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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석류들, 빛나는 파열, 터질 듯한 보석함이여! |
Les grenades
Ambroise-Paul-Touissaint-Jules Valery
Dures grenades entr'ouvertes
Si les soleils par vous subis,
Et que si l'or sec de l'ecorce
Cette lumineuse rupture |
석류(石榴)
폴 발레리
넘치는 알맹이들에 못 이겨
너희가 견뎌 온 나날의 해가,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이 빛나는 파열은 |
1871년 남프랑스의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 세뜨(Sète)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바다와 밀접하게 보낸 발레리(Paul Valéry:1871-1945)는, 1884년 가족의 이주로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을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보내게 된다. 내륙의 어두운 분위기에 가득 찬 그 곳에서 열 세 살의 소년 발레리는 도시의 유명한 식물원을 산책하고 가끔 몇 가지 식물을 채집하며 꽃과 풀에 대한 친화력을 키웠다.
그에게는 나무가 ‘살아 있는 시(La poésie Vivante)였으며, 시인과 감응하는 동무이자 시적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890년 12월 Pierre Louÿs의 소개로, 그를 만나려고 몽펠리에로 찾아 온 앙드레 지드(André Gide)와 만난 시인이 함께 식물원을 산책하면서, 삼나무 그늘에 앉아 장미꽃술을 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전기적(傳記的) 사실에서 이미 발레리의 자연 친화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몽펠리에 식물원의 정경
시인 발레리는 때때로 자신을 ‘생각하는 식물(Une Plante Pensante)’로 비유하였다. 그는 식물의 성장작용에서 그가 꿈꾸었던 이상세계로의 초월적 상승을 발견하였고, 자신을 끊임없는 지적 성장과 의식의 명확성을 통해서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현실 초월의 가능성을 시도하는, 한 그루의 식물이기를 소망하였다. 그는 특유의 면밀한 관찰과 수학적 사고, 절제된 감정과 명확한 언어를 통해 여러 식물들에 관한 시를 발표하였다.
시인은 식물이 든든하고 어머니같은 대지의 물, 혹은 풀섶 밑에 고이 감추어진 부드러운 강물에 둘러싸여 있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모든 식물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기 전, 식물은 세상과 동떨어진, 대지 속 깊이 감추어진 물 속에서 탄생을 위한 기다림의 과정을 거친 후 그 씨앗은 대지의 물을 빨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로 변모한다. 이는 흡사 어린 아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태내에 있을 때 부드러운 물(양수)에 둘러싸여 은밀하고도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노충현 작, <Blessing Home>
이러한 식물을 이상적인 삶의 한 형태로 파악한 발레리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이 들판이나 산, 길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식물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시인의 식물은 생각하는 식물이며, 대기의 움직임에 몸을 떨면서 대답하고, 새처럼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지적.정서적 존재이다.
이와 같이 시인의 의식 속에서 식물은 땅을 딛고 서서 생각할 뿐만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며 사고를 키워 온 것이다. 이러한 식물은 자신의 투영으로서, 시인의 밖에서 하늘을 향해 힘차게 성장하는 또 하나의 시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시는 시인의 대상물, 석류를 예리한 관찰과 인격적 애착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석류의 생김새와 생태를 서술하고 찬양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시의 언어들은 지극히 물상적(物像的)이고 그 내용은 관념적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석류를 하나의 개체가 아닌, 인격적 존재이자 대화와 사색의 객체로 바라보고 있으며, 시인 자신과 석류를 유사하게 상응시켜 내면화하고 있다.
시는 1연에서 3연까지가 전반부이고, 마지막 4연이 후반부이다.
제 1연에서 시인은 이미 성숙의 단계에 들어선, 반쯤 벌어진 석류 알갱이들을 보면서 그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성숙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변신을 예고한다. 석류에게 있어서 개벽(開闢)은 그 세계를 아브락사스(Abraxas)처럼 터뜨리는 것이다. 성숙한 과육은 그 외피(外皮)를 스스로 헤집고 나와 자신을 해방시킨다. 마치 父神 제우스의 이마를 깨뜨리고 나온 아테나(Athena)처럼 이 알갱이들은 자기 집을 깨뜨리고 외부세계와 만난다.
