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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간의 전생애 중 80여 년을 미술에 바친 피카소는 회화·조각·소묘·도자기·시 등의 무수한 작품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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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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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가 그린 유화 〈Seated Harlequin〉(19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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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생애]
그는 소묘를 가르치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와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세가 되던 1891년 그의 가족은 라코루냐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울 때부터 피카소는 이미 남달리 뛰어난 소묘 실력을 발휘했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에 놀란 아버지는 자신의 야망을 온통 아들에게 쏟으며 어린 피카소에게 모델을 구해주었고 13세에 첫번째 개인전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1895년 가을 피카소의 가족은 다시 바르셀로나로 이사했으며 그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소묘를 가르치던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가족들은 피카소가 전통적인 화가로 성공하기를 바랐는데, 1897년에 그의 아버지를 모델로 그린 〈과학과 자선 Science and Charity〉이 마드리드 미술 전시회에서 가작 입선하자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이 젊은 화가가 명성을 얻고 가족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1897년 가을 피카소는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의 교수법이 따분하다고 느낀 피카소는 카페·사창가 등을 배회하며 그곳의 생활을 그리는 데 더 열중했으며, 프라도 미술관을 자주 찾아가 스페인 회화의 진수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벨라스케스가 최고이며 엘 그레코는 위대한 몇몇 대가들 가운데 속하는 반면, 무리요는 별로 감동을 주지 않는다"라고 썼다. 이곳에서 감상한 작품들은 평생 그의 상상력을 자극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1898년 그가 이곳에서 묘사한 고야의 작품들, 즉 〈투우사 페페 이요의 초상 Portrait of the Bulfighter Pepe Illo〉과 한 뚜쟁이가 젊은 여인의 스타킹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묘 〈됐어 Bien tirada está〉에 나오는 인물들이 피카소의 후기 작품에도 등장한다. 1957년 제작한 인그레이빙 연작에 페페 이요가 재등장하며, 특히 〈판화집 347 Suite 347〉(1968)에 실린 일련의 에칭 및 인그레이빙 판화들에는 여자 뚜쟁이인 셀레스티나가 일종의 관음증적(觀淫症的)인 자화상으로 다시 나온다.
1898년 봄 피카소는 병에 걸려 바르셀로나에서 사귄 마누엘 파야레스와 함께 카탈루냐 지방의 오르타 데에브로에 가서 1년 내내 휴양을 하며 보냈다. 1899년초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는 미술학교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의 성을 더 선호하여 작품에 종종 P.R. Picasso라고 서명했다. 1901년말경에는 서명에서 Ruiz를 완전히 빼버렸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는 파리를 동경하고 있던 카탈루냐 미술가·작가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그들은 파리의 카페 '검은 고양이'(Chat Noir)를 본뜬 그는 '4마리의 고양이'(Els Quatre Gats)에서 자주 모였다. 1900년 2월 그곳에서 그는 바르셀로나에서는 첫번째로 전시회를 가졌는데, 전시된 작품들은 그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다양한 재료로 그린 초상화 50여 점이었다. 그밖에도 죽어가는 여인의 임종을 지키는 한 사제를 주제로 하여 그린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임종의 순간 Last Moments〉도 전시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해에 열린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렸다.
피카소는 적절한 작업환경을 찾을 겸,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리를 직접 경험하고 싶어 동료인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초상 Portrait of Carlos Casagemas〉, 1899)와 함께 파리로 가서 몽마르트르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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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파리 방문]
피카소가 파리 여행중(10~11월)에 얻은 귀중한 미술적 성과는 색채의 발견이었다. 전통적인 스페인 회화의 충충한 색채, 스페인 여인들이 즐겨 걸치는 숄의 검정색조, 스페인 풍경에서 흔히 보게 되는 황갈색조나 갈색조가 아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와 국제박람회가 열리는 그 도시가 펼쳐보이는 전혀 새로운 색채를 경험한 것이었다. 피카소는 목탄·파스텔·수채·유채 등 다양한 매체로 파리의 생활을 묘사했다(〈거리의 연인들 Lovers in the Street〉, 1900).
