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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무등산,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담양나들이를 다시 하게 되었다.
구순을 한 해 앞둔 처외할머님의 생신에
팔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간다.
연로하신 처외할머님과 몸이 꽤 불편하신 장인어른,
그런 처지가 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어느 분이 먼저 세상을 등질지 기약할 수 없다.
거기에 내 욕심, 무등산 산행이다.
일찍 길을 나서
증심사지구 주차장에서 나를 내려준 차는
처외가를 향해 바로 출발한다.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가자
잘 지어진 한옥건물, 전통문화관을 지난다.
멀리 무등의 연봉이 늘어서있다.
'국립공원 무등산' 표지석이
입구에서 탐방객을 맞이한다.
뒷 면에는
'무등산 국립공원 지정(2013년 3월 4일) 기념으로
이 표지석을 세움', 취지문을 적어놓았다.
조금 더 지나자 목간판을 만난다.
그 뒤로 보이는 조형물이
7월 12일 부터 17일간 광주와 여수에서 열린
‘제18회 2019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공식 마스코트인
'수리, 달이'다.
무등산과 영산강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수달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수달은 무등산의 깃대종이다.
무등산 증심사 계곡은 ‘절골’, ‘무당골’ 등으로 불렸다.
증심사 아래는 약간의 논과 밭이 있었을 뿐
야생초 우거진 거친 땅이었다.
계곡에서는 무당들의 굿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증심사 아래 논과 밭을 장문빈이라는 여인이 사들였다.
여인이 계곡을 찾아가 척박한 논과 밭을 사들인 것은 꿈 때문이었다.
여사의 꿈 속에 증심사 아래 초가 한 채가 나타났다.
다가가 방문을 여니 염주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증심사 계곡을 찾아갔더니
정말 초가 한 채가 있었다.
여사가 스님을 찾아가 꿈 얘기를 했다.
스님은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에 절을 지으면 나라와 중생을 위해 좋은 일이 될 것”이라 말했다.
여사는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문빈정사란 현판을 내걸었다.
1959년 4월의 일이었다.
<출처 :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Amp.html?idxno=76428>
문빈정사 출입문 등지문이다.
등산화 세척장이 보인다.
맷돌모양의 물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에
등산화를 씻어낸다.
공기를 고압분사하여 세척하는 방식에 비해
경관도 자연스럽고 친환경적이다.
증심교 앞에서 토끼등, 바람재와
중머리재, 새인봉으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나온다.
증심사에 들를 작정이므로
다리 건너 중머리재 방향으로 따라간다.
유난히 풍부하게 흘러내리는 물,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다.
몇 일 전, 태풍 미탁 위력으로 쏟아낸 호우가
아직 골골에서 흘러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입 잘 닦여진 길 뒤,
또 다른 이면을 무등은 보여줄 터이다.
마치 부모님과 들어서는 입대 훈련소처럼...
다시 갈림길이 나타난다.
왼쪽이 증심사, 중머리재,
오른쪽이 약사사, 새인봉 방향이다.
증심사를 찾아 왼쪽으로 접어든다.
곧 무등산 증심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 지나 왼쪽 언덕에
부도와 돌탑, 비가 자리잡고 있다.
사천왕문을 지난다.
대웅전이다.
증심사는 광주의 진산 무등산(1187m)의 서쪽 기슭에 있다.
1984년 2월 17일,
이곳 증심사 일원은 문화재자료 1호로 지정되었다.
증심사의 사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등 에는 “증심사(證心寺)”라 하였고
'광주읍지'(1925년)에는 “징심사(澄心寺)”라 하였는데,
언제 어떤 연유로 징심이라 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9세기 중엽 철감선사가 초창한 고찰로
사지(寺誌)에 의하면 고려 선종 11년(1094년) 혜조국사가 중창하였고,
조선 세종 25년(1443) 김방(金倣)이 삼창하였으며,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뒤 광해군 원년(1609) 석경, 수장, 도광 3대 선사가 4창하였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근년에까지 이르렀으나,
한국전쟁으로 오백전과 노전(사성전)을 제외한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불상과 비롯한 범종, 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막대한 피해를 당하였다.
