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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37세부터 50세까지(여기의 세는 저의 파가 4세로 갈문왕 박아도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중에서 참고하실때는 한 세씩 당기면 됩니다) 고려시대에 사신 조상님들의 근거를 인터넷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사절요와 여타 자료에서 찾아서 정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족보의 계대, 세가 맞습니다. 다른 성씨나 반남박씨 등이 고려시대 족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면 반박 자료로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한문은 옛족보의 오자, 탈자 등을 교정하고 필요한 내용을 보충하였습니다. 보유는 근거 자료이고 참고는 학자들의 자료입니다. 첨언은 제 개인 의이니 사용하실 때 삭제하시면 됩니다. 우리 밀양박씨 족보가 조작이나 허구가 아니라 선조님들께서 우리 밀양박씨 혈통 보존을 위해서 공들여 기록하시어 남겼음을 고려사절요 사료를 근거로 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족보를 함께 만들어서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2025년 4월 1일 규정공 후 충정공 14대손 박희용 드림 010-8587-4092
三十八世 彦孚 삼십팔세 언부
密城大君派十二中祖之長太師公派中始祖
高麗文宗朝與崔冲同爲太師中書令位至
門下侍中都評議事封密城府院君
出東史評林按遺址密州豊角花山見州誌
亭于沃川遠德祠
밀성대군파십이중조지장태사공파중시조
고려문종조여최충동위태사중서령위지
문하시중도평의사봉밀성부원군
출동사평림안유지밀주풍각화산견주지
정우옥천원덕사
밀성대군파 12중조 중에 맏이인 태사공파 중시조이다. 문종 대(1047~1082)에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지내고 밀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최충(984~1068)과 함께 태사중서령의 지위에 이르렀다.
문하시중과 도평의사(評議事)를 지냈으며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숲처럼 많은 평을 살필 수 있다고 고려사에 나와 있으며, 밀주 풍각 화산(豊角花山)에 유지(묘소)가 있음을 밀주지에서 볼 수 있다.
정자는 충북 옥천군 이운면 용방리에 있는 원덕사이다.
[참고 1] 한국고전종합DB 고전용어 시소러스 (2)
박언부(朴彦孚) : 고려 문종(文宗) 때의 문신. 최충(崔冲)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낸 후 문하시중(門下侍中)ㆍ도평의사(都評議事)에 이르렀으며,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짐.
한국/고려전기 , 경상도/밀양 , 인명/관인/문신
[첨언] 박씨족은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되어 경명왕으로 통합되었다가 밀성대군 등 8대군으로 다시 가지를 벌리며 본격적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맏집인 밀성대군 박언침의 6대손 찬행이 언부, 언상, 언인 3형제를 낳아 잘 양육하고, 그들이 자라 현달하여 태사공파, 도평의사공파, 복야공파의 중조가 됨으로써 밀양박씨의 본격적인 번성이 시작되었다. 언부 할아버지는 밀양박씨 모든 파의 맏집인 태사공파의 중시조이다. 한 집안에서 인물이 대를 이어 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드물고, 몇 대가 정기를 응축하다가 어느 한 대에 이르러 맺힌 정기를 분출하여 ㅌ큰 인물을 만든다. 앞의 찬행 대에서 <督捕以下四世則多有疑信故不敢直書諱字而懸註>라 기사한 까닭도 4대가 한미했으나 언부, 언상, 언인 대에 이르러 현달함으로써 비로소 家系가 튼실해졌다는 의미이다.
묘소는 청도군 풍각면 안산동 산 48번지 화산 꽃밭등에 있으며 해마다 후손들이 돌보고 있다.
三十九世 孝臣 삼십구세 효신
麗朝登第官至門下侍中有文章忠莭仕中朝平章事
天子禮遇致仕東遷謚文翼配享仁宗廟庭出麗史遺址豊角花山
려조등제관지문하시중유문동충절사중조배평장사
천자례우치사동천익문익배향인종묘정출려사유지풍각화산
고려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문장과 충절이 높아 평장사(平章事)에 봉해졌다. 천자(天子) 인종이 예우했으며 벼슬을 마치고 동쪽 고향으로 옮겨왔다. 시호가 문익(文翼)이고 인종묘에 배향되었다고 고려사에 나와 있다. 묘소는 풍각화산(豊角花山)에 있다.
[보유 1] 박효신은 밀성부원군 휘 언부(彦孚)의 아들이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문장으로 당시에 칭송이 대단하였다. 서기 1122년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평장사[平章使]에 봉해졌다. 시호를 문익[文翼]이라 하였다. 동생 박의신[義臣]도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서기 1123년 인종 조의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이르렀다. 박의신의 맏아들 元은 밀성대군파 十二中祖 중 하나인 四門進士公派의 원조이다. 둘째아들 允의 5대손 朴中美가 현달하여 대제학을 지내고 密直使府院君에 봉해지면서 十二中祖의 하나인 密直府院君派를 이루었다.
[보유 2] 암서집(巖棲集) 암서집 제20권 기(記) 원천재 기〔原泉齋記〕
原泉齋記
嶺南之地窮于海,而鐵城爲其門戶,當國家無事時,猶設大鎭以扼之。人之生於其土者,惟魚䀋船舶枹柝之習於耳目,其於文物禮數,宜若漠然其無所聞。然自麗季以來,士大夫之逃亂遯世者多居之,而偉人傑士亦往往出於其中,豈非山水之所萃、神氣之所應,固有然者歟?郡之北有村,曰月溪,朴氏之庄也。
朴氏自高麗 文翼公,世有令望,而太虛亭諱凱尙,當嘉靖之末,自凝川移而家焉。至今十餘世,子孫頗蕃,雖衣食須其出,婚葬不離鄕,而行能以純孝動物,文能以拔萃應貢者,猶斑斑數也。歲丙辰,諸父老以宗貲之贏,築室數楹于其側,以其在冷泉山之下,故名之曰原泉齋。朴君 基道,跋涉險阻,來請余記之。
영남(嶺南)의 땅은 바다에 닿아 철성(鐵城)이 그 문호가 되는데 국가가 무사할 때도 오히려 대진(大鎭)을 설치하여 막았다. 따라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오직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며 배를 만들고 군대의 경계하는 일만 이목에 익숙할 뿐이고, 문물과 예의에 있어서는 마땅히 까마득히 들은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고려 말 이래로 난을 피하고 세상을 떠나 은거하는 사대부들이 거주함이 많아 위대한 인물과 걸출한 선비가 또한 이따금 그 가운데서 나왔으니, 어찌 산수의 기운이 모인 바와 신기(神氣)가 응한 바에 실로 그러함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군(郡)의 북쪽에 월계촌(月溪村)이 있는데 박씨(朴氏)의 마을이다.
박씨는 고려 문익공(文翼公) 때부터 대대로 아름다운 명망이 있었는데, 태허정(太虛亭) 휘 개상(凱尙)이 가정(嘉靖) 말년에 밀양〔凝川〕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0여 대에 자손이 자못 번성하여 비록 의복과 음식은 거기에서 나오는 대로만 쓰고 혼사와 장례는 향리를 벗어나지 않지만, 행실은 순수한 효행이 능히 사물을 감동시키고 문학은 능히 무리에서 빼어나 인재를 선발하는 데 응할 수 있는 이가 오히려 많았다. 병진년(1916)에 여러 부로(父老)들이 종중의 넉넉한 재물로 마을 곁에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냉천산(冷泉山) 아래 있기 때문에 이름을 ‘원천재(原泉齋)’라고 하였다. 박기도(朴基道) 군이 험한 산천을 넘고 건너 와서 나에게 기문을 적어줄 것을 청하였다.
註 : 文翼公 : 박효신(朴孝臣)을 말한다.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박언부(朴彦孚)의 아들이다. 고려 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고려 인종묘(仁宗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참고 1] 한국고전종합DB 고전용어 시소러스 (2)
박효신(朴孝臣)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박언부(朴彥孚)의 아들로, 문하시중 (門下侍中)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지냄.
한국/고려전기 , 경상도/밀양 , 인명/관인/문신
四十世 公弼 사십세 공필
大將軍都檢事兵部尙書
대장군도검사병부상서
대장군(大將軍) 도검사(都檢事)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四十一世 育和 사십일세 육화
麗朝給事中兵部尙書
見輿地勝覽遺址密州豊角花山見州誌
려조급사중병부상서
견여지승람유지밀주풍각화산견주지
고려 초에 급사중과 병부상서를 지냈다.
밀주지(密州誌)에 이르길 풍각화산(豊角花山)에 유지가 있다고 함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볼 수 있다.
[보유 1]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축 11년(1157), 송 소흥 27년ㆍ금 정륭 2년
○十一月,遣工部郞中李光縉,如金,謝賀生辰,刑部員外郞朴育,和,謝橫賜,刑部員外郞金敦中,賀正,禮賓少卿崔令儀,進方物,工部員外郞金嘉會,賀龍興節。
○ 11월에 공부낭중 이광진(李光縉)을 금나라로 보내어 생신 축하를 사례하고, 형부원외랑 박육화(朴育和)는 횡사(橫賜)를 사례하고 형부원외랑 김돈중(金敦中)은 신정을 하례하고, 예빈소경 최영의(崔令儀)는 방물을 바치고, 공부원외랑 김가회(金嘉會)는 용흥절을 하례하게 하였다.
[보유 2]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임오 16년(1162), 송 소흥 32년ㆍ금 대정 2년
○六月,王,以諫官,不署崔光鈞告身,召諫議李知深,給事中朴育和,起居注尹鱗瞻,司諫金孝純,正言梁純精,鄭端遇,督署之,郞舍畏縮,唯唯而退,時,宮人無比,嬖於王,光鈞,爲其女壻,因緣內嬖,驟拜式目錄事,士大夫,莫不切齒,有人,嘲諫官曰,莫說爲司諫,無言是正言,口吃爲諫議,悠悠何所論。
○ 6월에 왕은 간관들이 최광균(崔光鈞)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는다 하여, 간의 이지심(李知深), 급사중 박육화(朴育和), 기거주 윤인첨(尹鱗瞻), 사간 김효순(金孝純), 정언 양순정(梁純精)ㆍ정단우(鄭端遇)를 불러 서명하기를 독촉하니, 낭관들이 두려워해서 "예, 예." 하고 물러났다. 이때에 궁인 무비(無比)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광균이 그의 사위가 되어 그 인연으로 갑자기 식목도감 녹사에 임명되니, 사대부들이 이[齒]를 갈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간관을 조롱하기를, “말하지 말라는 것은 사간(司諫)이요, 말없는 것이 정언(正言)이요, 말더듬는 것이 간의(諫議)다. 유유히 무엇을 논했던고." 하였다.
