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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인류무형문화제 판소리
가. 판소리의 의의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 아니리, 너름새를 섞어가며 구연(口演}하는 일종의 솔로 오패라다.‘판소리’는‘판’과‘소리’의 합성어로‘소리’는‘음악’을 말하고,‘판’은‘여러 사람이 모인곳’, 또는‘상황과 장면’을 뜻하는 것으로‘많은 청중들이 모인 놀이판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판소리라는 명칭은 판소리가 생길 때부터 붙여진 이름은 아니다. 이 이름이 널리 쓰이기 이전에는 타령, 창, 잡가, 소리, 광대소리, 장악, 극가, 가곡, 창극조 등의 명칭이 사용되기도 했다.
나. 세계인류무형문화제에 선정된 이유
판소리는 다양한 전통 예술로부터 필요한 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종합하는 개방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며, 우리 역사와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우리 문화의 정수로,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2003년 유네스코 제2차‘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2. 판소리박물관의 설립 목적
고창판소리박물관은 판소리의 이론가이자 개척자이며 후원가인 동리 신재효 선생과 진채선, 김소희 등 다수의 명창을 기념하고 판소리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 자리에 설립되었다. 또 판소리의 유형·무형의 자료를 수집, 보존, 조사, 연구, 정시, 해석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수준 높은 판소리 예술의 재교육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판소리 성지화를 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3. 판소리박물관 둘러보기
가. 명예의 전당
조선후기 판소리의 전성시대, 판소리의 연행 현장을 묘사한 민화와 한국 판소리의 대표적인 명창들의 사진 갤러리이다.
(1)‘기산풍속도첩
(가) 기산 김준근은 개항기의 풍속화가로, 생몰 연대나 사승(師承) 관계는 미상이다.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판소리의 소비자는 주로 양반들이었고, 당시의 대중문화였다. 특히 북을 보면 가죽 면에 태극표시가 뚜렷한데, 요즘의 소리북은 태극표시가 없는 일본식이다. 이 것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문화 말살정책으로 전통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발림마당’에 전통북이 전시되어있으니 감상해 보자.
(나) 우리나라 조선시대에서는 전문적으로 연희(演戱)를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광대라고 불렀다. 판소리를 부르는 광대는 창을 위주로 하는‘소릿광대’, 아니리와 재담을 위주로하는‘아니리광대’, 용모와 발림 등 연극적인 개념을 중시하는‘화초광대’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하는데, 소릿광대를 가장 바람직한 광대로 평가하고, 아니리광대는 광대를 낮게 평가하는 용어로 쓰였다.
(다) 또 재인광대가 있었다. 이들은 조선후기에 농어촌과 장터를 돌아다니며 민중 오락을 제공해 왔던 사당패나 나중에는 굿중패 또는 남사당이라고 불리던 유랑연예인들로부터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주요 공연 종목은 풍물(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가면무극), 덜미(꼭두각시놀음) 등 이었다.
(2) 평안감사 부임 환영연의 모흥갑 명창 판소리도
평양의 대동강가에 부벽루와 청운교 백운교가 있고 영명사가 있는 능라도 연광정에서 평안감사의 부임 환영연에 소리광대 모흥갑 명창이 초청되어 소리하는 장면은 대단한 볼거리였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얼마나 우렁차고 힘이 있던지 10리(4km) 밖에서도 또렷이 들릴 정도였다 한다.
이 그림은 그때 당시 판소리 하는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으로서 판소리 학회지나 학술지에 대표적으로 실려지는 그림으로 판소리도를 대표한다.
(3) 일제 강점기 판소리 명창들의 사진
(가) 여기에 전시된 일제 강점기 때 판소리 명창들의 사진은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며 시인 그리고 판소리계의 선각자인 벽소 이영민(1881~1962)의 지극한 소리 사랑 때문이다. 벽소 선생은 일제가 문화말살정책을 펴자 선생은 판소리가 민족정신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여 28년간 조선 팔도의 명창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소리를 한시로 평하고 명창들의 사진을 찍어두다가 6.25 전쟁 때 피난을 가면서 항아리에 그 사진들을 담아 땅 속에 묻어놨기에 그대로 보존이 되어 지금까지 그 귀한 사진들이 남아있게 되었다.
