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8. 메이지유신기의 폐불훼석(廢佛毁釋)
제정일치 추구…神道 국교화 佛敎 대탄압
1868년(메이지1) 4월1일 오전, 무장한 한 무리가 사카모토)의 히에신사 경내에 난입하였다. 신관(神官) 출신의 신위대(神威隊) 50명, 인부 50명, 히에신사의 사사(社司)와 궁사 20명 정도로 구성된 이 무리는 새 정부의 취지라고 하면서 스님들에게 본전(本殿)의 열쇠를 요구했다. 스님이 거절하자 그들은 경내로 들어가 불상, 불경, 불구 등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때 불타버린 불상, 불경, 불구 등이 124점에 이르고, 귀금속 장식품 등 48점이 약탈되었다고 전한다. 불과 반나절 동안에 있었던 이 엄청난 파괴행위를 지휘한 주동자는 히에신사의 사사인 주게 시게쿠니와 쇼겐지 요시타네 등이었고 특히 주게 시게쿠니는 메이지정부 신기사무국(神祇事務局)의 권판사(權判事)이기도 했다.
메이지정부 신도에 의한 국민교화-통합 추구
‘신불분리령’ 포고후 무자비한 불교탄압 번져
이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정부의 한 포고령이었다. 1868년(메이지1) 3월28일 신기사무국은 “불상을 신체(神體)로 삼는 신사는 이후부터 바꾸도록 하고, 본지(本地)라 하여 신사에 안치한 불상 혹은 방울, 범종, 불구 등을 조속히 제거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이 포고령이 결국은 불상, 불경, 불구 등을 파괴, 소각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사진설명>불교 전래 이후 전통종교인 신도와 융합돼 전해졌던 일본불교는 메이지 정부시대에 이르러 극심한 탄압을 받는다. 정부는 신도와 불교를 엄격히 구분하는 신불분리령이 발표해, 메이지유신 초기 종교정책의 기본방향인 신도의 국교화를 추진했다. 사진은 나라지역의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신사의 모습.
그런데 이 같은 형태의 사건은 히에신사에 한 곳에서 그치지 않고 일본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메이지유신기에 있었던 이러한 신도(神道) 측의 불교배척과 그 유물에 대한 파괴활동을 일본종교사에서는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 일컫고, 이것의 발단은 신도와 불교를 분리하고자 한 메이지정부의 포고령 곧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페불훼석의 대표적인 한 사례가 되고 있는 히에신사의 사건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와 외래종교인 불교와의 관계, 그리고 막부정권을 타도하고 왕정복고와 제정일치를 지향한 메이지정부의 종교정책과 그 의도 등 상호간의 역학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서기 538년 백제로부터 불교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전래된 후 불교 수용을 지지한 소가씨가 쇼토쿠태자와 결탁하여 그 반대파인 모노노베씨를 물리치면서 불교는 일본사회에 급속히 수용, 확산되어 갔다. 불교가 수용된 후 일본에서는 전통종교인 신도와 외래종교인 불교가 서로 융합하는 신불습합(神佛習合)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은 헤이안 시대(794~1192)에 일본의 신과 부처를 일체(一體)로 받아들이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로 체계화 되었다. 여기서는 불, 보살이 신의 근원이 되고, 신은 중생제도를 위해 나타난 불, 보살의 화신으로 해석된다. 신이 부처에 종속되는 불교중심의 이론이었다. 일본의 신불습합에서 항상 불교가 주(主)가 되고 신도가 종(從)이 된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신도에는 불교와 같은 교의, 수행 등이 없기 때문에 사상이나 행동에 있어서 불교보다 열세인 조건에 있었다. 또한 불교사원은 광대한 사원의 영지를 보유하였지만 이에 비해 신사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태였다. 사원이 경제적으로 신사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에도시대 이후로 사원이 단가(檀家)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막부의 기독교 금지령에 의해 기독교인 적발업무의 권한이 사원에게 위촉되었고 사원은 그 권한을 활용하여 자신들에게 소속된 단가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민중의 장제의식(葬祭儀式)을 독점할 수 있게 되어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누렸던 것이다.
일본 종교사에서 천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신불습합은 메이지 신정부의 종교정책에 의해 신불이 분리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1867년 12월 왕정복고의 쿠데타로 성립된 메이지정부는 제정일치의 천황제국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던 만큼 신도에 의해 국민을 교화하고 국가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즉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제정일치의 사회가 전통신앙이며 천황가(天皇家)의 신앙이기도 한 신도에 의해 운영되는 것을 지향했다.
이를 위해 신정부는 그때까지의 신불습합을 거부하며 신도와 불교를 엄격히 구분하는 신불분리령을 포고하였고, 이것이 폐불훼석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정부는 1868년(메이지1) 3월17, 28일에 스님들의 강제환속, 불교용어를 차용한 신호(神號)의 폐지, 신사에 안치된 불상과 각종 불구 등의 제거를 지시하여 불교적 색채가 사라진 신사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10일, 윤4월4일에 본지불(本地佛)과 각종 불구 등의 제거 신사의 신불혼효(神佛混淆) 폐지, 환속스님의 신관으로의 편입 등을 지시하였다. 특히 윤4월19일에는 신직자(神職者)의 신장제(神葬制)로의 전환을 지시함으로써 그동안 불교가 관장해 온 독점적 특권인 장제의식(葬祭儀式)을 공식적으로 박탈하였다.
실제로 1868년 12월25일 고메이천황의 2주기 때부터 천황의 제사의식이 불교식에서 신도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정부 초기의 이러한 일련의 신불분리령은 단순히 신도와 불교를 분리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고 그동안 불교에 종속되어 온 신도를 독립시키고, 불교를 탄압해 가면서 신도주 위주의 종교정책을 펴고자 함이었다.
