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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따기리 경(M70) Kīṭāgiri Sutta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까시(*1)를 유행하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나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간다.
비구들이여, 내가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한다.
오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가라.(*2)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문다고 인식할 것이다."(*3)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1) 까시(Kāsi 혹은 Kāsikā)는 부처님 당시 인도 중원의 16국 가운데 하나로 바라나시(Bārānasi)를 수도로 하였다.
까시와 바라나시는 초기 경에서 거의 동일시 되고 있다.
(*2)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병이 없고 고통이 없는 등의] 이러한 다섯 가지 이익을 보면서
밤에 먹는 것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때 아닌 때인 밤에 먹는 것과
때 아닌 때인 오후에 먹는 것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버리게 하지 않으시고
먼저 오후에 먹는 것을 금하게 하시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에 밤에 막는 것을 버리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단계적으로 금하셨는가? 이 두 가지 식사는 이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이행되고 실행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잘 보호된 마을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커온 아직은 어린,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이러한 두 가지 식사를 한 번에 버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한 번에 버리게 하지 않으시고 본서 「밧달리 경」(M65)에서는 오후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고,
본경에서는 저녁에 먹는 것을 버리게 하시는 것이다.
버리게 하시면서 위협을 주거나 꾸중을 하시면서 버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이 없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익을 보이시면서 버리게 하셨다.”(MA.ⅲ.186)
(*3) 적당한 때가 아닌 때에 음식을 먹지 말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본서 「메추라기 비유 경」(M66) §6에도 나타난다.
이 경 §6에서 보듯이 세존께서는 처음에 점심때 먹는 것을 금하셨고 그 다음에 저녁에 먹는 것을 금하셨다.
주석서는 세존께서는 한꺼번에 점심과 저녁을 다 금하게 되면 약한 비구들애개는 무리가 따를 것이므로
이렇게 점진적으로 금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MA.ⅲ.186)
3. 그때 세존께서는 까시에서 차례로 유행하시다가 마침내 끼따기리(*4)라는 까시의 성읍에 도착하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까시의 성읍인 끼따기리에 머무셨다.
(*4) 본경에 나타나듯이 끼따기리(Kīṭāgiri)는 까시에서 사왓티로 향하는 도로에 있는 성읍이며,
육군비구(六群比丘)에 속하는 앗사지와 뿌납바수까의 본거지였다.
이곳은 적당한 비가 내려 곡물이 풍성하였고 그래서 앗사지와 뿌납바수까가 이곳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다고 나타난다.(VinA.ⅲ.613)
4. 그때 앗사지와 뿌납바수까라는 두 비구가 끼따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5)
그때 많은 비구들이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니다. 비구 승가도 그러하고요.
도반들이여,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습니다.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어도
우리는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이익을] 버리고
미래에 얻어질 이익(*6)을 추구하겠습니까?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을 것입니다.“
(*5) “앗사지와 뿌납바수까는 육군(六群) 비구 가운데 무리는 거느리는 두 사람이다.
이들 여섯 명은 빤두까, 로히따까, 메띠야, 붐마자까, 앗사지, 뿌납빠수까인데,
이들 여섯 명을 육군비구(六群比丘)라 한다.
이 중에서 빤두까와 로히따까는 자기들의 회중을 거느리고 사왓티에서 머물렀고,
메띠야와 붐마자까는 라자가하에서, 이 두 사람은 끼따기리에서 머물렀다.”(MA.ⅲ.186-187)
(*6) ‘미래에 얻어질 이익’은 kālika(시간에 속하는, 시간이 걸리는)를 주석서에서 설명한 대로 풀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미래의 시간에 얻어질 이로움”(MA.ⅲ.187)으로 설명하고 있다.
5. 그 비구들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할 수 없자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가서는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니다. …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저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에 먹고 … 오후에 아무 때나 먹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설득할 수가 없어서
세존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6.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른 비구를 부르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내 말이라 전하고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불러오라. ‘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르셨습니다.’라고."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그 비구는 세존께 대답하고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를 만나러 갔다.