[보유 3]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계미 17년(1163), 송 효종(孝宗) 융흥(隆興) 원년ㆍ금 대정 3년
○以衛尉卿李陽實,知西北面兵馬事,給事中朴育和,爲東北面兵馬副使,有司,劾陽實,不合藩鎭,以徐淳仍之。○八月,左正言文克謙,伏閤上疏言,宦者白善淵,專擅威福,密與宮人無比爲醜行,術人榮儀,執左道,取媚於上,置百順館北兩宮,私藏財貨,以支祝釐齋醮之費,而與善淵,管掌其務,凡兩界兵馬,五道按察使陛辭之日,必於兩宮,置酒慰餞,使各獻方物,隨其貢奉多少,以爲殿最,至使家抽戶斂,以召民怨,左常侍崔褎偁,職掌樞要,勞傾中外,貪墨無厭,不附己者,必中傷之,財累鉅萬,請斬善淵,無比,黜榮儀,充牧子,罷褎偁,以謝一國,疏中,又及宮禁帷簿之事,王,大怒,焚其疏,褎偁,詣闕請辨,王,召克謙對辨,克謙,言甚切至,竟貶爲黃州判官,初,克謙,草疏,諫議李知深,給事中,朴育和,起居注尹鱗瞻等,不肯連署,及克謙見貶,又視事自若,時人,誦宋人,竝遊英俊顏何厚之句,以譏之。
○ 위위경(衛尉卿) 이양실(李陽實)을 지서북면병마사로 삼고, 급사중 박육화(朴育和)를 동북면병마부사로 삼았더니, 유사가 양실은 번진(藩鎭)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서순(徐淳)을 유임하게 하였다.
○ 8월에 좌정언 문극겸(文克謙)이 합문에 엎드려서 소를 올려 말하기를, “환관 백선연(白善淵)이 상벌의 권력을 함부로 행하고, 은밀히 궁인 무비(無比)와 추행이 있었으며, 술객(術客) 영의(榮儀)는 좌도(左道 바르지 못한 도)를 가지고 위에 아첨하여 백순(百順)ㆍ관북(館北)의 두 궁(宮)을 설치하고, 사사로이 재화를 저축하여 복을 빌고 재를 올리는 비용을 지출하며, 선연과 더불어 사무를 관장하면서 무릇 양계의 병마사와 5도의 안찰사가 대궐에 하직하고 떠나는 날에는 반드시 두 궁에서 잔치를 벌여 위로하고 전송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방물을 바치게 하고, 그 바쳐온 물품의 다소에 따라 전최(殿最 지방관의 실적에 대한 고과)를 삼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가가호호에 추렴하기에 이르게 하여 백성의 원망을 초래하였습니다. 좌상시 최유칭(崔褎偁)은 중요한 직위를 맡아 권세가 중앙과 지방을 주름잡고 탐욕이 한이 없어,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는 반드시 중상모략하고, 수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청컨대, 선연과 무비는 목 베고, 영의는 내쫓아 목자(牧子 말을 먹이는 하인)에 충당하고, 유칭은 파직하여 나라에 사례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상소문에서 궁문의 추문에 대하여 언급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그 상소문을 불살랐다. 유칭이 대궐에 나아가 대질하기를 청하여, 왕이 극겸을 불러 대질시키니, 극겸의 말이 심히 절실하였으나 결국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시켰다. 이전에 극겸이 소를 초(草)할 때에, 간의 이지심(李知深), 급사중 박육화(朴育和), 기거주 윤인첨(尹鱗瞻) 등이 함께 성명하지 않았고, 극겸이 좌천되어서도 여전히 직무를 보며 태연자약하니, 당시 사람들이 송(宋) 나라 사람의 "함께 놀던 영준(英俊)의 얼굴이 어찌 그다지 두터운고[竝遊英俟顔何厚]병 한 시구(詩句)를 외면서 이를 기롱하였다.
[보유 4] 東史綱目 第九[上] 起丁卯高麗毅宗元年。盡丙辰高麗明宗二十六年。 凡五十年。
〔癸未〕十七年春正月。王在仁智齋。○二月。王幸天壽寺。
○ 秋八月。焚左正言文克謙䟽。貶克謙爲黃州判官。
克謙。公裕之子也。爲左正言。伏閤上䟽曰。䆠者白善淵。專擅威福。與宮人無比爲醜行。術人榮儀。執左道媚上。置兩宮私藏財貨。以支齋醮之費。凡兩界兵馬五道按察陛辭之日。必於兩宮。置酒慰餞。各獻方物。隨其多少。以爲殿最。至使家抽戶斂。以召民怨。知樞密事崔裒稱。職掌樞機。貪黷無厭。請斬善淵,無比。黜榮儀充牧子。罷 裒稱。以謝一國。德寧宮主。王之妹也。天姿艶麗。又善談笑。王每召入內。日夜酣歌。醜聲聞外。至是。克謙又語及宮禁帷薄之事。王大怒。焚其䟽。裒稱詣闕請辨。王召對。言甚切至。遂貶黃州判官。補閑集云。克謙落職還家。題詩公州維鳩驛云。朱雲折檻非干譽。袁盎當車豈爲身。一片丹誠天未照。強鞭羸馬退逡巡。後修驛。請工施壁彩。工當時名手姓朴。壁間畵一白衣着笠乘馬者。緣山路。信轡徐驅。物色凄然。人皆不知是何圖。後。松廣社無若子見之。咨嗟良久曰。此諫臣去國圖也。乃題詩曰。壁上何人畵此圖。諫臣去國事幾乎。山僧一見尙惆悵。何况當塗士大夫。後人多詠其事。 初。克謙草䟽。諫議李知深,給事中朴育和,起居注尹鱗瞻。不肯署名。及克謙貶。三人視事自若。時人誦並遊英俊顔何厚之句。以譏之。克謙在黃州。政聲藹然。有貴近挾憾搆微過。奏請免官。王亦怒前事。又貶晉州判官。有司奏。克謙直臣。不宜連貶外官。以防言路。未幾。還拜閤門祗候。鱗瞻。彦頤之子也。
冬十二月。王幸天壽寺。
○ 추 8월 좌정언 문극겸(文克謙)의 상소문을 불사르고 극겸을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강등시켰다.
극겸은 공유(公裕)의 아들이다. 좌정언이 되어 복합하여 이렇게 상소하였다.
“환자 백선연은 위세와 복록을 전단하고 궁인 무비와 추행을 하였습니다. 술인(術人) 영 의(榮儀)는 좌도(左道 옳지 못한 사교)를 가지고 임금에게 아첨하여 양궁(兩宮)을 설치하고, 사사로이 재화(財貨)를 간직하여 재초(齋醮)의 비용으로 씁니다. 무릇 양계(界)의 병마사와 오도(五道)의 안찰사(按察使)가 폐사(陛辭 궁중에 들어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함)하는 날 반드시 양궁(兩宮)에서 술을 차려 위로하여 전송하는데, 각각 방물(方物)을 바쳐 그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전최(殿最)로 삼았고, 집집마다 거둬들이기까지 하여 민원을 자아내게 합니다. 지추밀사 최부칭은 추요의 기밀을 맡아 보면서 탐욕이 그지없습니다. 선연과 무비를 참하고, 영의를 강등시켜 목자(牧子)에 충용하고, 부칭을 파면하여 전국에 사과하기 바랍니다.”
덕녕궁주(德寧宮主)는 왕의 누이동생인데 타고난 자태가 염려(艶麗)하고, 또 담소를 잘했다. 왕은 늘 궁내에 불러들여 밤낮으로 마시고 노래하여 추문이 밖에까지 알려졌다. 이때에 와서 극겸이 또 궁금의 음란한 일에 대해 언급하자, 왕은 대로하여 그의 상소문을 불살랐다. 부칭이 궁궐에 가서 사실의 변별을 청하자 왕이 부칭을 소대(召對)시켰는데, 부칭의 말이 심히 간절하므로 마침내는 극겸을 황주 판관으로 강등시켰다.
《보한집(補閑集)》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극겸이 관직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다 공준(公州)의 유구역(維鳩驛)에서,
주운이 난간 부러뜨린 것 명예 구해서가 아니었거니 / 朱雲折檻非干譽
원앙이 임금에 맞선 것 어찌 자기 몸 위해서랴 / 袁盎當車豈爲身
한 조각 붉은 정성 하늘이 비추지 않아 / 一片丹誠天未照
파리한 말에 센 채찍질하고 물러나 머뭇거리네 / 强鞭羸馬退逡巡
하는 시를 읊었다.
후에 역을 수리할 때 화공을 불러다 벽에 채색을 하도록 하였다. 화공은 당시의 명수(名手)로 성이 박(朴)이라는 자였으며, 벽에다 흰옷에 삿갓을 쓰고 말을 탄 자가 산길을 따라 고삐를 풀고 서서히 몰고 가는 것을 그렸는데 그 정경이 처연(凄然)하였다. 사람들은 다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를 몰랐다. 후에 송광사(松廣社)와 무의자(無衣子)가 그것을 보고는 한참 동안이나 개탄하다가,
“이것은 간신(諫臣)이 나라를 떠나는 그림이다.”
하고는, 이런 시를 지었다.
벽에다 어떤 사람이 이 그림을 그렸는가 / 壁上何人畵此圖
간신이 떠나가니 나랏일 글러졌네 / 諫臣去國事幾乎
산승도 한번 보고 서글퍼지는데 / 山僧一見尙惆悵
하물며 요로에 있는 사대부이랴 / 何况當塗士大夫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많이 시로 읊었다.
시초에 극겸이 상소문을 기초하자 간의 이지심(李知深), 급사중 박육화(朴育和), 기거주 윤인첨(尹鱗瞻)이 서명하려 하지 않았다. 극겸이 강등되기에 이르러서도 세 사람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집무하자 당시 사람들이 ‘함께 놀던 뛰어난 인물들은 얼굴이 어찌 그리 두터우냐[並遊英俊 顔何厚之]’는 시귀를 낭송하여 그들을 나무랐다.
극겸이 황주에서 선정(善政)을 한다는 소문이 대단해지자, 어떤 권귀(權貴)가 원한을 품고 하찮은 허물을 트집잡아 그의 관직을 파면하기를 주청(奏請)하였고, 왕 역시 저번 일에 성을 내어 또 진주 판관(晉州判官)으로 강등시켰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극겸은 곧은 신하인데 계속 외관으로 강등시켜 말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하여, 얼마 안 되어 돌아와 합문지후를 배수하였다.
인첨은 언이(彦頤)의 아들이다.
