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장거리 연애 - 아임
내 애인은 독일에 있다. 독일로 간다는 민아에게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게 나한테도 즐거운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 서운했다. 코로나 시국에 해외로 가 1년 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민아 앞에서 날 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을 입 안에서 웅얼거리다 들리지 않게 조용히 삼켰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럼 뭐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가지 말라고 할 거야 뭐야. 내 쪼잔함이 구질거리는 것 같았다. 나에게 민아의 인생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있나? 가도 좋다는 말도 웃겼다. 내가 뭐라고 민아에게 가라 마라 얘기할 수 있지? 내가 민아라면 이런 말 하는 애인을 좋아할까?
내가 계속 괜찮다고 하니 오히려 민아가 더 걱정했다. 슬픈 게 당연하고, 시차와 거리가 당연히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는 버텼다. 슬픔을 인정하면 장거리 연애가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고 붙잡고 싶어질 테니까. 그건 민아와 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거리 연애 앞에서 나의 가장 큰 괴로움은 내가 울지 않고 민아를 보내기엔 민아를 정말 사랑하고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연애의 안정거리를 벗어나는 짓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내 사랑을 망칠까봐 무서웠다. 나는 내가 잘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지금 좀 슬퍼도 결국 이것도 내 감정인데 흘려보낼 수 있겠지 짐작했다.
나는 항상 거리유지가 관계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첨언하지 않고, 저 사람과 나는 같지 않다 기억하는 태도가 관계를 무너지지 않게 한다고 믿었다. 문제는 얼마만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감이 안 온다는 것이다. 얼마나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일단 질러보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겪어내야 하는데 말이 안 나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유명한 대사도 있지만 난 그걸 들을 때마다 그럼 사랑이 변하지, 안 변해? 당연한 얘기 아닌가 했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나는 항상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드라마니까, 영화니까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거지, 현실에서 그렇게 절절하게 푹 빠질 수가 있나? 사람 마음이 얼마나 휙휙 변하는데. 어제는 좋았다가도 오늘은 싫어질 수 있지 않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사랑을 믿을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쿨한 척 ‘어 맞아~ 사랑은 변하지. 그러니까 지금 연애도 언젠가 끝날 거야, 그게 당연한 거니까 난 괜찮아.’ 하면 내가 상처 받을 일이 없을 테니까.
민아의 독일행이 슬프다는 걸 인정하는 건 사랑에 대한 내 태도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민아가 독일로 가기 하루 전, 시간이 없으니 오히려 머리가 잘 돌아갔다. 사랑에 다치고 싶지 않아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지 알 수 있었다. 거리 유지고 나발이고 그냥 말해야했다. 카페 안 내 옆에 앉아 있는 민아가 내일이면 한국에 없고, 민아가 좋아하는 창가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고, 딸기 스무디가 없고, 여름에도 차가운 민아의 손이 만져지지 않을 거란 게 파도처럼 왔다. 눈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터져 나오는 거구나, 생각할 만큼 울었다. 내가 얼마나 슬픈지, 사실 너가 얼마나 미운지, 장거리 연애가 얼마나 걱정되는지, 한번 말하니 끝도 없었다. 세상 사람들 다 알고 나만 몰랐던 사실이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나는 슬프고, 지금 이 상황이 버겁다, 말하고 나니 그런데도 내가 왜 헤어지고 싶지 않은지가 더 분명해졌다. 민아를 사랑하니까.
우리 사이엔 처음엔 8시간, 지금은 썸머 타임으로 7시간 시차가 있다. 내가 일어날 때 민아는 잠에 든다. 아침 6시 반, 눈 뜨면 민아에게 전화한다. 최근 식품회사 인턴으로 취직한 민아는 예전보다 일찍 잠에 들어 비몽사몽한 상태로 전화를 받는다. 보통 통화는 막 깬 내가 잠긴 목소리로 잘 자...하면 민아의 잠에 취한 응... 잘 다녀와... 하는 30초로 끝난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통화하고 침대에서 조금 더 밍기적거리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 하루가 끝나는 민아. 나의 하루와 민아의 하루는 다르게 흐른다. 이빨을 닦으며 내가 자는 동안 민아가 보낸 카톡을 읽는다. 룸메가 시끄러웠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달이 엄청 동그랬구나.