또 〈물랭 드 라 갈레트 Moulin de la Galette〉(1900)에서는 카탈루냐 출신의 라몬 카사스뿐만 아니라 툴루즈 로트레크나 스탱랑 같은 프랑스 화가들을 모방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실연으로 의기소침해진 친구 카사헤마스 때문에 겨우 2개월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말라가에서 카사헤마스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수 없게 되자 마드리드로 떠났으며 그곳에서 새로운 잡지 〈젊은 미술 Arte Joven〉의 미술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는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심한 충격을 받았으나 그 사건은 감동적인 '청색 시기'의 작품들을 낳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몇 개월 후 1901년에 죽은 카사헤마스를 그린 2점의 초상화와 2점의 장례 장면, 즉 〈조객들 Mourner〉·〈초혼(招魂) Evocation〉을 그렸다. 카사헤마스는 또한 1903년에 그린 수수께끼 같은 그림 〈인생 La Vie〉에서 예술가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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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부터 1904년 중반까지 피카소의 회화는 청색이 주조를 이룬다. 피카소는 당시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오가며 작품의 소재를 구했다. 예를 들어 1901~02년에 파리에 있는 생라자르 여자 교도소를 방문하여 그린 감동적인 주제와 인물을 표현한 〈수프 The Soup〉(1902), 1902~03년에 바르셀로나 부랑아들을 묘사한 〈웅크린 여인 Crouching Woman〉(1902)·〈장님의 식사 Blind Man's Meal〉(1903)·〈늙은 유대인과 소년 Old Jew and a Boy〉(1903) 등이 있다.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던 당시의 여자 교도소에서 보았던 모성애는 그후 피카소가 전통적인 미술사의 주제를 20세기의 미술 언어로 표현해내기에 적합한 소재를 찾을 때 다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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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의 이주]
1904년 봄 피카소는 파리로 영구 이주할 결심을 했다. 이당시의 작품에는 정신적인 변화, 특히 지적·예술적 환경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유랑 서커스단이나 곡예사라는 주제는 파리에서 새로 사귄 기욤 아폴리네르와 공통된 관심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떠돌이 광대들은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Girl Balancing on a Ball〉(1905), 〈광대 The Actor〉(1905)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아폴리네르와 피카소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처지를 일깨워주었다. 특히 피카소가 그린 〈곡예사 가족 Family of Saltimbanques〉(1905)에는 이처럼 그들 자신을 떠돌이 광대와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는데, 피카소는 어릿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고 아폴리네르는 건장한 광대의 모습이다.
1904년말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났고 1906년 그녀와 함께 고솔로 여행을 갔다. 이때 올리비에를 모델로 〈여인과 빵 Woman with Loaves〉을 그렸다. 그밖에도 그녀는 조각 작품 〈여인 두상 Head of a Woman〉(1909)과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린 〈여인과 배 Woman with Pears〉(1909) 같은 몇몇 그림들을 비롯한 초기 입체파 시기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한다. 피카소의 그림에서 색채는 결코 수월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전통적인 스페인풍의 색조로 되돌아갔는데, 1904년말에서 1906년의 청색조는 도기·피부색·대지를 연상시키는 장미 색조로 나타나 이른바 장미색 시기를 열게 된다(〈하렘 The Harem〉, 1906). 피카소는 특히 1906년 조각적 형태에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 색채 실험을 한 듯하다(〈2개의 누드 Two Nudes〉·〈머리 단장 La Toilette〉).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Portrait of Gertrude Stein〉(1906)과 〈팔레트를 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alette〉(1906)에는 이같은 노력이 보이며 원시적인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도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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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말경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1907)이라는 대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여성의 신체를 심하게 왜곡시키고 얼굴을 가면처럼 그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얼굴을 가면처럼 그린 것은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연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술사의 전통에 확고하게 기초해 있다. 엘 그레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분열된 공간 표현과 인물들의 몸짓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반면, 전체적인 구성은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Bathers〉 및 하렘의 정경을 그린 앵그르의 그림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 친구인 막스 자코프가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비뇽 거리의 유명한 사창가를 지칭하여 붙여준 작품의 제목이 그렇듯이, 이 작품은 충격적이고도 날카롭다. 