[첨언 1] 고려 전기에, 급사중, 동북면병마부사, 수사공 좌복야 등을 역임한 문신. 1156년(의종 10)에 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를 지내고 1157년에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61년 급사중(給事中)으로 있으면서, 왕이 궁인 무비(無比)의 사위인 김광균(金光均)의 임명장에 서명하도록 하자 그 부당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서명하였다. 1163년에는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를 겸임하였다.
좌정언 문극겸(文克謙)이 환관 백선연(白善淵)·무비 등을 탄핵할 때 연서(連書)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문극겸이 좌천되어도 자신의 직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1173년(명종 3)에는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올랐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첨언 2] 박육화는 고려사에 행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인물이다. 이를 보면 공필, 효신, 언부, 찬행, 시주, 기세, 영정, 란, 욱, 밀성대군 언침까지 올라가는 상대가 결코 허위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밀성대군 위의 상대들도 근거 없이 세보에 기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보다 신분제가 더 확실한 고려 사회에서 상대부터 대를 이어 현달하였기 때문에 하대들도 행세할 수 있었다. 5대손 朴鉉이 糾正公派를 이루어 밀양박씨 최대의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형인 朴育慶은 대호군과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銀山君派를 이루었다.
사십이세 允恭 사십이세 윤공
文科侍中
문과시중
문과에 급제하여 시중을 지냈다.
[보유 1] 고려사절요 제11권 / 의종 장효대왕(毅宗莊孝大王)
정축 11년(1157), 송 소흥27년ㆍ금 정륭 2년
九月 命內侍朴允恭增營壽德宮
1157년 9월. 내시(內侍) 박윤공(朴允恭)에게 수덕궁(壽德宮)을 증축[增營]하라고 명하였다.
[보유 3] 고려사절요 : 정중부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키다
의종 24년 1170년 08월 30일 (음)
「李高 義方等率巡檢軍, 夜抵太子宮, 殺行宮別監 金居實 員外郞 李仁甫等. 又入泉洞宅, 殺別常員十餘人, 使人呼於道曰, “凡戴文冠者, 雖至胥吏, 俾無遺種.” 卒伍蜂起, 搜殺判吏部事致仕崔褎稱 判吏部事 許洪材 同知樞密院事 徐醇 知樞密院事 崔溫 尙書右丞 金敦時 國子監大司成 李知深 秘書監 金光中 吏部侍郞 尹敦信 衛尉少卿 趙文貴 大府少卿 崔允諝 侍郞 趙文振 內侍少卿 陳玄光 侍御史 朴允恭 兵部郞中 康處約 都省郞中 康處均 奉御 田致儒 祗候 裴縉 裴衍等五十餘人.
이고와 이의방 등이 순검군을 이끌고 밤에 태자궁(太子宮)에 이르러 행궁별감(行宮別監) 김거보(金居實)와 원외랑(員外郞) 이인보(李仁甫) 등을 죽였다. 또 천동택(泉洞宅)에 들어가 별상원(別常員) 10여 인을 죽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길에서 소리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라 하더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군졸[卒伍]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판이부사(判吏部事)로 치사(致仕)한 최유칭(崔褎稱),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許洪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서순(徐醇),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최온(崔溫), 상서우승(尙書右丞) 김돈시(金敦時),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이지심(李知深), 비서감(秘書監) 김광중(金光中), 이부시랑(吏部侍郞) 윤돈신(尹敦信), 위위소경(衛尉少卿) 조문귀(趙文貴), 대부소경(大府少卿) 최윤서(崔允諝), 시랑(侍郞) 조문진(趙文振), 내시소경(內侍少卿) 진현광(陳玄光), 시어사(侍御史) 박윤공(朴允恭), 병부낭중(兵部郞中) 강처약(康處約), 도성낭중(都省郞中) 강처균(康處均), 봉어(奉御) 전치유(田致儒), 지후(祗候) 배진(裴縉)과 배연(裴衍) 등 50여 인을 찾아 죽였다.」
[참고 1] 박윤공(?~?) : 의종 23년(1169) 12월 경자(庚子)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종 23년(1169) 기축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첨언] 의종 24년 경인년 1170년 음력 8월 30일에 일어난 <정중부의 난>에서 전해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된 박윤공은 보현원이 아닌 개경의 집에서 한밤중에 습격한 정중부, 이고, 이의방의 부하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죽었다. 반란에 빌미를 준 자들은 김돈중, 한뢰, 임종식, 이복기였다. 반란을 주도한 이의방과 이준의, 이린은 형제였다.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살해당하자 동생 이린은 고향 전주로 내려갔다. 손자 이안사가 삼척으로 도망했다가 다시 함경도 여진족 땅으로 망명하였다. 이린의 6대손 이성계가 고려에 귀부하여 대장군이 되고, 그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되었다. 밀양박씨 42세 박윤공이 전주이씨 이의방, 이린의 칼에 맞아 죽었으니, 밀양박씨와 전주이씨는 전주이씨 아주 오래 묵은 宿怨이 있다.
그러나 47세 박사경은 상장군으로 이성계와 협력하여 조선을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봉해졌다. 그러나 48세 박침은 조선 개국에 반대하는 고려의 충신으로 두문동 72인에 들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것을 볼 수 있다. 박사경과 이성계가 친밀하였기 때문에 박사경의 후손들이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현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망하면서 밀양박씨 주류도 망하고 말았다.
고려사에 나타난 박윤공과 『밀양박씨세보』의 초기 편찬은 500년의 시공 차이를 갖는다. 족보 편찬자들이 없는 世系를 만들기 위해 고려사를 뒤져서 일부러 박윤공이란 이름을 찾아 적었을 리는 없을 테니, 박윤공 대의 <文科侍中> 이 넉 자가 500년 동안 간직한 의미에서 보듯이 세보 편찬 당시까지 전해 온 각 문중의 가첩들이 진실성과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500년 이전의 世系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성과 사실성이 상당함을 인지할 수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四十三世 光禮 사십삼세 광례
麗朝封密城君見后孫判書諱鼎賢號義谷
公重修聯系世牒謹按辛酉譜圖有數世傳疑故
公之諱上書後二字其後甲申譜廣考史牒則輿正言公諱尙禮錄萼聯啣故無疑而書于子字
又按國初譜圖及麗史公以太史公五世孫系出而給事公之孫侍中公之子
的然無疑
려조봉밀성군견후손판서휘정현호의곡
공중수연계세첩근안신유보도유수세전의고
공지휘상서후이자기후갑신보광고사첩즉
여정언공휘상례록악련함고무의이서우자자
우안국초보도급려사공이태사공오세손?출이급사공지손시중공지자
적연무의
고려조에(1344~1374) 밀성군에 봉해졌고, 후손이 판서인 박정현이고 호는 의곡이다.
공은 후손 연계{되는 여러 문중의 가첩들을 여러 번 맞추고 신유보에서 살펴봐도 많은 세대 동안 의혹이 전해 내려왔다.
공의 휘 두자는 위 신유보(1741년)후의 갑신보(1764) 때 널리 사료와 보첩을 고구한 즉 정언공 상례와 같은 형제임이 밝혀짐으로서 의문이 해소되어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또 국초의 족보도감과 고려사를 살펴보니 공이 태사공 언부의 5대손이요 급사공 육화의 손자요 시중공의 아들임을 확인되어 아무런 의문이 없게 되었다.
[첨언] 박정현 朴鼎賢 (1562년(명종 17) ~1637년(인조 15))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중로(重老), 호는 의곡(義谷) · 응천(應川). 할아버지는 박이(朴苡)이고, 아버지는 참찬 박호원(朴好元)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김명윤(金明胤)의 딸이다. 이산해(李山海)의 문인이다. 동지중추부사,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박승종(朴承宗)의 족당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정현 [朴鼎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첨언] 박광례를 고정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위의 기사를 보면 이 족보 『밀양박씨세보』가 57世인 박정현과 인척들의 시대에 정리 작업이 시작되어 100년 후인 1740년경에 처음 만들어져서 1764년에 수정, 보충되었음을 알 수 있다. 400년 세월이 흘러 실전된 박광례를 찾기 위하여 의곡 박정현으로 대표되는 많은 후손이 여러 후손 문중의 가첩을 모아서 확인하고, 족보보감과 고려사 등 많은 서책을 살펴보며 찾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밀양박씨세보가』는 완벽한 족보가 아니라 빈 데나 부족한 점, 추측과 오류 등이 많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노력했듯이 앞으로도 대를 이어 고정과 수정, 보충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
四十四世 惟孝 사십사세 유효
麗朝襲封密城君
配夫人東萊鄭氏父文科簷事弼見義谷公重修聯系世牒
려조습봉밀성군
배부인동래정씨부문과첨사필현의곡공중수연계세첩
고려조 때 아버지로부터 밀성군 봉호를 물려받았다.
배 부인은 동래정씨인데 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여 첨사를 지냈음을
의곡공 박정현이 연계되는 세첩들을 살펴보고 근거를 발견하였다.
四十五世 興 사십오세 흥
襲封密城君
습봉밀성군
아버지로부터 밀성군 봉호를 물려받았다.
四十六世 朴鉉 사십육세 현
麗朝文科司憲大夫糾正以道學文章鳴于世見輿地勝覺密州誌謹按
公之父祖曾三世爵位諱啣載義谷公舊牒而且昭載於菊潭追先錄與祖妣東萊鄭氏譜
及外裔許氏譜諱曰文有典理佐郞慶州判官孫諱曰思敬典理判書上將軍推誠翊戴功臣次曰思仁三曰思敏
려조문과사헌대부규정이도학문장명우세견여지승람밀주지근안
공지부조증삼세작위휘함재의곡공구첩이차소재어국담추선록여조비동래
정씨보
급외예허씨보휘왈문유전리좌랑경주판관손휘왈사경전리판서상장군추성익대공신차왈사인삼왈사민
고려조 문과 급제하고 사헌대부 규정을 지내셨다. 도학과 문장이 세상에 울렸음을 동국여지승람과 밀주지에서 삼가 살펴볼 수 있다.
공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삼세의 작위와 휘는 (후손인) 의곡공(박정현)의 구첩에 실려있고, 국담추선록과 함께 할머니 동래정씨 족보에 자세하게 실려있다.
또한 외예 허씨(규정공의 配가 허씨임을 알 수 있다) 족보에 아들의 휘는 문유로서 전리좌랑과 경주판관을 지냈고, 손자의 휘는 사경으로 전리판서와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대공신으로 책록되었으며, 둘째 손자는 사인이고 셋째 손자는 사민이라고 실려있다.
