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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3주일 [주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마태복음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태복음 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마태복음 8: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마태복음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태복음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태복음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믿음이 있다.
주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자를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구원받고, 더 나아가 천국에 이르려면,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자중에서도 많은 수가 천국에 이르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한다.
이것은 주님의 복음의 진리를 사람중심으로 단순화하여, 수학공식처럼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경솔히 하면, 영원히 한번 밖에 없는 결정을 잘못할 수도 있다.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전제로서는 맞는 이야기지만, 딱 그부분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기회는 반드시 주어지지만, 천국가는 것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구원받았지만, 신앙의 자세가 좋지 못하면,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
구원은 두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하나는 대속, 죄를 속함받는 것이다. 크게 보면, 이 땅에서 저 나라로 옮겨지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속죄받는 첫단계다.
구원을 받았어도, 실패할 수 있다.
구원을 얻는 것과 천국가는 것이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신자가 되었어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히브리서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브리서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성령충만한 역사를 했어도, 여전히 실패할 수 있다.
천국에 가려면, 일단 은혜받은 자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도리가 있어야 한다.
일생 그 자세를 가지고, 자기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실질적인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외적으로 나오는 증거, 바로 행하는 도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은혜받았다는 것을 삶을 통해 나타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면서, 사는 것이 우리 삶에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내 삶을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죄인이므로,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무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거저 얻게 되었다.
우리의 소중한 기회이므로, 세상끝날까지 구원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이 나를 통해 드러내신 의를 행하며 사는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분의 성품, 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완전히 하나님의 모습처럼 변모할 수는 없지만, 우리 노력이 다가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은혜에 보답하는 삶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오래참으심으로 은혜받았다.
그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성공적인 신앙의 삶이다.
하나님은 겸손하시고, 인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희생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성품적인 것은 필요없다고 하면, 너무 위험하다.
영적인 것만 중요하고, 성품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복음의 중심을 흔드는 것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적인 자세다.
예수는 육신으로 오셨다.
우리 육신 때문에 닥쳐진 우리 형편을 바꾸시기 위해, 육신의 문제를 도우러 오셨다.
우리는 육신의 약점을 통해, 원수의 공격을 받아 생명을 잃었고,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자였다.
우리 모든 것은 이 땅에서 육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 삶 전체가 영적이다.
주님은 육체로 오셔서, 백프로 영적으로 진행하셨다.
모든 것을 육으로 행하셨다. 육으로 아프시고, 육으로 승리하고 가셨다.
진짜 예수님 가신 길, 오늘 우리 현실이 영적 실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나타내는 덕을 빼면, 신비주의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생각만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의 반대되는 것이 신비주의다.
어쨌든 그리스도 복음이 성도들로 인하여, 온세계에 전파되어왔다.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믿는 날부터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그래서, 마음의 변화, 행실의 변화를 계속 가져온다.
성령이 그 사람 속에서 계속 도와주신다.
그 사람의 실제적인 변화가 있기 위해, 성령이 도우신다.
그런데, 예수믿는 자로서 변화되기를 거절하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복음을 굉장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을 떠나, 외곽에서 헤매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면, 구원도 얻지 못하고, 천국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수 믿을 때, 단지 인식으로 충분하다고 하면 안된다.
정서적 동의, 소속감이 아니라, 현실이다.
성경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바, 신앙의 의미를 잘 정리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은 거저 얻는다.
가만히 있는데, 누가 전해주어, 그 사실을 인정했더니, 나의 삶이 바뀐다.
[믿는다는 말의 뜻]
가만 있다가 그랬다.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거룩한 삶이 남아있다.
믿는다는 뜻을 잘 가져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알고 말해야 한다.
로마서에 예수를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다고 한다.
예수를 시인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포괄하여, 전제하고 있다.
단지 마음으로 믿고, 시인하면, 끝,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하는 자, 주를 마음에 믿는 자는 증명해야 하는 진짜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다.
성경에 나타난 명제들은 간단하게만 설명했을 뿐이다.
믿는다는 행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므로, 구원이 임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예수를 마음에 모신다는 것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구약교회의 신앙의 길을 한마디로 평가하시고, 실망하시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역사내내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신 것은 실망이다.
