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아니므로
전형철
파란시선 0186∣2026년 9월 1일 발간∣정가 12,000원∣B6(128×208㎜)∣138쪽
ISBN 979-11-94799-41-2 03810∣(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신간 소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쩌면 내가 피하고 피하다 남은 마지막 세상
[밤이 아니므로]는 전형철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잎이 가시가 되는 동안」 「삼보」 「밤이 아니므로」 등 45편이 실려 있다.
전형철 시인은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 [밤이 아니므로]를 썼다. 조지훈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연성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때 검은 무당의 춤사위는 아름다웠다. 전형철의 첫 시집에 펼쳐진 신비로운 둔갑술과 환골탈태한 언어의 다채로운 생명력은 정말로 “지상에서 추는 가장 아름다운 춤”이었다([고요가 아니다]의 해설). 누군가에게는 분명 시적인 영험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뒤에 두 번째로 상재하였던 시집에서는 형상의 구체성보다 말의 무게에 치중하며 이른바 낭만적 시인으로서 시적 세계를 구현하였다. 이는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우리의 실존적 낭만성”으로 확장되며 더욱 단단해졌다.([이름 이후의 사람]의 해설) 그렇다면 이번 세 번째 시집 [밤이 아니므로]는 어떠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번 시집에서 주술의 힘은 휘발되었고, 밤하늘의 천문을 읽어 나간 시선은 땅에 줄곧 머물 때가 많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두 번째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에 마지막으로 실린 「신의 사슬」로 예견된 바였다. 제목만 보더라도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는 듯했다. ‘사슬’이 신을 향한 굳건한 믿음, 신앙적 결속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과감하게 끊어 내야만 하는 족쇄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문득 “나의 얼굴은 바닥의 소유”였음을 무연히 바라보면서, 그 시선은 밤하늘에서 내려와 이내 바닥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장한 마음을 한 “가장 낮은 자의 배후”를 배웅했던 것은 북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결빙의 바람”)이었다. 밤하늘에 별을 좇던 눈은 이제 완전히 땅바닥에 고정된 채로 “하루를 어떤 무늬로 새겨 넣을 것인가”를 골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혀끝에서 “다시 소환할 수 없는 주문(呪文)”이 차가운 바람을 따라 휘발되고 스스로 제 이름(무당)조차 지키지 못했음을 자책했는지도 모른다.
「신의 사슬」은 길게 이어져 이번 세 번째 시집 [밤이 아니므로]의 「북벽」으로 이어졌다. “버려진 허공에 잘못 든 길이 생기는 동안”에 신의 응답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정작 내 “옆구리”에서 생의 진실이 피어나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존재들의 울음과 눈물이 자신의 “곁이 무너지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고, 눈앞에 놓인 “저녁 술잔”에 휘청거리면서 또 다른 길목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땅에서 발을 딛고 있으니 도술이 아닌 스스로의 보폭으로 고독한 여정을 떠나야 했다. 이렇듯 「북벽」에서 바람에 얽어맨 마음의 향방은 신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자의 외로움과 고독의 그늘을 헛헛하게 남긴다. 좌중(座中)의 배치는 인간의 영역에서 행하는 것이지 신의 일이 될 수 없다. 운명의 행방이 어디가 될지 알 수 없었고, 지금 당장 길 위에 살아가야 할 몸에 “미리 연습한 기억” 따위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북벽」). (이상 정재훈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추천사]
슬픔은 나누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수, 여기 그것을 0으로 셈하는 시인이 있다. 전형철은 이 불가능한 계산에 ‘슬픔의 수리학(數理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이 명명 앞에서 오래 멈춘다. 답이 없는 줄 알면서도 셈을 그치지 않는 사람의 필적이 시집 갈피마다 별처럼 박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숫자에 영을 곱하면/0이 되”는 소멸의 산술 앞에서, 그래도 그가 “아프지 말자/아프지 말자” 두 번 겹쳐 적을 때, 이 셈은 얼마나 절실한가(「별내」). “눈물의 모든 이름을 아는 사람”으로서 시인은 무릎걸음으로 눈 내린 절벽 끝에 서거나(「예티」), “두 별 사이에/어금니를 깨물 듯” 기댄다(「북벽」). 답이 오지 않는 밤을 무릎과 어금니로 견디며 밑바닥까지 셈한 슬픔은, 더는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슬픔의 수리(數理)는 어느새 수리(水理)가 되어 다 풀지 못한 셈은 넘치고, 넘친 슬픔은 다른 생으로 번져 간다.