[보유] 享年八十七
東萊鄭氏譜諱惟孝以詹事鄭弼女入錄而子諱興孫諱鉉載之
又許涵譜以諱光禮惟孝興三世書子糾正公
향년팔십칠
동래정씨보휘유효이첨사정필녀입록이자휘흥손휘현재지
우허함보이휘광례유효흥삼세서자규정공
향년은 팔십칠세였다.
동래정씨의 보에는 휘 유효(惟孝)가 첨사 정필(鄭弼)의 사위라고 입록되어 있고 또한 子가 휘 흥(興) 이고 손(孫)은 휘 현(鉉)이라고 실려있다.
또 허씨의 보에는 위로는 휘 광례(光禮), 유효(惟孝), 흥(興)의 三世(삼세)라 쓰여 있고, 휘 興의 子가 규정공(糾正公)이라고 한다.
[보유] 糾正公墓誌
紏正公 墓誌公諱鉉字功肅 其先密城人也 文科司憲糾正 道學高明 中外洽然 遠近師之可謂東方道學之祖 配東萊鄭氏密直涵之女 芩州府南四十里 杜梅山下子坐 辛得之破
至正元年三月十一日 不肖孫思敬謹誌
규정공(糾正公) 묘지(墓誌) (돌에 새겨 무덤 앞에 묻은 글)
공휘현 자공숙 기선밀성인야 문과사헌규정 도학고명 중외흡연 원근사지가위 동방도학지조 배동래정씨밀직함지여 금주부남사십리 두매산하자좌 신득지파 지정원년삼월십일일 불초손사경근지
공(公)의 이름은 현(鉉)이요 자(字)는 공숙(功肅)으로 그 선조(先祖)는 밀성인(密城. 밀양의 옛이름) 사람이다. 벼슬은 고려조(高麗朝)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을 지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공은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시어 중외(中外 서울과 지방 고을)의 선비들이 흡족하게 여겼으며 원근(遠近)을 가리지 아니하고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고자 하였으니, 이야말로 동방국(東方國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始祖)라 이를 만한 분”이라 하였다.
공의 배위(配位)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밀직(密直 승지) 벼슬을 지낸 함(涵) 공의 따님이시다. 묘(墓)는 잠주부(岑州府 임진강 북쪽 장단군) 남쪽 40리 지점 두매산(杜梅山) 아래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방으로 모셔짐)에 신득을파(辛得乙破 묘 앞의 물길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이다.
지정원년(至正元年 1341년 고려 충혜왕 복위 년) 3월 11일
불초손(不肖孫) 사경(思敬)이 삼가 씀
[보유] 무열공 규정 박현(武烈公 糾正 朴鉉) : 1253(高麗,高宗40年 癸丑)~1340(忠惠王復位年,庚辰)
밀성군 박유효(密城君 朴惟孝)의 손자(孫子)로 밀성군 박흥(密城君 朴興)의 아들이다
고려 충선왕 및 충숙왕 때에 사헌부 규정(糾正)과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수교충절록(受敎忠節錄)]에 대사간 박상충(朴尙忠)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규정공 박현은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효를 하는데 곧 동방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사성 문정공 목은 이색(文靖公 牧隱 李穡)은 무열공을 ‘숭의전(崇義殿) 공자묘에 배향하도록 사(賜)하라’고 상소하였고, 전부(田傅)는 “고려태사 대사공신(代死功臣) 청백리 규정공 박현은 크게 글의 풍도(風道)를 일으키고 몸을 나라에 순절하여 천리(天理)를 다시 밝혀서 명성이 멀리 퍼지게 하였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과 나란히 한다”고 기록하였다.
벼슬은 정삼품에 이르렀으며 87세(八七歲)의 수(壽)를 누리셨다.묘(墓)는 실묘(失墓)하여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두응촌 제1묘역 상장군묘역 상단에 제단(祭壇)이 있다.
완주군(完州郡) 용진면(龍進面) 간중리(澗中里) 봉서동(鳳捿洞)에도 제단(祭壇)이 있다. 옥천군 원덕사(遠德祠)와 고흥군 숭양사(崇陽祠)와 장흥군의 세덕사(世德祠)와 경산 율산(栗山)에 위폐가 모셔져 있다.
[보유] 각양수교등록(各樣受敎謄錄)
조선후기 예조에서 선현·공신의 후예들의 군역·잡역의 면제요구에 관한 상언·상소를 모아 엮은 등록.상소문.
조선 후기 예조에서 편찬한 책. 1책. 필사본. 선조말부터 순조 때까지 수록되어 있으나, 주로 17세기 효종에서 숙종연간에 선현·공신의 후예들이 군역·잡역에 침책(侵責)당한 내용과 군역·잡역의 면제요구가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선현·공신은 경순왕·문익점(文益漸)·신숭겸(申崇謙)·장진필(張眞弼)·우탁(禹卓)·박현(朴鉉)·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간언신(簡彦信)·전이갑(全以甲)·우현보(禹玄寶)·강민첨(姜民瞻)·이색(李穡)·최충(崔冲)·공자(孔子)·김문기(金文起)·기자(箕子)·안유(安裕)·배현경(裵玄慶)·설총(薛聰)·김원발(金元發) 등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각양수교등록(各樣受敎謄錄))]
[보유] 列聖朝受敎
禮曹爲謄給事大司朴尙衷上書言 武烈公朴鉉卽設仁義輔忠孝誠可謂東方道學之祖 斯道之不墜其誰之力先賢報口 立後之典蔭及後裔者厥數雖多若 武烈公子孫垂萬世承蔭錄用東西正職不入沙汰考講勿定號牌軍保賤役鄕吏驛吏賤役免子孫之支公私之者許擢用淸路事言于銓自辛丑干戈滿目學校荒廢無臣僚復興之時 因大司成李文靖公上書附入傳配崇義殿孔子廟又賜致祭位田云云 禮曹覆啓武烈公朴鉉佐麗朝除塗炭興學校一洗三韓之舊染及公山之役與周全乘力戰而代死其身有口於斯文爲法於後世而入我朝以武烈公朴鉉後裔東西收用勿入講列勿口軍役擢用淸路事列聖朝受敎不翅縷縷其所優恤於裔之典依前擧行事覆啓允下 萬曆四十六年五月十日右副丞旨臣金緻次知啓傳曰先賢文成公安裕文憲公崔沖等一而武烈公朴鉉子子孫孫考講軍保鄕吏驛吏七般賤役及烟戶雜役只永永勿侵事傳敎敎是置受敎辭意道臣師臣與地方官奉審施行宜當向事
(出處.韓國學中央硏究院 기문잡록 (記文雜錄v1) )
예조위등급사대사박상훙상서언 무열공박현즉설인의보충효성위동방도학지조 사도지불추기유지력선현보구 립후지전음급후예자궐수유다약 무열공자손수만세승음록용동서정직불입사태고강물정호패군보천역향리역리천역면자손지지공사지자하약용청로사언우전자신축간과만목학교황폐무신료부흥지시 인대사성이문정공상서부입전배숭의전공자묘우사치제위전운운 예조복계무열공박현죄려조제도탄흥학교일세삼한지구염급공산지역여주전승력전이대사기신유구어사문위법어후세이입아조이무열공박현후예도서수용물입구열물구군역탁용청로사례성조수교불지시루루기소우혈어예지전의전거행사복계윤하 만력사십육년오월십일우부승지신김치차지계전왈선현문성공안유문헌공최충등일이무열공박현자자손손고강군보향리역리칠천면역급연호잡역지영영물치사전교교시치수교사의도신사신여야지방관봉심시행의당향사 (출처 한국학중안연구원 기문잡록)
예조위등급사 대사 박상충이상소하여 말하기를, 무열공 박현은 인의를 설하고 충효를 북돋우는 정성이 가위 동방도학의 원조라, 그 도의 높음과 선현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도를 한시도 멈춤이 없습니다.
대사간(大司諫) 박상충(朴尙衷)은 상소하기를..
박현(朴鉉)은 청백리(淸白吏)로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효(忠孝)의 사상을 널리 보급한 사람으로, 공(公)의 성(姓)은 박씨(朴氏)요 휘(諱)는 현(鉉)으로 밀양인(密陽人)이다.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의 45세손이며, 관조(貫祖) 밀성대군(密城大君)의 16세 손이다. 1253년(高麗 高宗40年 癸丑)에 고려국 태사(太師) 문정공(文靖公) 밀성군 흥(密城君 興)의 아드님으로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오르고 무열(武烈) 시호(諡號)를 받았으니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의 중조(中祖)이시다.
공(公)께서는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여 학문에 힘써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뛰어나 그 이름을 떨쳤고, 절의(節義)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공께서는 1340년(至正元年, 忠惠王復位年, 庚辰)에 졸(卒)하시니 향년 87세다.
1367년(공민왕 16)에 대사성(大司成) 문정공(文靖公)인 이색(李穡)과 대사간(大司諫) 박상충(朴尙衷)은 상소하기를, 『박현(朴鉉)은 청백리(淸白吏)로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효(忠孝)의 사상을 널리 보급한 사람으로 가위(可謂)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라 일컬을만 합니다. 하오니 규정(糾正) 박현(朴鉉)은 역사를 상고해보건대, 공의 높고 밝은 큰 덕과 가르침으로 말하면 그 업적이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과 같이 높고어지니 이들과 함께 숭의전(崇義殿)과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여 제사하게 하소서.』라 하였다.
공(公)의 배위(配位)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밀직(密直) 함(涵)의 따님이다. 공의 묘(墓)는 장단군(長湍郡) 장도면(長道面) 사시리(沙是里) 박능동(朴陵洞) 두매산(杜梅山) 아래에 자좌오향(子坐午向) 신득을파(辛得乙破)라 전한다.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산(鳳棲山) 봉서재(鳳棲齋) 뒷 산과 경기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원당) 박재궁(朴齋宮) 윗 자락에 공(公)의 제단(祭壇)을 설단(設壇)하고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또한, 옥천 원덕사(沃川 遠德祠)와 고흥 숭양사(高興 崇陽祠), 장흥 세덕사(長興 世德祠), 경산 율산서원(慶山 栗山書院) 등에 위폐(僞幣)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기도 하다.
[첨언]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고 하지만 경상도 청도군 편에 38세 박의신(37세 언부공의 子로 효신공의 아우)과 5대손은 있으나 45세 박현은 없다. 7세 후이니 다른 곳에 사셨을 수도 있다. 장단군과 개성편을 살펴보면 된다. 밀주지도 살펴봐야 한다.
