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 기도와 신비한 은혜
오늘 아침 가정 예배의 본문은 누가복음 3장 후반부였는데, 그 가운데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왔다.
눅 3:21-22, “21.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본문에서,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기도하실 때에”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기도’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변화산 사건 본문에서도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셨다고 기록한다.
눅 9:28-29, “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눅 18:1)을 ‘과부와 재판장’ 비유로 말씀하셨다. 또한 마지막 날에 대한 강화에서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고 명하셨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또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새로 신도가 된 삼천 명을 비롯하여 제자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라는 말씀이 계속 이어진다.
이처럼 누가-행전은 기도를 강조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두 먼저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받고 그 후에 희년을 선포하고 실천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본문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라는 말씀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이 예수님은 구약이 예언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자(시편 2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시라는(이사야 42장) 의미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지만, 우리도 이 말씀을 붙잡고 소망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늘이 열리고,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임하시어(성령의 내적 충만) 우리 성품이 거룩하게 변화될 뿐만 아니라 우리 위에도 충만하게 임하시어(성령의 외적 충만) 우리가 권능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좋겠다고 말하고 그렇게 함께 기도했다.
신구약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며”라는 말씀은 비단 예수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와 같은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스데반은 순교 직전에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의 성자 하나님을 본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열린다는 의미의 핵심이다.
이는 예언자 에스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겔 1: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기서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리며 그 모습이 보인 하나님은 바로 “사람의 모양”(겔 1:26) 같이 나타나신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겔 1:28)이신 하나님 곧 성자 하나님이셨다.
나는 오래 전에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적이 있다. 전에 아이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 준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1990년대 후반에 나는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기도하곤 했다. 당시에 나는 대학 안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곳을 찾았는데, 최적의 장소가 바로 학생회관 옥상이었다. 그 옥상에 올라가면 대각선 맞은편 가장 자리 바로 앞에 엄폐물이 있어서 그 가장 자리가 내 기도처가 되었다.
문제는 다른 학생들도 그곳까지 오는 경우가 있어서, 나만 홀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아, 아무도 오지 않을 시간이 언제일까 생각하다가 햇볕이 가장 뜨거운 정오 12시로 정했다. 마침 그 가까운 맞은편에는 1층 학생식당에서 올라오는 증기를 배출하기 위해 팬이 큰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해도 그 소리 때문에 밖에 잘 들리지 않을 것이어서 안성맞춤이었다.
정오 12시의 학생회관 옥상은 마치 광야나 사막처럼 햇볕이 강렬하고 뜨거웠지만, 기도하는 내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임한 빈들처럼 여겨졌다. 작은 스티로폼이 마침 그 자리에 있어서 그 위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며 찬송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고 또 침묵으로 기도했다.
당시 내 기도제목의 핵심은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오, 예수님! 나의 사랑이시여! 오, 예수님! 나의 전부이시여!”라는 기도와 함께, “예수 영광, 예수 통치! 통일한국, 예수님의 나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선포하게 해 주소서!”, “성경의 토지정의가 실현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의 고통에서 해방되게 해 주소서!”, “남과 북이 성경의 토지정의가 실현되는 희년 한국으로 통일되게 해 주소서! 제사장 나라, 선교 한국이 되게 해 주소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옥상에서 기도하고 식사하러 1층 학생식당에 내려왔는데, 한 후배를 만났다. 그는 정의로운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인 후배였는데, 나를 오해하여 미워했다. 그런데 그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놀란 얼굴로 말하기를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찌된 일인지를 내게 물었다. 나는 내 얼굴에서 빛이 나는지를 전혀 몰랐다가, 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방금 옥상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 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말은 그 훨씬 전인 고등학생 3학년 때 다른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광주 광덕고등학교에서 나는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함께 ‘한빛’이라는 신우회를 만들었다. 그 첫모임을 방과 후에 운동장 구석의 농구장 옆에서 했는데, 그때 친구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신우회와 학교 친구들과 학교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하교를 하는데, 그 자리에 없었던 한 친구가 하교하다가 나를 보고 놀라면서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옆에서 계속 말했던 적이 있다.
학생회관 1층 식당에서 그 일이 있은 후로 그 후배는 나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고,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대해 주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나는 그를 두 번 만났다. 한번은 성남 주민교회에서였는데 그가 나를 만나려고 일부러 찾아왔었다. 성남 주민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신 이해학 목사님이 희년 사역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셔서 삼일절 교회 창립 기념일에 나를 설교자로 초청해 주셨는데, 그 후배는 그 교회를 다니지 않았으나 내가 강사로 온다는 인터넷 광고를 우연히 보고 일부러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번은 대천덕 신부님의 장례식장인 성공회 대성당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 오랜만에 서로 반가워하며 장례식이 끝난 후에 걸어가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라는 말씀을 보면서, 그 두 번의 사건이 기억난다. 하나님은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그리고 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홀로 기도하는 나를 기뻐하셨고 그래서 그런 신비한 은혜의 선물을 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본질은 신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지난 1999년 봄에 3개월 동안 예수원에서 지원 훈련을 받을 때,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나는 바로 형제 야외 기도처로 가서 찬송하고 기도했었다. 큰 나무 십자가 제단 앞에 서서 키 큰 나무들의 가지들과 푸른 잎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내 마음의 눈으로 하늘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의 어린 양 예수님을 바라보며 찬송하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 심령에 큰 은혜를 부어주셨다.
그때 그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 아이들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그리스도인 여러분들도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 되셔서 “기도할 때에 하늘이 열리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