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우체통!” 내 나이에 숫자 하나가 덧붙여갈수록 감사도 늘어가고 대상도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육십육 년의 햇수 안에는 호흡이 없는 무생물체를 향해서도 고마움을 전할 때가 종종 생긴다. 얼마 전에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던 사물을 대상으로 짧은 시 한 편을 끄적거리다가 감탄을 한 적이 있다. 본래의 용도 외에 생각이 깊어질수록 숨겨진 의미가 적지 않아 경이로운 감정마저 들었다. 그것은 마치 눈앞에 보이는 길을 향해 가볍게 첫발을 내딛고 나아가다가 점점 출구를 알 수 없는 엉켜 있는 미로에 갇혀 헤매면서 마침내 가야 할 방향을 잘 찾아 나온 것과 같은 희열을 주었다. 사물의 재발견이라며 스스로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상 나의 시작(詩作)은 단순했다. 최근에 제7회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 시상식을 마치고 수상자들과 가족이 함께하는 단톡방에 감사 인사 글을 올렸는데, 그것이 나의 단순한 시작(始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에 응모한 여러분의 글은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되돌아보며 감사하며 적은 하나님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성경’이라는 ‘사랑의 구애 편지’를 이미 보내셨고 청소년 여러분은 예함 청소년 크리스천 문학상이라는 ‘우체통’에 답장을 넣은 것이지요. 저는 여러분의 답장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께 고용된 집배원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기도 역시 하나님과 소통하는 통로이고 이미 여러분의 마음도 아시지만, 은혜를 떠올릴 때마다 편지를 적어보는 습관을 지니면 그 사랑을 기억하고 글로 표현한 것에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고 흐뭇해하실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 시간 이후로 희한하게도 빨간 제복을 입고 서 있는 영국 왕실의 근위대처럼 늠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빨간 우체통이 눈앞에 나타나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나도 우체통이 되고 싶다.”라는 다소 엉뚱한 바람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체통이 지닌 용도에 의미를 부여하며 단숨에 우체통이란 시 한 편을 지었다. “엄마, 잘 썼어.” 순간 넓게 퍼져 있던 구름이 모여들며 내게 덮치듯 달려드는 것 같았다. 일곱 살 때 캐나다에 온 아들은 한국어로 대화는 무리 없지만, 한글책은 제대로 뜻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우체통을 주제로 쓴 내용을 아들이 단박에 알아맞혔다는 것은 숨바꼭질 놀이에서 바로 술래에게 들통난 것과 다름이 없다는 소리 아닌가. 그것은 달리 말하면 우체통이 지닌 본래의 용도에 충실하게 설명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우체통을 정말 잘 표현했네.” 한 마디 더 거들던 아들의 칭찬에 무게를 이기지 못한 구름이 물줄기를 내 머리 위에서 쏟아내었다. 이렇게 시작(始作)된 나의 시작(詩作)은 이틀 간격으로 우체통과 내 꿈을 연결한 시를 적어 보기 시작했다. 첫 작품이 쉽게 발각되었으니 좀 더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두 번째 시를 짓고 나니 이번에는 없던 욕심도 얹어지며 아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좀 더 멀리 나아가보았다. 첫 시에서 조금씩 떼어내고 두 번째 시에선 숨어든 위치를 바꿔 보고 세 번째 때는 지경을 넓혀가다 보니 같은 소재의 시가 조금씩 맛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의 ‘우체통’은 단순한 꿈의 대상이었지만, 계속 문장을 수정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니 이제는 기다림, 사랑, 인간의 내면이나 더 큰 존재를 향한 갈망을 담는 상징으로 확장되었다. 종교적 의미를 더할 때는 표현을 앞세우기보다 빛과 기도, 영혼 같은 것으로 창조주를 향한 기다림 같은 보편적 이미지로 스며들게 하니 요즘 시, 즉 현대시의 결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의 꿈은 우체통’이란 주제로 시를 적다 보니 우체통이라는 소재가 좋은 시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체통이라는 평범한 사물이 ‘기다림’ ‘전달되지 못한 마음’ ‘시간 속에 남는 사랑’ 더 나아가 ‘더 큰 존재를 향한 소망’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체통을 떠올리며 우체통을 보았던 기억 속의 어떤 사건이나 감정, 누군가를 기다렸던 순간, 전하지 못한 말 한마디 같은 작은 흔적 하나가 나만의 시로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작은 자각이 꿈틀댄다. 때론 막 버무린 김치보다 몇 해 묵은김치에 푹 고아진 돼지고기 김치찜의 풍미가 더 깊고 입맛을 당기듯이 시는 은은하게 곰삭은 정취가 느껴지는 것이 마음 안에 더 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수필은 나를 그대로 드러내 애당초 숨바꼭질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씨줄과 날실이 복잡하게 얽혀야 촘촘하고 단단하게 엮이게 되듯 지극히 단순한 내가 좀 더 과감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고 마음과 생각이 적당한 거리를 두며 밀당도 하고 타협도 하며 얻어낸 것으로 시를 쓰게 되니 한편으론 신기하다. 시는 읽히는 것보다 잉태되어 나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를 쓰고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창작의 시간이었고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시는 반드시 큰 무대에서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오래 품고 있던 질문에서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래서 처음 “나의 꿈은 우체통”이라는 시가 “도착하지 않은 편지”가 되고 “가지 않은 편지” 또 채비(差備)라는 시로 누군가에게 그런 작은 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세계를 열어 본다. 시는 ‘정답을 전달하는 글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들어가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좋은 시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래 바라볼 하나의 문을 남긴다”라는 개똥철학도 끌어내며 비로소 갓 입문한 새내기에겐 참 어렵고 어려운 시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느낌이다. 우체통에 대한 시를 계속 쓰면서 종교시로 완전히 기울기보다는, 독자도 공감할 수 있는 현대시의 여백 안에 나의 신앙적 울림을 담고 싶어서 방향을 살짝 틀어 보기도 하며 하나의 소재로 다섯 편의 시가 완성되었다. 그래서 좋은 시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래 걸어갈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꿈은 우체통”이라는 말에 사실 그런 힘을 갖고 있었고, 우체통이 누군가의 마음이 지나가고, 머물고, 언젠가 닿을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평범한 사물 하나를 통해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나아가며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내게 준 사명을 우체통과 내 꿈속의 질문에서 발견한 것 같다. 조금씩 조금씩 바라보는 깊이와 생각의 지경이 넓어지면 순수하게 나의 감정을 다 쏟아 내어 아름다운 시로 노래할 수 있기를 시편 27편의 4절 다윗의 시 한 구절을 낭송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2026년 7월 23일 우연히 우체통이란 단어와 만나 같은 제목으로 다섯 편의 시와 그 과정을 수필로 적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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