四十七世 文有 사십칠세 문유
擢第拜典理佐郞歷慶州判官三品致仕
享壽九十五
墓忠州永月山見一牒
配李氏見世譜及泰安派無參錄
탁제배전리좌랑력경주판관역삼품치사
향수구십오
묘충주영월산견일첩
배이씨견세보급태안파무참록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전리좌랑에 배명받고 경주판관을 역임했으며,
3품의 관직을 지내고 낙향하여 1373년(공민왕22)에 졸하니 수 95세로 장수하였다.
묘소는 충주 영월산에 있다고 서첩에 나와 있다.
배위는 벽진인(碧珍人) 밀직(密直) 이대(李玳)의 따님으로 세보와 태안파 무참록에 실려 있다.
[보유] 공(公)의 전후(前後)로 벼슬이 높아져 집안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후손(後孫)들 중 높은 벼슬과 이름난 장수(將帥)들이 끊이지 않아 조정(朝庭에는 공의 후손(後孫)들로 가득 했다고 한다. 묘소(墓所)는 실묘(失墓)하여 두응총 제1묘역 상장군 묘역 상단의 무열공 규정공 제단(武烈公 糾正公 祭壇) 우측에 제단(祭壇)을 세우고 향사(享祀)한다.
子는 박사경(朴思敬) 박사인(朴思仁) 박사민(朴思敏)이다.
사위 박중미는 1361년[공민왕10년]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쳐 평정하고, 밀직부원군에 봉해짐)
[출처] 밀양 박씨 규정공후 청재공파 진주문중 가승보(족보)|작성자 은우상준
四十八世 思敬 사십팔세 사경
高麗官典法判書一云版圖判書兼上將軍推誠翊戴功臣享壽九十三
墓在高陽男孝陵西元堂里豆應村癸坐原有床石辛酉刻今稱朴齊宮
配全州李氏父守善墓全州
고려관전법판서일운판도판서겸상장군추성익위공신향년구십삼
묘재고양남효릉서원당리두응촌계좌원유상석신유각금칭박제궁
배전주이씨부수선묘전주
고려 전법판서(典法判書) 또는 판도판서 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냈으며 추성익대공신이 되었다. 향수는 구십 삼세였다.
묘소는 고양시 남효릉(男孝陵) 서쪽 원당리 두응촌에 계좌 언덕이고 ‘신유년 지금 박제궁이라 칭한다‘고 새겨진 상석이 있다.
배는 전주이씨이고 아버지는 이수선(守善)이며 묘소는 전주에 있다.
[보유] 고려사절요 제30권 / 신우 1(辛禑一) 을묘신우 원년(1375), 대명 홍무 8년
○判事朴思敬,還自北元,白太后曰,納哈出,言,爾國宰相,遣金義,奏王薨無嗣,願奉瀋王爲主,故帝封瀋王爲爾主,若前王有子,朝廷不必遣瀋王也,太后,召仁任曰,宰相,遣金義如元,予聞此言久矣,卿等,獨不知乎,
○ 판사 박사경(朴思敬)이 북원에서 돌아와 태후께 아뢰기를, “나하추의 말에, '너희 나라 재상이 김의를 보내어 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고 아뢰고, 심왕을 받들어 임금을 삼기를 원하기에, 황제께서 심왕을 봉하여 너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전 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조정에서 반드시 심왕을 보내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후가 인임을 불러 이르기를, “재상이 김의를 원 나라에 보냈다는 말은 내가 들은 지가 오래다. 경들은 알지 못하는가." 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 (itkc.or.kr)>
[보유] 高麗推誠翊威功臣典法判書兼上將軍密陽朴公思敬之墓
고려추성익위공신전법판서겸상장군밀양박공사경지묘
상장군공 박사경 上將軍公 朴思敬(1312~1402 고려 충선왕 4~조선 태종 4년)
조부는 규정공 박현(糾正公 朴鉉), 부친은 전리 좌랑공 박문유(朴文有)로 3남 중 장자이며 배위는 전주이씨이다.
1312년(고려 충선왕4)생으로 문과(文科) 급제 후 전법판서(典法判書)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고려사(高麗史)에 공이 원경(元京)에 체류하고 있을 때에 충정왕(忠定王)이 훙서(薨逝) 후에 후사(後嗣)가 없음을 빌미로 친원파(親元派)들이 작당하여 왕을 북원 사람 독타불화(篤朶不花)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급히 귀국하여 명덕태후(明德太后)에게 직간(直諫)하고 신진 사류 박상충(朴尙衷)등과 협동하여 백태후(白太后)를 도와 간신(奸臣)들을 척결할 것을 직접 간언(諫言)하여 친원파(親元派) 안사기(安邪琦)를 처단하고 강녕대군(江寧大君) 왕우(王禑)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니 1351(辛卯) 12월의 거사로 곧 공민왕(恭愍王)이다.
공께서는 이 일로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려말 선초 보기 드물게 장수하여 수 93세로 1404년(조선조 태종4)에 졸하였다.
[첨언] 다른 문중 족보에서는 ‘추성익위공신 推誠翊威功臣’이라 하는데, 고려 조에서 강민첨과 한호 등이 받은 공신 칭호는 ‘추성익대공신 推誠翊戴功臣’이다. 우리 문중의 『밀양박씨세보』는 ‘推誠翊戴功臣’이다. ‘推誠翊威功臣’을 밀양박씨 문중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데, 고구를 거쳐 잘못이라면 족보와 인터넷 등 모든 자료에서 수정해야 할 것이다. 만약 ‘推誠翊戴功臣’이 맞다면, 박사경 할아버지 비문 등을 고쳐야 할 것이다.
四十九世 忱 사십구세 침
元至正壬午生官典儀寺判事開國原從功臣
明建文己卯卒享年五十八
贈戶曹典書
墓長湍舊縣男廉陵里朴陵谷子坐失傳久俟今上新築還尋
配夫人密城后典法判書密山君僯一諱密陽之女生三男一女
至正癸未生洪武辛酉卒享年三十九
墓全州襄只里府北門外十五里鳳棲山前有鳳棲寺屬慶其殿
配夫人咸從郭氏生一女按麗史勝覽及一牒有諱瑞生云以公之第四子官大司憲國初隱于白雲山以終未詳
원지정임오생관전의시판사개국원종공신
명건문기묘졸향수오십팔오
증호조전서
묘장단구현남염릉리박릉곡자좌실전구사금상신축환심
배부인밀성후전법판서밀산군린일휘밀양생삼남일녀
지정계미생홍무신유졸향년삼십구
묘전주양지리부북문외십오리봉서산전유봉서사속경기전
배부인함종곽씨생일여안려사승람급일첩유휘서생운이공지제사자관대사헌국초은우백운산이종미상
원나라 지정 임오(壬午)(1342년) 생으로 관직은 전의시판사를 지내고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졌다
명나라 건문 기묘년(1399년)에 졸하시고 향년은 오십팔세였다
호조전서로 증직을 받았다
묘소는 장단 옛 현의 남쪽(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사실리. 현 북한 개성시[특급시] 장풍군 사시리. 석물이 있다) 염릉리 막릉곡 자좌였으나 실전되었다가 현재 다시 신축 환원하였다.
배부인은 밀성 후인이며 전법판사를 지낸 밀산군 린 일설 밀양의 여식이며 3남 1녀를 낳았다
원나라 지정 계미년(1343년)에 태어나 명나라 홍무 신유년(1381년)에 졸하시니 향년 삼십구세였다
묘소는 전부 양지리 부 북문 밖 십오 리 봉서산 앞 봉서사에 속하는 경기전에 있다
배부인 함종곽씨는 1녀를 낳았다. 고려사와 여지승람 및 보첩에 보면 휘 서생이 있는데 공의 넷째아들로서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국초에 백운산에 은거했는데 나중에 어찌 됐는지 모른다고 한다.
[보유 1] ‘配夫人密城后典法判書密山君僯一諱密陽之女’라 했는데, 저생(抵生), 강생(剛生 1369~1422), 눌생(訥生 1374~1449)을 낳았다. 저생은 간성공파의 중시조가 되었고, 강생은 아랫대에서 청계공파, 낙촌공파, 충정공파 등으로 분파되어 광해조까지 가장 번창하였다. 또한 눌생은 참판공파의 중시조가 되었고, 후손이 충간공파로 분파하였다.
‘配夫人咸從郭氏生一女按麗史勝覽及一牒有諱瑞生云’라 했는데, 태종실록에는 아들이 ‘訥生’이나, 모친 밀산박씨가 1381년 돌아가시기 전인 1374년에 태어났으므로 오류이고, 찬성공파보에는 ‘信生’이다. 아들 박호문의 무덤이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산 110번지에 있다.
1412년에 벌어진 계모 함종곽씨와 전처 맏아들 저생 간의 송사 사건은 조상의 수치이므로 고금을 막록하고 후손들이 언급해선 안 될 것이다. 함종곽씨의 묘소가 밀산박씨 부인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있음은 사건 후에 세 형제와 저생의 아들이 모여 불미스런 일을 씻어버리고 우애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증표이다.
[보유 2] 휘 침(忱) 할아버지는 고려조에 문과 급제하여 전의시판사를 할 때 고려의 국운이 다하매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 칠십일현의 한 분이 되었다. 시를 지어 말씀하기를 “西退復東隱 夷齊是吾師 서쪽 두문동에서 나와 동쪽 백록동에 숨어서 사니 백이와 숙제가 오직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고 끝내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공께서 전서(典書) 서보(徐輔), 전서(典書) 채귀하(蔡貴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서 나와 배를 타고 벽란진을 건너 서해로 퇴둔할 (退遯)때 시를 지어 망국의 한을 토로하였는데, 참으로 애절하기 그지없다. 이때 공께서 시 한 수를 읊으셨다.
共出北門碧瀾渡
損益三友君且吾
鵠嶺山下迷歸路
西指首陽問橫島
공출북문벽란도 북문을 같이 나와 벽란진을 건넜으니
손익삼우군차오 지조를 지킨 이야 그대들과 나뿐일세
곡령산하미귀로 곡령산 기슭에서 헤매는 길손이여
서지수양문횡도 수양산 가리키며 횡도야 어드멘고
곡령산에서 헤어진 후 박침은 두류산, 채귀하는 다의현(多義峴), 서보(이천 서씨 전서공파)는 적암(積岩)에 은거했다고 한다.
[참고 1] 인천채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시조공 고려 증동지사(曾同知事) 채선무의 10세손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의 시호는 정의(貞義)이고 어려서부터 포은 정몽주 선생과 도의를 강마하고 교양을 위한 학문을 독실하게 닦았습니다.