제 2연에서 ‘루비 간막이’는 석류의 속이 꽉 들어차면 자연적으로 벌어지는 석류 알맹이 사이의 막을 말한다. 그 막이 찢어지기 직전까지 석류는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오만한’ 힘으로 오랜 나날들을 견뎌 왔다. 그 오만함은 인고(忍苦)와 유예(猶豫)의 길고 긴 기다림으로 쌓여진 오만함이었다.
제 3연으로 오면 시인의 정서는 보다 격정적이 되어 석류에 대한 찬탄을 내뱉는다. 석류의 껍질이 파열된 것은 내재적 응력(應力)과 외적인 섭리가 만나 이루어졌다. 이른바 내포와 외연의 줄탁동시(啐琢同時)이다. 하나의 세계가 깨뜨려지니 온통 태양 아래 석류밭은 진귀하고 빛나는 보석들로 넘쳐난다. 여기에서 보석은 석류를 비유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단어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세종 때 최항(崔恒)은 “비단 주머니 언뜻 열어보니 옥구슬이 가득 차 있다”고 노래했고, 율곡 이이(李珥)선생은 소싯적에 “껍질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다”라고 시를 지었다. 석류집과 그 알갱이는 보는바 그대로 훌륭한 보석함이요 값진 세공품이다. 그러나 보석이 긴 세월의 가공과 연마작업을 거치듯, 석류 또한 여러 번의 가뭄과 풍파를 견뎌 낸 인고(忍苦)의 노력을 겪어낸 것이다.
제 4연에서 시적 자아는 이러한 석류의 특성이 자신과 유사함을 발견하고, 석류와 같이 완전하고 아름다운 생애의 최고 건축물을 꿈꾸게 된다. 1연의 단단한 석류들, 2연의 루비나 3연의 금빛, 빨간 보석에서 보듯 시적 화자에게 석류는 단단한 돌, 보석으로 비춰진다. 보석은 그 속성상 고밀도이고 함축적이어서 그 안에 매우 긴 세월과 가공, 연마의 노력을 담고 있다. 이렇게 비춰진 석류는 매우 귀중하고 순수한 인고의 열매로, 자기 발견과 인식을 거쳐 궁극의 경지에 다다른 존재로 찬미되고 있다.
석류는 나무에 열리는 과실 중 가장 독특하고 매우 이채로운 존재이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석류는 지혜의 과일, 생명의 과일로 여겨졌고, 성서를 비롯한 고대 전적에 오래전부터 등장하고 있다. 또한 석류는 예로부터 지혜의 보석상자를 의미하였다. 보티첼리(Botticelli)가 그린 <성모자상(聖母子像)>에서 아기 예수가 석류를 들고 있는데, 이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한 손에 가진 초월자임을 가리키고 있다.
석류는 완벽한 외피를 가지고 있다. 검붉은 질긴 껍질은 빗물과 햇살, 더러움으로부터 씨앗들을 보호한다. 석류는 영글면서 세 번의 찬사를 받는다. 별모양의 붉은 꽃과, 잘 영글은 석류 열매, 그리고 갈라지며 눈부시게 빛나는 붉은 알갱이들은 석류의 경이로운 변신의 훌륭한 결과물이다. 달고 신 알갱이는 투명한 가종피(假種皮:Aril)에 싸여 있다. 이 가종피를 씹으면 캡슐약처럼 즙액이 톡톡 터지면서 입 안에 흥건히 침이 괸다. 이 가종피를 숙성하거나 가공하여 석류음료나 즙을 만든다.
우리 옛 귀부인들은 다자손(多子孫)과 다복(多福)의 염원을 담아 비단천으로 석류주머니를 달았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루비 등 붉은색 보석을 이용해 다양한 석류 세공품을 만들어 완상(玩賞)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과실이면서 성숙과 인내의 교훈을 담고 있는 이 석류를 시와 함께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