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철학의 발단
실존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철학사조는 1930년대에 독일에서 형성되었고, 그 이후 여러 유럽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실존철학은 그 뿌리를 삶의 철학에 두고 있다. 헤겔의 추상적인 관념론에 반대하고 정신이나 이성이란 낡은 개념 대신에 구체적인 삶을 철학적 주제로 다루기 시작한 삶의 철학이 보다 철저화된 모습으로 실존철학은 등장하였다. 공허한 형이상학적 명상을 거부하고 삶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한 삶의 철학의 운동은 실존철학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삶의 철학이 문제시하는 ‘삶’(Leben)이란 개념이 철저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삶의 현상들을 유형화하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선 실존철학은 이와 같은 상대주의적 요소를 거부하고 하나의 절대적인 삶의 철학을 형성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물론 이 실존철학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을 지배한 정신적 상황, 즉 전쟁이 가져다 주는 극한적 상황은 이제 더 이상 대상적인 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없게 하였고, 나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 미련을 가질 수 없게 하였다. 이 시대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것, 즉 더 이상 대상화할 수 없고 객관화할 수 없는 최종적인 삶의 문제에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지 않으려고 도망치다가 할 수 없이 절벽에 뛰어 내렸고, 다행히 절벽 한 가운데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은 건졌지만, 아래는 시퍼런 바다 속에 악어가 입을 벌리고 서 있다. 그리고 내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는 거의 썩어 부러질 정도가 되었는데, 그 남은 부분마저 생쥐가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다. 이런 한계 상황에서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성이나 정신 혹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 남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삶에 대한 불안은 그 시대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에게 만연되어 있었다.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무너지게 되었고, 역사는 반드시 진보할 것이라는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인간은 불안이라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가장 적나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던져졌고, 아무런 대상이 없는데도 하염없이 현기증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전쟁이 가져다 준 죽음의 문제를 바로 자신의 문제로 싸안아야만 했고, 죽음에 이르는 절망적인 존재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을 가속화한 것은 그 당시의 산업화나 기계화가 안겨다 준 인간의 소외 현상이다. 이것은 군중과 집단에 휩싸여 자신의 삶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왜소한 인간 그리고 기계화에 의해 단지 부품으로 전락한 바퀴벌레 같은 인간으로 변신한 현대인들은 이제 삶이란 문제를 철저하게 해명하고 한계상황을 극복하려는 철학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이란 개념은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아주 명확하고 결정적인 체험 능력을 사상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 실존이란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삶을 표현하는 생계와 같은 외면적인 실존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계를 잃는다’거나 ‘잘산다’ 혹은 ‘죽지 못해 산다’는 등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외면적인 삶의 양식인 경제적 부나 육체적 건강 혹은 지적 풍요로움에서 오는 상대적인 실존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핵심, 즉 마지막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삶의 체험을 지칭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부나 건강이 비록 인간의 삶의 외면적 치장을 해줄 수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건, 예를들어 죽음이나 불안과 같은 것들 앞에서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체험하는 실존이란 사건은 인간의 외면적인 삶의 내용들이나 형편들을 초월한다.
실존은 Existenz의 번역어인데, 이 말은 existentia라는 중세의 용어에서 연유한다. 이 말은 중세의 본질(essentia) 개념과 짝을 이루는 것이다. 이 본질은 “어떤 무엇이 바로 그것인 바”, 즉 나무가 나무인 소이를 일컫는다. 즉 어떤 것의 우연적인 속성들을 제거하고 남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래 전통철학은 존재자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왔다. 말하자면 본질철학이다. 예를들어 ‘망치’란 대상의 본질은 망치를 못이나 책상 등과 구분하여 주는 보편적 속성, 즉 ‘못을 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실존을 의미하는 existentia는 영원불변한 실재로서의 본질이 아니라, 현실적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개의 현실존재, 즉 현존(Dasein)을 의미한다. 여러 내용적인 규정들을 다 제거하고 남아있는 오직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런데 실존철학에서는 이 현존이란 개념의 외연이 좁아진다. 즉 인간의 현존을 특히 실존으로 부른다. 인간을 제외한 여러 존재자, 예컨대 산이나 나무, 신과 고양이 등은 존재하지만, 인간은 실존한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부채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에 있어서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신에게는 존재가 문제될 필요가 없고, 동물에게는 문제화할 능력이 없는데 반해, 인간은 마치 달팽이가 자신의 껍질을 평생 짊어지고 살듯이, 자신의 삶을 항상 문젯거리로서 짊어지고 산다. 이와 같은 인간의 특이한 존재방식은 실존이라고 칭한다. 이런 맥락에서 샤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전통철학에서는 본질이 실존에 항상 앞선다. 