가서는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 존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도반이여, 잘 알겠습니다."라고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는 그 비구에게 대답하고 세존을 뵈러 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앗사지 비구와 뿌납바수까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사실인가? 많은 비구들이 그대들을 만나러 가서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니다. 비구 승가도 그러하고요.
도반들이여,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오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도 밤에 먹는 것을 삼가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밤에 먹는 것을 삼갈 때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대들은 그 비구들에게 '도반들이여,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어도
우리는 병이 없고 고통이 없고 가볍고 생기 있고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눈에 보이는 [이로움을] 버리고 미래에 얻어질 이로움을 추구하겠습니까?
우리는 저녁에 먹고 아침에 먹고 오후에 아무 때나 먹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인간이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어떤 느낌을 경험하면 그에게 해로운 법들은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은 증장한다.' 라고 법을 설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7.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이렇게 법을 설한 것을 알지 못하는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지만,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7)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지만,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지만,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7) “이 문장의 첫 번째 즐거운 느낌은 재가에 바탕 한 기쁨(gehassita-somanassa)에 의한 것이고,
후자는 출가에 바탕 한 기쁨(nekkhammasita-somanassa)에 의한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다음 두 문장에 나타나는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각각 재가와 출가에 바탕 한 슬픔과 평온에 의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MA.ⅲ.187)
8.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善法]이 줄어든다.’(*8)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내가 그와 같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버려라.'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든다.'라는 것을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9)을 버려라.' 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내가 이와 같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구족하여 머물러라.'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타당한 일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고 보고 경험하고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10)을 구족하여 머물러라.' 라고 말한다.“
(*8) ‘해로운 법들[不善法, akusala-dhammā]과 유익한 법들[善法, kusala-dhammā]을 말씀하셨다.
본서 제3권 「왓차곳따 긴 경」(M73) §§4~5에서 세존께서는
탐·진·치와 살생과 도둑질 등의 열 가지 해로움을 해로운 법들[不善法]로,
불탐·부진·불치와 열 가지 유익함을 유익한 법들[善法]로 정의하고 계신다.
(*9)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evarūpa sukhavedana)’이란 것은
재가에 바탕 한 기쁨(geha-ssita-somanassa)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MA.ⅲ.187)
재가에 바탕 한 기쁨과 출가에 바탕 한 기쁨 등에 대해서는
본서 제4권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경」(M137) §9이하를 참조할 것
(*10) “여기서 ‘이런 종류의 즐거운 느낌(evarūpa sukhavedana)’이란 것은
출가에 바탕 한 기쁨(nekkhamma-sita-somanassa)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MA.ⅲ.187)
9.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든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로운 느낌을 구족하여 머물러라.'라고 말한다.“
10.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든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버려라.'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여기 어떤 자는 어떤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느낌을 느낄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유익한 법들이 증장한다.'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하고 통찰지로써 체득하지 못했다 하자. …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은 이런 종류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구족하여 머물러라.'라고 말한다.“
11.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더 이상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12. "비구들이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존재의 족쇄를 부수었고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아라한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일을 이미 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기때문이다."
13. "비구들이여,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지만(*11) 위없는 유가안은을 원하면서 머무는 유학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12) 사용하고 선우들을 섬기면서 기능[根]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13)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의 열매를 보기 때문에 방일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11) ‘얻지 못했지만’은 appattamānasā를 옮긴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본서 제1권 「뿌리에 대한 법문 경」(M1) §27의 주해를 참조할 것.
(*12) “‘적당한 거처(anulomaikāni senāsanāni)’란
도닦기에 적당하고 명상주제를 들기에 적합한 곳으로,
그곳에 머물 때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MA.ⅲ.187)
(*13) “‘기능[根]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라는 것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즉 믿음의 기능, 정진의 기능, 마음챙김의 기능,
삼매의 기능, 통찰지의 기능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MA.ⅲ.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