신불분리령 포고 후 히에신사에서와 같은 폐불사태가 빈번히 발생하자, 이에 대응하여 신정부는 1868년 6월 “신기관(神祇官)을 재흥하고 신불을 판연(判然)하게 한 것은 천조(天祖)에게 효경(孝敬)을 다하기 위함이었는데, 역적들은 조정이 배불훼석(排佛毁釋)을 한다는 등의 거짓을 퍼뜨려 하민(下民)을 현혹, 동요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신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신불분리령이 곧 폐불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공표하면서 사태의 추이에 따라 나름대로 사후조치를 취했던 것은 사실이다.
강제환속 사찰통폐합 장제의식 박탈 등 이어져
정부선 묵인 방관…굴절된 日근대종교사 ‘서막’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공식적인 입장과는 달리 신정부의 대응책은 너무도 미온적이고 소극적이었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을 여기서 자세히 열거하기 어렵지만, 메이지유신 초기 종교정책의 기본방향이 신도의 국교화 작업이었다는 사실만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1868년 4월1일에 있었던 히에신사의 폐불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 전역에서 유명 신사 내의 불교유물이 파괴, 제거되고 또 많은 불교사원이 폐합사(廢合寺)되었다. 폐불훼석의 실태와 메이지정부의 대응이 잘 나타난 몇 가지 사례만을 보기로 하자.
<사진설명> 메이지 정부가 홋카이도 개발을 시작할 즈음 들어선 동본원사 삿포르 별원의 모습. 폐불훼석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인 1870년에 설립됐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먼저 사도(佐渡) 섬의 경우를 보면, 1868년 11월 정부관리인 판사 오쿠다이라 겐스케가 섬 관내의 총 539개사를 80개사로 폐합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폐사에서 몰수된 불구를 녹여 대포, 천보전(天保錢) 등을 주조하고 스님들의 종교 활동을 대폭 제한하였다. 이에 진언종, 동서본원사 등이 그 부당성을 호소하자, 정부는 일방적으로 폐불을 행하지 않도록 통보하고 1869년(메이지2) 8월에 오쿠다이라를 해임하는 것으로 사태를 종결지었다.
오키 섬에서는 1868년 6월에 권력을 장악한 정의파가 불교를 배격하여 사원, 불상, 도상, 집의 불단 등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69년 3월 이후 수개월 사이에 도고의 46개사가 모두 폐멸되었다. 이 사태에 대한 처벌로 최고 책임자 요코치 간자부로는 도형(徒刑) 1년 반, 기부정홍(忌部正弘)은 자택근신 1년 형에 처해졌다. 도야마번(富山藩)에서는 1870년 윤10월 정부의 대참사(大參事) 다이주에 의해 사원정리가 단행되었다.
도야마번의 정책은 당시 영내 7개 종파 1,600여개의 사원을 6개종의 6개사로 통폐합하려는 것이었다. 일종일사(一宗一寺)라는 극단적인 폐합사 정책에 대해 진종을 위시한 각 종파는 정책의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자 태정관은 1871년(메이지4) 3월에 정부는 본래 폐불의 뜻은 없었다고 하면서 번 당국의 폐합사 정책이 정부의 뜻과는 다르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사원합병에 온당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만을 내렸다.
마쓰모토번에서는 1868년(메이지3) 8월에 번주(藩主) 미쓰사다가 번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믿는 일은 무의미하며 불장제(佛葬祭)에서 신장제로 바꾸어 단가를 없애고, 폐사된 사원은 학교 등으로 활용하고자 한다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것을 정부가 용인하고 나서자 번의 관리들은 촌민들에게 신장제로의 전환을 강요하고, 스님들에게는 귀농을 강요했다. 이 외에도 토사번, 야마구치번, 타도쯔번, 야마다번, 사쓰마번, 나에기번 등에서도 폐합사 사건이 있었고, 또한 사나노국의 슈호신사, 에치젠국의 시라야마 이시도시로신사, 교토의 이와시미즈신사, 오와리국의 아쯔다신사, 치쿠젠국의 하코자키궁 등에서는 히에신사와 유사하게 경내의 불교유물이 파괴, 소각되었고 이세신궁의 영내에서는 불교식 장례가 금지되고 수 십개의 사원이 폐사되었다.
메이지시대에 폐불훼석이 극심했던 시기는 1868년 3월 신불분리령이 포고된 직후부터 폐번치현(廢藩置縣)이 실시된 1871년(메이지4) 무렵까지였고, 교부성(敎部省)이 폐지되는 1877년(메이지10) 1월경에 대개 종식된 것으로 본다. 폐불훼석은 일본종교사에서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이것에 대한 해석은 현재까지도 매우 다양하다. 폐불사상에 내몰린 일부 광신적인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일시적이며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는가 하면, 신도 측의 일부 극단적인 인물이나 추종자들에 의해 자행된 국지적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혹은 신도국교화를 향한 메이지 유신정부의 용의주도한 단계적 조치였다고 평하기도 한다. 피해 당사자인 불교 측에서는 불교전래 이래 전국적 규모의 최초이자 최대의 박해이고 일본불교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입문적 시련이었다고 한다.
다만 폐불훼석이 메이지정부 본래의 의도를 벗어났고 중앙정부의 명령을 무시한 채 폐불을 시행한 지방 번(藩) 당국의 책임이 크다는 일반의 해석은 사태의 실상을 상당부분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메이지정부가 폐불사태를 방관하고 묵인 내지 조장한 모습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후에도 신도위주의 종교정책은 일관되게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폐불훼석은 일본 근대불교사의 전개가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예고한 사건이었고, 굴절된 일본 근대종교사의 서막이기도 했다.
윤기엽 / 동국대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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