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시제의 현재완료형 회화언어
Continuous Tenses of Pictorial Language from Present Perfect to Future Tense
-최진희의 네 번째 개인전
최진희는 이상-꿈-행복 사랑 등 추상개념을 자연의 이미지로 치환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며, 언어나 붓끝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찾지 않을 수 없고, 들추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심연 속에서 용솟음치는 세계를 표현하려 한다. 때로 그 표현이 어려울 때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강한 것, 어떤 진실한 것을 표현한다는 의지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지극히 건강하고, 희망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동경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회화에서 두 가지의 관문을 통과하여 미술사의 콘텍스트Context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첫 번째는 은밀한 내면의 이야기를 소통할 수 있는 미술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술사의 흐름에 합류할 수 있는 언어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콘텍스트는 얼개를 가진 흐름과 범주를 만족시킬 수 있는 내용의 뜻이다.
먼저 내면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내면의 세계를 이야기할 때는 두 가지의 방향을 떠올린다. 하나는 본질환원本質還元적인 것이요, 또 하나는 비트겐스타인Wittgenstein, Ludwig Joseph Johann 1889-1951이 명쾌하게 진술했던 바 사밀언어私密言語-Private Language적인 것이다.
먼저 본질환원적인 접근방식에서는 내면의 추상적인 세계를 연상이 가능한 구체적인 어휘로 규정하며, 나아가 사람들에게 내어 보일 때도 소통이 가능한 언어 혹은 어휘를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이야기나 이기적인 동기에서보다는 이타적인 동기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최진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전달하여 공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림을 선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가족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다는 동기에서, 나아가 자신의 세계를 표출한 그림을 걸어주고, 자신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동기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공리적인 목적이요, 효용이라 할 수 있다. 밝은 곳에서 시작하여 밝게 표현하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그것이 우선 화사한 색채와 맑은 색면으로 나타난다. 표현의 언어를 자연에서 찾아내는 것도 공감대 형성을 토대로 투명하게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크릴 안료에 미디엄-돌가루 등을 겹쳐 두께와 중층구조를 만들고, 그 위에 에폭시의 형체를 덧붙이고 다시 큐빅Cubic을 박는 것은 그 언어가 자연에서 비롯하되 인위적인 소통으로 나아가고, 우주의 질서에서 검증 가능한 것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기서 큐빅은 합성 큐빅 지르코니아라고도 부르는 산화지르코늄을 원석으로 만든 모조 다이아몬드를 일컫는다.
큐빅은 최진희에게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그러나 큐빅은 천연 다이아몬드에 비해 취약하다. 오랫동안 사용하면 뿌옇게 변색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항구적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과정적이다. 큐빅이 선수행자의 형상을 띈 에폭시 위의 요소요소에 박혀 있어 선불교의 수행 혹은 수행자의 방편적인 모습을 상형화한다는 것 역시 선수행의 결과라기보다는 과정이 강조된 형태로 해석된다.
화면에 에폭시로 성형된 인물은 대부분 좌선하는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좌선 혹은 참선은 선불교에서 부처님의 깨달음, 즉 무상등정각無上等正覺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등으로 일컫는 위없는 지혜와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방편이다. 최진희의 그림에 부착된 이 깨달음의 징표는 때로 가슴이나 머리, 혹은 단전 등에 부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선불교적인 해석이 아니라, 작가적인 직관이다.
이를테면 큐빅이 상징하는 것은 위없는 깨달음의 본질적 혹은 결정론적 세계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임의로 설정한 어떤 것 이를테면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을 느끼는 부분이 머리-가슴-몸 등으로 다르다는 것은 큐빅을 내세워 상징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말이며, 그것은 작가가 설정하는 방편적인 세계라는 말이 된다.
