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살롬 ! (2023년 2월 22일 신우회 예배 말씀)
예수님의 영성은 우리가 알 때만이 성장하고 우리가 삶속에서 살아가야만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길에서는 고난도 있을 수 있고 고통도 따름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한다는 일은 그 만큼 상급이 큼을 말해줍니다.
본문 말씀 : 마가복음4:13-20절 < 새번역성경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
씨를 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다.
길가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말씀이 뿌려질 때에 그들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그 말씀을 빼앗아간다.
돌짝밭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달리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말씀 선포 : 경계선을 무시하고 (Ignoring Border Line)
부활, 그리스도교가 타 종교와 가장 다른 점이 바로 몸의 부활입니다. 이는 온 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셨을 때 자기 몸이 그분처럼 변화도니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부활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점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많은 성도가 부활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주후 1세기의 유대인의 기대와 연결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보통 알고 바라는 부활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완전히 불타 사라지고 이전과는 다른 새 하늘 새 땅에서 살아갈 종말로서의 다시 살아남입니다. 이와 달리 고대 유대인이 믿었던 부활은 야웨 하나님이 틀렸다고 고발하며 도발했던 모든 악의 세력이 패배당하고 주님이 완전히 이 땅에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갱신된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성도가 막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단절된 새 세상에서의 삶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은 야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에 맞지 않은 모든 더러움을 태우시고 불순물이 섞여 완전하지 못했던 것을 정련하셔서 깨끗게 하신 연결된 세상에서의 삶과 연관한 부활을 믿고 소망했습니다. 이런 고대 유대인의 믿음은 오랜 시간 이방 제국으로부터의 지배와 관련합니다. 그들은 신바벨로니아 제국으로부터 내려온 오랜 제국의 지배동안 야웨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과 창조 세계로 귀환하시는 것을 고대했습니다. 고대 유대인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안티오쿠스 4세로부터 신앙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끔직한 일도 겪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에 야웨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완전한 하나님 백성으로 살도록 제련하시기 위함이라 믿고 어떤 협박과 폭력에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주님을 향해 신실하다면, 마침내 야웨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창조 세계에 귀환하신 끝 날에 부활해 주님의 인정을 받을 것라고 확신했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모든 환상이 이와 관련있습니다.
우리가 갖게 될 엄청난 고난이 세상이 모든 것을 다 불타 없애는 것에서부터 올 것이고 그 때가 이 지구의 종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이 나오고, 더 나아가 시한부 종말론이 우리를 현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고대 유대인의 믿음이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고대 유대인은 신실한 주님 백성이 부활하는 것이 바로 야웨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창조 세계에 귀환하신 사건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예수님의 부활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보여 주신것이고 우리를 위하신 사랑하심을 몸소 보여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은 고대 유대인의 믿음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예수님 홀로 다시 사셨다는 점입니다. 고대 유대인은 세상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함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홀로 부활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야웨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인자, 즉 그리스도시라고 확신했던 모든 주님의 제자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성령님이 자기들에게 임재하시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야웨 하나님이 고대 유대인이 선을 긋고 있던 그분의 백성이라는 경계선을 무시하고 넘어서서 모든 사람에게 찾아가셔서 그중에 주님을 애타게 찾는 이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기 위해 구세주 예수님이 홀로 부활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하실 때도 여러 번 유대인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인종과 나라를 뛰어넘어 자기 백성을 부리시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하신 이후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모세와 엘리야를 대표로 하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며 무수한 이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고 적은 숫자만 주님의 증인을 괴롭히다가 망하게 되는 환상을 기록했습니다.
왜 고대 유대인이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그들이 야웨 하나님이 자기 조상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이 경계로 삼아 그 수효대로 인류를 갈라놓으셨고 이제 제사장 나라를 통해 그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로 했던 소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명기 32장에서 모세가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노래를 계속 불렀다면, 그들은 온 세상을 구속하시는 주님이 진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은 이 사실을 잊음으로 모세의 노래대로, 수치스럽게도 미련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 관점에서 몸의 부활을 새롭게 바라봐야 고대 유대인처럼 어리석은 백성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여, 예수님께서 남기신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기억하십시오,
어느 바보가 씨앗이 뿌리내릴 수 없는 돌밭, 길가 그리고 가시덤불에 씨앗을 낭비하며 뿌립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심을 단언하십니다. 인간이 그어 놓은 모든 경계선을 무시하시고 온 인류와 창조 세계의 주인이신 주님이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때때로 유대인이 전혀 없는 이방인의 땅에 가셔서 꼭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야웨 하나님의 단일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고대 유대인을 뛰어 넘어 자기 백성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온 교회가 땅 끝에서 자기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부활할 때까지 자기 백성이 끝까지 신실한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