(나) 임방울 명창(1904~1961)
‘쑥대머리’명창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임방울은 20세기 중반을 전후로 하여 조선 전 백성의 우상이었다. 광주 광산 사람으로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성량도 풍부하여 쑥대머리로 인기를 얻자 이를 계기로 많은 음반을 취입하여 100여만 장이나 팔렸다 한다. 이런 폭발적인 인기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슬픈 소리가 조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이유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다) 박초월 명창(1917~1983)
남원 운봉에서 열한 살 무렵. 아버지한테 지게 작대기로 얻어맞으면서도 판소리에 미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다. 집안에 기생이 나올까 걱정이 태산이었던 아버지는 14살도 안된 딸을 시집을 보내버렸으나 선생은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도망을 나와 남원 권번(기생들의 소리 교습소)에 들어가 소리 공부를 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녀 명창이란 칭찬을 듣고 열여섯 살 무렵에는 이미 명창 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레코드 취입을 하고 일본으로 서울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조선 성악 연구회’에 들어가‘이화중선’과 함께 대표적인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여성 창극단이 생겼을 때는 전국을 돌면서 뛰어난 소리와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다.
제자로는 생질인 조통달 명창 등이 있고 가수 조관우는 조통달 명창의 아들이다.
나. 소리마당
판소리의 유래와 유파 해설 및 대표 음원을 청취 할 수 있다.
(1) 판소리의 유파
30여 년 전에‘서편제’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 후 여섯 달 동안 서울에서 관객 103만6천여 명을 불러 모으는 대성공을 거둔다.‘서편제’는 한국 영화사상 관객 100만 명을 넘긴 최초의 작품이 되어 영화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영화에서 성공한‘서편제’는 잊혀가던 판소리의 재발견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판소리에는‘서편제’만이 있는가? 답은‘그렇지 않다’이다.
판소리는‘동편제’와‘서편제’ 및‘중고제’등이 있다.
(가) 동편제
동편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 지역인 남원, 순창, 곡성, 구례 서쪽 해안지대인 고창 등지에서 불리는 소리다. 명창인 송흥록, 정춘풍, 김세종 등에 의해서 시작된 가풍으로 씩씩한 가락인‘우조’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 표현을 가능한 적게 하며, 장단은‘대마디 대장단’을 사용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발성은 뱃속에서 위로 바로 뽑는‘통성’을 사용하여 엄하게 하며, 구절 끝마침을 되게 끊어 낸다.
대표 음원으로는‘사철가’를 들 수 있다.
(나) 서편제
서편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 지역인 광주, 담양, 화순, 보성 등지의 소리를 말한다.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의 가풍을 이어받은 소리를 말하는데, 슬픈 가락인‘계면조’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장단은‘엇부침’이라 하여 매우 기교적인 리듬으로 표현한다. 또한 몸동작인‘너름새’가 매우 세련되고 부드럽다.
대표 음원으로는‘쑥대머리’를 들 수 있다.
(다) 중고제
중고제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전승된 소리로, 송흥록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강경 출신인 김상옥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개념이 모호하여‘비동비서(比東比西)’로 표현 된다. 중고제는 5명창 시대를 끝으로 전승에서 탈락하여, 현재는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다.
유파(제)는 현존하는 실체라기보다는 다양한 판소리를 구분하여 유형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관념적으로 구성된 참조의 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편과 서편의 소리는 서로 어울리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큰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2) 가장 오래된 판소리의 기록인 만화집 춘향가
(가)‘만화본춘향가’는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이 1753년 계유년에 호남지방의 산천과 문물을 두루 둘러보고 그 이듬해 43세 때인 1754년 봄에 집으로 돌아와 한시로 지은 작품이다. 유진한은 충청도 목천 이동 만화동에서 태어났고 흥양인(지금의 고흥)으로 호는 만화당이다.
(나)‘만화본춘향가’는 유진한의 문집인‘만화집’에 실려 있다. 원 제목은‘가사춘향가이백구’이고 지운의 칠언장시로 내외구를 1구로 한 200구, 총 400구 2,800자로 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만화집’으로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만화집’과 유제한편‘만화집(청절서원, 1989)이 있으며, 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3) 비가비 권삼득 명창
완주에서 안동 권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남원 지역에서 활동한 명창이다. 타고난 고운 목으로 흥보가를 잘 했으며, 설렁제, 덜렁제 혹은 권마성제라고 하는 선율을 개발했는데, 이 선율은 도약 선법을 사용하여 매우 씩씩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지금도 판소리의 곳곳에서 쓰이는데, 흥보가 중‘놀보가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이 권삼득의 더늠이다.
