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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신앙고백)
역사적 근원을 더듬어 교회음악을 살펴 볼때 교회음악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시편을 통해서도 쉽게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음악은 당시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예배의식의 일부였으며 따라서 음악담당자는 예배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와같이 음악목회는 사제들의 목회와 마찬가지로 구약시대부터 있었고, 따라서 음악목회자들도 목사님과 같이 사제의 한 사람이란 책임의식과 사명의식을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찬양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대원들이나 목사님들이 성가대의 직분을 하나의 합창대로 여겨 소홀히 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때문에 자신이 중요한 직분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래서 이 일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을 다하는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다. 먼저 목사님들이 교회안에서의 성가대의 직책과 직분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가져야 하며 또한 성가대원 모두가 그에따른 사명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성가대의 본연의 임무와 책임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음악목회자들은 이스라엘 열 두지파 중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특별히 선택받은 레위지파 중에서 뽑아 그 가족과 자손들로 하여금 성가대원으로 삼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야로 찬양하는 일에만 종사하도록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순번을 짜서 주야로 번갈아 가며 계속 야훼를 찬양하는 일에만 전심전력 하였고, 순번이 아닌 때에는 다음 찬양할 것을 준비하는데 전심하고,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았으며, 당번이 아닐 때에도 언제나 별관에 대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악 목회자로서의 가장 큰 임무는 바로 성가대가 온 교회 교인들과 함께 연합(communion)되어 같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은혜 받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목회자는 음악을 전공했다고 해서, 또한 음악을 잘 안다는 것 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교통을 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기술과 능력만이 교회음악의 전부일 수는 없다. 영적으로 서로 교통하며 사랑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 환언하면 영적인 것으로 테크닉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테크닉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 테크닉이 오히려 살아나게 되는데, 다른 말로하면 성령의 감화로 인한 영적상태에서 그것이 저절로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서,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성가 합창단 중의 하나인 Mormon Tabernacle Choir를 생각할 수 있다. 몰몬교가 이단이긴 하지만 내가 보고 관찰한 대로는, 그 성가단의 지휘자는 지휘할때에 있어서 어떤 전문적인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는다. 나는 그의 지휘의 테크닉을 보고는 별로 큰 느낌이 없었으나 그의 지휘하는 모습에서 크게 은혜를 받았다. 그는 기술적인 음악가가 아니었고,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런 그의 모습이 470명의 대원에게 감화를 끼쳐 성가가 울려퍼질 때 그 음악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음악 목회자는 음악적인 기술이 있다고 누구나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경험이 있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Mormon Tabernacle Choir의 성가대원은 모두 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성가대원으로 봉사 하는 것을 자기들의 생업 이상으로 생각하여 연습에 출석하고 주일에 성가를 부르고 또 방송을 통해서 혹은 예배에 직접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대원중의 한 농부는 100마일 떨어진 곳에 살면서 일주일에 두번씩 2시간 운전하여 연습과 예배에 참석하는데 20여년 동안 지각한번 결석한번 안했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충실한 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가대원들과 지휘자, 바로 거기서 세계적인 성가합창이 울려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음악은 테크닉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감화로 즉 은혜로서 연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성가대가 잘하고 못하는 것은 지휘자에게 달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휘자가 열성과 능력을 다해도 대원들은 시간도 안지키고 나오기 싫다고 안나오고 바쁘다고 빠지고...이렇게 하면 제아무리 유명한 지휘자기 온다고 해도 그런 성가대는 결코 좋은 성가대가 될수 없다. 반대로 대원들은 열성이 대단한데 지휘자는 기도도 없고 성경도 안읽고 10분 20분씩 지각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이런 성가대도 또한 되지 않는다. 교회에서 음악을 담당한 우리가 “음악목회자”의 위치에 서느냐, 또는 성가대원과 지휘자로서의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교회음악은 큰 차이를 갖게 된다. 우리가 성가대원과 지휘자로서의 위치에 설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음악에만 몰두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음악을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음악만을 위하여 존재하게 될 때 우리(성가대)의 활동은 예술활동이 되기 쉽다. 즉 예술적인 우수한 연주와 클래식한 음악만을 추구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을 연주 무대로 삼는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뿐만아니라 성가대가 수동적이 되기 쉽다. 교회가 필요로해서 음악을(음악적인 태크닉을) 제공해 주는 고용인의 봉사로 끝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목회자”의 위치에 설 때 우리의 역할은 사뭇 다르다. 음악목회자는 목사님들이 그러하듯이 항상 위로 하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과 함께 회중을 향하여 목회하는 것을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의 선택이 클래식 일변도일 수 만은 없고, 예술활동으로서의 연주활동을 지양하고 음악을 통하여 회중과 얼마나 가까워 질 수 있으며 그들의 심령을 얼마나 고양시킬 수 있는가에 관심이 크다. 따라서 음악의 연주와 악곡의 선택에서 “지휘자”와는 상당한 차이를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차이는 성가대를 운영하는 데에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어느 성가대 지휘자는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데 30분씩이나 할애해서 성경공부를 꼭 해야만 되느냐”고 불만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성가대가 영적인 예배에서 영적인 노래를 부르기를 원한다면 성령 역사의 원천이 되는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성가대의 일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음악목회자에게 성령이 크게 역사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힘의 근원이 되는 성경을 매주일 공부하는 것은 분명히 연습보다 우선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음악목회자”와 “지휘자”와의 다른 점이다.
