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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1-6절. 직분자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 요약설교
오늘 본문인 4장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바라본 바울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자랑하고 전파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반바울파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은 추천서를 자랑하고 자신을 자랑하지만,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전파하고, 자신은 복음을 위해 섬기는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1. 오늘 말씀은 <바울 사도가 신약 직분자로서 불신 율법주의자들에게 늘 박해를 받고 있지만, 복음 전도자로서 결코 낙심치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실 <낙심치 않는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6절. 긍휼하심을 입어 복음의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낙심치 않는다.
7-15절. 능력이 보배로운 복음에 있지, 질그릇 같은 내게 있지 않기 때문에 낙심치 않는다.
16절-5장 7절. 겉 사람은 환난으로 낡아지나, 속사람은 내세에 대한 영광으로 날로 새롭기 때문에 낙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마디인 <그러므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직분이 모세의 직분보다 더영광스러운 것이므로>란 뜻입니다.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1.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를 능가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더 열심이었습니다( 행 9:1-2).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사 복음을 증언하는 사도의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2. 바울은 자기가 받은 직분이 정죄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광스러운 직분이므로(3:8), 용기를 잃지 않았고, 모든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해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3. 바울이 자기의 직분에 대해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바울파 율법주의자들이 추천서 문제로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고 공격하지만, 바울 자신은 그러한 반바울파 운동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직분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낙심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과 박해에 직면하여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그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직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려는 각오로 매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4.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성도로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추천서와 같은 장로 권사 집사라는 명칭이 아니라, 진정으로 맡은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장로와 권사 같은 중직을 가진 사람도 교회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봉사도 않고, 십일조도 않고, 전도도 하지 않는 사람은 고린도 교회의 반바울파 거짓 사도와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직분도 갖지 않았지만,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전도도 하는 분은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적게 맡은 자에게는 적게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48.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5. 제가 군목으로 재직할 때, 연대와 대대에 여러 명의 군종병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군대 교회에서는 연대 교회에 연대 군종과 대대 군종들을 모아서 생활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서울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경기도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려고 부대를 나섰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부대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연대 교회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군종병들의 모습이 참 가관이었습니다.
대대 군종병들은 웃통을 벗어 던지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연대 군종병은 교회 주변의 풀을 베고, 비가 와서 패인 길을 삽으로 메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가 크게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즉, 주님이 갑자기 재림하실 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술 취하고 때리고 싸우는 사람도 있고, 맡은 일에 충성하고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나눠주는 종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45-51.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처럼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고, 배척하고 반대할지라도, 주님께 맡은 직분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 칭찬받고 큰 상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1. 바울을 대적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차마 백성들 앞에서 드러내지는 못하고, 숨어서 바울을 암살하려고 맹세하고, 음식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12-13.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빛을 밝게 드러내기 위하여, 숨어서 음모를 꾸미며 매복하여 사람을 죽이려는 그런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원래 바울도 믿기 전에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1. 사울(바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는 이런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버렸습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말은 부정과거형(ἀπειπάμεθα)으로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런 부끄러운 일들을 단호하게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1. <속임>(πανουργίᾳ: craftiness)이란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는 사단이 하와를 유혹한 <간계>로 번역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계책으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리고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속임수를 써서(디도를 통해서) 헌금을 횡령해 먹었다고 악선전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6-17.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그러나 바울은 본 절에서 이런 악선전에 대하여 자신은 결코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1. <혼잡하게 하다>(δολοῦντες)는 말은 ‘불순물을 섞다’(adulterate)는 뜻으로서, 마치 좋은 치료 약에 이물질을 섞어서 약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나, 맛있는 음료수에 물을 많이 부어서 맛을 떨어뜨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순수한 복음에 율법을 첨가시킴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율법을 첨가시킴으로써 기독교도 아니고 유대교도 아닌 혼합주의 종교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어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짐승 결례를 드려야 하고, 유대인의 절기도 지켜야 하고, 유대인처럼 할례도 받아야고 유대교의 성결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복음의 진리를 밝히 깨달아서, 일단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속죄의 제사를 완성했으므로,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지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성령 강림을 믿은 성도들은 더 이상 유대인의 유월절이나 맥추절이나 초막절 같은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처럼 바울 사도는 기독교 복음을 순수하게 전했고, 기독교 복음에 유대교의 율법주의나 헬라인의 신비주의나 동양의 무당주의(샤마니즘) 등을 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이단자들은 바울 당시의 이단들처럼 기독교 복음 진리에 신비주의나 율법주의나 동양의 종교를 첨가해서, 혼잡된 이단교리를 주장합니다.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1. 바울은 여기서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개념인 ‘진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은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만 비밀스런 교리를 가르친다>는 비난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것 때문입니다.