플라톤에 있어서 개체는 보편자인 이데아를 모방으로 하여 제작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데아란 본질이 먼저 주어져 있고 이를 모방으로 비로소 개체의 존재가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중세철학에서도 실존은 본질에 대한 보충물이나 우연적 속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실존철학의 형성과 더불어 인간의 구체적 현존을 실존으로 지칭하게 되었고, 이 실존을 본질에 앞서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인간과 사물은 똑 같은 현실존재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개별성과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현존이 본질에 대한 단순한 부가물로서 생각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망치는 못쓰게 되면 ‘저’ 망치로 대체될 수 있지만, ‘이’ 인간은 ‘저’ 인간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인가”하는 전통적인 물음은 인간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제거한 이후 개념적으로 본질을 규정하려는 물음이다. 사물과 신은 단지 거기에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항상 자기의 문제로 끌어 안아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이라는 추상적인 껍질에서 튀어져나와 각자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와 씨름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어떻게 사는가가 일차적인 문제이다. 인간에게는 현실적 존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본질이 정해진다. 이것을 샤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철학의 근본명제로 정식화했다.
(2) 실존은 주체적 결단이다
전통철학이 논리적 체계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는 가운데 인간의 실존에 대한 자각은 뒷켠으로 물러나 있었다. 헤겔의 범논리주의는 논리적-객관적 체계를 이론적으로 구축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뿐 인간의 현실존재에 대한 주체적 반성은 결여되어 있었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확보하기에 급급했던 전통철학은 인간의 개체적이고 주체적인 진리를 한갓 체계의 부산물로 여기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실존철학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문장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감탄사” 또는 “줄 사이에 거꾸로 인쇄된 활자”라는 키에르케골의 말은 거대한 논리적 체계만 갖추면 철학은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내었다는 헤겔 철학의 거만함을 꼬집는 말이다. 객관성과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거대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의 구체적 실존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거대한 궁전을 지어 놓고서 그 자신은 오두막에 살아가야 하는 가련한 모습이 될 것이다. 키에르케골은 젊은 시절의 일기에서 아무리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내가 그 속에 살고 있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외친다. 그는 어떤 종교강연에서 한 저술가의 예를 들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저술 때문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그 저자가 불행한 고난의 시련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민 끝에 어떤 목사를 찾아가서 충고를 구했는데, 그 목사는 찾아온 사람의 하소연을 다 들은 후 “그 누가 지은 ?하나님의 사랑?이란 책을 읽어보시오. 그 책을 읽으시고도 만일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당신은 구원될 길이 없는가 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진리는 어느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타당할지는 몰라도, 그 보편타당성이 나의 구체적 실존을 확인시켜주는 주체적 진리는 되지 못한다. 이 주체는 근대 이성주의에서의 추상적인 주관이나 인식론적 주관을 의미하지 않고 예외자, 단독자로서의 주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결단하며 살아가는 실존하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주체적 진리가 논리적 명제에 국한하여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명제에 국한되어 생각하는 한, 진리는 한갓 논리적 추론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적 진리는 자신의 삶에 성실함을 의미하며 자신의 본래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주체적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러기에 부단히 자기 자신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의 양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실존적인 의미의 진리는 한갓 명제적 진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성실한 것을 뜻한다.
키에르케골은 개인이 자신의 개별실존을 성취하는 바로 거기에 자신의 진리에 도달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개별 실존이 보편으로 약분되어 버릴 수 없음을 강조한다. 헤겔의 전체주의는 인간 개별 실존을 사변의 추상물로 환원하여 버림으로써, 개별 인간의 주체적 실존이 진리의 장이 되어야 함을 간과하였다. 키에르케골은 이 실존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설명한다.
첫째는 감성적 실존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감성적 욕구의 충족, 즉 향락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결국 인간을 쾌락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기회도 가질 수 없다. 이제 두번째의 단계인 윤리적 실존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 단계는 양심을 가지고 윤리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윤리적 사명을 다 할려고 하면 할수록 항상 한계에 부딪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윤리적 단계로부터 종교적 실존의 단계로 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의 참된 실존이 가능하게 된다. 신 앞의 단독자로서의 실존체험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실존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