일반적인 성가대원과 음악목회자로서의 성가대원의 차이도 크게 나타난다. 일반적인 성가대원들은 기도회, 철야기도회, 제자 훈련, 결단의 시간, 부흥회 등을 통한 신앙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지만 음악목회자로서의 성가대원들은 이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또한 두 그룹이 가질 수 있는 큰 차이이다.
몇년전 가을 KX 논단에 어느 목사님과 함께 초대되어 교회음악에 관한 대담을 가진적이 있다. 이때 사회자가 나에게 “한국 교회음악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서슴없이 “신앙”이라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성가대원과 지휘자들이 음악목회자로서의 소신이 부족하여 예배를 연주회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꼭같은 질문을 목사님께 했을 때 목사님은 나와 정반대로 “기능”이라고 말하여 나를 몹시 긴장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설명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분은 일선 비무장 지대 근방에서 목회를 하시는 분이었다. 그 교회에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라곤 한사람도 없었다. 그리하여 교회 성가대 지휘는 대원중 신앙이 가장 좋은 분이 맡아서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 교회의 경우 성가대의 가장 큰 문제는 “기능”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듣고 깨달은 것은 신앙없이 기능만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앙은 있으되 기능이 없는 것도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음악목회자의 신앙과 사명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전제로한 때문이지 기능을 무시해서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보다 옳게 말을 한다면 음악목회는 신앙과 기능이 모두 중요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에베소 첫머리에 보면 교회의 모든 사람을 가리켜 한국말 성서에는 성도라고 했으나 본래의 말은 saint(성자)로 부르고 있다. 성자라고 하면 우리들은 구라파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려진 옛날의 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나 구교의 교황이 성자로 인정한 성 프란시스, 성 어거스틴, 성 그레고리 등 특출한 기독교인 또는 유명한 순교자 같은 사람을 생각하지 우리와 같은 이름없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래의 핵심은 바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자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다 성자들이다”라고 말할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또한 우리 음악목회자들의 자각이어야 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발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 이다.
이 성자란 말은 바울이 여러 서한에서 자주 쓴 그 시대의 새로운 말이었다. 성자란 말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 (The People of God), 선민(A Chosen People)으로 사용되었고, 따라서 이들을 가리켜 거룩한 민족 (A Holy People)이라고 일컬었다. 본래 Holy, The Holiness(신성 또는 거룩성)라고 하는 것은 소명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들 백성은 소명받은 민족으로서의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거룩한 민족이라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직업에 있어서도 그 직업이 마음에 들든지 안들든지 간에 소명의식이 있게 되면 신성한 직업이 되고 소명의식이 없을 때는 천한 직업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가대직이란 것도 우리들의 소명의식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신성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으로 될 수도 있다. 성가대를 기피하려고 하는 소위 점잖은 사람들과 지위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가대에 대한 소명이 없기 때문에 성가대의 봉사를 거절한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성가대직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지워 주신 영광의 멍에로 인해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하고, 성가대로서 봉사하겠다고 하나님의 계약에 따라 살도록 강요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러한 고난과 강요로 인해서 때로 우리는 음악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봉사할 책임없이 교회에 왔다가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 조용히 집에 가서 편히 지내는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 할때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러한 고난과 강요에 못이겨 욥은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혔으면 좋겠읍니다. 언제까지나 살 것도 아닌데 〔하나님 !〕 제발좀 〔나를〕 내버려 두십시요”(욥기 7:15-16)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음악목회자로 또 성자로서의 의식을 갖고 살 때에 받아야하는 고난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성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 머리위에 축복을 소나기처럼 내려주시는 것도 또한 기억해야만 한다. 한번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백성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과 약속한 사람은 성가대의 직책, 성자로서의 직책, 음악목회자로서의 직책으로 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다. 바쁘다고, 몸이 좀 아프다고 핑게나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베드로 앞에 거짓말을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혼이 즉시 떠난것을 읽을 수 있다.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빠져 나갈수 없는 그물에 걸려 들었다. 