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자야구 국가대표 선수단 (사진=박종규)
“제 까라~ 마 셰라 왈리 까!”
한국과 경기를 앞둔 인도 야구팀 더그아웃. 검게 그을린 손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위에 하얀 손 하나가 포개진다. 필승의 의지를 다지는 구호를 서툰 인도어로 선창한 이는 다름 아닌 한국인. 한국인이 인도 야구선수들과 손을 모아 한국을 이기겠다고 외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순간이었다. 인도야구와 연을 맺은 지 1년, 필자는 인도 국가대표 여자야구선수들의 코치가 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늘이 인도 여자야구에 준 기회, LG 국제여자야구대회 참가
델리 선수들이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향하고 있다(사진=박종규)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경기도 이천 LG 챔피언스파크에서 ‘2015 LG컵 국제여자야구대회’가 열렸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이 대회에 인도는 2년 연속 초청받았다.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협회 예산도 부족한 인도야구가 국제대회에 참가할 방법은 오직 하나. 기업 협찬뿐이다. 대회 관계자는 “LG전자 인도법인에서 CSR(사회공헌활동) 차원에서 인도 여자야구 대표팀의 대회 참가경비를 지원해줬다”고 귀띔했다. 이를 두고 델리 야구연맹 회장은 ‘하늘이 주신 기회’라며 기뻐했다.
인도 대표팀의 대회 준비는 6월부터 시작했다. 지난해 1회 대회에서 인도 대표팀을 이끌었던 라젠더 감독은 각 지역 야구협회에 ‘국가대표 선발전 참가 의사’를 물었다. 그러나 대표선수를 보내겠다고 연락 온 곳은 고작 5개 주에 불과했다. 대부분 지역에서 야구가 활성화되지 않아 국제대회에 나갈 실력을 갖춘 선수가 태부족한 까닭이었다. 선발전에 나온 선수 대부분이 국가대표로 뽑히는 촌극이 벌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본, 한국 등 상대팀 경기 영상을 보면서 대회 수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인도어 통역이 가능한 회사 동료에게 도움을 받았다. (사진=박종규)
문제는 이만이 아니었다. 인도는 워낙 땅이 넓어 전국 각지에 흩어진 선수들이 정기적으로 한 지역에 모여 훈련할 여건이 안됐다. 대회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필자의 마음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평소 훈련량이 매우 적은데, 대회를 앞두고 집중적인 훈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델리 지역 선수들을 주말마다 모이게 해 연습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 훈련이 제대로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5명의 델리지역 선수들은 매번 사정이 생겨 연습에 한 두 명씩 빠지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7~8월은 몬순 시즌(우기)이라, 수시로 내리는 비로 연습이 어려웠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델리 지역 선수들의 기본적인 포구, 송구 실력이 어느 정도 봐줄 만 하다는 것이었다.
강 건너, 바다 건너, 산 넘어 모인 인도 여자야구 선수들
인도 국가대표팀이 델리 청소년팀과 연습경기를 통해 실전에 대비하고 있다 (사진=박종규)
초조함 속에 2개월이 지나고, 드디어 합숙훈련의 날이 다가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8월 19일부터 훈련이 시작됐어야 했다. 하지만 선수들의 델리 이동이 지연되는 통에 첫 훈련부터 하루가 미뤄졌다. 그렇다고 다음날 모든 선수가 모였느냐? 그랬다면 춤이라도 췄을 것이다. 5개 지역에서 총 15명의 선수가 동시에 모이는 건 세계 정상들이 모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사정은 다양했다. 우선 남인도 지역(께를라, 고아 지역) 선수들은 기차를 타고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걸려야 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데 한 달이 걸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21세기 인도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로 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지만, 소득수준이 높지 않아 기차를 탈 수밖에 없는 형편. 여기다 하이데라바드 지역에서 선발된 선수들은 직장인들이어서 주중엔 훈련할 수가 없었다.
인도는 한국 같은 엘리트 스포츠 방식이 아닌 방과 후 활동으로 운동을 한다. 선수들의 나이는 대략 19~23살인데, 학창시절 방과 후 활동 종목으로 야구를 선택했던 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모습들이 각기 달랐다.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무역학, 미술 등을 전공하는 대학생, 대학원생부터 취업 준비생, 회계사, 마케터, 패션디자이너까지 다양한 직업군이 한 팀으로 뭉쳤다. 놀랍게도 체육학 전공자는 단 한 명뿐.