증심사의 현존 건물은 오백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70~80년대에 복원된 건축물들이다.
<출처 : http://jeungsimsa.org/bbs/>
조선 세종 25년(1443) 김방이 증심사를 개축하면서
오백 나한을 봉안하기 위하여 이 건물을 지었다고 전한다.
정유재란 때 불탔고, 광해군 때 또다시 대규모의 중수가 있었다.
6.25전란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소실되었지만
참화를 피한 오백전이 유일한 조선조의 건물이다.
광주에서 증심사에 가려면 홍림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넌다.
이 다리믄 '배고픈 다리'로 알려져있다.
또한 이 근처를 '선거리'라고 브른다.
조선 세종조 가뭄이 잦아 흉년에 시달렸다.
김방이 무등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둬 농사에 쓰고자
장죽 축조공사를 별였다.
2년에 걸쳐 방죽을 완공하였으나
그 해로 부터 3년간 비가 내리지 않았다.
김방이 사흘 밤낮 식음을 전폐하고 기우제를 올렸는데
마지막 날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증심사를 중건하고 오백나한을 봉안하라, 이른다.
이에 김방은서둘러 증심사 중건과 오백나한전을 조성하며
혹여 부정탈까 육식을 금한다.
반 년이 지나 김방의 건강이 나빠지고 몸이 야위어가자
백성들이 염려하여 매일 닭을 잡아 먹도록 권한다.
백성들의 간절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닭똥집만 먹고
나머지는 일꾼들에게 고루 먹인다.
어느 날 세종대왕의 꿈에 닭 수백마리가 나타나
광주 무등산 골짜기에 김방이라는 자가
장정들을 훈련시켜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한다.
세종대와은 지체없이 금부도사에게
3일 안에 김방을 잡아올 것을 명한다.
금부도사와 금군이 밤낮없이 말을 달려 홍림교를 지나려는데
말들의 발이 땅에 붙어 움직이질 않는다.
기괴한 일에 금군들이 내리려하나
말에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그날 밤 침소에 든 세정대왕 앞에 사미승 수백명이 나타나
김방이 백성들을 위해 방죽을 만들고
비를 내리게 하려고 증심사를 중건하고 오백나한상을 봉안하려는데
어찌 미미한 닭들의 고변을 믿느냐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대왕은 곧 명을 내려
금부도사를 돌아오도록 한다.
멀리서 어명이 전해지고 금부도사가 회군을 명하자
비로소 말과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군들이 이틀밤낮을 꼼짝없이 선채로 있었다 하여
'선관이' 또는 '선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출처 : jeungsimsa.org/>
나한전과 왼쪽 전각이 비로전이다.
나한전에 모셔진 나한들
석탑 두 기가 세워져있다.
왼쪽이 고려시대 조성된 오층석탑,
오른쪽이 조선사대 조성된 칠층석탑이다.
1933년 해체 수리를 하던 중 오층석탑 안에서
염주로 추정되는 청옥 23개, 금동불 2구 등이 나왔다
이 중 금불동 2구는 국보로 지정되었다.
여순사건과 빨치산의 등장으로
광주경찰서에 보관하던 중 한국전쟁 당시 분실되었다.
나한전 앞
창건 당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다.
1971년 해체, 복원작업을 했는데
발견된 유물이 없어 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2층 구조의 산신각이다.
공양간 앞 아궁이와 철솥이 보인다.
예전에 샘물로 사용했을듯 한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증심사를 옆으로 돌아 나온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계단을 올라가니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건물이 보인다.
산중 교회는 흔히 보지 못했다.
신림교회 '오방수련원',
오방 최홍종목사가 신림마을 주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1950년 4월 7일 교회를 설립하였던 곳이다.