너희는 죄인인데, 너희 신앙의 자세가 옳지 않다.
너희 삶이 옳지 않다.
돌이켜라.
내게 돌아오라.
이것이다.
우리가 오늘 복음전파할 때 하는 것과 거의 모든 면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 너희는 죄인인데, 너희 태도가 옳지 않다 하신 것이다.
주님이 그리 판단하시고, 심판을 내리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따가운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자신의 민낯을 보이므로, 오랫동안 누려왔던 특권은 빼앗겼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주님의 구원하려고 하는 마음과 조화되는 심령이다.
그런 심령을 가져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참으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가게 하지 않으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전제되는 내용은 무시하고, 사람의 관점에서 추려내어 거기만 매진한다면, 신앙이 굉장히 왜곡될 수 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천국가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보면 안된다.
이것은 주의 공로의 확실성을 설명하다 보니까, 과다하게 과장된 것이다.
잘못 이해하면, 영원한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된다.
내가 영원한 시간을 견뎌갈 수 있을까. 영원히 불행하다면, 누구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똑같은 신앙의 여정을 한 것이다.
구약교회의 신앙생활이나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버렸고, 그 결과 주님도 그들을 버렸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여정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복음이 전달되도록 하는 일을 돕는 사명을 맡았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도록 사명을 맡았다.
엄청 큰 특권을 가졌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신앙을 만들었다.
별개의 종교를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되었고, 보여주는 모습은 굉장히 거만했다.
또 성품이 악했다.
그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면전에서 박해하고, 배척했다.
그들의 악한 성품은 주님을 배척하는 직접적 도구가 되었다.
그들의 임금이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앞에 나타났는데, 그를 거절했다.
그들의 악한 성질과 주님의 선한 성품이 도무지 조화되지 않았다.
너무 많이 차이가 났다.
그들의 성품에 대해 주님은 굉장히 놀라셨다.
우리도 신약교회로서 이와 비슷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의 의로운 모습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겸손과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의를 전해야 한다.
그래야 은혜 받은 자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성품이 그대로 있다면, 자기 속의 타락은 여전히 진행되고, 구원의 기회는 잃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오랫동안 신앙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체계화했다.
주님의 마음이나 목적과는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갔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주님이 보시기에 마귀와 너무나 닮은 성품만 있었다.
오히려 하나님 같았어야 하는데, 반대의 모습이 왕성했다.
그들의 성품이 주님을 아프게 했다.
주님은 더이상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역사할 수 없었다.
한계에 부딪혔음을 실감하시고, 손을 떼셨다.
그들은 주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쳤다.
인류는 옛날 사람보다 신약 시대 사람이 유리한 부분이 많다.
우리는 예수가 누구신지 알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했던 실패를 겪지 않는 성공하는 교회가 되자.
[예외적인 인품의 로마 백부장]
마태복음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2의 고향같은 곳이다.
복음전도의 중심적인 곳이었다.
거기에서 한 백부장이 주님께 나왔다.
백부장은 로마군대에서 백명쯤 되는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다.
오늘날은 군대의 중대장쯤 된다.
백부장은 직업군인인데, 로마가 세계를 제패할 때, 지배한 나라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군대조직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엄청 미움을 받는다.
이방인이 자기들의 삶을 통제하니까 미워한다.
로마가 점령하고 있는 곳은 군사들이 와서 통제한다.
그 사람들은 그 지역사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심지어, 사마리아, 시리아에서 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군인들은 연고도 없다. 굉장히 잔인할 수 있다.
자기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사나울 수 밖에 없다.
로마군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압제자였다.
그러나, 놀라운 점이 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았다.
누가복음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누가복음 7: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누가복음 7: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누가복음 7: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이 백부장은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건립하고,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았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굉장히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보다 더 자세히 나와있다.
예수께서 백부장을 만날 때, 어떤 중개인을 통해 만나셨다.
백부장이 직접 예수께서 와서 할 수 있는 사회적 상황이 아니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부로 접촉할 수 없었다.