여기에 묘사된 여인들은 전통적인 아름다운 여성상이 아니라 바로 그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매춘부들인 것이다. 그무렵 레오 스타인, 거트루드 스타인, 러시아 상인 세르게이 슈추킨 같은 수집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사들이고 있었으나 피카소는 이 작품을 둘둘 말아 여러 해 동안 내버려두었다. 아프리카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데 이어, 1908년 그는 새로 사귄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세잔의 작품을 연구했고 거기서 발견한 요소들로 새로운 기법을 구사했다. 특히 피카소의 1909년 작품에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 얕은 공간 표현과 독특한 평면적 화면 처리가 두드러진다. 피카소로서는 처음으로 정물화를 중요하게 다루게 된 점 역시 세잔의 영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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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1909~12년의 3~4년간 피카소와 브라크는 함께 매우 긴밀한 작업을 하며 이른바 분석적 입체파로 알려진 미술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같은 공동 작업은 피카소의 평생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처음에 감상자들은 물론 비평가들조차 그들의 작품이 단순히 기하학적인 구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종종 잘못 이해했다. 그러나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이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 특히 원근법과 3차원적 공간 표현에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리얼리티를 제시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예로 그들은 단일하고 제한된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도록 복수 시점을 화면에 도입했다. 칸바일러가 간파했듯이 입체주의는 3차원적 표현 방식을 통한 단순한 모방 대신에 대상의 형태 및 공간 속에 그것이 놓여 있는 상태를 '다시 제시'함으로써 닫혀진 형태를 펼쳐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다. 대상·공간·명암, 심지어 색채까지도 단편화시키는 입체주의의 분석적 방법을 아폴리네르는 외과 의사의 시체 해부술에 비유하기도 했다. 1909년 이후, 특히 1909년 여름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그린 풍경화들(〈오르타데에브로의 공장 Factory at Horta de Ebro〉)에서는 이러한 분석적 경향이 특징을 이룬다. 그후 1910년에 〈앙브루아즈 볼라르 Ambroise Vollard〉·〈다니엘 앙리 칸바일러 Daniel-Henry Kahnweiler〉 같은 일련의 밀폐된 초상화를 그렸으며, 1911~12년에는 〈아코디언 연주자 The Accordionist〉(1911)와 같이 악기를 연주하며 앉아 있는 인물들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들에서는 인물과 사물 및 공간이 일종의 격자형 구도 속에 한데 뒤섞여 있다. 색채는 다시 갈색, 황토색, 회색의 단색조로 제한되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복수 시점, 복수 기준축(軸), 복수 광원과 같은 서로 일치되지 않는 여러 회화 요소들을 한 화면에 도입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완전 추상의 방향으로 나아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한 화면에 추상적·재현적 요소를 모두 삽입하면서 신문 문구들과 같은 2차원 요소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그림에 삽입된 노래 제목 '내 귀여운'(Ma Jolie)만으로도 회화 영역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나타낼 수 있는 동시에 당시 피카소의 새로운 연인 에바(마르셀 윙베르)를 지칭할 수 있었다. 또한 그 활자체는 회화의 구성 요소가 되기도 하여 다른 회화 영역들이나 곡선형의 모티프에 상응하는 평면적인 회화 요소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림 속에 글자를 삽입하는 것은 또한 입체파 회화가 전통적인 원근법에 따르는 회화에서처럼 그림의 주제를 화면 안으로 후퇴하면서 전달하기보다는 화면의 표면에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했다. 또한 캔버스의 모양을 변형시킨 것(예를 들어 타원형)은 입체파 회화에서는 캔버스 자체가 진정한 회화 공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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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경 피카소와 브라크는 실제의 종이를 화면에 부착하거나(파피에 콜레) 다른 재료들을 붙여(콜라주) 자족적인 대상으로서의 미술 작품이라는 입체주의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발전했다. 이른바 종합적 입체주의(1912~14)라는 이 시기의 화면에는 색채가 다시 등장했고 사포·벽지 등 콜라주된 실제 삶의 편린들이 종종 산업화된 현대문명을 암시했다. 이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는 정물화를 주로 그렸고 때때로 인물 두상을 그렸다. 기타를 암시하는 동시에 귀를 나타낼 수도 있는 곡선과 같이 피카소의 종합적 입체파 작품들에 깔려 있는 복합적인 암시는 익살스런 요소(〈파이프를 문 학생 Student with a Pipe〉, 1913)로 작용했고,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일변시키는 착상을 낳게 했다. 예를 들어 6점의 〈압생트 잔 Absinthe glass〉(1914)은 청동조각이면서 콜라주(작품 꼭대기에 실제로 은제 차 거르개를 용접해놓았음)이고 또 한편으로 회화(흰 바탕에 점묘법으로 색점들을 찍어놓았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조각도 콜라주도 회화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3차원의 대상이면서 그 표면은 2차원의 특성을 띠고 있어 결국 그것은 실제와 환영 사이를 배회한다. 1915년경 피카소의 생애에 변화가 생겼고 어떤 의미에서 그의 예술의 방향도 바뀌었다. 그해말 사랑하는 에바가 죽었다. 그녀가 앓고 있는 동안에 그린 〈익살 광대 Harlequin〉(1915,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그의 슬픔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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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극 〈익살 광대의 촌극 Parade〉]