부친 권래언의 호인 이우당은‘두 가지 근심이 있는 사람’이란 뜻인데, 그중 한 가지는 아들 권삼득이 소리를 하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고 한다. 권삼득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멍석말이를 당했을 때 소리를 청해 불러서 살아났고 또 파문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4) 판소리 여섯 마당의 소개
(가) 춘향가
남원부사 자제 이몽룡이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전라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남창·여창·동창(童唱) 세 종류가 있는데 남창은 웅건하고 간결하며, 여창은 전해지지 않고, 동창은 동심의 세계에서 본 애정과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으나 미완성이다.
(나) 심청가
심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앞 못 보는 아버지 심봉사의 동냥젖으로 자란다. 15 세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 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빠졌으나 하늘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와 황후가 되었고, 맹인잔치에서 아버지를 만나 눈을 뜨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다) 적벽가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중심으로 한 부분을 차용하고 있는데 유비와 관우 및 장비가 도원결의를 하고 공명을 모시러 삼고초려를 하는 대목부터 적벽대전에서 공명이 동남풍을 빌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마침내 관우가 조조를 사로 잡았다가 놓아주는 대목까지 부른다.
(라) 수궁가
남해 용왕이 중병이 들었는데 도사가 나타나 토끼 간이 약이 된다고 하여 신하들의 공론이 분분하자 충신 자라가 용왕을 구하겠노라 나선 후, 세상에 나가 마침내 토끼를 만나 갖은 유혹으로 토끼를 속여 용궁에 데려오나 자신이 죽을 자리임을 알아챈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용왕을 속이고 다시 세상으로 살아 나온다는 줄거리이다.
(마) 흥보가
마음씨 착한 아우 흥보는 심술궂은 형 놀보에게 쫓겨나 가난하게 살다가, 부러진 제비 다리를 고쳐 준 후, 이듬해에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에서 열린 박을 탔더니 온갖 보물이 쏟아져 나와 부자가 되었으나, 놀보는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치료를 해 낫게 했는데,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에서 열린 박을 탔는데 그 박속에서 나온 상전, 놀이패, 장수 등에게 혼이 난 다음, 마침내 죄를 뉘우치고 개과천선한다는 줄거리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바) 변강쇠가
평안도의 월경촌에 옹녀라는 여자가 있다. 열다섯에 시집을 가서 남편이 죽는데, 매년 계속 개가를 하나 여자의 음기가 하도 세서 매번 죽는다. 스무 살에도 남편이 죽자, 동네 남자들이 이 여자를 자꾸 범하는 일이 벌어지니까 결국 동네에서 쫓겨나 청석골에서 변강쇠를 만나 혼례를 치룬다. 둘이 속궁합이 잘 맞아 도회지로 이사를 해 사는데 일은 하지 않고 맨 날 싸움질만 하고 다녀 다시 지리산으로 이사를 하였으나, 역시 마찬가지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루는 나무를 해오라 하니 말없이 가더니 장승들을 죄다 뽑아와 아궁이에 불을 때버린다.
이에 전국의 장승들이 모여 회의를 열어 변강쇠를 병이 들게 하여 죽게 한다. 여자에게 수절을 당부하며 아니면 상대남이 죽게 될 것이다 유언한 후 죽는다.
옹녀는 치상을 치루기도 전에 넘치는 욕정을 참지 못하여 여덟 명의 남자가 연속 죽자 변강쇠의 영혼을 위로하고 장사를 잘 치러 준다는 줄거리의 판소리이다.
(5) SP·LP 시대의 판소리 음반
(가) LP 시대의 판소리 음반
SP음반은 1분에 78회전하는 평원판 레코드로 유성기 음반을 말하여, LP와 대조적으로 사용된다. 이 유성기 음반은 한국음악의 고형을 담고 있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이다. 한국 음악인의 음반은 최초로 1907 년 미국 콜롬비아 음반회사에서 발매되었으며 모두 국악음반이었다.
이때부터 1960 년대 중반까지 2,500여 장의 국악 음반이 취입되었으며, 이 중 판소리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나) LP 시대의 판소리 음반
LP 음반은 SP음반과 대조적인 장시간 음반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959 년 처음 국악음반이 제작되어 1990 년대 사양길에 접어들 때까지 약 900여 장이 제작되었다. 단가, 판소리, 창극 장시간 음반은 박록주 김여란 김연수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박동진 성우향 조상현 한동선 등이 많이 취입하였다.