광주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오방 최홍종목사는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한센병, 결핵퇴치, 빈민구제에 힘써
나병원, 애양원, 삼애학원, 호혜원, 무등원 등을 설립하였다.
해발 1187미터 무등산을 오르는 길,
미리 각오를 하고 오르는 중이다.
증심사에서 앱으로 확인한 해발이 이백사십미터,
구비져 돌아오르겠지만
가풀막이야 어찌 각오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앞이 트이고 개활지가 나온다.
이정표에 '당산나무'라고 표시하고 있다.
이름처럼 우람한 당산나무 한 그루가
초입에 서있다.
광각으로 담은 사진이 왜소해보인다.
하지만 실물을 본다면
훨씬 더 우람함을 알 수 있다.
약 오백년된 느티나무로 신림마을의 당산목으로
예전에는 주변에 보리밥집이 있었다.
2007년 5월 노무현대통령이 재임 중
무등산을 오르면서 광주시민들과 인사를 나누며 쉬었던 곳이다.
아스팔트 슁글로 지붕을 인 넓은 휴게공간에
'송풍정'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이정표에 '천제단' 방향이 보인다.
대충 살펴본 무등산 인터넷 자료 중
아주 낯선 지명이다.
중머리재로 오르려던 처음 예정을 바꿔
천제단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다소 경사가 있지만
출발한지 아직 얼마지 않아 힘들 정도는 아니다.
약 1킬로미터 정도 오르니
지도에는 봉황대기점으로 표시된
천제단 삼거리에 닿는다.
지명과는 달리 이정표는
네 개 방향으로 표시하고 있다.
오른쪽 천제단방향으로 길을 접어든다.
탑머리가 훼손된 돌탑에
다소 조잡한 '천제단'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신라와 고려 때 무등산에 신사를 설치하고 산신제를 올려
고을과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삼별초를 진압할 때
무등산신의 음조를 입었다는 보고로 '호국백'이라는 봉작을 주어
'무등산호국백지신위'를 신사에 걸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뭄이 들면 광주목사, 전라감사가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 신사 자리에 18세기 들어 천제단이 들어섰다.
아마도 역할은 같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천제단이 일제강점기에 사라져버린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가
이 일대 임야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면 허물어버린 것이다.
이를 분통하게 여긴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
광주청년회의 이름으로 매수한다.
20세기 초기에 들어서 천제단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러던 1965년, 남종화가 의재 허백련에 의해
천제단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허백련이 일제시대에 연진회를 조직하여
회원들과 늘 회합하며 문화운동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천제단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10월 3일 개천제가 열린다.
<출처 : http://gjstory.or.kr/sub.html?pid=11&formtype=view&code=71>
진행방향을 둘러보지만 길을 찾을 수 없다.
되돌아 내려와
천제단 삼거리에서 중머리재로 길을 찾아 든다.
반듯한 들을 놓아 만든 계단이
왠지 경건한 장소에 온 느낌이다.
양옆으로 대나무가 숲을 이룬다.
조금 더 올라가니 깨 넓은 공터에 곧은 나무가 서있고
수로를 따라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샘이 솟는지 돌을 쌓아놓았는데
바가지가 놓여있지 않으니 마실수가 없다.
이정표는 '백운암터'라고 소개하고 있다.
올라서는 곳에 서있는 나무가 곧고 높다.
그 옆으로 수로가 지난다.
다시 중머리재를 찾아 가는 길,
비탈진 사면 윗쪽으로 바위가 흘러내릴듯 쌓여있다.
자잘한 자갈로 형성된 너덜지대는 많이 봤지만
이처럼 크고 작은 바위로 된 광경은 보기 힘들다.
사면 아랫쪽으로도 너덜지내가 펼쳐진다.
계속 진행하는 길,
몇 번인가 다시 너덜지대를 지난다.
절리 형상이 바위에 그대로 나타난다.
돌이 쪼개져도 반듯한 형상이 유지되는 현상을
보여주려 일부러 전시한 것 같이 보인다.