고려의 운명이 끝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고려의 유신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공은 통곡하며 글을 써서 아들을 경계하여 가로되, 나라가 무너지고 인군이 망하였으니 내가 어찌 돌아가겠는가. 맏아들 군자소감 채영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삼가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라. 둘째 아들 채부 세마는 서도 (지금의 평양)으로 가서 부모와 스승이 남긴 가르침을 따르라. 채동양의 아들 참의 채승, 넷째 수사 채명양은 내 뒤를 따르라 하여 목단산에 들어가 은거하였습니다. 그후 후손이 번성하여 대구를 근거하여 전국에 산재하여 살고 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전국 인구조사에 의햐면 인천채씨의 인구는 43,387명이었습니다. [대전 뿌리 공원 조형물]
* 의현사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로 234-32(검단동)
고려 공양왕조 호조전서 두문동 72현(賢)의 한 분인 정의 체귀하 공을 모신 곳으로 인천채씨(仁川蔡氏) 증시조의 공을 기리기 위해 후손 삼천여 명의 정성으로 1981년에 건립하였다. [다음백과]
[참고 2] 채귀하(蔡貴河)
채귀하는 고려 말에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달성군 후동(지금의 대구시 중구 후동 중앙공원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웃한 고을 영천의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젊어서부터 사귀었고, 함께 벼슬을 했다. 벼슬이 호조전서에 이르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조영규(趙英珪)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울면서 “세상일은 끝났도다”며 관복을 벗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두문동에 머물다가 조선 개국 세력에 쫓겨 뿔뿔이 흩어질 때 채귀하는 예성강 포구인 벽란진을 건너게 됐다.
이때 함께 강을 건넌 여덟 전서(典書·조선의 판서 직책)가 있었다. 호조전서를 지낸 채귀하·변숙(邊肅)·이맹운(李孟芸)·박침(朴沈)·조안경(趙安卿), 공조전서를 지낸 서보(徐輔)·박심(朴諶)·박녕(朴寧)이 이들인데, 이들이 벽란진을 건넌 것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팔전도(八典渡)라 불렀다.
이때 벗들과 헤어지며 지은 채귀하의 시가 몇 편 전하는데, 그중에 ‘도진분로(渡津分路·나루를 건너며 길이 갈리다)’가 있다. “다 함께 두문동을 나와서/ 배를 잡아 앞다투어 나루를 건넜네/ 고려의 국록을 아직 잊지 못하는데/ 어찌 이씨의 신하가 되겠는가/ 바다를 건너겠다는 노중련의 절개 같고/ 고사리를 캐던 백이숙제와 한가지일세/ 나라 잃은 우리들의 원한을/ 답답하여 강물의 신에게 물어보노라.”
채귀하가 벽란진을 건너 다다른 곳은 수양산 줄기인 평산의 목단산(牧丹山)이었다. 정확한 주소지는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 아현리 다의현이다. 채귀하가 다의당이란 호를 가진 것도 이 지명에서 유래됐다. 그런데 채귀하보다 목단산에 먼저 들어와 살던 이가 있었는데, 그가 목은 이색(李穡)이다. 이색은 목단산의 서쪽 탁영대에, 동쪽 배록동에는 신황의(申黃衣)가, 가운데 다의현에 채귀하가 살았다. 채귀하는 이곳에 머물며 이색과 시문을 주고받았는데, 이색에게 보낸 글귀 중에 “망국의 한을 품은 몸이/ 죽지 않고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는 다의현에서 송경(松京·개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기도 했다. “하루 종일 산막에서 대사립 달아놓고/ 멀리 송악을 바라보니 저문 구름 어둡구나/ 가을 바람에 궁궐 터는 기장 밭이 된 듯하여/ 예로부터 외로운 신하는 눈물만 흘리네.”
채귀하는 목단산 다의현에서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던 모습을 그린 채미도(採薇圖)를 보면서 절의를 지키다 생을 마쳤다. 그리고 목단면 의현리 불곡산에 묻혔다.
[참고 3] 서보(徐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구적암면(舊積岩面)(현재는 積岩面)의 由來(傳說)
本 전설(傳設)은 번면(本面) 온후(溫后) 고서복환(故徐復煥) 학자(學者)의 유전(遺傳)이라 한다
「적암(積巖)이란 암(巖) 字는 모양이 준험(險峻)하게 생긴 대로를 表現함이요,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않고 自然대로를 말함이다.
由來에 대하여는 歷史와 考證도 없이 언전(諺傳 민간에 전해지는)되고 있음을 그대로 記錄하는 바 筆者도 사실(事實) 여부(與否)는 확인(確認)할 길이 없으므로 各者의 식견(識見)에 一任하는 바이다.
구평산군지(舊平山郡) 고적(古跡) 란에 記錄된 바와 같이
「典書 徐輔 麗 李退休 伐樹開沓 孫 塘植 建築石 構亭以講諸生 名以杏亭 後孫 敎官 徐X 因建遺墟碑 因修㘩亭 전서 서보 려 이퇴휴 벌수개답 손 당식 건축석 구정이강제생 명이행정 후손 교관 서X 인건유허비 인수비정」
이라 한 바에 依하면 五百數十년전 積岩面의 由來가 된 이곳은 溫井里에서 約 6Km 떨어진 東方 新畓里이며 高句麗 末期에 典書 徐輔가 退去比地하여 穩居 終身한 構基이다. 그는 新王 李朝에 벼슬하지 않은 代身 住居 周圍의 樹林을 손수 伐採하고 논을 일구어 自結自足하면서 李氏王朝 開京이 보이지 않게 바위(다듬지 않은)를 높고 길게 쌓은 것이 綠由되었다고 諺傳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㘩項 溫后里 燈明洞 出身 故申泰燮甫 提報)
[출처 :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카페]
[참고 4] 두문불출(杜門不出) 두류산인 박침
“문을 닫아걸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입을 하지 않음을 말한다”.
고려가 망한 때에 한 동네가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문을 닫고 절의(節義)를 지켰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두문동이라 불렀다. 고려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인데,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아래를 말한다. 그리고 두문동이라 말함은, 고려조의 세신(世臣)들이 개국한 조선왕조에 벼슬을 하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서는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려 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 중에서
그리하여, ‘두문동 72현 (杜門洞 七十二賢)’은 조선 개국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들을 칭하여 말한 것이며, ‘두문동’은 이들 때문에 훗날 붙여진 지명이다. ‘두문(杜門)’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는 의미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두문동 72현’은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일찍이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조 이전까지는 공식적인 문헌인 실록(實錄) 등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이다. 이들 언급을 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 12년(1412,임진년)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조에서 사헌부 장령을 지낸 서견(徐甄)이 금주(衿州)에 은거할 때 고려를 사모하는 시를 썼다.
千載新都隔漢江
忠良濟濟佐明王
統三爲一功安在
却恨前朝業不長
천재신도격한강 천년의 새 서울이 한강 너머 있는데
충량제제좌명공 충성하는 신하들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
통삼위일공안재 삼한을 통일한 공 어디에 있느뇨?
각한전조업부장 문득 전조 왕업이 길지 못함 한하노라
이 시의 처음 두 구절에서‘천년의 신도(新都)와 충성스런 신하들이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라고 한 것은 조선의 개국을 찬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 두 구절의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이라고 한 말과 ‘전조의 왕업 즉 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함을 한하노라’라고 한 것은 은연중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사실은 즉각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이에 태종은 “서견(徐甄)이 조선의 조정에서 벼슬을 아니 하고 전조(前朝)의 신하로서 추모하는 시를 지었으니 또한 착하지 아니한가.”라며 더이상 죄를 묻지 말라고 했다.
또한, 두문동 72현에 대한 언급은 영조실록에 처음 나타난다. 영조(英祖)는 즉위 16년(1740. 경신년)째 되는 해에 송도에 있는 재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참배하러 갈 때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신하들이 “부조현은 개성의 대족(大族)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에서 ‘부조현(不朝峴)’과 ‘두문동(杜門洞)’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부조현’이란 고려의 유신들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신왕조인 조선의 왕에게 ‘조회를 하지 아니하고(부조;不朝) 넘어간 고개(현;峴)’라는 말로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영조는 ‘부조현’ 앞에서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한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후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는 것과 같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했다. ‘승국충신면계세(勝國忠臣勉繼世 ;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라고 한 것이다.
그는 ‘부조현(不朝峴)’세 글자를 써서 그 유허지(遺墟地)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영조 27년(1751, 신미년)에는 두문동 72인들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또 어필(御筆)로서 “승국충신금언재 특수기동표기절(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 ; 고려의 충신이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그 동리에 비석을 세워 그 절의를 표하노라.)”라는 14자를 써서 내리고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한다. 제문(祭文)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曺)와 임(林)과 맹성(孟姓) 세 사람만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유지(遺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 사적이 점점 오래되고 문헌이 없어져 후세에 권장을 하려해도 표석이 없으므로 특별히 큰 글자 14자를 비석에 새겨 나의 뜻을 나타내었노라. 남긴 충렬을 생각하여 후손을 찾아내어, 방위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깨끗하게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드리노라.」
그 뒤 정조는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配享)하였다. 두문동 72현은 다음과 같다. 한편 기록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명단은 아닐 것이다.
