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복, 내 복 / 양선례
“어이, 이번 토요일에 올라올랑가?”
셋째시누이의 전화다. 큰시누이가 나보다 열아홉 살이나 많아서 한창 어른으로 느껴지는 데 비해 셋째시누이는 여섯 살 차이라 상대적으로 좀 편하다. 아이 키울 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를 돌봐 주는 데가 없었다. 병설유치원은 9시에 문을 열었고, 나는 집에서 8시에는 나가야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발 동동거릴 때 형님이 손을 내밀었다. 집으로 데려다만 주면 아침밥 먹여서 등원을 시켜주신단다. 자신의 아이 둘에 우리 아이 셋까지 아침 식탁이 얼마나 복작거렸을지 상상이 간다.
셋째시누이는 아이들이 고등학교 다닐 무렵 광주로 이사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만나기만 하면 자꾸 땅을 사라고 권했다. 본인의 동생이자 내 남편이 퇴직하면 놀 텃밭이 필요하다며. 삼십 년 넘게 직장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쉬면 우울증 걸릴 수도 있으니 소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생전 농사라고는 지어본 적이 없는 친구의 남편도 의외로 재미있게 정붙이며 일하는 모습을 보니 남편도 잘하리라고 여겨졌단다.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예를 들어가며 만날 때마다 생각해 보라며 압력을 넣었다. “형님, 딴 주머니 안 차서 저는 단돈 천만 원도 없어요.” 처음에는 거절했다. “직장 생활 30년이나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한가? 내가 자네라면 맘에 드는 데가 나오면 남편이 반대해도 대출이라도 받아서 저지르겠네.” 형님은 꽤 단호했다.
옷을 사거나 소소한 살림살이는 내 맘대로 하지만 집이나 차 등 목돈이 드는 건 그래 본 적이 거의 없다. 권유는 하지만 결정권은 늘 남편에게 넘겼다. 당연하게도 땅을 산 적도 없다. 그것도 남편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여 무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님이 광주 인근에 땅을 샀다며 구경 오라고 했다. 절대 농지인데 머지않아 풀릴 수도 있다며 기대에 들떠 있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복덕방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형님이 산 땅부터 둘러봤다. 볼 줄 모르는 내가 봐도 위치가 좋았다. 햇빛도 잘 들고 경지 정리도 되어 네모반듯했다. 마을과도 지척이라 곧 그린벨트가 해제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영 터무니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땅에 별로 욕심이 없었는데 막상 형님 땅을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사장이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 따라다녔다. 한 곳은 개발 예정지라는 말과는 달리 들어가는 길도 험하고, 땅 모양도 고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땅값은 형님 땅보다 비쌌다. 또 한군데는 소방서 옆의 논이었는데 차로 들어가기 어려워 내려서 좁은 논두렁 길을 걸어가야 했다. 가격도 두 배였다.
교감 초임지는 위로는 녹차밭이, 아래로는 해수욕장과 해수 사우나가 유명한 관광지에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직원 몇 명과 학교 뒤 낮은 산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운동장을 벗어나 십여 미터 계단을 오르면 파란 기와집이 보인다. 계단 양편에는 잘 깎은 녹차밭이 자리했고, 마당 가에는 작은 비닐하우스 한 동이 있었다. 마을 끝 집이라서 별도의 담이나 대문은 없었다. 집을 가운데 두고 사방이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인 할머니가 고구마나 고추 등의 작물을 철따라 심었는데 그 밭은 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갈했다. 또 봄이면 수돗가에 수선화와 할미꽃이 천지였다. 그처럼 여럿이 무리지어 핀 할미꽃은 처음 보았기에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남의 집 처마 밑까지 가서 살펴봤다. 머잖아 하얀 자두꽃이 봄바람에 날렸고, 모란과 철쭉이 화사하게 피었다. 이래저래 구경할 게 많은 집이라서 오가다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 집 주인과도 잘 알게 되었다.
형님과 집을 보러 다니던 중에 그 집이 떠올랐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라 멀기는 하지만 산과 바다가 같이 있고 먹거리가 풍부했다. 또 관광지라서 나중에 팔고 싶을 때 고생하지 않고 쉽게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전임지였기에 함께 운동 다닌 옛 동료에게 혹여 팔 의향이 있으면 연결해 주기를 부탁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진짜로 소식이 왔다.