앞이 다시 훤하게 트인다.
해발 617미터, 중머리재에 오른다.
고갯마루 쉼터에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봉울리 평평한 능선을 따라간다.
왼쪽 돌계단이 중봉,
오른쪽이 장불재 가는 길이다.
장불재를 향해 발을 옮긴다.
갈림길에서 친절하게 방향을 알려주는 알림판이
고맙다.
무등산,
해발만큼이나 우려도 높았는데
막상 산에 드니 초행 산객을 부드럽게 안는 느낌이다.
그래도 어느 한 곳 쯤,
거친 시련을 줄 것 같은 예감은
틀렸다.
다른 코스도 그럴까?
용추삼거리에 닿는다.
왼쪽은 중봉,
오른쪽은 장불재 6백미터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 급하지 않은 경사에
다양한 볼거리와 편안한 풍경이 넉넉하게 안긴다.
자주 오가는 사람을 지나친다.
높은 산을 오르는 이들의 가벼운 복장을
그제서야 이해할 것 같다.
해발이 팔백미터를 넘은듯 한데
바로 옆 계곡에는 소란스런 물소리가 들린다.
잠시 옆으로 빠져
흘러내린 땀에 짠 기운이 입으로 스며드는 얼을 씻는다.
광주천발원지 안내문이 보인다.
'장불재에서 생성된 물이 지면으로 스며 들었다가
이 곳 샘골에서 솟아 지면으로 흘러나온다.
용추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용추폭포에서 힘차게 떨어져
광주천으로 따러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게곡 바로 옆 돌틈에 바가지가 보인다.
평소에는 돌틈으로 물이 솟을것 같은데
큰 비 온 뒤라 옆 계곡에서 물이 흘러들고 있다.
마실수 없을 듯 하여 돌아선다.
여늬 등산로 돌길처럼 보이지만
대개 평평한 돌이라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른쪽에 돌담이 나즈막한 보인다.
다시 하늘이 시원하게 드러난다.
통신탑이 보이는
장불재에 도착하여
서석대와 입석대가 있는 능선을 올려다 본다.
광주와 화순의 경계 능선 고갯길,
해발 919미터 장불재다.
아주 너른 능선이 펼쳐져있다.
노무현대통령이 재임 중
무등산 등산길에 이 곳에서 산상 연설을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광주시내를 내려다 본다.
그나마 길 눈이 어두운데
초행길인데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다.
화장실과 쉼터, 왼쪽에는 365재난 상황실을 겸한
장불대탐방지원센터를 상황실이 자리잡고 있다.
주욱 뻗은 포장도로 왼쪽,
억새밭으로 입석대를 찾아 올라간다.
깐지 오래지 않은듯 야자매트가 깔끔하다.
길 옆에 가끔 구슬봉이꽃이
그 진한 보라빗 자태를 뽐낸다.
떨어져 나온 절리 조각들,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이며 볼거리가 된다.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입석대 전망대가 나온다.
무등산 주상절리대와 화순 공룡화석지, 적벽 등
무등산권 지질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됐다. .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제204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무등산권 지질공원이 세계지질공원으로 최종 확정됐다고 2018년 4월 13일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취지는
지질학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고고학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 곳을 보전하고
교육·관광을 통해 지속가능한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전 세계적으로 137번째,
국내에서는 제주도, 청송군에 이어 3번째다.
무등산권은 2014년 12월 국가지질공원에 이어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으로 위상을 확보했다.
지역은 광주시, 담양군을 비롯해 화순군 일부 등 총 151.36㎢ 규모로
입석대 등 지질명소 20곳,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죽녹원 등 역사문화명소 42곳이 포함됐다.
<출처 : http://www.segye.com/newsView/20180413000989?OutUrl=daum>
입석대다.
다소 아쉽지만 전경을 담기에
왼쪽 장애물들이 시야를 가린다.
전망대 오른쪽 입석대안내판이
멀리서 전경을 담기에 거슬리게 들어온다.
