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팎을 그리 쏘다니는데, 이상하게 경주와는 인연이 닿질 않았다. 1987년 친구가 결혼날짜를 잡아 청춘을 마감한다는 약간은 비장한 각오로 떠났던 보름간의 아랫녘 여행 때도 경주역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동해남부선을 탔으니 경주에 다녀왔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 수학여행에라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상하게도 비껴갈 뿐 서른다섯살까지 경주에 갈 일이 없었다.
90년대초, 해직된 동료들의 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끼리 답사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경주 남산기행이란 프로그램이 떳길래 '드디어 오매불망 그리던 경주 땅에 가게 됐구나' 아이 동행 신청을 했다. 경주에 간다길래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대능원 같은 곳을 보러 가는줄 알았지 아침부터 밤까지 남산을 걸으며 종주하는건지 우찌 알았겠나.(최강 민폐족, 아직도 첨성대, 대능원은 못가봤다)
아장 아장 걸음조차 불안한 세돌 막 지난 아이와 하루종일 겨울 남산을 등반해야했던 지난함은 상상에 맡긴다. 그 때 세돌짜리 아기를 번갈아 업고 하루종일 남산을 걸으신 김갑* 유문* 샘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헥헥 거리며 올랐던 그 남산에서 두 분 샘이 안 계셨으면 오도가도 못할뻔했다.
전날밤 여관방에 모여 슬라이드 필름을 스크린에 띄워 다음날 걸을 경주의 유적, 남산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하고 갔는데도 남산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절에 놀러는 가되 대웅전에는 한번 들어가보지 않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전무한 때였는데도 신라인들이 이뤄낸 불국토의 장엄함과 지극함에 이게 뭘까 어리둥절 했던 기억이 난다.
마치 신라시대에 살아본 사람처럼 신라와 신라인들의 불심, 남산을 설명하는 신병철 선생님의 문화에 대한 이해, 해박한 지식, 입담은 그밤 우리를 천오백년전으로 이동시켰다.(그 후 신샘은 탁월한 입담과 전문적 해설로 모 신문사의 답사여행을 이끄는 유명한 분이 되셨다.)
새벽밥 먹고 배리 삼존불에서 시작된 남산 답사는 그 넓은 산 속에, 숲속에, 바위에 신라 사람들이 새겨놓은 수많은 불상과 탑들을 찾아내 불국토의 퍼즐을 맞추는 시간여행이었다. 여름에는 우거진 숲 때문에 유적 찾기가 불가능해 반드시 겨울이라야 한다고 했다. 마치 우리들이 신라 사람처럼 탑을 세우고, 바위에 마애불을 새기는듯 했다.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았으니 전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라는 용장사탑과 답사를 끝낸 칠불암의 바위 면면에 새겨진 불상이 기억에 남는다. 칠불암에서 내려오는 길의 호젓함이 오래 기억에 남아 시눗대 우거진 오솔길을 만날 때마다 그 겨울 남산과 칠불암이 떠올랐었다.
3박 4일의 남산 답사는 감은사지와 기린사를 거쳐 경주박물관 뒷뜰의 고선사지 삼층탑을 바라보며 공식 일정을 마쳤다. 남산 등산의 피로와 감포의 바닷바람에 절은 몸을 풀러 남, 녀로 나누어 목욕탕을 다녀왔는데 또 그 샘들이 아이를 데리고 가 깨끗하게 씻겨 주셨다.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없이 일면식 없는 타인들과 목욕탕에 다녀온 아이의 자신감에 빛나던 얼굴도 기억난다.
감포 바닷가 고유섭 선생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란 표석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던 것 같은데 사진이 보이질 않는다. 경주 남산의 의미, 가치, 무게에 무지한채 다녀와 나중에 얼마나 운좋게 남산을 만났나를 알게 됐다. 보름날 달빛남산걷기란 제목으로 경주시에서 하는 남산기행 프로그램이 있다하니 언젠가는 꼭 달빛 남산을 걸어 볼 생각이다 -1994년 1월, 경주 남산
96년 태풍으로 울릉도 가는 배가 뜨지 못한 덕분에 처음 만난 불국사의 감동, 고딩 수학여행 중 봤으면 쓱 하고 지나갔을텐데 늦게 만난 덕에 엄청 감탄했다.
재작년, 반드시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의 기운을 받으며 한해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들 덕분에 20년만에 경주에 다녀오며 경주 한달살기의 꿈을 갖게 됐다. 1월1일 일년에 딱 하루 문을 닫는 박대성 화백의 솔거 미술관에 가지 못한 아쉬움도 큰 이유이다.
어떤 얘기를 하든 경주, 신라사람들의 이천년을 말할 깜냥이 안된다. 하여 3박4일 남산과 경주를 걷고, 해돋이를 보러 경주에 다녀왔음에도 사진 한 장 제대로 남은게 없는지도 모르겠다. 어설프게 나대지 말라고.
자전거를 타고 오래된 무덤 사이를 달리고, 솔거미술관에 그림을 보러가고, 칠불암에 새겨진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꿈을 꾼다. 비가 오는 날엔 아라비아 사람을 만나러 괘릉에 간 김에 배병우 작가의 사진 속 소나무도 만나고 와야겠다.
뽀나스_경주남산, 사진 대신 시집
중고서점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찾기 힘든 희귀템 시집이란 글을 보고 찾아봤더니 다행히 버리지 않았다. 호시탐탐 버릴 궁리를 하는 책꽂이에서 건재해줘 고맙다.
첫댓글 코로나 여파로
경주에 안 가본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오랜만에 경주의 사진들을 보니 반갑네요..^^
주상절리는 제주도에서만 보았는데
양남의 주상절리 또한 인상 깊네요
전에는 군사지역이라 못 들어갔다 하더라고요. 일출 보러 감포와 양남을 고민하다 주상절리 생각이 나서 양남으로 갔는데 동네사람들이 준 떡국도 먹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