문구사에 들러 생전 처음으로 매매 계약서를 샀다. 한번 생각이 정해지면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성격을 아는지라 남편도 궁시렁거리면서도 동행해 주었다. 할머니는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논과 밭, 집을 팔고 자식들이 사는 평택으로 이사간다고 했다. 본인들이 이 땅을 사서 28년 전에 직접 집을 지었단다. 20평 남짓된 집은 아담했다. 우리 부부가 생각한 마지노선보다는 살짝 더 불렀지만 형님과 몇 군데를 둘러본 참이라 별로 깍지도 않고 계약금 천만 원을 주고 도장까지 찍고 돌아왔다.
집과 밭은 우리가 사고, 논은 남편의 지인에게 연결해 주었다. 마을과도 백여 미터쯤 떨어져 있어 외지인이라고 텃세 받을 일도 없고, 적당히 높은 언덕에 있어서 멀리 바다가 한눈에 보여 전망이 좋았다. 붉은 지붕의 교회 첨탑이 잔잔한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물 흐르듯이 잘 되는 듯싶었다.
아뿔싸! 뒤늦게 지적도를 떼어보니 우리가 산 집이 올라와 있지 않았다. 온통 밭으로만 되어 있었다. 그때서야 법무사 사무실을 찾았다. 현재의 법으로는 구제받을 길이 없으나 십 년에 한 번씩 특례법이 적용되면 그때는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는 그 법이 시행될 때까지 재산권을 전혀 행사할 수 없을뿐더러 그동안에 혹여 발생할지도 모를 불안을 감수해야 한단다. 집주인 할머니는 계약금으로 이미 평택에 집을 샀다며 난색을 표했다. 계약을 파기하면 3천만 원을 날린단다. 위험 부담을 안고 모험을 할 것인가, 계약금을 돌려받고 –법무사는 가능하다고 함- 땅을 포기할 것인가의 기로에 섰다.
결국 나는 그 집의 주인이 되었다. 아니 집을 산 게 아니라 집을 둘러싸고 있는 밭 2필지를 산 것이다. 한 필지는 명의 변경했으나 집이 포함된 또 다른 곳은 그렇지 않다. 집을 리모델링하여 주말 주택으로 사용한 지 만 5년이 넘었다. 풀 한 포기 없이 정갈하던 밭은 점차 쑥대밭으로 변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두 양주분의 손길이 얼마나 가 닿았을까를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감나무가 열여섯 그루나 있으나 내가 먹을 감도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 자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대추나무는 유실수가 아니라 관상용이 된 지 오래다. 힘들게 심은 고구마와 생강, 마늘은 종자 값도 안 나온다. 심고 캐는 수고에 비하면 사서 먹는 게 훨씬 싸고 품질도 좋다는 걸 애저녁에 알아버렸다. 그런데도 별일이 없으면 주말 주택에 간다. 햇살의 양도 바람의 속삭임도 다르게 느껴진다. 텃밭의 신선한 작물이 밥상에 오르면 보약 먹는 기분이다.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마음은 편안해진다.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뒹굴거리는 시간조차 여유롭다.
기다리던 특례법이 작년부터 적용되었지만 여전히 집을 포함하여 400평이 넘는 땅은 할아버지 명의다. 예전과 다르게 인공위성 사진을 첨부하라는 항목이 붙어 있어서 요구하는 조건을 맞출 수가 없었다. 상담해 주던 군청 직원은 한심한 눈길로 쳐다봤다. 내 이름으로 바꾸려면 집을 허물고 지적도 대로 밭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법무사의 공증을 받아 나름의 안전 장치를 해 두긴 했지만 깊이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연말이 되면 할아버지의 아들이 재산세 고지서를 문자로 보내온다. 집에 얽힌 사연을 아는 지인은 돈이 거짓말하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며 걱정한다. 누구는 이런 나를 어리석다 한다. 뭘 믿고 억 단위가 넘는 돈을 투자했느냐고 혀를 끌끌 찬다.
이미 저질러진 일인 데다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바엔 이 순간을 즐길 수밖에 없다.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사람을 믿어야지. 어차피 십 년간의 놀이터로 구한 땅이니, 열심히 놀다가 미련없이 집을 허물어 버리기로 남편과도 합의했다. 온정주의자 마누라와 사느라고 비싼 값을 치른 셈이지만 어쩌랴. 그조차 그의 복인 것을. 이제 오 년 남았다.