국악 장시간 음반은 대부분 초기 인간문화재들이 활동한 시기에 녹음된 것으로 일제시대 국악을 현대인에게 전해주는 구실을 했다. 장시간 음반 시대는 국악이 외래음악에 밀려 소외된 시기인지라, 한정판, 비매품, 특정인 대상의 전집물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일부 뜻있는 창자와 지식인들의 판소리 감상회, 사설집의 음반전집 출간 등의 노력으로 시대적 요구에 따라 판소리는 부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한국고음반연구회 활동, 브리태니커 판소리전집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6) 판소리계 소설
판소리계 소설이란 구비전승되어 오던 판소리 사설이 소설이라는 독서물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판소리 사설과 판소리계 소설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문사의 문학적 능력에 따라 문어체적 수사가 가미 산정(定)되기 마련이고, 실제로 노래로 불리는 사설은 일상 언어와 같은 구어체적 성격을 더 갖게 된다.
이 계열의 소설들은 판소리로부터 유래한 공통의 문체, 수사적 특징과 평면적 인물형 및 세계관 판소리계소설로는 잘 알려진 대로,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배비장전> <장끼전> <옹고집전> <숙영낭자전> 등이 있다. 여기서 배비장전 이하의 것은 판소리 전승에서 탈락하여 소설로 정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문체는 운문과 산문이 혼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세련된 한문 투의 언어와 평민층의 발랄한 속어 및 재담 육담이 엇섞여 있다. 삶의 고통을 그리는 비장함이 구수한 해학, 신랄한 풍자와 공존하면서 조선 후기 사회의 생활상을 폭넓게 형상화한 데에 이 작품들의 가치가 있다.
(7) 동편소리의 창조적 계승자 송만갑
국창 송만갑은 우리나라 동편제의 큰 흐름 중 하나인 송흥록 --> 송광록 --> 송우룡으로 이어지는 동편 소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근대화의 시기에 양반취향의 격조를 추구하는 동편소리는 시류에 맞지 않았다. 그는 창조적인 소리꾼으로, 가문의 전통적인 동편제 법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새로운 소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제 동편제의 전통에 새로운 요소(서편제, 경드름)를 추가하였으며, 거기에 공력을 깃들여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 나갔다.
그가 고법(古法)의 판소리를 변화시키자, '송씨가문의 법통을 말살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가(自家) 법통의 좋은 점은 간직하면서도 식자 취향의 계층적 한계를 벗고, 진정한 대중성과 예술성을 추구하여 높은 수준의 판소리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설적이게도, 현대에 와서는 그의 소리가 가장 동편적인 소리의 전형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8) 동초 김연수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1907~1974)는 현대판소리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명창 중의 한명이다. 일제시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창극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판소리 다섯 바탕을 새로 짜고 소위‘동초제’판소리를 완성하는 등 뚜렷한 행적으로 남겼다.
전남 고흥의 무가 출신으로 한학을 수학하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농삿일에 전념하던 중 판소리에 흥미를 느껴 축음기로 7년간 독학하였다. 그 후 유성준, 송만갑, 정정열로부터 2년여를 배웠다.
심청가와 적벽가에 뛰어났으며 창극 심청가의 심봉사역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판소리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지식인으로 판소리 노랫말의 잘못을 고쳐 이면과 표현이 정확하고 격조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판소리 노랫말 정리에 힘썼다.
(9) 동리대상
동리는 신재효 선생의 호. 수상 대상자는 판소리를 국민예술로 승화시킨 신재효 선생의 문화적 업적을 추모하고 뜨거운 예술정신을 계승하여 판소리의 전승을 이어가기 위하여 1991 년부터 판소리의 소리꾼이나 고수, 판소리를 연구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을 선정해 동리대상을 수여하는데, 영광의 제1회 수상자는 만정 김소희 국창이고. 선생의 호를 따서 동리대상이라고 한다.
다. 아니리마당
유품을 통해 판소리 후원활동과 판소리사에 남긴 업적을 조명하고 판소리를 통한 예술적 교감과 도리화가에 얽힌 사랑이야기 및 동리정사 중 사랑채를 전시하고 있다.