2. 그리고 바울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바울의 종교가 비밀단체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추천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말씀하고, 또 <양심>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양심은 비록 인간의 타락 이후로 무디어지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선한 양심은 여전히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양심에 호소하여 자신을 변증하고 또 인간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3. 한편 바울이 <스스로 추천한다>는 말씀은 고린도후서 3장 1절 내용과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왜냐하면 율법주의자들이 숨어서 바울을 핍박한 데 반해서, 바울 자신은 복음 진리를 밝히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즉 반바울파 율법주의자들은 모세의 직분을 앞세우면서 숨어서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속임수(궤휼: 악한 꾀로 속여먹는 것)를 행하고, 말씀을 혼잡하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 자신은 빛의 직분을 받아 진리를 밝게 드러내고, 하나님 앞과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서 떳떳하게 행동했습니다.
4. 그리고 <말씀을 혼잡하게 한다>는 것은 말씀을 아전인수 격으로 잘못 해석하여 청중을 부패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를 반대하는 반바울파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는 달리, 모든 사람의 양심에 호소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실함을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행동이 언제나 베일로 진리를 가리거나 간교하게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진리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바울처럼 복음 진리를 밝히 드러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혼자 잘 믿는 것도 좋지만,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6. 광주에서 어떤 공직자(안*숙 국장)를 보았습니다.
이분은 도청에 다니는 고위 공직자시면서도, 어디를 가든지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고, 어느 교회 장로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조그마한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제가 어디 교회 아무개 장로입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장로님 왜 이런 데서 굳이 장로님인 것을 밝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님은 조용히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로님은 그렇게 공개적으로 사니까 공직생활을 하는데도 아무 흠이 없고, 식사 자리에서도 술을 들지 않고 실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내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잘하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신자들에게도 복음 진리를 잘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실수 없는 삶을 사시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1.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모호한 말을 전하여, 소수의 영적인 마음을 가진 비밀단체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2. 그러나 바울 사도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비밀 집회 장소에서 전도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장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시장 같은 곳에서 전도했습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려졌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복음 전도를 믿지 못한 것은 마귀가 그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는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한편 여기서 <가리었다>(κεκαλυμμένον:having been concealed)고 수동태로 말씀한 것은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임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거부하고 멸망에 이르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진다는 계시의 이중적 측면(계시가 선택된 자에게는 받아들여지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거부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고린도후서 2장 16절에서 말씀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구원 얻는 자에게는 생명의 향기이나 멸망 받을 자에게는 사망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 절에서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수건을 벗은 자들에게는 생명이나, 수건에 영적인 눈이 가려진 자들에게는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복음의 양면성>이라고 합니다.
5. 그래서 과거에 최 권능 목사님(최봉석 崔鳳奭, 1869-1944)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전도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를 믿고 너희를 영접하면 그 집에 평안을 전하고, 믿지 않고 배척하면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0:12-14.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6. 이처럼 복음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복음을 전했어도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으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어도, 믿는 분들은 바울 사도를 추종했으나,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배척하고, 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모함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성도님들이 복음을 전하면, 믿고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배척하고 대항하는 불신자도 있습니다.
7. 이번에 전도대회 때 전도해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고, 참 좋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종교나 이단을 따르는지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학교 운동장에서 전도지를 드렸더니, <어제 받았습니다>라고 점잖게 말씀했습니다.
어떤 분은 평상시에 몇 년 동안 관계를 잘 맺어놓았기 때문에, 음식을 사 먹지 않고 그냥 들어가서 전도했어도, 그렇잖아도 한 집사님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아예 확신서까지 써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깜빡 죽는 것처럼 반갑게 받아들이다가도, 막상 확신서를 기록하려고 하니까, 변해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음 전도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전도해보니까, 10명 중 7명은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 교회에 대한 시민들의 이미지가 좋은 덕분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지역은 참 좋은 전도의 텃밭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혹시 복음 전도를 배척하고 대항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같은 능력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어도, 율법주의자들같이 바울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13장 30절에 천국은 마치 알곡을 곡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사르게 내주는 농부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3장 48절에 천국은 마치 바다에 그물로 고기를 잡아서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는 내버리는 어부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하다가 반대를 당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끝까지 복음을 전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1. 본 절에는 여러 가지 대조되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 세상 신과 그리스도, 현세와 영원, 불신자와 신자, 어두움과 빛입니다.