▲우현보(禹玄寶)-본관 단양, 호 양호당(養浩堂) ▲조의생(曹義生)-본관 창녕, 호 원촌(遠村) ▲임선미(林先味)-본관 평택. 호 휴암(休庵) ▲고천상(高天祥)
▲전귀생(田貴生)-호가 뇌은(耒隱)▲이숭인(李崇仁)-본관 성주, 호 도은(陶隱), 정몽주가 살해된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심복에게 배소에서 살해됨 ▲이맹예(李孟藝)-오천 은거 ▲유순(柳洵)-오봉산 은거 ▲전조생(田祖生)-호가 경은(耕隱)-두류산 배록동 은거 ▲조승숙(趙承肅)-호 덕곡(德谷), 고향 덕곡으로 돌아감 ▲채귀하(蔡貴河)-다의현 은거 ▲서보(徐輔)-적암 은거 ▲변숙(邊肅) ▲박심(朴諶) ▲신안(申晏)-호 황의옹(黃衣翁), 황의산 은거 ▲박녕(朴寧) ▲김충한(金冲漢)-호 수은(樹隱), 두류산 은거 ▲고천우(高天祐)-두류산 은거 ▲서중보(徐仲輔)-두류산 은거 ▲조안경(趙安卿)
▲이색(李穡)-본관 한산, 호 목은(牧隱), 조선 개국 후 유배생활을 하다 죽음
▲이유(李裕)-오천 은거 ▲조견(趙狷)-송산 은거 ▲허금(許錦)-호 야은(埜隱)
▲이수인(李守仁)-원지(遠地)로 유배 ▲정희(鄭熙)-원지(遠地)로 유배
▲길재(吉再)-본관 해평, 호 야은(冶隱), 고려 멸망 후 고향 선산(善山)에서 후진교육에만 힘씀 ▲원천석(元天錫)-본관 원주, 호 운곡(耘谷), 일찍이 태종 이방원을 가르친 바 있어 여러 번 불렀으나 고려 멸망 후 치악산 은거
▲김주(金澍)-호 농암(籠岩), 중국으로 들어감 ▲최양(崔瀁)-본관 전주), 호 만육당(晩六堂), 중대산(中臺山) 은거, 포은 정몽주의 생질 ▲전오륜(全五倫)-서운산 은거 ▲조홍(趙洪)-율원산 은거 ▲김자수(金自粹)-호 상촌(桑村), 추령 은거 ▲이사경(李思敬)-숙신리 은거 ▲이수생(李遂生)-율리 은거
▲김약시(金若時)-본관 광산, 호 음촌(陰村), 조선 태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절의를 지킴, 금광리 은거 ▲남을진(南乙珍)-본관 의령, 사천 은거하다 조선 태조가 부르자 더욱 깊숙이 감악산 은거 ▲이행(李行)-본관 여흥, 호 기우자(騎牛子), 고려 멸망 후 예천동 은거 ▲이륜(李淪)-도탄 은거
▲이양중(李養中)-본관 광주, 호 석탄(石灘), 고려멸망 후 태종이 불렀으나 끝내 절의를 지킴 ▲서견(徐甄)-본관 이천, 호 여와(麗窩), 정몽주 살해 후 정도전 등에 의해 장류(杖流)되었다가 풀려나 조선 개국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나 금천(衿川)에 숨어 살면서 절의를 지킴 ▲임탁(林卓)-금성 은거
▲김육비(金六庇)-고석산 은거 ▲변귀수(邊貴壽)-두류산 배록동 은거
▲안종약(安從約)-두류산 은거 ▲김준(金俊)-두류산 은거▲윤육(尹陸)-두류산 은거 ▲박침(朴忱)-두류산 은거 ▲배상지(裴尙志)-호 백죽(柏竹), 두류산 은거
▲구홍(具鴻)-본관 능성, 호 송은(松隱), 두류산 은거 ▲이유인(李唯仁)-두류산 은거 ▲박문수(朴門壽)-두류산 은거 ▲이석지(李釋之)-본관 영천(永川), 호 남곡(南谷), 용인 은거 ▲성사제(成思齊) ▲민보(閔普) ▲임척(林隲) ▲차원조(車元覜) ▲최문한(崔文漢)-본관 강릉, 호 충재(忠齋), 충숙왕 부마(駙馬), 강릉 은거 ▲신석(申釋) ▲신자악(申自嶽)-신석 의 아우, 영해 은거 ▲김위(金瑋)-두류산 은거 ▲민안부(閔安富)-두류산 은거 ▲신덕린(申德隣)-두류산 은거 ▲신포시(申包翅)-두류산 은거 ▲박의중(朴宜中)-본관 밀양, 호 정재(貞齋)
▲이양소(李陽昭)-본관 순천, 호 금은(琴隱), 조선 태조와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묘정(墓庭)으로 돌아감 ▲박태시(朴太始)-호 송계(松溪), 고향으로 돌아감
▲이경(李瓊)-호 이우당(二憂堂) ▲맹호성(孟好性)-호 용호(龍湖) ▲길인적(吉仁迪) ▲신이(申彛)-호 신귀재(愼歸齋) ▲반모(潘某)-실명(失名)
* 두문동 72현의 명단이 72명으로 고정된 최초의 문헌은 고종 9년(1872년)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철종 11년 (1860)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다. 물론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기우집’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 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좁혀 뽑아 정했기 때문이다. [다음백과]
* 동사강목(東史綱目):조선후기 유생들 교과서)은 이렇게 써 놓았다. “고려가 망한 후 명문자제들은 벼슬을 싫어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죽음으로 지조를 지켰으니 그 자폐현상을 지금에 두문동이라 한다.” 또 “부녀들이 거리에 나설 때는 얼굴을 가리고 화사한 몸단장을 아니 하며 소박하게 정결을 지키니 그 풍속이 지금에 이른다.”고 했다.
[참고 5]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발복지 정경부인 밀산박씨 묘
39세에 수하시고, 지생, 강생, 신생 등 3남을 두신 정경부인 밀산박씨는 밀산군(密山君) 린(璘)의 따님이시며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파조 박현(朴鉉)의 증손자이신 박침(朴忱)의 부인이시다.
묘는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현 완주군 용진읍 간중리 산2번지) 봉서동에 있고 석물이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발복지이며 호남 8대 명당으로 알려진 정경부인(貞敬夫人) 밀산박씨(密山朴氏) 묘는, 우수좌류 정미방(丁未方) 수구(水口)이면 곤신향(坤申向)을 세우는 88향법의 자생향에 따라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해 득수는 생(生)득수이고 정미 파구는 고장파(庫葬破)이다. 특히 안산 너머 곤방에 규봉(窺峰)처럼 투구 모양의 산 정상이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곳의 발복으로 이후 7대가 과거급제를 하고 밀양박씨 중에서도 규정공파가 자손이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많은 풍수가들이 찾고 있다.
[참고] 두문동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두문동(杜門洞) 태학생(太學生) 72인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72인의 고려 유신. 두문동 태학생 72인
현재 72인의 성명이 모두 전하지는 않고, 임선미(林先味)·조의생(曺義生)·성사제(成思齊)·박문수(朴門壽)·민안부(閔安富)·김충한(金沖漢)·이의(李倚) 등의 성명만 전한다. 그 밖에 맹(孟)씨 라는 성만 전하는 자가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이들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구전(口傳)이 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지명은 조선이 건국되자 태학생 임선미 등 72인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서 마을의 동·서쪽에 문을 세우고, 빗장을 걸고서 문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태조는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경덕궁(敬德宮)에서 친히 과장(科場)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의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그 고개를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하여 이를 괘관현(掛冠峴)이라 불렀다고 한다.
1740년(영조 16) 영조가 개성을 행차할 때 부조현의 이러한 유래를 듣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그 뒤 이 고사가 임선미·조의생 자손의 가승(家乘)을 통하여 정조에게 알려져 1783년(정조 7)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추모하였다.
다른 한 속전(俗傳)에 따르면, 개성 부근 보봉산(寶鳳山) 북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도 두문동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 유장(遺將) 48인이 들어와서 몸을 씻고서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한 골짜기라고 한다. 이들의 성명 역시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신정(洗身井)·회맹대(會盟臺)라는 지명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송도속지(松都續誌)』, 『중경지(中京誌)』,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보유 3] 김회련 개국원종공신녹권
1395년(태조 4) 조선 조정이 검교 한성판윤 김회련에게 내린 개국원종공신녹권. 1966년 2월 2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내용을 보면 개국원종공신의 선정절차와 이들 공신에게 내린 상급의 내용 및 공신도감의 구성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공신도감의 관원은 녹사(錄事)·판관·부사(副使)·사(使)·판사 각 2명이 있었고, 이조의 좌랑·정랑·의랑(議郞) 각 2명, 지조사(知曹事)·전서·겸전서·판사 등과 별감 3명이 녹권 발급에 관여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태조실록》에도 없는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이조지인(吏曹之印)이 찍혀 있으며, 문서 끝에는 발급연월일과 사무집행자의 관직·성씨·수결(手決)이 있다.
전하께서 즉위하던 처음에 궁궐의 일이 갖추지 못하자 고려의 전성기 때 제도를 덜고 더해서 궁의(宮儀)를 갖추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야흐로 전하께서 즉위하실 무렵에 일관(日官)으로 있으면서 삼가 천시(天時)를 점치고 대위(大位)에 오를 것을 권고하였다. 이들은 통틀어 왕지 내의 뜻과 같이 가상하다. 그러므로 다시 공신직명단자(功臣職名單字)를 신문(申聞)하였더니 거기에 대해 전하께서 낱낱이 분례(分例)하셨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부사(前府使) 황보개(皇甫盖)ㆍ진의귀(陳義貴)ㆍ이황(李滉)ㆍ홍보(洪保) 졸(卒)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숭(李崇) 고 검교문하부사(故檢校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 전 지문하(前知門下) 치사(致仕) 김득제(金得齊) 전 밀직(前密直) 윤취(尹就) 권균(權鈞) 유번(柳蕃) 관찰사(觀察使) 이지(李至) 절제사(節制使) 이희충(李希忠) 전 밀직부사(前密直副使) 곽선(郭璇) 권현(權鉉) 권현(權顯) 김천리(金天理) 검교중추부사(檢校中樞院使) 김지서(金之瑞) 원빈(原賓) 유방택(柳方澤) 노을준(盧乙俊) 전 개성윤(前開城尹) 이서(李舒) 원(原) 유규(柳玽) 정의(鄭義) 전 절제사(前節制使) 정영손(丁令孫) 고 검교밀직부사(故檢校密直副使) 주원(周原) 전 첨절제사(前簽節制使) 박인우(朴麟祐) 전 전서(前典書) 강유(姜儒) 염광원(廉廣原) 박의(朴誼) 윤순(尹順) 전요(田饒) 박침(朴忱) 여우(呂遇) 신양귀(辛良貴) 기전(奇琠) 고의(高義) 정원보(鄭原輔) 최윤문(崔潤文) 안인길(安仁吉) 정복(鄭復) 민중훤(閔中萱) 홍사안(洪沙顔) 홍승우(洪承祐) 최천(崔天) 노승경(盧承慶) 강윤주(康允柱) 임천년(任天年) 강양(姜陽) 권충(權衷) 조경우(趙瓊禹) 문수(文粹) 김손(金遜) 박지원(朴之原) 박원식(朴原植) 안길(安吉) 신하(申夏) 황윤기(黃允奇) 박만용(朴萬龍) 손원충(孫原忠) 곽만경(郭萬慶)
[팔경첨언] 휘 침(忱) 이 어른이 조상님들 중에서 인생의 파란을 가장 많이 겪으신 분이다. 두문동 72현이기도 하고 개국원종공신이기도 한 정반대의 일생은 가히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할 만큼 현대 시중 말로 다이나믹하게 사신 분이다.
