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족대는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901번지의 동창천 암벽 위에 세워져 있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1479-1552) 가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지내면서 후진들을 교육하기 위해 우연(愚淵)이 있는 운문산 아래 세운 건물로, 김대유의 호를 따라 삼족대라 이름 지었으며, 조선 중기의 문인들인 조식(曺植)·박하담(朴河淡)·주세붕(周世鵬)·김응조(金應祖)·김극일(金克一)·신계승(申季誠) 등과 강론하던 곳이다. 김대유의 본관은 김해이고 제학 김준손의 아들이며,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기도 하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07년(중종 2) 현량과의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의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에 이어 정언, 칠원 현감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모든 직을 사임하고 향리(鄕里)에 은거하면서 후진들의 교학과 휼민 사업에 힘쓰게 되었는데, 이때 강정(講亭)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삼족대를 건립하였다.
김대유의 자호(自號)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는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벼슬도 현감을 지냈으니 벼슬로도 만족하고, 항상 밥상에 반찬이 부족하지 않으니 먹는 것도 만족하고, 나이도 환갑을 넘겼으니 수명(壽命)도 만족한다 하여 삼족(三足)이라고 이름 지었다.
청도 삼족대는 학일산의 지맥이 동창천으로 숙으러드는 등성이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북쪽 평지 위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방형의 담 안에 토석의 담장을 두르고, 동북쪽 사주문을 달았다. 삼족대는 토석 담장 안에 배치되어 있는데 담장의 서북 모퉁이에도 사주문을 달아서 출입을 하고 있다. 삼족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북쪽 2칸은 통으로 된 방이며, 반 칸 정도는 전퇴를 물려 마루를 놓았다. 남쪽에 있는 전면 1칸 앞뒤로 두 칸은 통마루로 되어 있다. 마루의 남쪽 면과 뒷면에는 두 쪽으로 열수 있는 판문을 내었고 온돌방 앞쪽에는 양쪽으로 열수 있는 두 개의 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일반 양반집의 문처럼 두 짝의 열 개 팔모 불발기가 있는 살문을 달았다. 구조를 보면 네모진 자연석에다 초석(礎石)을 놓고 건물의 바깥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세웠다. 청도 삼족대에서 보면 바로 아래 남쪽에 한단 낮은 대지 위에 삼족대의 관리사로서 방 2칸과 부엌과 방앗간이 ‘ㄱ’자로 배열된 하당(下堂)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삼족당의 신도비가 서 있다. 삼족대 언덕 아래 벼랑에는 물에 뜬 강정(江亭)도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으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다시 세워지를 여러 번 하였다가 김대유의 13대손 김용희에 의해 새롭게 단장된 건물이다. 지금은 언덕 아래 청도군에서 6각 정자를 지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