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 5권, 숙종 2년 2월 9일 辛酉 2번째기사 1676년 청 강희(康熙) 15년
복창군 이정과 복평군 이연 등에게 입시토록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요(堯)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 구족(九族)을 친애(親愛)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이번에 종반(宗班)의 영감(令監)060) 이상을 돌려가면서 사대(賜對)하여, 나의 친족에게 화목하는 뜻을 보이고, 그 질고(疾苦)를 물었는데,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등이 입시(入侍)하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마음 속으로 그리워한다. 이 뒤로는 역시 같이 참여하여 입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註 060]
영감(令監) : 종2품과 정3품.
○下敎曰: "堯之治天下, 以親九族爲本。 今此宗班令監以上, 輪回賜對, 示予睦族之義, 詢其疾苦。 而福昌君 楨、福平君 㮒等不爲入侍, 予心戀戀。 今後亦爲同參入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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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令監) : 종2품과 정3품.->종친부의 감(監,정6품), 영(令,정5품) 이상의 왕실 종친을 가리킨다.
*관직과 호칭은 다른 것이다. 판서급을 대감이라 호칭하나 대감은 호칭이고 관직이 아니다. 여기서의 영감은 호칭이 아니고 영과 감의 관직을 통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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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21년 정사(1797) 4월 22일(임진)
21-04-22[02] 황해 감사 민태혁(閔台爀)을 파직하였다.
○ 승지 송전(宋銓)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 민태혁이, 봉조하 김종수(金鍾秀)가 출발한 일자를 급히 장계하였는데, 내용 중에 심지어 ‘대감(大監), 행차(行次), 분부(分付) 기후(氣候)’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임금에게 아뢰는 문자는 그 체모가 얼마나 근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제대로 살피지 않고 경솔히 한 점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장계는 막 도로 내려보냈습니다마는 황해 감사를 엄하게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명색이 장계라고 하면서 어찌 이렇게 작성한단 말인가. 공적인 격례와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놀랍다고 말만 하고 말아서는 안 된다. 해당 도신을 파직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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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21 (1797) 년 4월 22일 ( 임진 )
강 :
召見諸承旨于誠正閣
목
持公事入侍也
강 :
罷黃海監司 閔台爀職
목
承旨 宋銓啓言黃海監司 閔台爀以奉朝賀 金鍾秀發行日子馳啓而措辭中至有大監行次分付氣候等語奏御文字事體何等謹嚴而屑越不審莫此爲甚狀啓纔已還下送而該道臣請從重推考敎以名以狀啓寧有如許措語乎揆以公格事體不可但以駭然言當該道臣罷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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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정조 19년 을묘(1795, 건륭) 12월 16일(계사) 복상하다. 윤시동을 의정부 우의정, 채제공을 좌의정으로 삼다
복상(卜相)하였다. 【구복(舊卜)은 김종수(金鍾秀)ㆍ김이소(金履素)ㆍ김희(金憙)였으며 신복(新卜)은 윤시동(尹蓍東)이었다.】 윤시동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채제공(蔡濟恭)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삼았다. 【원전】 46 집 620 면 【
362 정조 20년 병진(1796, 가경) 3월 19일(을축) 고 영돈녕부사 유언호의 졸기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죽었다. 언호는 자가 사경(士京)이며 영의정 유척기(兪拓基)의 족질이다.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고, 영종(英宗) 신사년에 등제하여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주연(胄筵)에서 지우를 받았다. 상이
