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M 논란의 핵심은 '찬양의 도구'가 아니다
대중문화 활용해도 존재감 잃어 가는 '교회 문화'가 문제
심 용 환 | 역사 강사, '깊은계단&5분인문학' 대표 newsnjoy@newsnjoy.or.kr
역사 강사이자 대학생을 위한 인문학 세미나 '깊은계단&5분인문학' 대표(lyanga.blog.me) 심용환 씨의 글을 게재합니다. 'EDM'을 단순히 20년 전 '드럼'에 비유하는 논리를 떠나, 교회 찬양 문화에 대해 생각할 지점들을 지적해 주는 글입니다. <뉴스앤조이>는 EDM 찬양과 교회 문화에 대한 다른 견해도 환영합니다. - 편집자 주
한국기독학생회(IVF) 디제잉 찬양 사건을 둘러싼 논쟁이 지나치게 단순해지고, 어떤 의미에서 조잡해지기까지 하고 있다.
디제잉 예배 인도자 한진호 씨의 주장은 결국 단순하다. '교회 안에서 새로운 장르를 활용하는 것은 정당합니까, 잘못된 것입니까?', '대중문화를 이용할 것입니까, 아니면 버려 둘 것입니까?'
<뉴스앤조이>·청어람ARMC와 인터뷰하기 전, 한진호 씨가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20여 년 전 신문 기사 스크랩도 이런 그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소위 복음주의 운동권 논객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서고 있다.
"장르에 대한 정확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쓸데없는 비판이다."
"문화 창조를 막는 이 누구인가, 문화를 구속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놀이의 영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어? 왜 '나도 한때는 식'으로 꼰대처럼 반응하는 거야? 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하는 거야?"
▲ EDM을 찬양의 도구로만 인식하는 논쟁은 공허하다. EDM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단순히 그런 차원이 아니다.
프레임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한국에 CCM이 시작된 지 30년 정도 지났건만, 결국 사건 하나가 터지니 기껏 하는 얘기가 30년 전 잠시 논의되었던 단순하디 단순한 논리다. 도대체 얼마나 교회 문화의 변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기에 이런 구닥다리 논리를 들이민단 말인가.
첫째, 대중문화 이용론. 이용이 가능한가. 30년 전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를 읽고 문화의 구속에 대해 열렬히 떠들면서 세계관 운동에 매진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상황이 어떤가.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조금이라도 대중문화를 비롯해 사회의 한 구석이라도 제대로 '구속'을 했던가. 성과가 없다면 왜 성과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성과도 없는 막연한 주장, 더구나 최근 어디에서 리처드 니버를 이야기하나. 30년 전 그럭저럭 쓰이던 논리를 들이밀면서 대중문화 이용론을 주장하는 자세야말로 자기반성 없는 비참함의 실체가 아닌가.
지난 30년간 한국교회와 교회 문화를 둘러싼 사회구조와 대중문화는 놀랍도록 빠르게 변화했다.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것이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충분히 무력하게 되었고, 사회구조는 나날이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변화하고 거대해졌으며 구조화했다.
교회는 대중문화를 어떻게 이용할 것이며, 대중문화를 어떻게 구속할 것인가. 그런 사례가 어디 있는가. 교회 다니는 청년들이 록(Rock)을 넘어 일렉트로닉(Electronic) 장르까지 소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그러한 교회 청년들의 문화는 사회의 어느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가. 결국 그들만의 문화 아닌가. 일반인 입장에서는 참으로 웃긴 모양새다. 무엇하러 하나님을 찬양하나. 그냥 편하게 자신의 기분과 욕망으로 활용하면 되는 것을 귀찮게 왜 하나님을 끼워 넣나. 교회의 음악 소리가 커지고 악기가 대중화하면서, 우리가 문화를 구속했다고 당당하게 외치며 열린 예배, 찬양 예배의 가치를 외칠 때, 청년부는 나날이 줄어들었고 전도는 되지 않았고 교육부서는 폐쇄되었다. 굳이 교회 다닐 필요가 없다. 목사님의 말씀은 설득력이 없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존경받을 부분이 없다. 교회 사람들이 누리는 문화? 훨씬 편하고 신나게 누릴 게 많은데 굳이 뭐하러 누리는가. 교회는 종합적으로, 문화적인 면에서조차 영향력을 잃었다. 필요성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반성이 없고 30년 전 볼멘소리나 외치는 것인가. 마치 억압당했다는 투인데 진짜 그런가.