시차가 8시간일 땐 한국의 7시는 독일의 23시라서 민아가 잘 준비할 때쯤 운동을 갔기 때문에 런닝 머신 위를 걸으며 민아의 하루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젠 나의 7시는 민아의 밤 12시, 잘 시간이다. 민아의 목소리 없이 조용히 런닝 머신 위를 걷는다. 민아가 자기 전 통화하면서 하루의 마무리를 함께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민아의 잠긴 목소리가 없으니 원래도 혼자 하던 운동이었지만 새삼 내가 혼자 있다는 게 느껴졌다. 조용히 운동하고 씻고 출근하고, 민아는 자느라 읽지 못하겠지만 일하는 중간 중간 카톡을 남긴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다! 민아는 잘 자고 있으려나? / 오늘 점심은 내가 싫어하는 소스에 버무린 강정이 나왔어. 서랍에 과자 넣어놓길 잘했다. 몽쉘 먹어야겠어. / 오늘 회의 엄청 길게 했어. 부장님 오늘따라 할 말이 많으셨나봐. 제발 그만~ / 카톡이 세 개정도 쌓일 때쯤 민아의 답장이 온다. 오늘은 꿈도 안 꾸고 잘 잤다고, 점심이 아쉬워서 어떡하냐고, 회의 고생했다고. 오후 4시, 드디어 우리가 둘 다 깨어있는 시간이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내가 자는 8시간, 민아가 자는 8시간을 빼고 나면 우리가 실시간성을 가질 수 있는 건 8시간뿐이다. 뿐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기도 하다. 애인 사이라고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1분1초마다 연락하며 지내는 것도 아닌데 둘 다 한국에 있을 땐 얼마나 시간을 공유했다고 이러는 건가 싶다. 그런데도 섭섭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젠 나는 우리의 거리 앞에서 좀 더 용감해졌다. 이제는 민아에게 운동할 때 통화를 안 하니 아쉽다고, 그러니까 내가 자는 동안에 동영상이든 사진이든 흔적을 더 많이 남겨줄 수 있는지 묻는다. 나의 사랑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해줬으면 하는 걸 말하면서 좀 더 가까워졌다.
첫댓글 너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요. 전 가끔 사랑이라는 걸 못 느끼는 사람처럼 굴곤 하는데요. 연인이 없을 때는 더욱더 그렇게 되어서 사랑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것도 왜인지 피하게 돼요. 분명 그때 그 사람과 잘 지내며 행복했던 시간도 있는데 결국엔 헤어질거라며 서로의 간극을 버티지 못할거라고 단념하곤 합니다. 그런 제게 아임님의 진행 중인 사랑 이야기가 따뜻하게 다가와요. 진솔한 두분의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기처럼 쓴 글이라 하셨지만 상황도 그려지고 마음이 절절히 전해지네요. 저도 남편이 스위스에 1년 가있는동안 장거리연애를 했었는데요, 그 사람이 깰 오후 3시를 기다리는 마음이나 자유롭게 보내고싶지만 보내기 싫은 그 마음들이 오랜만에 생각났어요. 민아님이 돌아오는 날,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러 갈 아임님의 얼굴이 그려지네요. 저의 장거리연애 시절 이진아의 '공항가는길'을 들으며 설레했었는데ㅎㅎ 살포시 추천드려보아요.
사랑이야기라서 그런건지 아임님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글마다 서윗함이 묻어납니다. 애틋한 마음으로 쓰신 글일 테지만, 오히려 행복함이 느껴지네요. 장거리를 통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표현 받을지를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신 것 같아요. 민아는 장거리 연애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울면서 털어놓았을 때 어떤 말을 하셨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