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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34-37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
성경본문 : 다니엘 4: 34-37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36.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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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오창우 목사
할렐루야!
우리나라가 참 잘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에 땅덩어리가 커서, 아니면 자원이 많아서, 인구가 많아서 잘 사는 나라가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신앙인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잘 사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고난을 겪었기때문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잘못하면 일제36년의 고난도 오고, 625전쟁 같은 어려움이 와서 나라를 빼앗기면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들이 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람이 변하니 땅이 좁고 자원이 없고 인구가 적어도 오늘날 이런 큰일들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은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도 그 사람이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일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IQ가 좋으면 공부를 잘 하는 것입니까? 집중력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IQ개발보다는 집중력에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중력을 가진 아이들이 공부를 잘합니다.
마찬가지로 집중력을 가진 사람들이 직장생활도 잘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좋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교회생활을 잘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한 사람이 완전히 변화가 되는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느므갓네살입니다.
느므갓네살은 바벨론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왕으로 뽑히는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하나님이 꿈으로 보여주시는데 나무가 자라서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 열매를 먹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순간에 그의 나무를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힘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사람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625전쟁 기념주일이기도하고 625를 상기하자는 상기주일이기도 합니다.
625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아픔도 컸지만 625전쟁을 통해서 우리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이 자세를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70년대에 그렇게 어렵게 해서 만들어 논 이 나라! 80년대의 번영에 도취돼 버리니 625를 잊어버리는 동시에 그때 깨달았던 삶의 자세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겸손케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큰 영화를 누리던 느므갓네살 왕도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다 잃어버리고 7년 반 동안 고난을 겪는 일이 나오고 있습니다.
A. 다니엘서 4장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35절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들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37절 “...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잠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잠18:12“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교만한 것 그 자체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몇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 풀무불의 기적을 보게 함으로(1-3)
- 꿈으로 경고하심으로(4-5)
- 다니엘의 가르침으로(19-27)
- 고난의 경험을 하게 함으로(28-33)-“열 두달이 지난 후에..(29).”
- 그루터기를 남겨두심으로(26)-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31)
그런데 12달이 지나도록 그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마 12달이 지나면서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12달이 지난 어느날 자기 업적에 도취되서 혼자말로 중얼거리기를 “내가 새운 도성과 이 거대한 바벨론을 보아라 나의 권세와 능력과 영화와 위엄이 그대로 있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느부갓네살아! 너에게 선언하노라. 왕권이 너에게서 떠났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앗수르와 유다를 심판한 그 회초리로 하나님께서 자기 느부갓네살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대 제국인 바벨론을 세운 것이 자기 능력인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물론 느부갓네살왕은 찬란한 바벨론의 문화를 꽃피운 왕이고 인재를 등용할 줄 아는 능력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이 하늘이 찌르니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경고하신대로 그를 치셨습니다. 7년 동안이나 들짐승과 함께 살면 소처럼 풀을 뜯어야 하는 비참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야만 교만한 느부갓네살왕이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과 누구든지 그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나라를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달아 할 것은 무엇입니까?
25,26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 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우리가 흔들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 있든 흔들리는 사람은 조그만한 일에 난리를 피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조금 남보다 가져도 교만해 집니다. 그 이유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모르기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2:6-11(예수님)“...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을 하십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셔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믿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아니면 힘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자가 되라는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온유해지셨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겸손해지셨습니까?
여러분 이 짐은 얼마나 지고 사십니까?
여러분 마음의 쉼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쉬지를 못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여러분들의 마음이 흔들립니까?
오늘날 한국사회가 흔들립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는데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야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든, 가정이든, 교회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여러분은 얼마나 받아드리십니까?
여러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가 겸손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온유함이 지상의 누구보다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 겸손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도 네 사명이 끝났다고 하니 끝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40년동안 이 고생을 했는데 여기를 못 들어 가보고 끝나다니.... ’
그러면서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다’ 하시면 ‘네’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속에서 이렇게 하실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욥의 고난이 언제 끝납니까? 욥의 고난이 끝나는 것은 1장부터 욥의 얘기가 나오면서 고난이 계속 됩니다. 그 고난이 계속되는 시간속에 있는 것은 논쟁이 있습니다. 죄가 있다, 없다! 그래서 고난이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편도 들어주시지를 않습니다. 42장에 와서는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고 믿은 때가 고난이 끝나는 때였습니다. 그러고 나니 원수가 그를 향해서 축복을 하고 그를 향해서 제사를 드려주고 하나님이 그런 인생의 복을 주십니다.