다양한 직업군 만큼이나 야구실력도 편차가 심했다. 델리와 고아 지역 선수들은 기본기가 갖춰져 있어 어느 정도 손발이 맞았지만, 하이데라바드와 께를라 지역 선수들은 타구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해당 지역 지도자들은 “국가대표 선발전 이후 각 지역에서 훈련을 해왔다”고 주장했지만, 선수들의 실력만 보자면 지도자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긴 힘들었다. 평소 훈련을 등한시하고, 대회를 앞두고 ‘벼락치기 훈련’을 하니 팀 실력이 좋아질 리 만무했다.
지도자들도 각지에서 모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이데라바드 야구연맹의 라젠더 감독, 자이뿌르에서 온 하리쉬 코치, 고아에서 온 딜립 코치까지 세 명이 정해진 보직 없이 함께 선수들의 훈련을 이끌었다. 정해진 보직이 없다 보니 서로의 영역이 겹치고, 당연히 의견이 맞지 않아 충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시쳇말로 목소리 큰 사람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식이었다.
합숙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운동장 담장 너머에는 쓰레기 매립지가 있었다. 소들이 몰려와 쓰레기 더미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사진=박종규)
훈련 시간도 다른 참가국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인도 특성상 훈련을 오래 지속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인도는 낮 최고기온이 40도에 육박할 만큼 덥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야 하는 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선수들의 영양상태였다.
팀엔 힌두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채식주의자들과 평소 식사량이 부족한 저소득층 선수들이 일부 포함돼 있었다. 델리 지역 선수들에게 펑고를 20분 정도 쳐주다 보면, 선수들은 필자에게 “Sir, water break”하며 울상을 짓곤 했다.
그래도 훈련환경만은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학교 운동장 흙바닥에서 먼지를 먹어가며 운동했던 선수들은 이번엔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훈련했다. 대회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인도까지 날아온 작가가 “굉장히 열악한 환경을 예상했는데, 운동장 상태가 좋으니까 그림이 안 나온다” 며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이런 쾌적한 운동장은 인도야구 발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델리 야구연맹 회장 및 임원들의 노력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야구양말에 익숙하지 않은 인도 선수들이 바지를 걷은 채로 경기에 임하고 있다. 포수 디프티는 포수미트 대신 야수 글러브를 고집했다.(사진=박종규)
대회가 열릴 LG 챔피언스파크의 잔디 관리상태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선수들이 잔디 야구장에 적응하는 덴 큰 도움이 됐다. 다만 운동장 담장너머 쓰레기 매립지에서 불어오는 악취가 가끔 호흡을 곤란하는 게 최대 단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합숙훈련은 시작됐다. 그런데 하리쉬 코치는 계속해서 선수들의 포지션을 바꿔가며 수비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선수들을 잘 알지 못하니 여러 포지션을 시험해보고 베스트나인을 결정하겠다는 의도였다. 오랫동안 자기 포지션으로만 연습하던 선수들은 처음 서는 위치에서 수비할 때면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회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불안감만 증폭하는 훈련이 아닐까 싶어 조바심이 난 게 사실이었다. 아나나다를까. 델리 청소년팀과의 연습경기에서 인도 여자야구 대표팀은 기본적인 힘의 차이를 실감하며 참패를 거듭했다.
한편, 이 대회는 국가대항전이 아닌 클럽대항전이었다. 그래서 인도는 ‘하이데라바드 차저스’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나섰다. 물론 선수가 고정돼 있지 않고, 정기적으로 리그 경기도 치르지 않는, 경기가 나가려고 급조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팀이었다.
꿈같은 시간의 서막
개막식 참석차 대회장을 찾은 허구연 위원이 인도팀을 위해 원포인트 레슨을 자청했다(사진=박종규)
8월 26일, 인도 선수단은 델리 국제공항을 떠나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인도에서 말레이시아를 거쳐 한국으로 향하는 15시간의 긴 비행이었다. 비행기를 난생처음 타보는 선수들가 일부 있었지만, 장시간의 비행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인도에서 다른 도시로 가려면 버스로 10시간은 기본적으로 소요되니 15시간 정도의 비행은 충분히 참을만 한 듯 보였다.