제1차 세계대전은 피카소 주변의 친구들을 흩어지게 했다. 아폴리네르와 브라크를 비롯해 여러 동료들이 전선으로 떠났고 스페인 동료들은 대부분 중립국인 고국으로 돌아갔다. 피카소는 프랑스에 남았고 1916년에 작곡가 에리크 사티와 가까워지면서 전쟁기간 내내 적극적으로 활동한 새로운 전위 모임에 끼게 되었다. 카페 로통드에서 자주 만난 이 재능 있는 예술가들의 자칭 대표는 젊은 시인 장 콕토였다. 장 콕토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과 공연하여 서커스 촌극을 주제로 한 무용극 〈익살 광대의 촌극〉을 전쟁중에 무대에 올리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마천루나 비행기 같은 20세기의 새로운 이미지들을 도입한 이 작품의 음악을 사티에게 맡겼고 무대장식과 의상은 피카소에게 맡겼다. 1917년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여행을 싫어했던 피카소였으나 콕토와 로마로 가는 데 동의했고 그곳에서 디아길레프와 이 무용극의 안무를 맡은 레오니드 마신을 만났다. 바로 이때 무용수들 가운데서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올가 코흘로바를 만났다. 1917년 5월 이 무용극은 파리의 샤틀레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나 프랑스 문화의 결속을 위태롭게 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으로 혹평을 받았다. 악보에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와 타자 치는 소리를 삽입한 사티는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것 같다. 반면에 사실주의풍의 무대막과 파격적·종합적인 입체파풍의 의상을 대조시킨 피카소는 관객의 반감을 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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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중해주의]
1910년대말에 피카소가 그린 회화의 소묘들은 대개 바로 이전의 입체파 작품들과 대조적인 자연주의풍이며 가끔 입체파 양식을 따르기도 했다. 1917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그해 11월에 〈익살 광대의 촌극〉이 공연된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후, 그의 작품에는 새로운 지중해주의 정신이 깃들게 되는데, 특히 고전적 형태와 소묘 기법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1915년의 초상 소묘〈막스 자코프〉·〈볼라르 Vollard〉에서 볼 수 있듯이 앵그르 작품과 르누아르의 말기 작품을 탐구하면서 더 심화되었으며 그의 입체파 작품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면·형태·색채를 뚜렷이 표현함으로써 입체파 그림들에 고전적 표현을 부여했던 것이다(〈3명의 악사 Three Musicians〉, 1921). 피카소는 계속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일했고 마누엘 데 파야의 〈삼각 모자 Three-Cornered Hat〉(1919),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풀치넬라 Pulcinella〉(1920), 데 파야의 〈플라멩코장(場) Cuadro Flamenco〉(1921), 사티의 무용극 〈메르쿠리우스 Mercure〉(1924)의 무대장식을 맡았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 무용극을 위한 무대장식을 초현실주의 정신에서 나온 "어른들을 위한 비극적인 장난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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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공식 회원이 되지는 않았으나 이 운동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다.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를 그룹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예술은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새로운 차원을 획득했다. 〈아비뇽의 처녀들〉 이래로 피카소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가 주창한 많은 요소들이 내재해 있었다. 예를 들어 입체파 작품에서 불연속적인 윤곽선으로 인물을 묘사하거나 인물의 형상을 혼란스럽게 병치해놓은 것에서 확실히 기괴한 형상의 창조를 볼 수 있는데, 브르통은 특히 〈속치마 차림의 여인 Woman in a Chemise〉(1913)에 주목했다. 또한 어떤 것에서 다른 것을 해독해내는 종합적 입체주의의 개념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옹호한 꿈 같은 이미지와 상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운동이 피카소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주제, 특히 호색적인 주제의 선택이었다. 공공연히 관능적이고 왜곡된 형태들로 이루어진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주제의 수많은 작품들(연작 〈디나르 Dinard〉, 1929)은 분명히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며, 반면에 관람객들에게 왜곡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다른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의 심리적인 목표들 가운데 하나를 성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예를 들어 1930~35년의 소묘 및 회화 연작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rucifixion〉). 1930년대에 그는 많은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변형이라는 개념을 종종 주제로 삼았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는 인간과 짐승간의 투쟁을 상징했는데 피카소의 작품에는 그러한 생각을 구현하고 있는 동시에 일종의 자화상 구실을 한다.