즉 이 세상 신인 마귀는 현세에서 불신자들을 지배하고, 어두운 지옥으로 몰고 가지만, 예수님은 성도들을 영원한 빛이 비추는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2. 여기서 이 세상 신은 사탄 마귀를 가리킵니다.
사탄은 요한복음 12장 31절에는 불신자들의 임금으로, 에베소서 6장 12절에는 정세와 권세와 어두움의 주관자요 악한 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천사였으나,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교만을 품었기 때문에(이사야 14:13-14), 하나님께 정죄를 받고(이사야 14:12, 15)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눅 4:1-2)
그런데도 사탄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계속해서 불신자들을 성도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1. <혼미케 한다>는 말은 마음의 눈 즉 영적인 눈을 멀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탄 마귀는 사람들의 영안을 멀게 하여, 영적인 어두움에 빠지게 하고, 빛 되신 그리스도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2. 그러므로 불신자를 예수 믿게 하는 것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입니다.
그리고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게 하는 것은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를 따라 지옥에 가는 가련한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 천국으로 인도하는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불신자에게 전도하여 예수님 믿고 마귀에게서 해방시켜주는 일입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복음 전도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말씀한 대로 전도할 때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할 때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즉 성령님의 인도에 민감해서 성령님의 감동(지시)에 따라서 전도할 사람을 전도하고, 괜히 시비 거는 사람은 무리하게 접근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어제는 선관위원장(부장판사)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완고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잘 아는 더 높은 고위 공직자(정*주 고등법원장)가 예수 믿고 변화된 간증을 했더니, 마음이 열려서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1. <형상>이란 원형을 그대로 그린 초상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위격(位格:person)과 성품을 지니신 분임을 말해줍니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편견 때문에 영안이 어두워져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거부했습니다.
2.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볼 수 없게 가리는 것은 모세의 수건이었습니다(고후 3:12-18).
그런데 바울은 계속 이 수건의 비유를 사용하여, 이 수건이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도록 눈을 가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불신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편견’이라는 수건으로 영적 눈이 가려진 것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 신인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안이 열려서 예수님이 구세주시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병자들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풍랑도 잔잔하게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이루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수백만 명을 먹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여서 마음이 열린 사람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를 받아서 말씀을 깨닫고, 선한 열매를 맺으며,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늘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5절.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함이라
1. 선거 때 보면, 후보자들은 자기를 선전하고 자기를 찍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분도 자기 사업체를 선전하는 광고지를 집집마다 보냅니다.
연애인들도 자신을 PR하기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옷과 외모를 신경 쓰고, 머리핀 하나를 신경 씁니다.
그러나 바울과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구주되심을 전파합니다.
왜 이처럼 바울과 성도들은 예수님을 전파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모님을 존경하는 자녀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 부모님을 욕하면, 목숨을 바쳐서 싸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부모님이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를 둔 부모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 자녀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자기를 용서해주시고, 영생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사도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예수님이 구주되심을 전파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나를 죄악과 마귀와 지옥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을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2. 어제는 경찰서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어떤 계장이 못 만나게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경찰 서장은 열린 마음으로 전도를 받아주었습니다.
교회에도 나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가 기도해주니까 <아멘> 했습니다.
3. 군청에 다시 찾아갔습니다.
비서실장과 만나고 있는데, 군수님(박*종)이 마침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군수실에서 군수님에게 함께 식사하는 것과 교회 출석에 대해서 의논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잘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지시했습니다.
제가 기도해드리니까 <아멘> 했습니다.
그리고 향기 나는 난초를 선물해주어서 예배당에 갖다 두었습니다.
4. 우리 지역은 전도하기가 참 좋은 텃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감하게 예수님이 구주되심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고, 교회로 인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1. 바울 사도는 앞에서(3:7) 율법이 가져다주는 것이 죽음인 반면에, 복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라고 했습니다(3:17).
그런데 지금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서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복음의 자유로 옮겨진 것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을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롬1:1, 빌1:1).