오늘 이 사회가, 오늘의 교회가, 오늘의 가정이 회복되어야 할 것은 다시는 우리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 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흔들리는 사람들은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과연 나의 삶속에, 나의 입술속에, 나의 믿음속에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이 있는지 말입니다.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은 커다란 나무는 베지만 뿌리는 남겨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깨닫고 돌아올 때
를 위해서입니다. 그때 그루터기에서 새순을 나오게 해서 전보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가장 큰 복중에 하나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깨닫는데도 사람마다 유형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깨닫고 믿는 백부장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만 듣고도 눈이 떠진 바디매오가 있습니다. 매를 맞을 때야 비로서 깨닫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요나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매를 맺으면 맞을 수록 완악해 져서 아무것도 못하도록 완전히 눕혀 놓는 느부갓네살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죽어야 깨eke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에서 부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미 늦였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사람이십니까? 소문만 듣고도 은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것도 못하도록 눕혀놓기 전에, 오랜 시간 연단 받으시기 전에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중에 한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을 허리에 동이라고 벨트가 없으면 바지가 흘러내려서 힘을 못씁니다. 우리 힘은 겸손입니다.
벧전5:5“...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오늘도 이 시간 나를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나를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B.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신 계명 두 가지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사랑입니다.
제가 나누어서 여러분에게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겸손하려면 자기를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1. 자기를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흔들리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물질입니다. 여러분 돈 벌고 교회 나가실래요, 교회 나가서 돈을 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이 순서를 때에 따라 바꿉니다. 시간이 있으면 교회에 온다는 성도분들과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내 시간을 내는 것, 때에 따라서 바뀝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말이나 생각을 잘 보세요.
내가 어디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나에게 초점을 맞추시나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시나요?
내 시간이 항상 앞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항상 앞에 있습니까? 내 것을 다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봐도 됩니다. 겸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다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해결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이 항상 물질을 가지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물질과 하나님을 저울질 하면 안됩니다.
또 두 번째는 요즘 민주화시대라고 해서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사람의 소리인지, 하나님의 소리인지 잘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겸손한 사람은 항상 초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 인생이 내가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살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교만이 하늘이 찌르듯, 느부갓네살 왕이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아십니까?
34절“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 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 에 이르리로다”
기한이 찼습니다. 나 느부갓네살 왕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내 총명이 내게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총명이 있기를 원하시면 하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바라 보아야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정신차리니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도 하고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도 경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5:30“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니 병이 나고 탈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내 주변으로 오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내 주변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자기를 높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잘난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면 사람들이 따르게 돼 있습니다. 진짜 좋은 사람이 따르게 돼 있습니다.
맹의순씨라고 기억하십니까?
기독교 작가인 정연희씨가 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제목의 책은 신학교 출신의 맹의순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소설이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입니다.
맹의순 선생은 6.25 사변의 피난길에서 공산당으로 오해를 받고 체포를 당해 포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원래 그의 삶은 이웃을 돕고 복음증거에 헌신적인 사람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가 공산당으로 오인을 받아 포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아마 보통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이 억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높이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었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전도사로 만드시더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실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가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그곳에 전도할 수 있는 대상과, 자신이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모아 광야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광야교회를 시작하던 날, 너무 기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여기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를 여기에 보내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어째서? 왜?'라는 질문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일 때 평안이 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중공군 포로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하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갈 수 없었던 중국, 그곳에 가기 위해서 일생을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가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 앞에 중국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다니...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선교 현장으로 보내 주셔서 섬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니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날마다 감격이고, 날마다 선교현장이며, 날마다 봉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는 세월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친구들이 그가 억울하게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석방 탄원서에 자기의 이름만 서명하면 수용소를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서명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보내셨는데, 나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새벽 세시까지 중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손발을 씻기고 복음을 전하고, 찬송가를 가르쳐 주고, 시편 23편을 읽어주다가 갑자기 그가 쓰러졌습니다.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그의 장례식은 수용소 밖의 어느 교회에서 진행되었는데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어떤 사람이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그 장례식장의 자리에서 이 편지가 읽혀졌습니다. 그것은 중공군 포로들이 쓴 편지였습니다. 한국말로 번역된 편지 한 부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맹의순 선생 영전에 드립니다.
평화의 왕, 화평의 사도, 인애의 왕,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던 맹의순 선생이 정말 가셨습니까?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포로의 옷을 입은 그가 미국 군인의사들을 도우며 우리 병동을 찾아오던 초기에 우리는 그를 경멸했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늘 온화했고 우리를 돕는 그의 행동은 희생과 헌신으로 언제나 꾸밈없이 한결같습니다.