마태복음 13장 47절에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은 바다에 던져 모든 것을 끌어올리는 그물과도 같다”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는데 여기에서 그물이란 “잡는다” 또는 “포로로 한다” 하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건져준다”, “ 구원한다”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성가대원이기 때문에 강요당하는 희생과 어려움을 생각할 때는 하늘나라의 그물에 잡히고 포로가 된 것 같으나 우리를 은총으로 불러주시고 우리 머리위에 한없는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으로 보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그물로 인하여 건져졌고 구원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선생은 “노예라도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자유인이 되고, 자유인일지라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고전 7장 17절)라고 말했다. 성가대의 직책이 어려움과 희생이 강요되어도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부름받은 소명의식이 뚜렷할 때는 이 모든 것이 즐거움이 될수 있다. 바울선생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열성이었던 사울이 바울로 변한 것은 사울 자신의 의도나 의지는 아니었다. 사울이 바울로 거듭나게 되고 새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다메색까지 직접 바울을 찾아 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고 불러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이방전도라는 특별한 임무를 맡기어 하나님의 복음이 이방나라에 전파되는 첫 전도인이 되게 하셨고 오늘날 그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음악목회자로 각자의 교회에서 봉사하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이 직책을 받았고 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음악목회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직책에서 도망가거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붙들린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 노예는 자유인이 아니고 매어있는 사람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다. 노예가 할 일은 오직 충성뿐이다.
레위지파 사람들의 임무와 책임을 유산으로 받아 음악목회를 충실히 맡아 행하여 음악목회자로써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준 사람이 음악사에 있다. 그가 바로 독일 Leipzig의 성 토마스교회의 음악목회자로 평생을 바친 Johann Sebastian Bach이다. Bach는 1723년 성 토마스교회의 음악목회자가 된 이후 1750년 그가 죽을 때까지 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하는데 온 시간과 정성을 다 바쳐왔다. Bach는 코랄의 멜로디를 가지고 많은 오르간 음악을 써서 Chorale Preludes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는데 책머리에 “In excellsis Deo”(가장 높으신 하나님께)라는 헌정의 글을 써서 출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칸타타와 수난곡을 작곡하면서 악보의 첫머리에 “J.J"란 약자를 써넣고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라틴어 “Jesu, juva”로써 ”예수여, 도우소서“란 뜻이다. 그가 작곡을 시작할 때 예수의 성령이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하면서 예수에게 온전히 맡기고 작곡을 시작하였고, 작곡이 끝났을 때는 그 마지막 페이지에 S.D.G. 란 약자를 써 넣고 작곡을 마무리 하였다. 이것은 라틴어의 “Soil Deo Gloria"의 약자로서 ”읒?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시옵소서“란 뜻이다. 그 작품을 통해서 Bach 자신이 영광받고 칭찬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Bach는 아들의 피아노 교육을 위하여 연습곡집 Clavierudung을 쓰면서도 I.N.J. (In nomine Jesu) 즉, “예수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곡을 하였다. 이와같이 Bach는 자신이 쓰는 모든 음악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이 세상의 모든 음악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가 Through-bass라고 하는 건반화성법을 설명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성령을 기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화성을 낼 수 있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 것을 보면 Bach에게 있어서 모든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모든 작품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작곡했다는 뜻으로 “Soli Deo Gloria"란 말을 작품마다 빼지 않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악 목회자의 임무와 책임이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음악목회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 곧 사명의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작곡자 Haydn도 대단히 신앙적인 음악가였다. 그는 “In nomine Domini”(주님의 이름으로)란 구절을 작품 첫 머리에 써 놓고 작곡을 시작하였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Laus Deo”(하나님을 찬양합니다)란 말로 작품을 끝 맺었다. Haydn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음악적인 영감을 주실 것을 열망했고, 작곡할 때마다 새로운 능력을 달라고 늘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작품이 성공적으로 완성된 데 대해서 다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마무리 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옷을 단정히 입고, 무릎을 꿇고, 오늘도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도록 은총 내려 달라고 기도함으로 일과를 시작합니다“ 라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다. “선량하게 살고, 많은 작품을 쓰고, 하나님을 영원히 섬기는 것”이 Haydn의 생활신조였다고 한다. Haydn의 기도가 음악 목회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음악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Bach와 Haydn과 같은 삶을 우리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음악목회에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첫째 음악목회자는 헌신적인 봉사와 경건한 행동과 진실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가대는 헌신적인 봉사를 요구한다. 