카메라를 들고와 이리저리 각도를 잡는 등산객은
연신 안내판에 대한 불만을 읊는다.
파노라마로 사진을 담지만
역시 왼쪽 가리워진 부분이 불만스럽다.
포기하고 서석대로 향한다.
입석대표지석 글씨체가
투박한듯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뒤로 보이는 난간 끝으로 돌아
입석대 바로 앞 산소로 들어선다.
그렇게 다시
파노라마로 입석대 사진을 담았다.
분명 욕먹을 짓을 했지만
관리공단에서 조금만 더 탐방객을 배려한다면
훨씬 좋은 위치에서 관람할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입석대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선다.
왼쪽 끄트머리,
입석대 머리 부분이 보인다.
넓게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어본다.
서석대 오르는 길,
옆으로 누워 비스듬이 하늘을 향해 오른 바위가 보인다.
'옛날, 무엇엔가 쫓기던 산양을
이 부근 암자에 기거하는 스님이 구해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스님 꿈속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 먹겠다고 한다.
얼마 후 종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자
이무기는 스님을 풀어즈거 승천하게 되었다고 한다.'
왠지 치악산과 까치 이야기가 생각난다.
물론 여러가지 구성이 틀리기는 하지만...
다시 능선으로 올라서니
멀리 가운데 인왕봉과 그 너머 정상 천왕봉이 보인다.
서석대봉우리가 가깝다.
수 십 만년 전 이었을까?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그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을 바위가
오늘은 오가는 하찮은 인간의 디딤돌이 되었다.
바위들이 얽혀있다.
그 바위틈에 흙과 풀이
바위의 모남을 메꿔, 왜소한 인간이 찾을수 있게한다.
서석대 이정표 앞에 다다른다.
서석대이정표가 보인다.
먼저 다다른 이가 그 감동을 누리며
두고두고 떠올리고자 사진에 담는다.
광주·전남의 진산(鎭山)이자 호남정맥의 중심 산줄기로
1972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3월, 우리나라의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전체 면적은 75.425㎢이다.
해발 1,187m의 무등산은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한 산’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서석대·입석대·광석대 등 수직 절리상의 암석이
석책을 두른 듯 치솟아 장관을 이룬다.
아쉽지만 정상 천왕봉과 지왕봉, 인왕봉은
군사보호지역이라 출입할 수 없다.
'현재 무등산 정상에는 공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군사보안 목적상 일반 시민의 산행 목적 출입을 할 수 없으나
시민들의 요청에 의해 무등산 개방행사를
연 4회(봄, 여름, 초가을, 늦가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행사시기는 광주시 의뢰, 공군 검토 과정을 거쳐
광주시 행사일정 공고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반 탐방객이 오를수 있는 최고봉,
해발 천백미터 서석대다.
저녁 노을 질때 햇살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빛나기 때문에 수정병풍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경치때문에 무등산을 서석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경을 거의 300도 이상 파노라마도 잡아봤다.
앞쪽 인왕봉과 뒤 보일듯 말듯 지왕봉,
그 뒤 넓게 건물이 자리잡은 곳이 천왕봉이다.
광주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아쉽지만 옅은 안개가 베일처럼 드리웠다.
'해발 천미터가 넘는 산이 인구 백만명이 넘는 도시를 품고 있는 경우는
전세계적으로 무등산과 광주가 유일하다.'는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 사면 너덜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서석대정상석 뒤에
'광주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되다'는 글귀가
마음에 와 닿는다.
하산길로 접어든다.
목적지는 원효사가 있는 무등산국립공원 원효분소다.
지도를 보자면 오르던 증심사
오른쪽 방향으로 하산하는 셈이다.
서석대가 보이는 전망대로 갈라지는 길이다.
앞에 가린 나무가 다소 아쉽다.
전신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올라오는 이들이 몇 있었지만
자주 오르는 길인지 관심도 없이 지나친다.
조금 더 내려간 공터에
의자가 놓여있다.