인도 여자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한국땅을 밟은 건 27일 아침이었다. 입국장에서 대회 관계자들이 인도 선수들을 반갑게 맞았고, 여러 대의 카메라들이 들뜬 표정의 인도선수들을 담아냈다. 그 순간이 필자에겐 굉장히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인도에서 홀로 야구를 전파하며 인도 선수들에게 한국과 한국의 야구 환경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꿈같은 시간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날 저녁 인도 선수단은 잠실구장을 방문해 LG-SK전을 단체 관전했다. 필자가 스무살 때부터 경기장 안내요원, 경기보조요원, 선수단 훈련보조요원, 기자 등으로 일하며 꿈을 현실로 이루려 노력했던 그 곳을 인도 야구선수들이 방문한 것이었다. 선수들은 야구경기 자체보단 흥겨운 한국 야구장 분위기에 흠뻑 취한 듯했다. 인도의 4번타자 셰를은 다른 나라 대표선수들과 함께 LG-SK전 시구·시타 행사에 참여하며 무척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허름하고 오래된 글러브를 더 반긴 인도 여자야구선수들
양승호 전 감독(왼쪽)이 인도와 한국의 합동연습을 지도하고 있다(사진=박종규)
1년 전, 인도야구의 첫인상은 암울 그 자체였다. 낡은 장비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유니폼도 갖추지 못한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설령 유니폼을 입고 있어도 인도 업체에서 유니폼 비슷하게 만든 트레이닝복일뿐 유니폼으로 부르긴 어려운 옷이었다. 야구 유니폼 업체가 없다보니 그저 흉내만 낼 수 밖에 없었으리라. 모자도 두꺼운 재질의 야구모자 스타일이 아닌, 바람불면 벗겨질 듯한 패션모자가 대부분이었다. 필자는 국제대회면 국제대회에 맞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유니폼은 한국에서 새로 맞출 수 없었지만, 나머지 의류들은 어떻게든 구할 수가 있었다. 인도 여자야구팀을 흔쾌히 도와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필자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야구용품업체를 찾아갔다. 야구 동호인들 사이에서 ‘야용사’로 널리 알려진 제이엘스포츠였다. 제이엘스포츠는 이미 5월에도 “좋은 일 하시는데 조금이나마 도와드리고 싶다” 며 각종 야구용품을 정상 판매가보다 저렴하게 제공해준 바 있었다. 이번에도 대폭 할인은 물론, 인도야구를 위해 야구용품을 기증할 뜻을 밝혔다. 덕분에 인도 여자야구선수들은 모자, 언더셔츠, 허리벨트, 스타킹까지 선수들 모두가 같은 제품으로 통일해 입을 수 있었다.
야구 장비도 어느 정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했다. 그러나 장비는 의류와는 달리 가격이 비싸 처음부터 구입보단 대여에 초점을 맞췄다. 필자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사회인야구팀 및 대학교 야구동아리 선후배들이 글러브, 배트, 포수장비 등을 대여해주며 이 문제 역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지난해 대회에선 포수미트가 아닌 야수용 글러브를 쓰는 통에 인도팀 포수가 큰 주목을 받았으나, 이번엔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이것저것 선수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챙겨주고 나니, 자식에게 옷 하나라도 더 입히고자 하는 부모 심정이 ‘딱 이렇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자식이 부모 마음을 몰라주듯, 선수들도 후원자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것이었다. 선수들은 지원받은 물품들을 사용하길 꺼렸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무관심 품목이 바로 스타킹이었다. 인도 선수들은 스타킹처럼 긴 양말을 신는 게 어색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인도는 워낙 더워 양말 자체를 신지 않는 이가 많다. 주로 맨발에 샌들을 즐겨 신는다. 이는 선수들과도 같아 야구할 때조차 양말을 신지 않는 선수가 태반이다.