우리는 대개가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고 우리를 전장에 보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맹선생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글씨를 가르쳐 가며 찬미가를 불러 주셨고, 나무 십자가를 안고 다니며 그 뜻을 성심껏 설명해 주셨습니다. 선생은 새벽 한 두시면 늘 병동으로 오셨습니다.
초저녁에 치료와 간병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나서 중환자들이 더욱 심하고 무거운 고통에 짓눌리는 시간에 선생은 고통을 다스리는 천사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선생의 한 손에는 성경책이,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선생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골고루 만져 주고 주물러 주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선생의 손에는 신비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 손이 얼굴에 닿으면 시원하고 가벼워졌습니다.
선생이 발을 씻어 주시면 천상에 오른 것처럼 평화로워지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염치없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그 분의 손으로 씻기움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선생에게서 사랑의 신이 계시다는 것을 보고 깨닫고 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별로 불편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맹 선생의 숨결은 우리의 껍데기를 녹여 주었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고 두껍고 어둡던 마음의 문을 기도와 찬미의 손과 사랑으로 녹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의 시작이 예수 그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중공군 포로들은 이 편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곡합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통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맹선생과 함께 주님 안에 있습니다.” - 거제리 포로 수용소, 중공군 병동의 환자 일동 -
36절, 느부갓네살의 고백입니다.
36절 “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내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에, 나의 명예와 위엄과 나라의 영화가 회복되었고, 나의 고문관들과 대신들이 나를 찾아왔으며, 나는 이전보다 더 큰 영예를 받으면서 왕위를 회복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높이려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높이면 사람들이 떠납니다.
잘난 척하다가, 밑 둥 잘린 나무처럼 고난과 부끄러움 당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겸손함을 입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더 아름답게, 더 귀하게 높여주실 것입니다.
- 시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습2:3, 시147:6,10:17)
하나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2. 자기를 낮추지 말고 상대방을 높이십시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두 번째 과제는 사람을 보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당연히 낮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낮추는 것이 겸손의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높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부모에게 잘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교만해지려는 죄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세요. 바리새인은 자칭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자랑이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한다, 십일조를 한다... 우리가 신앙안에 있으면서 남을 무시합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낮추기가 매우 힘든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벌레만도 못한 인생들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더라도 마음은 안그렇습니다. 만약에 우리 기도하신 분께 “여러분! 벌레만도 못하고 죄인의 괴수인 이 사람이 기도해 주셔서 했습니다.”라고 하면 기분나빠했을 것입니다. 말로만 그러는데 실제적으로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만큼 우리들이 자기를 낮추기가 힘듭니다. 낮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초점은 상대방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전국의 화물차가 파업을 했습니다.
공장도 가동을 하지 않습니다. 수입도 수출도 안됩니다. 그 결과 물류대란이 생겼고 온 나라의 경제가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하찮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1세기의 리더십은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서번트(Servant)라고 하는 것은 종인데요 종, 머슴로서의 리더십은 상대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1977년 AT&T의 경영관련 교육담당자로 있었던 로버트 그린리프)
서번트 리더십의 아이디어는 헤르만헤세가 지은 `동방순례`라고 하는 단편집에서 라고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레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돈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할 때 머슴입니다. 여행단의 잡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짐들고 빨래하고 허드레 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자,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지식 있는 사람들이 이 머슴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레오가 없어졌습니다.
갑자기 일이 생겼는데, 과연 이 짐을 누가 들고 갈지, 이 풀은 짐을 누가 싸며, 누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할지 누가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여행이 실패합니다.
그 여행단 중 한 사람이 레오를 찾습니다. 그래서 그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무시 할 사람,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받은 은혜를 자기를 높이는 것보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더 못합니다. 그래서 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난 척’ ‘겸손한 척’ ‘거룩한 척’ 되지도 않는 ‘척, 척, 척...’ 하다가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책망받는 교회처럼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것일 수 있고 부한 것 같으나 가난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지 높여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사는 길입니다.
-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그러므로 나를 낮추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남을 높여주고 세워주는데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자연히 높여주십니다.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에게 말합니다.
단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 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죄악에서 떠나 공의를 시행하되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지 말고 긍휼..불쌍히 여기는 상대의 입장에 서서 사랑을 하면 왕의 평안함이 장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안하지 못한 것은 상대방과 싸우고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도 사랑하면 평안해 질 줄로 믿습니다.