둘째, 세속 문화 수용하기. 지난 30년을 다시 돌아보자. CCM이 처음 나올 때의 대중문화는 소위 1990년대 대중문화 르네상스 시대였다. 유재하와 이영훈 그리고 이문세가 한국형 발라드의 틀을 잡았고, 변진섭, 이승철, 신승훈, 김건모, 김종서, 전람회 등으로 이어지는 충격적인 보컬리스트들의 연이은 등장이 이루어졌다. 신해철은 대중가요에 자아 성찰, 사회 비판 등 의미 있는 사회정신을 불어 넣었고 서태지는 그 자체로 완벽한 새로움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말이 되면 이런 자율적 문화 공간은 우그러들기 시작한다. 소위 기획사 주도로 생산되는 아이돌의 탄생 때문이다. 더구나 한류라는 새로운 문화적 성취를 얻게 되면서 이 추세는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음악은 또 어떤가. 장르별로 따진다면 대중문화의 변동은 간단히 설명될 성질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교회는 어떠했던가. 받아들이지 않았나. 충분히 활용하고 충분히 이용하지 않았던가. 30년 전 기타와 드럼 논쟁을 끄집어내는 사람들은 참으로 당돌하다. 언제 한국교회에서 기타와 드럼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그렇게 싸우고 대안을 모색했던가. 잠깐 다투다 효과 있는 것 같으니까 신나게 받아들여서 신나게 활용하지 않았는가. 요즘 어느 교회를 가도 찬양 예배가 없는 곳이 없으며, 대형 교회를 가면 얼마나 대단한 수준의 음향 장비와 시설을 갖추고 찬양을 하고 있나. 어디 그뿐인가. 설교를 비롯해 홈페이지, 앱(App) 등 우리는 충분히 세속 문화를 활용하고 있고,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음악 장르를 써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주장은 고답적(高踏的)일 뿐더러 사태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반박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누가 록과 메탈, R&B와 힙합을 정확히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나. 그렇게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고 누가 말하고 있나. 상황을 호도하지 말라.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 역시 찬양 예배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대중사회에 대한 유의미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다. EDM은 예배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논다', '하나님을 이 방식으로 찬양하고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렇게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논쟁의 본질은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반응에 대한 직접적 반발은 위에서 언급한 논리들이다. 그게 아니면 페이스북에 달리는 수많은 '좋아요'와 응원 댓글이다. "저는 은혜받았어요. 저는 감동받았어요." 바로 그걸 묻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 어떤 감동을 받았는가. 그 은혜와 감동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은혜와 감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러한 감정적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이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없이 은혜받았고 감동받았다고 주장할 뿐이다. 어떻게 이것이 정당한 반박이고 주장일 수 있는가.
둘째, '대중문화를 활용하는 것이 과연 효과가 있는가'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다. 여태까지 충분히 해 봤는데 안 되었다는 자괴감이 있다. 교회 청년 문화는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따로 논다. 청년들은 청년부 외에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그들의 정체성을 구가하기 위해 그들만의 공간을 따로 만든다. 이것이 전도에 효과가 있다고 느낀 교회의 막강한 투자가 선행되었음에도, 교회 청년들은 얼마나 교회의 일꾼으로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키고 있는가. 혹은 과거 교회의 일꾼들에 비해 뭐가 다르고 얼마나 나아졌는가.
그들에게 스피커를 사 주고, 마이크를 사 주고, 원하는 악기를 사 주었더니 결국 노래와 놀이에 멈춰 있다. 그러니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보편적 감성, 기존의 교회 문화가 아니라 CCM을 누리고 즐기는 다수의 입장에서도, EDM 찬양을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대중문화의 하류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예배다', '찬양이다' 우기고 주장하고 그들끼리 즐거워하는데, 이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셋째, 선을 넘었고 무용하다고 느끼는, 의미 있는 반발심이다. '그것은 찬양이 아니다'라고 느낀다. 상당수의 찬양팀, 찬양 인도자들 역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주장한다. 찬양은 감정이 아니며,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거나 감격받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시 논란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을 향하고 있다.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과연 기독교 문화는 존재하는가. 대중음악을 따라하는 방식으로 대중음악을 정복하거나 기독교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가. 과연 작금의 찬양 문화는 교회를 살리는 문화적 도구로 활용이 가능한가. 과연 찬양은 교회 청년 공동체를 더욱 고립시키고 그들만의 오타쿠적인 문화로 정착되고, 그 때문에 결국 교회 청년회는 세상과 교회로부터 더욱 고립되는 것은 아닌가.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가 기껏 주관적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것인가. 왜 가톨릭은 여전히 그레고리안 성가나 그들만의 미사 예식을 고집하는가. 성경에 나온 일체의 예식을 거부하며 성경말씀에만 의존하며 자기 정체성을 구사했던 개신교가 오순절 찬양 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어떻게 변했고 어떻게 변질했는가.
이런 주제들과 함께 작금의 찬양 문화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디제잉? 그것은 문제의 본질일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런 비판적 제기를 한다고 해서 교회 공동체가 진지하게 이 문제를 성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과거 교회가 자신의 성장 전략을 위해 쉽사리 대중문화를 수용했듯, 현재의 기독 청년들은 얼마만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교회 문화를 대하며 찬양 문화에 대해 반성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변화를 일구어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