글러브도 그랬다. 인도선수들은 반으로 접히고 물렁물렁한 낡은 글러브를 오히려 더 편하게 여겼다. 대여한 A급 글러브를 손에 넣으면 “너무 딱딱해서 못쓰겠다”며 난감해했다. 포수 역시 자신이 쓰던 야수글러브가 더 잘 잡힌다며 포수미트를 내려놓았다. 1루수도 마찬가지였다. 빌려 온 체스트가드가 불편하다던 포수 디프티는 앞치마같이 얇은 자신의 체스트가드를 다시 착용했다. 선수들이 스스로 어떤 게 좋은 장비인지 터득하게 될 때까진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꿈의 구장’을 밟은 인도 여자야구선수들의 꿈같은 경기
인도 선수들은 경기 전 한국 선수들에게 팔찌를 선물했다. 경기가 열린 8월 29일은 락샤 반단(누이가 오빠의 손목에 끈을 묶어주는 인도 고유의 풍습)이라고 불리는 인도의 명절이었다(사진=박종규)
인도의 조별예선 첫 상대는 미국이었다. 대회 첫날 메인스타디움에서 경기가 펼쳐졌다. 인도에서 정식 야구장을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던 선수들은 잠실구장과 동일한 크기의 LG 2군 구장에 압도됐다.
경기초반에는 양팀이 팽팽한 승부를 펼쳤다. 인도의 ‘에이스’마드위는 4회까지 5안타 2실점을 기록했지만, 그 2점은 모두 희생플라이로 허용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인도 타선은 미국 선발 켄드라에게 삼진 4개를 당하며 한 점도 내지 못했다. 4회말 2사 만루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웠다.
인도는 5회부터 두 번째 투수 푸자를 내세웠으나, 푸자는 제구에 문제를 드러내며 주자 2명을 내보낸 채 마운드를 내려갔다. 다음 투수로 나선 니키타 역시 2안타 3볼넷을 내주고 강판됐다. 4점을 내준 인도는 0-6까지 끌려가며 승리와 멀어져 갔다.
인도는 5회말부터 공격의 실마리를 풀었다. 미국 불펜진의 제구 난조를 틈타 볼넷 4개를 얻어내며 3점 차로 추격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구원 등판한 미국의 2선발 오즈에게 눌리며 더 는 점수를 내지 못했다. 미국은 경기 후반 체력이 떨어진 인도 투수진을 공략해 결국 10-3으로 승리했다.
셰를의 역전 3타점 2루타에 환호하는 인도 선수들 (사진=LG전자 페이스북)
이날 경기는 인도 야구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승부였다. 우선 에이스 마드위를 제외하고 믿을만한 투수가 없다는 게 드러났다. 두 번째는 포수 기용의 문제였다. 원래 인도의 주전포수는 푸자였다. 푸자가 맏언니로서 중심을 잡아줘야 했다. 필자도 2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푸자에게 포수 연습을 시켰다. 그러나 하리쉬 코치는 푸자를 포수보단 유격수-3루수-투수로 활용하길 원했다. 물론 기본적인 야구 센스가 뛰어나 유격수와 3루 수비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마운드에서는 구위만 좋을 뿐 제구의 약점을 드러냈다.
푸자가 포수 자릴 비운 사이 상대 주자들은 도루를 여유 있게 성공시켰다. 여자야구의 특성상 포수의 어깨가 약하면 절대 도루를 잡아낼 수 없다. 이날 경기에서 미국은 무려 12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이번 대회 인도의 수비진은 투수, 유격수, 3루수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마드위가 투수 겸 유격수로, 푸자가 투수 겸 유격수 겸 3루수로, 니키타가 투수 겸 3루수로 멀티 포지션을 소화했다. 한 경기에서 이들이 모두 마운드에 오르면 주심과 기록원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전에선 한국인 구심이 선수 교체가 너무 헷갈린 나머지 필자에게 통역을 요청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인도 여자야구 박병호' 셰릴이 친 회심의 한방과 한국전 명승부
대회기간 내내 인도 선수들에게 수시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피했던 선수들이 나중에는 능숙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사진=LG전자 페이스북)
조별예선 2차전 상대는 한국A팀이었다. 한국A팀은 한국B팀보다 좋은 전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세계최강 일본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팀답게 실력이 뛰어났다. 그래선지 대표 관계자들은 이번 대회 최고 스타감으로 주목받던 여중생 투수 김라경을 앞세워 한국A팀이 조별예선쯤은 가볍게 1위로 마무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한국에 맞서는 인도는 너무나 초라했다. 필자는 인도가 콜드게임패를 당하리라 생각했다. 그저 한국에 한 수 배우는 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래서 경기 전 한국팀 인스트럭터인 양승호 롯데 전 감독에게 인도 선수들의 수비훈련 지도를 요청했다. 양 전 감독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경기 전 한국과 인도 선수들이 함께 어우러져 수비훈련을 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인도 선수들에겐 잘 훈련된 한국 선수들의 수비 자세를 직접 보고 배울 기회가 됐을 것이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선발로 등판한 니키타가 볼넷 2개를 연속으로 내주자 인도는 전날 미국전에서 91개의 공을 던진 ‘에이스’ 마드위를 마운드에 올렸다. 마드위는 3회까지 한국 타선을 무자책점으로 막아내는 호투를 펼쳤다. 3회까지 0-2의 승부가 이어지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적의 3회말’ 이 시작됐다.