그 오른쪽 안에
또한 멋들어진 주상절리가 보인다.
내려가는 길 왼쪽 바깥으로 조망지가 있어 다가가니
유연한 능선이 아름다운 무등의 자애로운 경치가 있고
그 뒤로 무등이 끌어안은 광주가 보인다.
등산로는 여전히 적당한 경사로
먼 길 찾아온 산객을 위무한다.
임도가 보이고
지붕 보이는 그 밑으로 방향을 안내한다.
'목교'라는 이정표가 의아하다.
방금 건물 뒤 데크를 지나왔고
그 밑으로 물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난간없는 데크가 다리였던 셈인가?
지도로 방향을 짐작하면 중봉으로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자연석 돌계단이
아직껏 물에 젖어있다.
다행히 디딤돌이 반듯하여 불편함은 없다.
가끔 만나는 경사진 돌은
조심해서 밟으면 된다.
지난 태풍으로 불어난 물은
등산로에 물길을 만들고 있다.
무등산 옛길 2구간, 물통거리를 걷고있다.
옛날 나뭇꾼들이 땔감이나 숯을 구워 나르던 길로 사용되다
1960년대 군부대가 보급품을 나르던 길로
1980년대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무등산옛길은 광주 도심에서 원효사를 거쳐 서석대까지
옛사람들이 오르던 길을 찾아 복원한 길이다.
돌이끼가 낀 너덜겅이
이곳에서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듯 완만하다.
잔뜩 이끼낀 바위를 둘러
줄이 쳐져있다.
위 바위 앞 수직면에 글이 새겨져있고
그 밑 바위 위에 평평한 자연석으로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더 내려가니 '무등산과 김덕령장군' 안내문에
주검동유적지라는 안내가 있다.
'금곡동 제철유적지', 이정표 지명이 의아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무등산에서 철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2년 발굴 조사 결과
철에서 불순물을 제거, 가공하는 시설 등
제철에 필요한 시설이 이 곳에서 확인되었다.
가까운 계곡에 사철이 있고
화살촉, 못과 철찌꺼기 등이 발견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덕령장군이 무기를 만들었던 장소로 전해져
주검동이라고도 부른다.
다시 하산길을 서두른다.
원시림속에 들어온듯
울창한 숲과 이끼, 스산함이 느껴진다.
인적없는 비 내린 숲길에 들어서니
그런 느낌은 현실감을 더한다.
건물 지붕이 보인다.
멀리 무등산 능선이 유혹한다.
산악구조대 간판이 보인다.
무등산국립공원 원효분소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이나 기부, 신탁을 통해
보존가치가 있는 무등산 자연, 문화자산을 매입하거나 위탁받아
시민 주도로 영구히 보존관리하고
그 혜택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무등산공유화운동 비가 서있다.
특히 토지를 기증한 이들의
공적을 기록한 기념돌이 나란히 서있다.
무등산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다른 자랑거리 주상절리가 조성되어있다.
'수목원',
이름만으로는 잘 가꿔진 넓은 공원을 연상했지만
그 밑 식당이라는 글에 실망감이 든다.
하지만 명불허전이라고,
그 이름 값 만큼 멋진 경치가 기대된다.
원효사지구 주차장에 당도한다.
마음으로는 원효사까지 다녀오고 싶지만
돌아갈 대중교통 편 고민이 깊다.
이미 마중하러 보낸 이도 곧 도착할테니
진중하게 기다리기로 한다.
늘 염두에 두고 아쉬워만 하던 무등산 산행을 마친다.
빙산의 일각이라고, 무등의 자애로움만 맛본건 아닌지,
또 다른 우람함이나 거침을 지나친건 아닌지
앞으로 몇 개 코스는 더 다녀볼 작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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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는 차타고 휘리릭 돌아서 경치조코 산이 크다는 것만 모리속에 있습니다.....^^
대단한 차장님!!
담에 나두 쫌 델꼬 댕기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