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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에 부흥을 주소서
성경본문 : 느헤미야 8:1-12
사람들은 누구나 영화를 좋아합니다. “저는 별로 안좋아하는데요” 라고 말하시는 분도 앞에 두 글자만 붙이면 모두 좋아합니다. ‘부귀영화’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을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지 않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돈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인정도 받고, 영광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성지가족 모두 부귀영화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문제는 세상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를 누릴 때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가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세상이 추구하는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삶을 복 있다고 가르치셨을까요?
세상의 부귀영화는 환경과 조건의 지배를 받습니다.
돈이 행복의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은 돈이 없으면 금방 불행해집니다.
세상의 권력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은 권력에서 밀려나면 금방 불행해집니다.
저는 5선 의원을 지내고, 6선 의원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낙심하여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분의 장례를 치룬 적이 있습니다.
초선도 힘든데 5번이나 국회의원 했으면 원이 없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계속 더 큰 욕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는 진정한 만족이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욕망의 굴레를 씌워서 스스로를 감옥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기준을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면 상황과 환경 따라 흔들립니다. 온도계는 환경에 따라 오르내립니다. 그러나 온도 조절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삶은 온도계 같은 삶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세상의 욕망은 마시면 마실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마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시대를 이렇게 진단하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8:11) 이 시대의 기갈은 바로 말
씀입니다.
우리가 진정 목말라해야 할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인간은 방황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혼돈과 좌절에 빠집니다.
그래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6:1-3)
하나님은 우리가 패역한 길로 걸어갈 때 찢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를 매를 들어 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힘써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삶, 자신의 패역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영혼의 목마름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부흥(REVIVAL)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죽었던 자가 소생하는 것, 침체되었던 자가 활력을 되찾는 것, 절망 가운데 있던 자가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의 부흥입니다. 내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흥성회를 하는 이유는 내 영혼의 회복과 부흥입니다. 침체되었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새롭게 소성케 되는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면 모든 삶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부흥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부흥은 삶에 활력을 줍니다. 부흥은 놀라운 축복을 일으킵니다. 낼 저녁부터 진행되는 부흥성회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대하시고,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복된 성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난 영적 대 부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벽을 재건한 느헤미야는 영적 부흥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벽을 쌓았다 할지라도 성벽이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성벽 안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아무리 컴퓨터의 하드웨어가 좋아도 소프트웨어가 좋지 않으면 고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했지만 그것은 하드웨어를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보다 마음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를 초청합니다. 에스라 목사님을 모시고 영적 대각성 부흥성회를 수문 앞 광장에 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 부흥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은혜의 자리로 함께 모이라.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 하던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성벽을 쌓았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쌓은 성안에서 안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쉬고 싶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영적인 갈급함을 느꼈습니다. 70여년 동안 제대로 말씀을 듣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편안함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1절 말씀에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당시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의 백성들은 적어도 3만에서 5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누가 모이라고 소집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모든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모였습니다.
우리들이 부흥을 경험하는 비결은 먼저 은혜의 자리로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말씀의 은혜를 사모할 때 더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개인적으로 말씀묵상(QT)를 통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일 때 더 큰 은혜가 임합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의 불이 임할 때도 120명의 성도가 함께 모였습니다. 각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사모하며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불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려면 먼저 은혜의 자리로 함께 모여야 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들을 모이지 못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방해를 합니다. 갑자기 아프거나,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게 만듭니다.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 새벽기도회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방해공작을 기도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번 부흥에 먼저 모이기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7곱 번의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느 시간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시간 시간 은혜를 사모하며 참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했듯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우리들이 은혜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함께 모이면 살지만 흩어지면 죽습니다. 서로를 격려하여 모든 시간 부흥에 참여하여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는 두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번 성회에 은혜 주시면 좋고, 안주시면 할 수 없고... 이런 태도를 가지면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12년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에 손만 대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던 것처럼 간절함으로 모여야 합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합니다. 모든 백성이 율법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섭니다.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선포될 때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응답합니다.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무려 6시간 이상을 말씀에 집중합니다. 느헤미야 8장 18절에 보면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항상 말씀에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42:1-2)
시편 119편 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다윗은 항상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먹으려고 입을 열고 헐떡였습니다.