이 직관에 의해 선불교적인 세계,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결정론적인 범주는 작가의 사밀언어가 되었다가 이윽고 회화라는 얼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언어가 된다. 그것은 일종의 객관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미술사에서 일컫는 대가들이 겪어온 역정이기에 최진희의 세계는 그러므로 매우 건전한 혹은 바람직한 방식에 의해 미술의 언어화가 이루어진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밀언어적이라 할 때는 내면의 추상적인 세계를 규정하고, 세상에 내어 보일 수 있는 공통언어란 없다는 관점을 대변한다. 이를테면 껄끄러운 마음이라는 상태를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 껄끄러운 상태로 전달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러한 상태가 언어로 전달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보편적인 언어일 따름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사밀언어적이라 함은 다분히 젖먹이의 옹알이처럼 일방통신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림 속에서 이 도식은 보통 두 언어가 다른 모습이면서도 공존하는 모습으로 가시화한다. 최진희의 그림에서 볼 때, 안료의 물리적인 두께와 중층구조가 본질환원적 언어의 징표라면 갈라짐-균열은 사밀언어적이다. 화면에는 깊은 아래쪽에서부터 쌓아올린 안료의 층이 만드는 두께와 무게가 먼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리고선 에폭시와 아크릴 칼라의 장력차이가 만들어내는 매끈한 면과 갈라진 느낌, 그리고 그 사이에서 투영되어 보이는 두 가지 언어적인 것들이 조화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곳이 하나로 모이는 곳에 최진희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동기와 욕구의 세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사랑 등은 우리가 보는 만큼 투명하지는 않으며, 때로 거기에는 균열도 있을 수 있다. 한국인의 미의식 역시 오로지 밝고 맑고 깨끗한 화면만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최진희의 화면과 같이 둔탁하고, 두껍고, 거친 바탕 위의 날렵한 터치나 색면의 배치 속에서 한국적 미감은 더욱 밝고 맑고 깨끗하게 두드러질 수 있다.
최진희에게 이러한 양의적인 내면의 세계는 다양한 전개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세계는 때로는 지향하는 바로서, 때로는 나타나는 바로서, 그리고 때로는 화면이 스스로 요구하는 이를테면 화면의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화면에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선, 보는 사람과 그의 시선 및 화면과 사람과의 사이에 있는 공간을 장악한다. 그렇게 화면의 언어는 이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의 소통을 시도하게 된다.
20세기 미술의 원론적인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화면의 자율성에는 이를테면 사밀언어가 공통언어처럼 받아들여지면서 소통의 폭이 확장되는 경우가 포함될 수 있다. 이 경우의 사밀언어는 그림 혹은 예술이란 이러 이러 하다라는 상식적 인식 속에서 그 형식과 내용이 통념화 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것을 현상학적 관점에서는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에 의해 꺽쇠라는 이름의 생략부호 안에 갇힌다Bracketing라고 말한다. 그렇게 핵심에서 먼 요소들을 꺽쇠 안에 가둔 후에 지극히 개인적인 사밀언어적인 화면 위에서의 독백 혹은 옹알이는 미술사의 콘텍스트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개성과 창의라는 이름으로 객관화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소통되는 언어가 아닌 사밀언어가 미술의 언어가 될까? 언어학적인 엄정한 규범Criteria을 벗어나 화면의 범주Category로 편입되면 거기에는 또 다른 소통언어가 생성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회화적인 공감대에 의해 공유되는 인식이라는 부분이 생겨나는 것이다.