마침내 피카소는 시를 써서 가장 강력한 초현실주의를 표현했다. 그는 1934년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35년 2월에서 1936년 봄까지 1년간 사실상 회화를 포기한 상태로 시쓰기에만 매달렸다. 그의 시들은 〈카예 다르 Cahiers d'Art〉(1935)와 〈라 가세타 데 아르테 La Gaceta de Arte〉(1936, 테네리페)에 발표되었다. 몇 년 뒤에 그는 초현실주의 희곡 〈꼬리 잡힌 욕망 Le Désir attrapé par la queue〉(1941)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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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피카소는 자신의 조각을 팔지 않고 대부분 간직하고 있었으므로 사후에야 비로소 20세기의 주요 조각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8년에 조각에 손대기 시작한 그는 파리에 있는 훌리오 곤살레스의 작업실에서 철과 금속판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931년에는 새 연인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 함께 부아즈루의 시골집으로 내려가 살면서 그녀를 모델로 거대한 석고 두상들을 만들었고 일상에서 발견한 물건들을 이용한 조각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후 계속해서 다양한 재료의 조각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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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서정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었고 이따끔 〈거울 앞의 여인 Girl Before a Mirror〉(1932)에서처럼 관능적인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6년 그는 아내 올가, 마리 테레즈 둘 다와 헤어지고 파리로 돌아가 유고 태생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와 살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사생활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던 그 해에 시작된 스페인 내란에 개인적으로 깊이 몰두했다. 피카소는 1934년에 한번 스페인을 다녀온 뒤로는 결코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으나 마음은 언제나 고국과 함께 있었다. 단명한 공화국 정부는 그를 프라도 미술관 명예 관장으로 임명했고 1937년초에 그는 공화국의 신조를 지지하는 일련의 동판화와 애쿼틴트 판화들(〈프랑코의 꿈과 거짓 Dream and Lie of Franco〉)을 판매용으로 제작했다. 그러나 공화국에 기여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작품은 1937년 파시스트들의 폭격을 받은 바스크 마을에서 제목을 따온 벽화 〈게르니카 Guernica〉였다. 이 작품은 공화국 정부가 1937년에 열린 파리 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피카소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그가 이 대작(3.49×7.77m)을 완성하는 데 들인 시간은 불과 3주일 정도였다. 울부짓는 말, 죽은 병사, 죽은 아이를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등 〈게르니카〉에 묘사된 이미지는 각각 투우와 전쟁 및 여자 희생자들을 나타내는 파괴적인 삶을 비난하기 위한 모티프들인 반면, 황소는 보이지 않는 침략자인 파시즘을 이겨내리라는 희망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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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단색조의 〈게르니카〉에 묘사된 형태들과 인물들의 자세는 다분히 표현적인데, 이러한 특성은 피카소의 다른 작품에도 계속 나타났다. 특히 이 작품과 관련된 판화나 소묘뿐 아니라 색채가 강렬한 〈통곡하는 여인 Weeping Woman〉(1937), 도라 마르와 뉘슈 엘뤼아르의 초상화들 및 정물화들(〈빨간 황소 머리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Red Bull's Head〉, 1938)에는 표현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전쟁기간중에는 밀실 공포증을 느끼게 하는 실내화와 해골 같은 소묘들(〈소묘집 110번〉, 1940)도 그렸다. 전쟁이 끝나자 피카소는 다시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4년 가을 살롱전('해방전'이라고도 함)에 지난 5년간 제작한 회화·조각들을 출품하여 일반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게다가 그가 그때 막 공산당에 가담했다고 발표하자 화랑측에서는 그의 정치적 견해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무렵 피카소는 자기 작업실을 장 폴 사르트르, 피에르 르베르디, 엘뤼아르, 사진작가 브로샤이, 영국의 미술가 롤런드 펜로즈, 미국의 사진작가 리 밀러 등 여러 작가 및 미술가 친구들과 수많은 미국 병사들에게 개방했다.