2회까지 볼넷 하나를 얻어내는데 그쳤던 인도는 3회말 한국선발 정혜민의 컨트롤 난조를 틈타 기회를 만들었다. 볼넷 3개로 1사 만루의 기회를 잡은 뒤, 마드위마저 밀어내기 볼넷으로 걸어나가며 첫 득점을 올린 것이다. 계속된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엔 4번타자 셰를이 등장했다.
고아 지역에서 온 셰를은 매우 흥미로운 선수였다. 델리 합숙훈련에서 처음 만났을 때, 셰를은 비단결 같이 고운 재질의 하늘색 ‘배트 가방’에서 무시무시한 배트를 꺼내 들었다. 무려 34인치-31온스에 달하는 초대형 배트였다. 한국의 야구 동호인들이 주로 28~30온스의 배트를 쓴다는 걸 감안하면 매우 무거운 배트였다. 배트 모델명마저 ‘HAMMER’ 라고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31온스를 그램으로 환산하면 약 878.8g. KBO리그 타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880g짜리 배트와 비슷했다. 홈런왕 박병호(넥센)가 올 시즌 사용한다는 배트무게(900g)와도 불과 21g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홍콩전에서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경기에 임하고 있는 인도 선수들(사진=박종규)
인도 선수 가운데 가장 큰 체격의 셰를이 이렇게 엄청난 배트를 휘두르려면 큰 스윙을 해야 했는데, 역시 제대로 스윙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지 어정쩡한 자세로 헛스윙만 남발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셰를에게 “제발 가벼운 배트를 쓰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셰를은 “이걸로 홈런을 쳐본 적도 있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전 첫 타석에서 셰를이 삼진을 당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왔을 때 필자는 “만약에 다음 타석에서 안타를 못 치면 가벼운 배트로 바꾸자”고 간청했다. 그랬더니 셰를은 다음 타석에서 그 커다란 배트로 보란 듯이 유격수쪽 내야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배트를 지켜낸 셰를에게 다음날 1사 만루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마운드에는 좌완 원혜련이 있었다. 셰를이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 필자는 “좌완투수 공은 당겨치기 어려우니 바깥쪽 공을 우중간으로 밀어친다는 생각으로 타격하라”고 귀뜸해줬다. 사회인야구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요령이었다.
앞선 타자를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내준 원혜련은 셰를을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넣으려고 했다. 셰를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무시무시한 배트를 휘둘렀다. 잠시 후, 셰를의 타구는 중견수 키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역전 3타점 싹쓸이 2루타. 인도 벤치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한국 벤치는 차갑게 식어갔다. 이번 대회 인도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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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4-2 리드를 잡은 인도는 여세를 몰아 하르시타의 좌전 적시타로 1점, 상대투수의 폭투로 1점을 더 추가했다. 타자일순하며 3안타 5볼넷으로 6득점, 말 그대로 빅 이닝이었다. 6-2로 앞서나가며 인도는 ‘대어’ 한국을 꺾을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물론 인도의 마운드 사정으로 볼 때 4점 차는 한 순간에 따라 잡힐 점수 차이긴 했다.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한 한국은 이민정, 김미희, 양인숙 등 주전 멤버들을 교체 투입했다. 마운드엔 에이스 강정희까지 올렸다. 한국 타자들은 베이스에 나가기만 하면 2~3루 연속도루를 했다. 인도의 주전포수 푸자가 한국전에선 유격수 위치에 있어 가능한 도루들이었다.