그리하여 시인은 제 울음마저 아껴 남의 울음에 목을 빌려준다. “먼저 간 자의 울음을 대신 우는 것처럼//갈라진 솥을 지고 느리게 걸어”가는 사람(「둔차」), 「곡비」의 가난한 비와 「완신」의 쉰 목소리로 땅을 긁는 무당이 모두 그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육친은 죽고 아이들은 자란다. “늦고 적고 다른 길을 가는 흰 국수 같은 아빠”는(「코코」) “이 바람을 다 타고 넘어야지요”라고(「하원」) 아이에게 타이른다. 존재가 0으로 지워지는 것을 지켜본 사람만이 곁에 남은 목숨이 얼마나 뜨거운 수인지 알기에, 떠난 이를 세던 손으로 그는 아이들의 “두고두고 돌아볼 퇴로가”(「코코」) 되어 주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죽어 본 적 없고 누구도 어떤 별에 닿아 본 적 없지만, 그 유이(唯二)한 저편을 향해 전형철은 “말이 아니면 침략할 수 없는 저 세계로, 모든 것을 거슬러” 걸어간다(「슬픔의 수리학」). “나는 지금/사라질 준비가 되었다”라고 그가 적을 때, 우리는 안다(「둔차」).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부재하는 것들의 슬픔까지 모두 세어 보고자 하는 도저한 의지라는 것을. 이 시집이 오래도록 우리를 대신해 걸어갈 것을 믿는 까닭이다.
―장만호 시인
[시인의 말]
상처 주려 한 것이 아니라 비우기 위해
나는 슬픔 앞에서 자주 무력했다
한때 빛났으나
이제는 서서히 식어 가는 시간들을 타전한다
당신이 없는 문장 속에서 나는 기꺼이,
도착하지 않는 당신을 믿는 쪽에 선다
[저자 소개]
전형철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2007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 [밤이 아니므로]를 썼다.
조지훈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연성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북벽 – 11
잎이 가시가 되는 동안 – 14
삼보(Zambo) – 16
나는 얌전한 돌을 사랑했지만―이매망량(魑魅魍魎) – 18
비(緋)―도플러 효과 – 20
얼굴 행성 – 22
예티(Yeti) – 25
천극(栫棘)―시간의 물고기 – 27
도무지 – 29
라하이나 눈(Lahaina Noon) – 31
제2부
카르만 라인 – 35
닫힌 방―콘클라베 – 37
별내―아내에게 – 39
하얀 빗방울―문진 – 42
코코 – 45
하원 – 49
아홉 – 51
흡혈 – 53
북풍을 타고 – 55
투명 시인 – 58
다른 새벽으로 – 60
빛보다 느린 – 63
제3부
몰(沒) – 67
곡비 – 69
펀치 드렁크(Punch drunk) – 71
앵무 – 74
저녁의 파수(派收) – 76
어름처럼 – 78
작야 – 80
배화(拜火) – 82
미년(未年) – 84
서천―J에게 – 87
탁고(託孤) – 90
별의 말일(末日)―블랙홀 – 92
제4부
국외(局外) – 97
백로 지나 추분 사이―K 형에게 – 99
밤이 아니므로 – 101
송정 – 103
크로노토프(Chronotope)―꿈의 측량술 – 105
이 별 – 107
시설(柹雪)―아버지 – 109
후기 – 111
슬픔의 수리학 – 113
완신 – 115
둔차(鈍次) – 118
해설 정재훈 곁을 지키는 그대여. 마음의 불씨에게 안부를 – 120
[시집 속의 시 세 편]
잎이 가시가 되는 동안
꿈속에 선생을 만났다
담배를 물었다
반가운 나는
선생이 실체인가 다가갔지만
뒷걸음치며 같은 곳을 맴돌았다
몽자와 몽유의 밤을 굴리며
잎이 가시가 되는 동안
잘라 보지 않고는 물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나무선인장처럼
후려갈기는 비바람에