1943년 피카소는 젊은 화가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사랑에 빠졌다. 1946년 그는 그녀와 지중해 연안으로 갔다. 처음에는 앙티브로 가서 그곳에 있는 그리말디성에서 그림을 그리며 4개월을 보냈다. 이때 그린 〈삶의 기쁨 Joie de Vivre〉(1946)과 같은 그림과 1947년초 발로리스 근처의 작업실에서 만든 도자기들에서는 고전적인 전통 및 자신의 지중해 혈통과 동일시하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질로와 살면서 새로이 발견한 행복을 나타내고 있기도 한데 자신은 파우누스나 켄타우로스로, 그녀는 님프로 묘사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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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피카소가 만든 도자기들은 보통 그의 주요 작품들과는 별도로 취급되며 덜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들은 대개가 발로리스의 마두라 도자기 공장에서 도자기공에 의해 만들어진 접시·단지·꽃병들을 고치거나 채색했으며 또는 거기에 구멍을 뚫거나 긁어서 자국을 내고 지문을 남겨서 쓸모없이 만들어놓은 것들이었다. 피카소는 이렇게 하면서 해방감을 느꼈고 장식과 형태 간(2차원과 3차원 사이)의 작용 및 개인적·보편적 의미 사이의 차이를 시험했다. 이무렵 피카소의 명성은 점차 높아져 수많은 방문객들이 그를 찾았는데, 그중 엘렌 파르멜랭, 에두아르 피뇽, 엘뤼아르, 그리고 특히 루이 아라공은 그의 정치 참여를 더욱 부추겼다. 1949년 그는 폴란드의 브로추아프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를 위한 포스터 도안으로 기꺼이 비둘기를 그려주었으나 그것은 공산당에게 헌신한 것이라기보다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평생 진정으로 공감을 느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발로리스에 있는 옛 교회의 부속 건물인 평화의 신전을 장식하기 위해 1952년에 그린 2점의 패널화 〈전쟁 War〉·〈평화 Peace〉는 당시 피카소의 낙천적 인생관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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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신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피카소라는 이름 주변에 신화가 싹터 그의 생애 마지막 20여 년 동안에 그의 작품은 비평을 초월해 존재했다. 그를 공격하는 비평가는 거의 없었으나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만은 예외였다. 그는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1965)에서 피카소의 경제적 동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과장된 그의 명성을 재고했다. 피카소는 말년까지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주로 판화와 소묘)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당시의 주요흐름이던 추상미술과 동떨어졌던 것과는 상관없이 계속 명성을 누렸다. 1953년 프랑수아 질로와 헤어진 뒤, 1954년 발로리스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자클린 로크를 만나 1961년에 결혼했다. 그녀는 그의 반려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년에 그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 뮤즈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녀와 무쟁에서 살았고 1958년에 그가 구입한 보브나르그의 성에 함께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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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피카소는 말년에 주로 미술사에서 주제를 구했다. 때때로 그는 과거 대가들의 작품을 변형시켜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는 알트도르퍼와 마네,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쿠르베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변형시킨 수많은 판화·소묘·회화를 남겼다. 또 어떤 특정한 작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다루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Las Meninas〉을 독립된 58점의 그림으로 변형시킨 연작이다. 그는 때때로 어떤 작품을 개인적으로 동일시하여 그것을 개작했는데,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 Femmes d'Alger〉을 보고 그 오른편에 있는 인물이 자기 아내와 닮았다고 느껴 개작한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과거 대가들이 이미 제기한 회화상의 문제들을 자기 방식으로 재창조하려고 한 피카소는 자신을 과거의 수많은 대가들과 연계시킴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미술사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새기고 있었다. 피카소의 말년 작품에는 새로운 익살 개념이 들어 있다. 그는 종이를 오려서 거대한 조각을 만들었고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영화 〈피카소의 신비 Le Mystère Picasso〉(1955)에서는 유일한 등장인물로 나와 붓뿐만 아니라 빛으로 묘기를 부리는 마법사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과거 대가들의 작품을 개작했던 것처럼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다시 주제로 다루었다. 또 다시 서커스나 그의 화실이 그림의 배경이 되었고 그는 거기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가운데 늙은 곡예사나 왕으로 묘사되곤 했다. 그는 1973년 4월 8일, 91세의 나이로 무쟁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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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초기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이미 엿보이는 피카소의 급진적인 미술 성향으로 인해 사실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20세기의 미술가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티스나 브라크 같은 20세기의 다른 거장들이 그들의 초기 화풍을 끝까지 고수하는 경향을 보여준 반면, 피카소는 말년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이로 인해 그의 생전에나 그 이후에 많은 오해와 비판을 초래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에 와서야 그의 말년 작품들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1920년대부터 매우 비싼 가격으로 작품을 팔 수 있었으므로 자기 작품을 대부분 소장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동안 다양한 매체로 만든 5만 여 점의 작품을 프랑스 정부와 상속자들에게 유증했다.
M. McCully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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