한국은 4회부터 점수차를 조금씩 좁혀갔다. 4회에 1점을 추격하더니 5회엔 결국 6-6 동점을 만들었다. 인도 에이스 마드위는 구위를 잃고 장타를 허용했는데, 인도 코치들은 한국의 곽대이, 유경희 등 강타자들의 타석에서도 좌익수에게 전진수비를 지시했다. 결국 곽대이는 5회 좌익수 키를 넘어 펜스까지 굴러가는 타구로 인사이드파크 홈런을 만들어냈다. 그는 6회에도 똑같은 코스로 3루타를 쳐냈다.
예상대로 한국은 6회에 4점을 추가해 10-6 승리를 거뒀다. 분명 한국에게는 쉽지 않은 경기였다. 인도는 1점을 뽑아내기도 어려울 것 같았던 한국을 상대로 한 이닝 6득점이라는 기적을 연출하며 야구의 진수를 선보였다. 이날 경기를 계기로 필자를 포함한 세계여자야구 관계자들은 인도 여자야구의 잠재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이날 짜릿한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선수들은 인근의 놀이공원 나들이에 나섰다. 토요일이라 인산인해를 이룬 그곳에서 인도 선수단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필자 역시 선수들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며 이날 경기만큼이나 짜릿한 순간을 함께 즐겼다.
설사와 부상으로 무너진 인도 여자야구
발목부상을 당한 쁘리앙카가 구급차로 이송되고 있다. 대회 관계자들이 몰려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델리 선수들만이 활짝 웃으며 친구를 안심시키고 있다.(사진=박종규)
대회 3일째 인도가 만난 상대는 타이완이었다. 인도는 지난해 대회에서 타이완에 완패당한 바 있다. 역시 인도에겐 벅찬 상대였다. 게다가 일부 인도 선수들은 복통 증세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사실 인도 선수들에게 식사 문제는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었다. 특히 일부 채식주의자 선수들에게 한국음식은 항상 경계 대상이었다. 대회본부에서는 이 같은 인도 선수들의 성향을 고려해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는 메뉴를 따로 준비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
하지만 인도와 한국의 환경은 너무나 달라 인도 선수들은 설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도 인도에 처음 갔을 때 위험한 음식을 피하면서 나름대로 대비했지만, 결국 설사라는 통과의례를 치러야만 했다. 한국에 처음 온 인도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경기 전 필자는 점심식사를 선수들과 함께했는데, 채식주의자 선수들은 과일만 잔뜩 쌓아놓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고기를 먹지 않는 선수들이 과일만 먹고 과연 무더위 속에서 2시간 넘게 경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과일만 먹고 선발로 등판한 푸자는 1.2이닝 동안 2안타 3볼넷 5실점을 기록하고 마운드를 마드위에게 넘겼다. 여기다 전날 한국전에서 127개의 공을 던진 마드위의 어깨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눈에 띄게 구위가 떨어진 마드위의 공은 타이완 타자들에게는 배팅볼 수준이었다. 도루는 무려 22개를 허용했고, 수비진마저 3회말에만 5개의 실책을 범하며 와르르 무너졌다.
이 와중에도 인도 타자들은 최선을 다했다. 0-5로 뒤지던 3회초 4점을 뽑아내며 타이완을 위협한 것이다. 셰를은 이날도 3회초 중견수 키를 넘는 2루타를 날리며 자존심을 지켰다. 패배 속에서도 타자들은 경기를 풀어나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6-17로 크게 뒤진 인도는 콜드게임패를 목전에 둔 채 5회초 공격을 시작했다. 2사 3루 상황에서 중전안타로 3루 주자를 불러들인 쁘리앙카는 2루 도루에 성공했다. 곧이어 3루 도루까지 시도 했는데, 이 때 3루에서 태그아웃을 당한 뒤 일어나지 못했다.
슬라이딩 도중 발목이 골절된 것이었다. 고정식 베이스에 대비한 슬라이딩 연습을 하지 않은 게 원인이었다. 인도에선 이동식 베이스를 발로 밀어내며 엉덩방아를 찧는 식으로 슬라이딩을 하는데, 고정식 베이스에서 그렇게 슬라이딩을 하면 베이스를 밟은 채 발목이 꺾일 수 있었다. 그게 현실이 된 것이었다. 쁘리앙카는 긴급히 그라운드로 들어온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됐고, 경기는 타이완의 17-7 콜드게임승으로 끝났다.
