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들지 않는 길 (잠 22:26-29)
26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27 만일 갚을 것이 내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28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이 시간에 “시험 들지 않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실족시키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려주신 말씀이 마18:6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리라”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이 일 때문에 자신은 물론 세상에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유태인 600만을 죽였던 히틀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재혼한 유태인 아버지와 함께 살 때 유태인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열두 살 어린이다 보니 인생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머니의 재혼 그 자체가 충격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든 내가 시험에 들거나 내가 시험 들어 남을 시험에 빠뜨린다는 것은 큰 죄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우리의 영혼이 시험 들지 않고 사는 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 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시험들 올무를 멀리해야 합니다.
26-27절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내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함부로 보증을 서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보증을 서지 말라는 교훈이 잠언에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6:1, 17:18, 20:16, 그리고 본 절입니다. 그만큼 보증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보증을 잘못 선 보증인이 대신 빚을 변재하거나 깊지 못할 때는 대신 종이 될 때도 있었습니다.
왜 보증을 서지 않아야 합니까?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증했다가 쪽박만 찬 사람들 많이 보셨지요? 그러나 일이 잘못되어 더 큰 서운함이 오기 전에 거절하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에게도 보증 서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교회가 주는 사례나 생활비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일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을 위한 공인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시험 들면 교회가 시험 듭니다.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누가 보증 서달라고 하면 가족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사업이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남의 집에 들어가 배우든지 작게 시작하며 경험을 쌓아가야지 처음부터 남의 돈으로 하려고 하면 그건 99% 실패하게 됩니다. 투자로 봐서도 이건 무모한 투자입니다.
그래서 “만일 갚을 것이 내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율법에는 비록 빚을 졌더라도 몸을 가린 옷은 저당 잡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출22:26, 신24:12) 이 계명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빚보증하다가는 이처럼 최악의 상황에 도달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보증은 내가 올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6:1-5에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세상 죄는 올무와 같아요. 짐승을 잡는 덫이 올무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잡으려고 온갖 세상 죄와 이단사상과 세상철학을 마련해 놓습니다. 방법은 그보다 더 잘 알고 또 멀리 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하면 시험 들게 되어 있어요.
보증이 잘못된 계약이듯 세상 사랑도 위험한 계약입니다. 세상사랑은 영적으로 간음이고 이것은 배우자에 대한 계약파기를 의미하며 새로운 대상에 대한 언약을 의미합니다.
민25:2-3에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했습니다. 여기 가담했다는 말이 개역성경에는 부속됐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나 세상 사랑이 바로 위험한 계약입니다. 이건 100% 나의 모든 영적 보물들을 다 빼앗기게 되는 위험한 것입니다. 세상 사랑하면 영적인 모든 보물을 다 쏟아버립니다. 나중에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의 수치를 가릴 옷인 행위마저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계3:17에 주님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책망하셨습니다.
2. 말씀의 경계선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28절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옛 지게석이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여호수아가 각 지파별로 분배한 토지의 경계를 나타낸 표식인데, 율법은 어떤 경우에라도 한 지파의 토지를 다른 지파에게 매매하거나 빚 대신 취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이는 어디가지나 이스라엘 백성들 중 일부라도 삶의 터전이요 생계의 근원인 토지를 상실함으로써 형제의 종이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종속관계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 했지만 나봇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옮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험 들지 않으려면 말씀의 경계선을 넘지 않아야 합니다. 고전4:6에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했습니다. 경계를 넘는 것이 시험이요 죄요 죽음이요 이단입니다. 사람들이 기록된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경계를 넘습니다.
의를 주장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 감정으로 나가면 죄가 됩니다.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 신비주의로 나가면 죄가 됩니다. 성도의 교제도 좋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넘어 가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자동차를 주행할 때도 도로의 황색선은 넘지 않아야 합니다. 바다의 생물이 경계를 넘어 육지로 나오면 죽음입니다. 반대로 육지 생물이 바다로 가면 죽습니다. 이처럼 기록된 말씀을 넘어서면 안 됩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시험 두려운 줄 모르고 함부로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성경 말씀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지켜 줄 것입니다.
3. 신앙생활에 능숙하시기 바랍니다.
29절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여기 자기의 일은 사업을 말하고, 능속하다는 것은 부지런하다 근실하다 솜씨가 좋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두각을 나타내고 인정을 받아 마침내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광야에서 양을 칠 때 양들을 잘 쳤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물맷돌 던지는 연습을 능숙하게 했더니 그 재주 하나로 아버지의 양을 구하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다윗이 찬송도 잘했습니다. 찬송 열심히 했더니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 결과 왕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능숙해야 할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눅22:39-40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습관이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최후의 순간에도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호7:15에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오른팔이 강한 권능을 상징합니까? 많이 쓰는 팔이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팔을 능숙하게 자주 썼더니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능숙하게 해야 승리합니다. 권능이 임합니다.
꼭 오른손만 그럴까요? 사사기 보면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아시죠?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인데 왼손잡이였습니다. 그러나 단도로서 모압 왕을 암살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모압을 쳐부순 뒤 80년 동안이나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습니다. 왼손도 열심히 연습하면 오른손과 같습니다. 서투르다 못한다 핑계 대지 말고 열심히 신앙생활하십시다.
기도에 일등, 찬송에 일등, 전도에 일등, 감사에 일등, 성령의 불이 임하도록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그러나 딤후3:5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형식적인 믿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데교회와 같이 살았다하는 이름만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형식주의는 하나님의 임재를 제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산출할 수도 없기 때문에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막 9장에 귀신 들려 쓰러져 거품을 흘리는 한 아이를 보신 예수님은 이 세대를 "믿음이 없는 세대"(19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하늘로 이륙할 때 가장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능력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경외해야 합니다. 방해하는 세력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능숙한 자만이 다가오는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기도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남을 실족시키는 것만 두려운 것 아닙니다. 내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도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탄의 올무요 잘못된 계약인 세상 멀리하고, 말씀을 사랑하여 그 경계 안에서 살며, 기도생활에 적극적이고 능숙하여 어떤 일에도 시험 들지 않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