진정한 부흥은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목마름은 영혼이 건강하고 하나님이 부흥을 주신다는 신호입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더 달라하면 그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음식이 맛없다고 하고, 투정한다면 그 사람은 어딘가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먹고, 또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하늘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보고를 여는 마스터 키입니다.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된 존 워너 메이커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 장관직을 제안 받았습니다. 그 때 그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저는 토요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제 고향 필라델피아에 가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해야 합니다. 주일마다 주일학교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수락해주신다면 체신부 장관직을 수락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장관을 맡지 않겠습니다.”
기자들이 그에게 주일학교 교사직이 체신청 장관직보다 중요하냐고 물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관직은 임시직, 부업이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교회학교 교사직은 영원한 직책이고 나의 본업입니다.” 그리고 기자들이 어떻게 백화점 왕이 될 수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저는 45년간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달려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마 6:33입니다. 그 말씀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입니다.”
기자들이 다시 묻습니다. “당신 생애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1때에 2불 75센트를 주고, 할부로 산 빨간 성경책을 지금까지 보물처럼 소중히 여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항상 백화점 안에도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말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과서로 여기고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워너메이커는 미국 최고의 백화점 왕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 인생을 밝혀주는 등불입니다. 내 인생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교과서입니다. 말씀 안에 삶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십시오. 날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그리고 깊이 묵상하십시오. 말씀이 나를 사로잡게 될 때 내 인생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라.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소리로 들을 때가 많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칭찬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태도가 중요합니다. 옆 사람이 들어야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듣고, 내가 은혜 받고, 내가 변화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어지면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아멘’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먹는 숟가락입니다. 이것은 설교하는 목사에게 힘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임을 내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멘입니다. 입술에 아멘이 많은 사람은 말씀을 경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또한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습니다. 말씀이 그들의 삶의 죄를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면서 반응합니다. 얼마나 백성들이 말씀 앞에 흐느껴 울었던지 말씀을 선포하던 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9절)
매 주일 마다 설교 시간에 졸고 있던 여자 집사님이 그 날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 속으로 내 설교가 오늘 은혜스러운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집사님에게 “오늘 무슨 특별한 은혜가 임하셨나 보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제가 애지중지하면 키우던 강아지가 어젯 밤 갑자기 죽었어요. 목사님 말씀을 듣든데 어찌나 죽은 강아지 생각이 나던지요. 그래서 제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목사님 죄송해요.”
진리의 말씀이 선포될 때 마음이 감동되어 눈물로 반응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감격하여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여전히 강퍅한 상태로 머무는 자들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도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오히려 옥에 가두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말씀 앞에 자신을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와 세례를 받고 주님을 영접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랍비여, 나는 토라를 세 번 훑었습니다.”
그랬더니 랍비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토라는 당신을 몇 번 훑었습니까?”
내가 몇 번 말씀을 읽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느냐가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반응이 나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10절)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으면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말씀의 은혜를 받았어도 나만 누린다면 합당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나눌 때 그 능력을 더 크게 나타납니다.
18세기 초반, 미국과 영국에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과 영국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사람들마다 술에 취하고 집집마다 주정뱅이들이었습니다. 욕을 하지 않고는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방탕하고 타락했습니다. 가장 많이 걸린 병이 성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존 웨슬리(John Wesle),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일어나 하나님 말씀을 전하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과 사회가 변화했습니다.
제일 먼저 술집이 문 닫고, 범죄율이 줄어들고, 가정이 화목해졌습니다. 심지어 짐승들조차 사람들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욕을 섞어 명령을 했는데, 욕을 빼고 말을 하니 못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대나 경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바른 반응에서 온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매 주일마다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영광을 돌리고, 말씀 앞에서 내 죄와 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어본 적은 언제 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내 삶에 힘이 되고 능력이 됨을 경험 적은 언제입니까?
금번 가을 부흥성회를 통하여 우리의 메마른 심령에 말씀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함께
모이기에 힘쓰십시오. 그리고 불방이같은 말씀이 나에게 임하시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말씀 앞에 반응하십시오. 그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붙들고 순종의 삶을 사십시오. 그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든든한 바위가 되심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메마른 심령위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고,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서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내 영혼에 부흥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