
Bordeaux Harbor 1886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이즈음 그의 인생에서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1886년 화상인 ‘테오 반 고흐'의 소개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난 것이고 두 번째는 마르티니크를 여행한 것입니다.
마르티니크는 쿠바와 아이티의 동남쪽, 베네수엘라의 북쪽에 있는 섬으로 프랑스령 섬입니다. 고갱은, 지금도 관광지로 유명한 이 섬에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열대지방 풍경의 찬란한 색채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원시공동체의 매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고갱의 원시주의는 어린 시절 페루에서의 생활과 마르티니크 여행에서 출발한 것이고, 인상주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87년 10월, 마르티니크 섬에서 병을 얻어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생계를 위해 에르네 샤플레와 도자기를 제작하는데 이 시기 작품에는 원시주의적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Seascape with Cow on the Edge of a Cliff 1888 Oil on canvas 73 x 60 cm Musee des Arts Decoratifs, Paris
The Swineherd, Brittany 1888 Oil on canvas 74 x 93 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Still Life with Three Puppies 1888 Oil on canvas 88 x 62.5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The Vis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Oil on canvas 73 x 92 cm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Edinburgh
빈센트와 테오의 제안을 받은 고갱은 1888년 10월, 빈센트 반 고흐와 공동생활을 하기 위해 고흐가 이미 터를 잡고 작업실을 만들어 놓은 ‘아를의 노란 집’으로 가게 됩니다. 반 고흐는 고갱과 그림에 대한 생각이 비슷한 정열적인 인물이었지만 두 사람의 성격차이는 줄일 수 없었습니다.
Les Alyscamps, Arles 1888, Oil on canvas, 91 x 72 cm Musee d'Orsay, Paris
Les Miserables 1888 Oil on canvas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고흐와 이별한 고갱은 1889년에 다시 퐁타방으로 돌아간 뒤 인상주의와 결별하고 그의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하게 됩니다. 아마 우리가 많이 본 그림들은 이 시기부터의 그림들일 것입니다.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 (Le Christ jaune) 1889 Oil on canvas 92.1 x 73.4 cm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고갱이 타히티로 가기 전에 그림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그림입니다. 브르타뉴의 퐁타방의 트레마로의 교회를 그린 것으로 멀리 마을과 언덕이 보입니다. 야성과 자만한 그가 최대한 경건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얼굴은 참 우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 시절 고갱의 심정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Be in Love and You Will Be Happy. 1889. Carved, polished and polychromed linden wood. The Museum of Fine Arts, Boston, MA, USA
이 나무 릴리프를 제작하고 고갱은 자신의 최고 작품이라 반고흐에게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양식의 몹시 슬퍼하는 여인의 누드가 상단 왼편 성서 시대 바빌론의 도시와 아래 상상의 꽃과 여우 사이에 있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바빌론 도시는 음란을 상징하고 여우는 심술궂은 숙명적 동물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감람산의 그리스도 Le Christ au Jardin des Olivers(Christ in the Garden of Olives) 1889 oil on canvas 73x92cm Norton Gallery and School of Fine Art, West Palm Beach (United States)
1889년 가을에 그린 이 그림은 부패한 세상과 그가 상상한 초월적인 세상을 대비시킨 작품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가 체포되기 전 제자들을 뒤로 하고 홀로 감람산에서 고뇌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것으로 중앙의 나무를 중심으로 두 세계를 양분 시켰습니다. 특히 예수의 모습이 특징적입니다.
[戱畵的 自畵像] Caricature Self-Portrait. 1889. Oil on wood.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보면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Portrait of a Woman, with Still Life by Cezanne 1890, Oil on canvas, 65.3 x 54.9 cm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M. Loulou 1890 , Oil on canvas, 55 x 46.2 cm Barnes Foundation, Merion, PA
고갱의 작품들을 보면 분명한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원시주의에 몰두하면서 단순한 색채조화로 그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는 영혼을 파괴하는 부르조아지적 물질주의와 퇴폐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이는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나타나 파리 탈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회로 넘기겠습니다.
La Belle Angele 1889, Oil on canvas, 92 x 73 cm Musee d'Orsay, Paris
Breton Landscape - Fields by the Sea(aka Le Pouldu) 1889 oil on canvas Nationalmuseum - Stockholm (Sweden)
첫댓글 학교다닐때 고갱과 고호를 많이 헷갈려 했는데....이제는 그림만 봐도 누구 작품인지 알거 같아요~~한때 고호그림을 참 좋아했었는데....생각난 김에 고호 음악을 올려봅니다. 화려한 색체가 봄을 미리 느끼기에 충분하겠지요~~^^
나도 무쟈 헷갈렸느데....귀 잘른 사람이 누구든가요 밴 고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