첫댓글 모처럼 산 땅이 말썽이네요. 전망 좋은 곳이라 땅값은 크게 오를 것 같은데요. 그런데 관리하기가 참 어렵죠?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땅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는 있습니다만 과연 재산권을 행사할 수나 있으려나 싶습니다.
점점 풀밭이 되어 갑니다. 하하.
@이팝나무 그곳에 해바라기를 심으면 어떨까요? 내게 해바라기씨가 많이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말하세요.
@곽주현 네. 선생님!
기억해 둘게요.
집을 사기까지의 과정도 겁나게 복잡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그 과정을 생략했답니다.
선생님처럼 2탄을 이어서 써야 하나?
잠깐 생각했습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의 속삭임은 덤이네요. 지금 행복하면 최고지요. 모든 일이 잘 될 거여요. 복이 많은 분이시니까요..
하하.
언젠가 인복이 많다는 제 말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지금 행복하면 최고라는 말씀에 동감입니다.
고맙습니다.
아이고 참.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명의를 가져와야 할 텐데. 잘 해결될거라 생각하세요.
그게 이상적이긴 한데 지금은 어느 정도 포기상태입니다.
자녀분들에게서도 도장과 주민번호 자필로 적은 포기서 받아두었답니다.
법무사 공증도 받았고요.
잘 해결되겠지요.
지금은 마음을 비워 편안합니다.
어머...조속히 잘 해결될 수 있길 바랍니다.
조속히 해결은 틀려 버려지만 마음은 편하답니다.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사람을 믿으려고요.
선생님 한몸에 두 지개 못 진다는 말대로 서툰 전원생활을 시작하셨군요. 그래도 참 잘하신거라 생각됩니다. 어이없지만 법대로 그 집은 허물고 이전 하는 수 밖에 방법이 없을듯 합니다. 저도 40년 살았던 집 터가 지목이 산이라는 이유로 새집을 지으려고 닦아놓은 자리에 나무가지라도 심어 산으로 복원해 놓아야 건축 허가를받을 수 있다고해서 여러 해 길렀던 정원수들을 몽땅 옮겨 심었다 사진 찍어간 다음에 시작하느라 아까운 나무만 죽이고 사간도 두 달이상낭비하는 일을 격었답니다. 특별조치법이 10년에 한번씩 시행 되었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라서 2년 반으로 기간을 늘려 올해 8월까지를 끋으로 이후에는 그런 제도가 없어진답니다.서두르셔야 될 것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일반 이전이 훨싼 간편하고 빠를 수 있는데 특조 이전은 6계월이상 걸립니다. 지금 신청해도가을 쯤 되어야 서루를 받을 수 있어요.만약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더욱 어려워지니 이러나 저러나 서두르셔야 될것 같습니다. 더 알아보셔요.이전만 끝네면 예쁜 농막 하나 놓아도 좋을거라 생각됩니다만 , 제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써 보았싑니다.
선생님! 정성어린 댓글 고맙습니다. 저도 특별조치법의 그런 내용은 잘 알고 있지만 집을 허물기 전에는 방법이 없더라고요. 법무사가 상속대상인 할머니와 자식들 몫까지 포함한 문서를 공증해 줘서 있으려고요. 돈을 들여 편백으로 둘러싼 리모델링까지 마쳐서 지금은 허물기 아쉽답니다. 조금 더 놀이터에서 놀고 이다음에 팔 때 그쪽의 협조를 구해야지요. 살 때는 비싸게 샀지만 공시지가는 얼마 안되기에 그 쪽 자제분들도 이해는 한답니다.
집 지을 때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마음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이왕 꼬인 것 서둘지 않으려고요. 그냥 포기하고 산답니다. 집을 허물기 전에는 아무 방법이 없어서요. 이번 주제 '어리석음'에 딱 맞는 글이지요? 하하.
하하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역시 땅을 사고 파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자꾸 생각하니 머리 아파서 마음 내려 놓고 삽니다. 남편한테 죽어라 야단은 맞았지만요. 선무당이 사람 잡은 격이지만 저는 미련한 데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라 여전히 어리숙하게 산답니다. 오늘 편하면 제일 좋다 생각하고요. 이 또한 잘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