(1) 동리 신재효 선생
(가) 판소리 생활문화공동체 조성 및 운영
동리 선생은 판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수습창자를 모아 판소리 전문교육을 실시했다. 동리정사 지구 내에 사랑채, 행랑채, 연못과 정자 등을 조성하고, 숙식을 같이하며 판소리를 교육 수련 공연 평가하는 판소리 생활문화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동리정사는 최초로 사회 교양적 차원의 판소리 교육을 실시했던‘한국 판소리 공연과 교육의 산실’이라 할 수 있다.
(나) 판소리 여섯마당의 집대성
동리 선생은 당시 구비전승 되어오던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그리고 변강쇠가를 집대성 정리했다. 개작정리 작업은 40세를 전후로 판소리에 심취하여 53세인 1864 년 무렵부터 토별가의 정리를 시작으로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이어진 인생의 대 기획이었다.
(다) 20여 편의 단·잡가의 창작 및 개작
판소리사설 여섯 마당 외에도 20여 편이 넘는 단·잡가 작품을 창작했다.
(라) 판소리의 4대 법례론
광대를 중심으로 판소리에 대한 이론을 펼치고 있으며, 이때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조건 즉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다.
(마) 판소리를 통한 예술적 교감
도리화가에 얽힌 사랑이야기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드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우리나라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선생이 나이 쉰아홉에 지어 불렀다는‘도리화가’의 한 구절이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각 고을 광대를 불러 모아 판소리 이론을 세우고 판소리 사설을 완성한 선생은 진채선이라는 최초의 여류명창을 탄생시킴으로써 판소리사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이후 고창은 진채선을 필두로 허금파, 김여란 등 여성 명창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김소희 등 걸출한 여성 명창을 배출하였다.
(2) 동리정사 중 사랑채
“고창읍내 홍문거리/ 두춘나무 무지기안/
시내위에 정자짓고/ 포도 끝에 연못이라/
너도 공부하량이면/ 어서어서 찾아오소“
동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는 참으로 단아하면서 고풍스럽다. 원래 이곳에 있던 고택은 선생이 머무르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철종(1849~1863) 1 년(1850 년)에 건립하였다. 당시엔 마루 아래로 물이 흐르게 했고, 집 주위로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선생의 인품만큼 멋있고 운치가 있는 집이었던 듯하다.
암행어사 어윤중과의 이야기는 선생의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어사는 그의 인품에 반해 사랑채의 구조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만큼 선생의 인품도 집도 좋았다는 걸 짐작하게 하는 일화다.
새로 단장한 생가는 선생의 제자들이 맥을 잇고 있는 소리공부방, 그리고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해 놓은 판소리박물관과 함께 예향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곳이다. 고창읍성 입구에 자리하고 있으며, 9월 중순이면 생가에 한참 꽃무릇이 피어나 여행객을 반긴다.
라. 발림마당
(1) 구전심수 교실과 득음의 현장
소리북을 두드리며, 단가 한 대목을 따라 배워보는 구전심수 교실과 소리광대가 백일공부를 했던 독공 현장을 재현한 곳이다.
발림마당은 판소리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판소리 여섯 마당의 눈대목을 들을 수 있는 음향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익힌다는 ‘구전심수’교실에서 단가 한 소절을 따라 부르며 소리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코너이다. 소리꾼의 독공장소였던 인적이 드문 산 속의 계곡, 동굴 등이 재현되어 있으며, 이중 굴을 실물 크기로 재현하고 있는 소리굴에서는 득음한 광대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테스트해 볼 수 있다.
(2) 소리광대의 소리공부
판소리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목소리를 얻는 일과 자기 나름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소리광대는 스승으로부터 전승형을 배워서, 이를 기초로 새로운 창조적인 변이형을 만들어 나간다. 이를 위하여 어느 정도 소리를 익힌 소리꾼은 깊은 산속이나 절간에 들어가서 오랜 수련기간을 갖게 되는데 이를 독공이라고 하고, 독공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백일공부이다. 백일공부는 백일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집중적으로 소리만을 하는 공부이다.