그런데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종이 되는 것이며,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고, 성도들을 섬기는 종인 사실을 기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이것은 이사야 40-48장에서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보여주듯이, 여호와의 종들은 비록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섬김의 사명을 기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구원 받은 주님의 종들이므로, 주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즐거이 섬기고 헌신하고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4. 지난 월요일에는 기관장 세 사람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군민을 섬기는 봉사 기관에 있는 기관장들은 섬기는 자세로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민 봉사 기관이 아닌 기관장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즉 군수님은 저와 함께 간 교회 세 사람을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그 바쁜 가운데서도 충분한 시간을 주어서 대화를 하게 했습니다.
또한 경찰서장도 참 친절하게 대해주고 대화할 시간도 충분하게 내어주었습니다.
기도할 때 기도도 모두 다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민 봉사 기관이 아닌 기관장은 별로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무적이고 업무적으로만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간 여성도들이 가족적인 분위기로 말하자, 다시 화기애애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이처럼 대민 봉사를 하면서 사는 직종이 얼마나 좋은 직종이고, 행복한 직업인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이나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복음 전도와 실제 삶으로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고 베풀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성령님께서 운행하시고, 행복이 충만한 사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1. 3장 1절부터 4장 6절까지는 이와 같은 바울의 감격스러운 체험과 그가 본 그리스도의 영광이 밑바닥에 흐르고 있습니다.
본 절은 원문에 “왜냐하면”(ὅτι: For)이 있어서, 왜 바울이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1.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처음 창조시에 말씀하셨는데(창세기 1:2-4),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재창조시에도 말씀합니다. (고후 5:17, 요한 3:3-7, 벧전 1:3, 23)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요한복음 3: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베드로전서 1: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것은 재창조 시에 복음의 빛으로 인해 죄의 어두움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죄로 죽었던 인간이 영원한 생명으로 재창조되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온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신 하나님의 첫 창조(창세기 1:3)와 인간의 마음에 구원의 빛을 비추신 두 번째 창조를 대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어두운 데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자연계의 빛을 창조하시고 비추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아는 성령의 빛을 조명해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첫 번째 창조의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면, 바울의 영혼에 비친 구원의 빛은 그를 덮었던 영적 무지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신령한 지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행9:3-9, 22:6-11, 26:13-18).
사도행전 9:3-9.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22:6-11.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도행전 26:13-18.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3. 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빛을 아는 지식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복음을 아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이 지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이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4. 본 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말하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수건을 벗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 것(고후 3:18)과, 바울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정오의 빛보다 더 밝은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바라보았던 사건(행 9:3)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나서 바울은 일평생 죽기까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죽을 때까지 인도한 것과 같습니다.
5. 이처럼 바울이 자신을 모세와 비교한 것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추천서를 문제 삼고 괴롭히자,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숭상하는 모세와 같이 바울 자신도 예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볼 때, 태양 빛보다 더 밝은 예수님의 영광의 빛을 보았습니다(행 9:3).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빛나는 영광의 빛을 본 후에, 곧바로 다메섹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추천서를 가지고 자신들을 전파하려고 하지만, 바울은 오직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전했습니다.
원래 바울은 지독한 율법주의자로서 예수 믿기 전에는 유대 나라에서 대제사장의 권세를 위임받아 군대를 통솔할 정도로 대단한 권력자였고, 지금 바울을 반대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세상적으로도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얼굴에 빛나는 영광의 빛을 본 후에는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6. 그렇습니다. 꿀맛을 본 사람은 설탕물을 마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버스를 잘 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산삼을 캐서 먹어본 사람은 인삼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본 사람은 세상 영광을 크게 욕심내지 않습니다.
천국 영광을 본 사람은 세상에서 이웃에게 사랑과 선을 베푸는 것으로 기쁨을 삼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도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기쁨을 맛보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성령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에 우리 교회 부흥 전도 집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육신의 질병도 치료받은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늘 기도하여 성령님과 동행하며, 이웃에게 늘 선을 베풀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 돌리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받기를 축원합니다!
7. 나누어 봅시다.
본문 가운데는, 반바울파 사람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굽힐 줄 모르는 바울의 헌신과 그리스도의 영광에 감격한 바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나는 어떠한 오해와 핍박을 받고 있습니까?
그렇지만, 바울처럼 헌신과 감격 속에서 섬기고 있습니까?
에베소교회(계 2:4)는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받고 있는데, 나는 어떠합니까?
비록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어떠한 모욕과 실망스러운 일을 만날지라도, 신앙적 첫사랑을 잃지 맙시다.
(첫사랑의 체험, 잃은 것과 회복한 사실 등을 나누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