승리 열정이 불같았음에도 한없이 즐겼던 인도 여자야구
이번 대회 4경기에서 19.2이닝 동안 375개의 투구수를 기록한 에이스 마드위(사진=박종규)
대회 마지막 날 인도는 7위 결정전에 나섰다. A조 최하위(4위) 인도와 B조 최하위 홍콩 간의 ‘탈꼴찌 싸움’이 펼쳐졌다. 예선 3경기에서 1무 2패를 기록한 홍콩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인도가 형편없는 실력을 가진 팀이 아니라는 걸 양팀 선수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날 경기에선 인도 최고의 포수 푸자가 드디어 포수로 선발출전했다. 필자는 경기 전 연습 때 의도적으로 푸자에게 2루 송구연습을 시켰다. 이를 본 상대팀이 도루를 마음껏 시도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홍콩 선수들이 벤치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푸자는 흠 잡을 데 없는 송구능력을 선보였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서 홍콩은 단 3차례 도루를 시도했고, 푸자는 이 중 한차례 도루저지에 성공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선발로 나선 에이스 마드위는 이번 대회 최고의 투구를 선보였다. 이닝 첫 타자에게 출루를 허용할 때마다 1점씩 내줬지만, 맞춰 잡는 피칭으로 추가 실점을 막았다. 이날만큼은 야수들도 빈틈없는 수비로 마드위의 호투를 뒷받침했다. 마드위는 미국전 91개, 한국전 127개, 타이완전 49개를 던진 데 이어 이날 6이닝을 완투하며 108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4일 연속 마운드에 올라 팀의 전체 23이닝 중 19.2이닝을 책임진 것이다. ‘혼자 다 던졌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셰를은 6회초 좌익수 키를 넘어가는 2루타로 다시 한번 4번 타자의 위용을 뽐냈다. 3경기 연속 장타였다. 이번 대회 마지막 타석까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인도 최고의 거포임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역시 행운의 여신은 인도를 향해 웃지 않았다. 인도는 홍콩에게 2-5로 패하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위안이라면 이날 경기내용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 그 원동력은 부담없이 경기에 임한 선수들의 자세였다. 승패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야구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선수들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끊임없이 서로가 대화하며 경기를 풀어갔다. 인도에서 주말마다 뜻맞는 이들과 어우러져 흥겹게 야구를 즐기던 바로 그 분위기였다.
‘꿈의 무대’ 를 향한 재도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놀이동산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인도 선수들(사진=박종규)
이번 대회에서 인도는 4전 4패의 전적을 남겼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성적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은 결코 패배자가 아니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자세로 도전했고, 어떤 상대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뭉쳤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이번 대회의 경험은 내일의 승자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라젠더 감독은 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다른 나라와 실력차이가 크지 않다. 단지 연습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라고 총평했다. 이어 “일주일간의 합숙훈련은 충분하지 않았다. 최소한 한 달 정도는 훈련을 해야 되는데, 연맹에서 그에 따르는 비용을 지원해줄 수 없는 게 문제” 라며 인도야구의 엄혹한 현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인도야구가 세계 무대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량 향상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들을 가공하는 지도자들의 과제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선수들을 육성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지도자들이 조금 더 노력한다면, 인도 최고의 선수는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재정적 지원이다. 그동안 인도야구가 국제대회에 나서지 못한 것은 재정적인 문제가 항상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서 LG 측의 경비 지원을 받았던 것처럼 자국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하면 앞으로도 국제대회에서 인도야구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인도야구 관계자들은 국제대회 경험이 야구 발전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을 청하고 있다.
수 년째 제자리걸음을 거듭하던 인도야구는 이제 조금씩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여자야구는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무대’라는 자신감을 얻은 상태다. 다음 목표는 2016년 8월 부산 기장군에서 열릴 제7회 세계여자야구월드컵이다. 1년 후, 인도야구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 필자 박종규는 xportsnews, 스포츠투데이에서 야구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삼성 SDS 인도법인에서 네트워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귀국할 때마다 자비를 털어 포수 장비와 글러브를 구입해 인도로 돌아가는 그는 야구열정과 ‘야구 보급’이라는 사명감을 안고 오늘도 회사 일과 인도 야구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야구 지도에 젊음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정리 :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