기사 어디에도 급제란 말이 없는 걸 보니 전법판서 겸 상장군으로 추성익대공신에 봉해진 아버지 박사경의 후광으로 음직을 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가, 1392년 51세에 전의시판사일 때 조선 개국을 맞이했다. 많은 관리가 정치 현실에 적응하여 조선의 관리로서 새 출발했지만 박침은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아래 두문동에 들어갔다. 아직 아버지가 81세로 살아계셨기 때문에 가솔들에 대한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 나라 조선을 부정하는 정신적 중추세력 집단을 용납할 수 없는 조선 조정의 독촉과 탄압에 견디지 못한 고려 충신들은 각자 다른 은거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두문동을 나온 세 명의 전서 박침, 채귀하, 서보가 서해로 나갈 배를 타려고 벽란도에 서 있을 때, 박침이 ‘共出北門碧瀾渡’ 시 한 읊었다. 둘째 행 ‘損益三友君且吾’를 보면, 72 충신들이 두문동에서 흩어질 때 많은 사람이 조정의 압박에 굴복하거나 개인의 이해득실에 따라 조선의 관리로 복직한 것 같다. 그러나 박침, 채귀하, 서보 세 선비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박침은 그길로 두류산에 들어갔다가 몇 년 후에 개경으로 돌아와 다시 벼슬 길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다가 1399년 58세로 졸하였다. 채귀하는 목단산 다의현에서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던 모습을 그린 채미도(採薇圖)를 보면서 절의를 지키다 생을 마쳤다. 그리고 목단면 의현리 불곡산에 묻혔다. 서보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 신답리 수림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하면서 이씨왕조 개경이 보이지 않게 바위를 높고 길게 쌓아놓고 살았다고 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조선후기 유생들 교과서)가 써 놓기를, “고려가 망한 후 명문자제들은 벼슬을 싫어하고 집안에 들어앉아 죽음으로 지조를 지켰으니 그 자폐 현상을 지금에 두문동이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즉 조선 시대 내내 고려 초기에 두문동과 산림, 또는 자기 집에서 은둔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자폐 현상’이라고 할 만큼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인 ‘두문동 72현’은 금기였다. 그러나 이 동사강목도 간과한 점이 있다. 상것이나 일반 관리들이 아닌 ‘명문자제들’이 왜 벼슬을 싫어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뒤집어 보면, 가문과 학벌, 능력과 도덕이 우수한 ‘명문자제들’은 새 왕조 조선을 외면했고, 보통 이하의 집안의 자제들만이 새 왕조에 참여했다는 반증이 된다.
후세에 영조가 왕권을 강화하는 방책으로 ‘부조현’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의 표상으로 ‘두문동 72현’을 띄웠다. 그러자 많은 가문에서 자기 조상이 ‘두문동 72현“이라고 주장하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72명의 명부가 수차레에 걸쳐 변하였다고 한다. 현재도 ’두문동 72현‘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수많은 사람들과 가문이 줄줄이 달려 나온다.
그러나 위 [보유 2], [참고 1), [참고 2], [참고 3]에서 보듯이 박침, 채귀하, 서보 세 분의 두문동 행적은 고금을 통해 뚜렷하다. 이 세 분은 뚜렷한 고려 충신이다. 그러나 여하의 이유이든 간에 두문동에서 나와 조선조에 출사한 사람은 ’두문동 72현‘의 고려 충신이 될 수 없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역사도 변한다. 고려 충신으로 조선 500년 동안 끝까지 절개를 지킨 가문도 있지만, 훨씬 많은 수의 가문이 몇 대가 흐르면서 조선 조정에 출사를 하게 되었다. 박침의 가문 역시 그러한 변화 속에 들었다.
1395년(태조 4) 조선 조정이 검교 한성판윤 김회련에게 내린 [보유 3]의 개국원종공신녹권에 보면 박침이 원종공신으로 되어 있다. 그럼 두류산에 들어갔던 박침이 곧 산을 나와서 개경 조선 조정에 출사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개국공신은 개국 전과 직후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작위이다. 1392년 개국 때에 박침은 두문동에 들어갔고, 이후 아무런 벼슬을 하지 않다가 7년 후인 1399년에 졸하였다. 두문동에 들어가기 전에 이성계에게 협조했다면 아예 계속 벼슬을 했지 왜 구태여 두문동으로 들어가겠는가. 그러므로 젼혀 무관하다.
여기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버지 박사경과 이성계의 관계이다. 1392년 조선 건국 때 부 박사경은 81세, 자 박침은 51세였다. 이성계는 58세였다. 박사경이 1351년 거사로 공민왕을 추대할 때는 40세 이후 상장군이 되어 한창일 때 이성계는 청년 장교였다.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할 때 박사경은 77세로 은퇴한 원로로서 73세 최영과 달리 이성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때 부자간에 정치적 입장과 노선을 두고 치열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계가 박침을 원종공신에 책록한 것은 아들 박침이 아니라 아버지 박사경의 공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박사경은 1402년까지 10년을 더 살면서 아들이 죽고 난 후에도 가문을 든든하게 보존하였다. 그 덕분에 손자 넷이 모두 관직에 출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참고 5]의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발복지 정경부인 밀산박씨 묘에 대해 살펴보자. 밀산박씨의 묘가 호남의 명당이라서 이후에 자손들이 발복햇다고 하여 지금도 많은 풍수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아들 넷이 음서와 급제로 출사했고, 이후 6대에 걸쳐 급제자가 쏟아지고 고관대작이 수두룩하였으며, 광해조 때 9대손 박승정이 영의정을 5년 동안 했으며, 11대손 여식이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었으니 밀양박씨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이 발복도 여기서 그치고 말았다. 인조반정으로 박승종이 아들 박자흥과 함께 자진하고 폐세자됨으로써 밀양박씨는 벼랑을 만나고 말았다. 이후 밀양박씨는 전주이씨 조선에서 완전히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러므로 밀산박씨 묘에 대한 재해석이 있어야 한다.
五十世 剛生 오십세 강생
字柔之號蘿山耕叟
洪武己酉生恭讓王朝庚午文科以經術行義補藝文舘檢閱選集賢殿副提學水原府使
潮本程朱之學品明禮敎陽村權近敬菴許稠稱推以師友
永樂庚子出守安邊府壬寅六月十八日卒享壽五十四
王賜賻命給官還車歸葵
墓豆應村祖考上將軍墓下癸坐有床石
後以女莊懿宮主貴贈贊成有遺書傳戎子孫
配夫人坡平尹氏原興夫人父衛尉尹承慶
洪武戊申生癸丑卒享年六十六墓公墓同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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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경자출수안변부임인유월십팔일졸향수오십사
왕사부명급관환거귀규
묘두응촌조고상장군묘하계좌유상석
후이여장의궁주귀증찬성유유서전융자손
배부인파평윤씨원흥부인부위위윤승경
홍무무신생계축졸향년육십육묘공묘동원
자는 유지이며 호는 나산경수이다.
홍무 기유생(1369년)이고 공양왕조 경오년(1390년)에 문과에 경술과 행의로 급제하여 예문과 검열을 지내고 집현전 부제학에 뽑혔으며 수원부사를 지냈다.
정주학이 처음으로 수입되던 때에 품행과 예교에 밝았으며 경암 허조와 함께 벗하며 양촌 권근을 선생으로 모셨다.
영락 경자년(1420년)에 외직인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임인년 (1422년) 유월 십팔일 졸하였다. 수는 54세였다.
왕이 부의를 전하고, 명하여 관청의 수레로 운구하여 돌아오도록 하였다.
묘는 두응촌 할아버지 상장군의 묘 아래 계좌이며 상석이 있다.
후에 여식이 장의궁주로 귀하게 되어 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자손에게 전해지는 유서가 있다.
배 부인은 파평윤씨 원흥부인으로 부는 위위 윤승경이다.
홍무 무신년(1368년)에 태어나서 계축년(1433년)에 졸하였다. 향년은 육십육세였고, 묘는 공의 묘와 같은 언덕에 있다.
[보유 1] 등과록전편에 의하면 공양왕(恭讓王) 2년(1390) 경오(庚午) 경오방(庚午榜) 병과(丙科) 3위를 하였다. 선발인원은 33명 [乙3・丙7・同進23] 중 전체 6위이다.
[참고 1] 나산경수 박강생 蘿山耕叟 朴剛生 (1369년∼1422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字는 유지(柔之), 號는 나산경수(蘿山耕叟). 할아버지는 상장군 박사경이며 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박침(朴沈), 어머니는 밀산군(密山君) 박린(朴隣)의 딸이다.
1390년(공양왕 2) 문과 급제 예문검열(藝文檢閱)에 제수.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호조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408년(태종 8)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세자에 대하여 보고를 잘 함으로써 황제의 환심을 사게 하고 돌아와 태종으로부터 미두(米豆)를 하사받고 이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1412년 앞서 지인주사(知仁州事)로 있을 때의 부정 사건으로 연루되어 태형(笞刑)을 받고 사임하였으며, 1417년 수원부사로 재임 중 한양으로 교체되어 가는 과천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을 안양사(安養寺)에서 하다가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으로 죽으니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지냈다.
『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18년 2월 29일조에는 박강생에 관하여 “조사(朝士)와 결탁하기를 좋아하고 권귀(權貴)에 아부하여 출세하였는데, 탐욕하고 방종하고 불법(不法)하여 드디어 더럽고 욕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라는 평을 하였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이름이 높았다. 저술로는『배불론(俳佛論)』이 있다.
1424년(세종 6) 10월에 딸이 세종의 후궁이 되어 11월에 장의궁주(莊懿宮主)로 봉해지자, 그도 찬성(贊成)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윤홍경(尹汞慶)의 딸인데, 3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자 박의문(朴疑問), 차남 박절문(朴切問), 삼남 박심문(朴審問), 1녀는 김숙양(金叔亮)에게, 2녀는 함우공(咸禹功)에게 3녀는 유종(柳淙)에게, 4녀는 서효온(徐孝溫)에게 , 5녀는 세종의 후궁인 장의궁주이다.
*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등과록전편에 의하면 공양왕(恭讓王) 2년(1390) 경오(庚午) 경오방(庚午榜) 병과(丙科) 3위를 하셨다는 기록이다. ※선발인원은 33명 [乙3・丙7・同進23] 중 전체 6위이다.
[참고 2] 권근 權近 (1352년 ~1409년)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이성계의 새 왕조 창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개국 후 각종 제도정비에 힘썼다. 하륜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했다. 그의 사상은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영향을 주었으며, 〈예기〉를 중시하여 강상의 확립을 통한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1393년(태조 2) 왕의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로 가서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짓고, 왕명으로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桓祖)의 비문을 지었다. 이후 새 왕조에 출사하여 예문관춘추학사 겸 대사성·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409년(태종 9) 58세로 사망하였다.
[참고 3] 경암敬菴 허조許稠 (1369년 ~ 1439년)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郞) 윤창(允昌)이며,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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