하나님이 레위사람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헌신하라고 요구하셨다. 그래서 레위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지 아니하고 전심전력하여 헌신하고 봉사하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음악목회자 즉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것을 구약시대와 비교할 수는 없다. 현대인들은 생계를 위하여 직업을 가져야 하고 특별히 한국사회에서의 직장생활이란 음악목회자로 헌신적인 봉사를 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역경 속에서라도 우리는 음악목회자로서의 책임과 헌신적인 봉사를 할 수 있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만 한다. 성가대원들이 주중 연습시간에 맞추어 각자가 시간전에 도착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성가대는 발전하고, 시간에 늦는 것과 연습에 참여하는 그 자체를 우습게 생각하는 대원이 많으면 그 성가대는 답보 상태이거나 아니면 퇴보하게 된다. 성가대의 발전과 퇴보는 이와 같은 조그마한 차이에서 비롯하게 된다. 특별히 지휘자와 반주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내걸고 반드시 시간 전에 나타나야만 하고, 성가대 대장, 부대장, 총무는 연습에 빠진다거나 지각할 경우엔 그만 둘 각오로 충성해야 하다. 음악 목회자된 우리들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이기 때문이다.”(롬 12:1)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르나 우리가 받은 은사는 성가대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은사인 것도 알 필요가 있다.
음악 목회자는 또한 경건한 행동과 진실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경건한 행동과 진실된 삶을 살려고 한다면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행동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행동이 경건하지 못하고 그 사람들의 삶에서 진실성을 찾아보기가 힘 들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가대를 필요악의 존재로까지 보는 사람도 있다. 행동이 경망스럽고 삶이 모범되지 못한 사람들이 성전 앞 좌석에 앉아 있게 되면 그들을 바라보고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고 따라서 성가대에 봉사하는 다른 모범적인 사람들까지도 피해를 입게 되어 결국 나이가 들게 되면 성가대를 떠나게 되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성가대에서의 봉사를 꺼려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음악목회자는 반드시 행동을 경건하게 해야만 하고 각자의 삶을 진실되게 살아야 한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고 하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쉼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생활을 함으로써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인격을 본 받을 수 있고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인격이 되어 살 수 있을 때 그 행동은 경건한 것이 될 수 있고, 그 삶은 진실될 수 있다고 본다. 간혹 성가대원들 중에는 남을 욕하는 것, 헐뜯는 것을 퍽 즐기고 취미로 삼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이 성가대의 또 하나의 큰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배우며 기도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이 경건해지고 삶이 진실되어져 이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음악목회자는 성도간에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이 모든 율법을 폐한다고 말씀하신것 처럼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힘이 든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인 줄 알지만 참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만 내가 못되고 남이 잘 되는데 시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성을 내지 아니하고 앙심을 품지 않는 것이 사랑인 줄 알지만 내 욕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을 안낼 수도 없고 앙심을 품지 않게 되기 까지는 큰 수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허물을 들추어 내는 일에 쾌감과 즐거움이 따르는 유혹때문에 덮어준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는데 사랑은 우리 인간들에게 실천하기에 가장 어려운 기독교의 진리인듯 하다.
그러나 이 사랑이 찬양을 드리는 모든 성가대원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조건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한 마음이 되어 찬양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두 마음을 가지고 찬양할 수 있겠는가? 노래를 함께 부르는 사람들 사이에 한 마음이 없이는 한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사랑”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래 참지 못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 앙심을 품는 사람, 남의 잘못을 들추어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 제 눈의 들보 보다는 남의 눈에 든 티가 더 보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음악목회자의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루 속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고, 그래서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또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다. 그리스도의 피와 몸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된 한 덩어리의 떡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여러 사람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이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뭉친 한 몸, 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다.