수년전에 미국 국립정신건강 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 실험은 8마리의 쥐를 160마리 정도의 쥐를 수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210㎤의 네모상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8마리에게 물과 음식을 충분히 주고 쥐가 늙어죽는 것을 제하고는 죽을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한 지상천국이었습니다.
2년 반 만에 8마리의 쥐는 2,200마리로 늘어났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상자 안에 더 이상 번식할 수 없는 상황, 스트레스가 쌓일 만큼 쌓인 상황에 쥐들을 그대로 두고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을 실험심리학자인 존 칼훈(John Calhoun) 박사는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160마리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 2200마리가 사니 쥐 사회는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쥐 중에 12마리 정도가 배타적인 집단을 형성하며 특별한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하고, 지도적 위치에 있던 수컷들이 자기 역할을 중단하고 자기만 살려고 수동적으로 변하는 대신 암컷들이 사나워졌습니다.
암컷들은 새끼들을 내몰고, 새끼들은 자기 역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며 마음대로 먹고 마셨습니다. 어린 쥐들은 사회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해 제멋대로 행동했고 정상적인 활력도 찾지 못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먹을 것이 계속 공급되는 등 다른 조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쥐들은 결국 5년 만에 한 마리도 안남고 다 죽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칼훈 박사가 발견한 것은 쥐들의 강한 독립성과 극단적 고립증후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쥐들에게 가장 복잡하고 강렬한 행위인 구애와 교접행위가 맨 먼저 중단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접근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고립시키고 고독을 즐기다 혼자 죽는 것입니다.
칼훈 박사는 쥐 실험으로 얻은 관찰 결과를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발표하기를, 사람도 마찬가지로 탈출할 수 없고 스트레스 요인을 동반한 과밀한 상태에서는 먼저 사고가 중단되고 목표와 이상 그리고 가치기준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자 사람들은 모든 것이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감싸고 고립시킵니다. 그러다 각자 외로워하며 죽게 됩니다.
여러분 요즘 세상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살아가면 결국에는 다 망하게 돼 있습니다.
여자들의 힘이 점점 세져, 드라마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시대는 지나가고 여자가 남자를 때리는 시대가 왔습니다. 남자가 한 대를 때리면 여자는 두 대를 때리고, 남자가 두 대를 때리면 여자는 세 대를 때리면서 발로 찹니다. 여자에게 쩔쩔매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남자들은 점점 기가 죽습니다.
현실적으로 남자들이 50세가 넘으면 여자들에게 맥을 못 춥니다. 갈수록 더 합니다. 따라서 남자들의 지도력이 점점 약해집니다.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분야에서든 여자들의 진출이 괄목할 만큼 두드러집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쩔쩔매면 자녀들 앞에서 아버지의 위치가 서지 않으니 가정이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생활은 풍요로워지고, 사람이 즐겁고 재미있게 지낼 여건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사람들은 한결같이 외로워 못살겠다고 합니다. 전부 고독합니다. 그 이유는 돕는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마음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신 한마디 말씀이 상당히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뱡황하는 인생들에게 들어가셔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병든 자를 섬겼습니다. 가난한 자를 섬겼습니다. 그럴 때 우리를 섬기러 왔던 삶의 모습 속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망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섬기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사랑이, 이 겸손이 우리 부부사이에 들어가면 이 부부사이에도 새로운 사랑의 관계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굳어지고 강퍅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과 섬김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곧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섬김과 사랑이 부부 사이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부부 간에도 새로운 사랑의 관계가 싹트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섬김과 사랑이 가정 속에 들어갈 때 부모와 자녀가 모두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섬김과 사랑이 국가와 사회 속에 들어갈 때, 그 민족과 국가가 회복되고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용서가 나타나고, 화해가 나타납니다.
지금처럼 각박하고 절망적이며 메말라가는 우리 가슴과 사회 속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주님의 섬김입니다.
섬김이 회복될 때 정작 우리가 찾던 삶의 가치와 목적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그 시간에 성찬식과 더불어 떡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복음이 섬김이라는 그릇에 담겨지지 않으면 복음이 복음 될 수 없기에 세숫대야 속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에게만 관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도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옳으니라” 옳은 일을 하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적용
겸손하게 살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
나를 높이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지 말고 상대방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돼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고 견고케 하심이 있고 평안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C.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기도
37절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 벧전5: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느부갓네살 왕도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찬송하며 경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찾아야 하고 회복해야 할 것은 겸손함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시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겸손을 회복해서 이 625전쟁 기념주일에 우리가 다시 주의 은혜로 회복되고 승리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