363 정조 20년 병진(1796, 가경) 4월 1일(병자) 관동 지방을 유람하러 가는 김종수에게 말과 양식을 지급하게 하다
상이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관동 지방을 유람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말과 양식을 지급하게 하고 지방관은 안부를 물어 상문하게 하였다. 【원전】 46 집 644 면 【분류】 왕실(王室)
364 정조 20년 병진(1796, 가경) 4월 17일(임진) 김종수에게 여행길에 식사를 더하고 명승지를 두루 찾도록 하유하다
강원 감사가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의 여행경로에 대하여 아뢰니, 전교하기를, “들으니, 경이 대관령(大關嶺)을 넘고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가 오죽헌(烏竹軒)을 거쳐 송담 서원(松譚書院)을 찾아보고 양양(襄壤)으로 향할 것
365 정조 20년 병진(1796, 가경) 4월 18일(계사) 육조의 판서 이하가 청백리를 추천하여 올리다
】 , 고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전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고 집의 박치륭(朴致隆) 【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 고 병조 판서 윤지인(尹趾仁), 고 군수 박선(朴銑) 【호조 판서... ...) 【호조 참의 홍낙항(洪樂恒)이 추천하였다.】 , 고 부사 이동표(李東標), 고 부윤 정간(鄭幹), 고 목사 고유(高裕) 【예조 참의 이정덕(李鼎德)이 추천하였다.】 , 고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봉조하 김종수(金鍾秀) 【형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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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1월 7일 丙寅 1번째기사 1799년 청 가경(嘉慶) 4년
봉조하 김종수의 졸기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가 죽었다. 김종수의 자는 정부(定夫)인데, 우의정 김구(金構)의 증손이다. 젊어서부터 인품이 뛰어나고 문학이 우수하였다. 영종(英宗)무자년001) 문과에 급제한 이후 간혹 실의(失意)를 겪었었다. 그러나 일찍이 상이 동궁에 있을 때 궁관(宮官)으로서 한마디 말로 서로 뜻이 통하였기 때문에 상이 즉위함에 미쳐 그에 대한 권우(眷遇)가 백관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상이 그를 명의(名義)로 허여하고 복심(腹心)으로 의탁하였다. 그리하여 내각(內閣)·문원(文苑)·전임(銓任)·융원(戎垣)의 직을 두루 역임하고, 기유년에 이르러서는 한 몸에 오영(五營)의 부절을 찼다가, 얼마 안 되어 재상이 되었으니, 그 조우(遭遇)의 융성함이 제신(諸臣) 중에 비할 자가 없었다. 매양 경연에서 아뢸 때나 상소문에서 이따금 다른 사람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을 말하였다. 그래서 행동은 매양 급하게 한 때가 많았고 언론은 혹 한쪽으로 치우치는 점도 있었으나, 대체로 또한 명예를 좋아하고 의리를 사모하는 선비였다. 갑인년에 상소를 올린 뒤로 온 조정이 그를 성토하였으나, 상은 그가 다른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서 잠깐 유배시켰다가 이내 용서하였다. 을묘년에 치사(致仕)하였는데, 그후로도 은례(恩禮)가 변함없어 상의 친서(親書)와 좋은 약제(藥劑)가 늘 길에 연달았다.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고, 관직 생활은 매우 청렴하여 그가 살았던 시골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뒤에 정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註 001]
무자년 : 1768 영조 44년.
○丙寅/奉朝賀金鍾秀卒。 鍾秀字定夫, 右議政金構曾孫。 少有氣岸, 優於文學。 英宗戊子登第, 間經蹭蹬。 上, 在春邸, 以宮官, 一言而契, 及御極, 眷遇逈絶百僚, 許以名義, 托以心膂。 歷內閣、文苑、銓任、戎垣, 至己酉, 身佩五營之符, 未幾拜相, 遭遇之盛, 諸臣莫有比者。 每筵奏疏, 陳往往言人所不敢言。 擧措每多劻攘, 言論或涉偏係, 而蓋亦好名慕義之士也。 甲寅疏後, 擧朝聲討, 而上察其無他, 乍竄旋宥。 乙卯致仕, 恩禮無替, 雲章珍劑, 相續於道。 事親孝, 居官廉, 所居鄕廬, 不蔽風雨。 至是卒, 配食廟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