셋째로 음악목회자는 성령의 크신 역사가 있도록 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지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부터 음악목회자로 봉사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지휘자로, 어떤 이는 반주자로, 어떤 이는 독창자로, 또 어떤 이는 대장, 부대장 혹은 총무로 봉사할 수 있게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1부성가대, 혹은 2부성가대에서 봉사를 하지만 이 모든 은총의 선물은 같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고, 이들이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시다. 따라서 성령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이 우리 입을 통하여 노래하고 말씀하시게 하고, 성령이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온전히 지배해서 우리가 약하지만 성령의 힘으로 옳은 생각과 은혜스러운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배워야 할 것으로 본다.
네째 음악목회자는 하나님의 전에 거룩하신 영광이 지금부터 영원히 지켜질 수 있기 위하여 전심전력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음악목회자 모두의 최상의 과제요 목표이다. Bach가 모든 작품활동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했고 자기의 삶 전체를 Soli Deo Gloria를 위하여 바쳤던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지키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고 살아야 하며 이것이 음악 목회자 모두의 최상의 과제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가르쳐 주셨다.
다섯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받은 음악목회자임을 자각하고 온전히 은혜로운 성가대의 모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각자 교회의 음악목회자가 된 것은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이 훌륭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들이요, 특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특별히 선택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자각과 의식이 있어야겠다. 그래서 성가대의 모임이 온전히 은혜로운 모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고린도후서에 기록된 것처럼 받은 바 은총의 선물을 소중히 가꾸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성가대원의 직책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하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하신 나의 사명이란 의식을 가지고 봉사해야만 하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목사님이 소명받는 것과 같은 그러한 소명을 우리가 음악부문에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명감을 우리 지휘자나 성가대원들은 마땅히 가져야만 한다. 서로의 사랑이 넘치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성도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성가대, 그리고 전체 교회가 될 때 거기에 진정한 은혜가 넘치고 또한 발전이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진정 영적으로 감화 감동되는 노래를 불러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한 우리 스스로도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면서 찬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성가를 부른다는 것은 내 목소리와 기교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부르는 것이고 나의 온 힘과 능력을 묶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나는 깊이 깨닫고 있다. 그래서 내가 온 심령을 기울여 영적으로 노래를 부를 때 나의 목소리를 빌어 나의 영과 듣는이의 영이 서로 교통하게 되고 동시에 모두 함께 하나님께 찬양드리게 됨을 나는 확신한다. 내가 독창을 했다고 해서 나만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내가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반 교우들은 성악가와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지 못함으로 그 분야에서 성악가들처럼 훌륭하게 노래 부르지는 못한다. 그러나 대신 독창자나 성가대원들이 찬양을 부름으로 해서 모든 교인들의 영이 부르는 이들의 영과 합쳐져서 하나님께 상달되어 지는 것이다. 즉 독창자나 성가대는 모든 이들의 영을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도구이다. 한마디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모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종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성가대를 지도할 때 원하는 톤(tone)은 자기 목소리를 뽐내려고 하는 톤이 아니다. 그러한 톤은 비록 제아무리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언제나 이것을 막는다. 그러기 때문에 노래 잘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목소리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반면에 잘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자기의 정성과 열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즉 영으로 노래하도록 인도한다. 왜냐하면 음악목회자로서 다시말해, 제사장과 같은 직분을 맡은 레위지파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교회에서 음악목회를 하는 책임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독자들 앞에 겸허한 심정으로 음악 목회자로써의 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이 책을 끝내려고 한다. 나 개인은 토요일 저녁에 있는 충현교회 할렐루야 찬양대와의 연습과 주일 하루의 찬양을 위하여 일주일을 살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찬양을 드리는 그 순간이 나의 일주일 삶의 클라이맥스(climax)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위하여 일주일을 산다. 이는 내가 유학시절 보스톤 한인교회 성가대와 함께 음악목회를 할 때나 귀국후 새문안 교회 예본 성가대와 음악목회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나의 일주일의 삶은 주일 하루 예배시간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살다가 주일 예배시간이 되면 나의 삶은 climax를 이룬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하나의 climax를 만들기 위하여 다른 일주일을 준비하면서 산다. 이것이 음악목회자 된 나의 삶이다. 뿐만아니라 나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음악예배를 끝낸 다음 교인들의 박수에 돌아서서 답례를 한적이 한번도 없다. 오직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이기에 조용히 지휘대에 그대로 선채 눈을 감고 교인들의 박수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찬양의 종 음악목회자로써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는 의식을 수시로 확인하고 새롭게 다짐하면서 매일을 살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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