언어학적 기준에서 볼 때 캔버스 혹은 화면이라는 형식-물감이나 안료가 만드는 궤적-나아가 대상을 화면 위에 올리는 방식은 이를테면 “세계 속의 존재In der Welt Sein“으로서 “거기에 있는Das Sein”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밀언어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뿐만 아니라, 미술사의 콘텍스트 안에서 수용되어 하나의 범주로 해석될 때는 사밀언어와 공통언어의 완충공간에 이 콘텍스트에 의해 재해석된 범주가 창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최진희가 집념해 온 두터운 질감, 여러 겹의 안료층이 만드는 중층구조이며, 장력이 다른 안료들이 만드는 균열 등이 만드는 사밀언어이자 공통언어이다. 이러한 형식은 미술의 20세기에서 대중적인 상식으로 고착된 바 있다. 이를테면 데자뷔Deja vu라는 개념이 그러할 것이다. 벽에 그림이 걸려 있을 때, 그것이 그림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그림은 그림의 논리에 따른 해석이 필요한 분야라는 전제하에서 비판없이 힐끗 보면서 거기에 있어왔던 것,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면 그것을 데자뷔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최진희가 보여주는 화면상의 부단한 시도와 그 결과로서의 궤적 그리고 조형은 이미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미술사와 미술현상의 이미지베이스를 스캔하여 일치match 판정이 내려진 안정된 범주가 된다. 사실 개성이나 작가적인 창의성은 이 바탕에서 발아하여 성장하고 꽃을 피울 때 붙여주는 이름이다.
최진희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먼저 중후한 색감이요, 그리고 시지각에 의해 느껴지는 것은 두터운 질감 다음에 물리적으로 다가오는 중량감 혹은 무게이다. 이것은 미술이라는 분야에서 호의적으로 수용되는 형식이다. 또한 아크릴 칼라는 오늘날 유화에 버금가는 안정된 질료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최진희의 작품에서 미술의 안정된 콘텍스트, 혹은 미술의 범주를 보게 된다.
이때 작품의 언어는 현상학적인 브라케팅이라는 과정을 거쳐 그림의 내면에 자리 잡는다. 현상학에서의 언어는 연상과 추론을 벗어난 엄정한 범주개념에 의해 걸러지고 걸러져서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브라케팅은 이렇게 걸러지고 걸러지는 과정을 말한다. 이렇게 걸러지게 되면 이미 작품은 사밀언어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사밀언어에서 해방되어 공통언어가 된다.
이렇게 최진희의 사밀언어가 미술이라는 범주에서 공통언어화하는 과정은 소통을 위한 기초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의 과정이라면 미술사에서 요구하는 얼개와 흐름에 합류한다는 명제라 할 수 있다. 뿌리기에 의한 일종의 파괴행위가 첫 번째 합류의 시도라면 감필에 의한 화면의 조형의지와 배경에의 주의가 두 번째 합류 혹은 창의적 공간창조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뿌리기란 이름 그대로 묽은 물감을 화면에 뿌리는 작업이다. 이미 만들어진 화면의 자기 주장력을 부드럽게 순화하면서 일관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이 기법에 의하면 개성적인 혹은 톡톡 튀는 색면이나 터치 등의 무질서한 화면구성을 강제적으로 균일화하여 시선을 분산하고 초점을 확산하는 효과를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워낙 전면회화All-Over Painting 등을 통해 보편화된 기법이므로 비개성적, 획일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위험이 없지 않다.
두 번째의 감필의지는 비개성적인 뿌리기 대신 최진희의 강력한 조형언어로 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두된다. 감필이란 원래 남송의 양해梁楷에 의해 완성된 필법이지만 축자逐字해석을 하자면 ‘붓을 놀려 뭔가를 보태고 싶은 의지를 꺾고 붓을 내려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단순화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비유하자면 미래시제의 현재완료형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감필이 필요 없는 미래 어느 시점의 자신이 감필의지와 힘겹게 싸우는 현재의 자신을 가르친다 라고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최진희의 화면은 공통언어화한 사밀언어를 미술사적인 얼개 속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편입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선 전면회화에서 볼 수 있었던 이를테면 시점의 확대와 초점의 확산이라는 상투적 뿌리기 기법 대신 분명한 자신의 이야기를 미래지향적인 선택지에서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탄탄한 바탕 위에서 이렇게 몇 년, 혹은 몇 십년 후의 작품을 미리 땡겨 현재의 시각에서 재현하는 것, 그것이 이번 전시에서 보여줄 최진희의 야심적인 작품들이 될 것이다.
2006-2019
#최진희 #Choi_Jin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