쉽게 멍들고 자주 물렀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쩌면 내가 피하고 피하다 남은 마지막 세상
최선과 집착 사이 한 끗의 줄타기
나는 옆구리에 생긴 푸른 옹이에
주먹을 꼭 쥐어 붙인다
내가 아는 신화의 장자는
모두 죽거나 제구실을 못 했는데
담벼락에 피어 있는 불의 미소를
장미의 주먹을 바라본다
시간의 명세를 감춘 주머니
수없이 구겨진 마른 지화(紙花) 속에 나를 염한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수난
그것을 태우려는
모든 심지에 불을 붙여
물을 담은 가시와
꽃을 피운 가시 사이
잎이 되지 못할 가시를 위해
하루 종일……
*장미의 주먹: 조정권, 「장미의 주먹」에서. ■
삼보(Zambo)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나의 찌꺼기예요
높은음자리표를 닮은 계단에서 항상 내려다보며
잘못 찾은 사전을 손에서 놓지 못하지요
내 오드 아이가
당신의 길을 살펴 주진 못할 겁니다
한 단어가 뿌리내린 시추 점을 찾아
한 개의 심지를 찾아
나에게 손을 내밀겠지요
번번이 바뀌는 증언에 대해 의심하지 마세요
안과 밖 모두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어린아이의 기도가 폭격을 맞았거든요
미망인, 삼보, 말없이 걸어가죠
다시 기본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은혜로운 당신은 지혜롭게도 말합니다
모든 것은 혈관을 흐르는 피톨들의 믿음 때문이라고
어쩔 수 없다고
차라리 잘되었어요
이 네모난 겨울을 벗어나고 싶어요
거울 뒤편의 악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은 은도 금도 내게 없는 것도 당신에게 줄 수 없을 테니까
고양이는 시간이 멈춘 개와 태양으로 향하는 의자 가운데 앉아 있지요
눌은 발음을 비난하지는 말아요
어차피 눈이 보이지 않는 악사의 목소리는
삼보,
신은 미리 연습했을까요
전선으로 향하는 깃발처럼
삼보, ■
밤이 아니므로
이 방은 어두운 방, 거품의 방, 늙지 않는 방, 수헬리베의 방, 침묵의 방, 고통의 방, 리라의 방, 정오를 건너는 방
내 것이 아니었어야 하는 방, 깊은 잠 조용히 내려온 방, 뚫어져 밑창에 닿은 방, 첫 화장에 혼자 눈부신 방, 꽃 피고 슬픈 방, 흩어져 버릴까 꼭 쥔 방, 이렇게 주머니에 몰래 넣는 방, 누구도 찾지 않는 방, 숨죽여 아직은 아닌 방
가슴과 마음 밖에 있는 방, 꽃도 곰팡이도 없는 방, 언제나 네가 없는 방, 처음부터 없던 방, 이렇게 좋을 일도 없는 방, 어떤 눈동자도 없는 방
너라는 눈부심과 가장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꿈꿨던 방, 그래서 다시 심연에 깃든 괴물을 찾는 방, 울타리 너머를 오래 바라보다 서서히 양의 미소를 닮아 가는 여우의 방
가지고 싶으면 그렇게 네가 꾸려야 하는 방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가는 방, 그리 다녀갔는지도 모르는 방, 이끼와 얼룩만 가득한 방, 자기 목소리로 천년 동안 통곡을 듣는 방
나 말고 너를 보내야 맞는 방, 내일은 일어나기 싫은 방, 집으로는 다시 올 수 없는 방,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방, 그래서 시침(時針) 위에 누이는 방
셋 중 둘이 고발하는 방, 굳은 맹서(盟誓)를 허무는 방, 방의 밖과 자는 방, 그 방에서 종말을 끌어안고 웃는 방
그렇게
방이 아닌 방
방이 아니어야 하는 방
당신들이 다 다녀간 방
영원히 없는 방
그래서 네가 지금 떠났던 방, 또 떠나는 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