백은 순 우리말로는‘온’이다.‘온’은‘전체, 전부, 모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일동안 아무 일 없이 한 번에 수 시간 걸리는 판소리를 하루 동안에 몇 차례씩 부르는 초인적인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3) 소리굴에서의 백일공부와 폭포소리
백일공부의 상징적인 공간이 바로 소리굴이다. 굴은 목구멍을 연상시킨다. 예로부터 굴은 환생, 탄생, 여성의 성기 등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소리꾼은 오랜 수련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곧 명창으로 다시 태어난다. 단군신화에서도 굴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공간이다. 판소리 창자들이 온갖 고통을 참으며 수련에 임하는 것은 바로 명창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오랜 수련을 거쳐 득음이 되면 목소리가 폭포수의 떨어지는 우람한 소리를 뚫고 나간다고 한다. 이는 단지 전설에 그치는 것이 나이라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소리꾼들은 득음의 정도를 가늠하는 수단으로 폭포수 앞에서 시험을 해보기도 한다.
마. 혼마당
소영상실로 판소리의 역사적·음악적 이해를 위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판소리를 체험하는 곳이다.
혼마당에서는 디지털 영상을 통해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의 면모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판소리의 발생과 역사적 발전 그리고‘조’‘장단’‘성음’‘목’등 판소리의 음악적 공연의 특징을 역사적 자료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4. 다목적실
가. 국창 만정 김소희 유품전
국창 만정 김소희 유품전을 열고 있는 곳으로 선생의 약력, 예술세계와 다재다능한 예인으로서의 삶과 멋, 중요무형문화재로서 다양하게 활동했던 당시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유품들은 선생의 딸인 박윤초 명창이 89점과 선생의 제자인 이명희 명창이 기탁한 124점 및 고창군이 자체 수집한 80여 점 등 모두 290여 점의 유품과 소장품으로 선생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곳이다.
전시품목으로는 선생이 사용하던 장롱, 경대, 비녀, 반지 등의 생활 소품과 손때 묻은 소리북, 가야금등 악기류를 비롯해 무대의상과 소품류, 각종 상패들이 전시되어 있고 선생의 음반을 비롯한 희귀 SP음반과 붓글씨 작품, 춤사위 사진,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삶을 느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나. 국창 만정 김소희의 소리 인생
(1) 김소희의 생애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광주의 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 13세 때에 당대의 여성 명창인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듣고 감명을 받아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명창 송만갑·정정렬·박동실 문하에서 소리를 공부했다. 창법은 가성을 쓰지 않고 상·중·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 춤, 기악을 두루 익혀 판소리 다섯마당도 모두 녹음을 했고, 유럽, 미국 등 순회공연을 하면서 고운 음색과 명확한 창법으로 찬사을 받는 등 우리 전통 예술을 보급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19세기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진채선 이래 우리의 여창 판소리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김소희 국창을 꼽는다.
(2) 김소희의 예술관
김소희 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창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성대와 음질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자각과 자기 반성의 자세가 없었다면, 깊은 예술세계를 구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생은 또한 제자들에게 이면을 늘 강조했다.“소리만 잘 하려고 허지마, 인간이 돼야지 올바른 국악인이여.”라고 늘 잔소리를 했다. 이면은 단지‘소리’로서만 구현되는게 아니었다. 몸 전체로 구현되는 것이었다. 판소리의 삼라만상의 느낌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몸은 그 의미가 펼쳐지고 전달되는‘의미의 표현’이었다.
선생은 송만갑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 많은데, 이 중에서도 창법에 있어서 발성의 기교를 복잡하게 부리지 않고, 소리를 거의 평평하게 낸다. 그러나, 다루치는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하고 복잡한 기교를 능숙하게 구사 할뿐만 아니라 태도를 진중하게 해야 한다며 연기적인 동작을 절제하는 데까지 이른다.
(3) 김소희 판소리의 특징
선생의 판소리를 말할 때, 먼저 드는 것은 천부적인 목소리다. 선생은 다른 점은 몰라도 소리 때문에 노래가 잘 되지 않아서 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즉‘천의무봉’의 목소리였다.
선생은 동서편의 기라성 같은 스승으로부터 소리를 배워 그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동서편의 소리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선생은 또 판소리의 어느 한 바탕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사람의 것을 오롯하게 이어받아 부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들을 자신의 안목에 따라 다시 재배열하고 재창조해서 불렀다. 다시 말하면 선생은 전통에 충실한 소리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목으로 판소리를 부른 창조적인 소리꾼이었다는 점이다.
첫댓글 신재효 선생 본가도 여러번 들러 사진 찍곤 했었지요
미국인 남편과 아이들에겐 신기한 모습들 ㅎ
읍성과 주변의 모든것들이 눈에 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