마태복음 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을 대신하여 온 자가 주님께 요구한다.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닌데도, 예수께 와서, 자기 하인을 고쳐주시도록 간구했다.
선생, 랍비라고 해도 되는데, 주님이라고 불렀다.
굉장히 높여 부르는 것이다.
주님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인은 원어로 어린아이를 말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종이라고 말한다.
누가복음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노예를 말한다.
여기 말하는 노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자다. 짐승과 다르지 않은 굉장히 비천한 자다.
노예 가정에서 태어나, 자기에게 속한 자가 된 것이다.
노예 아이가 죽어가는데, 백부장이 걱정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볼 때, 백부장은 노예이므로, 무시해도 될텐데, 굉장히 걱정하며, 주님께 나와서 고쳐주기 바라는 것이다.
노예는 사회정서상 무시해도 되는데, 백부장은 노심초사하며, 마음아파하고 있다.
여기서 백부장의 예사롭지 않은 인간됨을 볼 수 있다.
노예에 불과한 어린아이를 잘 돌보고 있었던 것은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는다.
정말 남다르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그 아이를 향한 안타깝고, 따뜻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는 로마군인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로마군인은 무자비함의 상징이다.
차가워야 하고, 사나워야 한다.
옛날 고서에 보면, 과거 노예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볼 수 있다.
예수님 시대보다 이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에게는 우정, 정의는 없다고 했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는 공통점이 아무것도 없고, 살아있는 도구라고 했다.
또, 로마의 법전문가는 노예의 삶과 죽음은 주인에게 달려있다고 했다.
또, 어떤 로마작가는 노예, 짐승, 수레의 유일한 차이는 노예는 말을 한다고 하였다.
아무 감정의 부담없이 매매해도 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사회통념이다.
그런데, 백부장은 다른 사람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그는 경험도 많고, 노련한 능력있는 전사였다.
그는 백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자였다.
타지에 와서, 남의 땅을 지배해야 한다. 그는 전사중의 전사이고, 군인중의 군인이다.
굉장히 사나울 수 있고, 무자비할 수도 있는데, 죽어가는 노예어린이에 대해 많이 마음 아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예수앞에서 부탁하기를 어려워했다.
이 아이가 아프다고만 했고, 오셔서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프니까, 주님의 처분에 맡기는 자세를 보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주님의 형편이 어떻든 졸랐을 것이다.
조르는 것이 주님이 기대하는 믿음의 자세는 아닌 것 같다.
이 사람은 주님 앞에서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무가치하게 보고 있다.
또,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은 것은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접촉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없다.
그런 배려가 있다.
[세심한 배려와 겸손]
[주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의 믿음]
당시 중풍병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주님이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마태복음 8: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그러니까,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다.
원문에는 ‘나’라는 표현 없이, 동사로만 되어있다. 번역은 주어를 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쓰여있다.
주님이 흔쾌히 받아주신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가 의문문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내가 가서 고쳐주랴?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양쪽 다 문제없다.
너는 내가 유대인인 줄 알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 집에 가서 도와주길 바라는 것이냐?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집에 가까이 오실 때, 사람을 보내어, 오시는 것을 만류했다.
마태복음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는 감당치 못하겠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어떤 권위있는 대상에 대해, 내가 무가치함을 느낄 때 하는 말이다.
그 분앞에서 내가 너무 무가치함을 느낄 때, 쓴 말이다.
예수께서 그를 만나기 위해, 성의를 갖고 오신 모습을 보고, 그 호의를 받기에 자신은 가당치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거룩하시고, 자기는 죄로 물든 자라고 보는 것이다.
사도행전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이 사람의 특별한 배려가 눈부시다.
이방인과 접촉을 하지 못하는 유대인의 관습이 있다.
백부장은 이런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면 안되는데,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오려고 하신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므로, 주님이 곤란을 겪기 원치 않았다.
[하늘의 권세에 대한 깊은 이해]
주님을 곤란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또, 이 사람은 주님의 신적 권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말로만 주님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 하옵소서 한다.
마태복음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있는가.
정말 놀라운 믿음이다.
마태복음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권한을 위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권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 사람은 로마황제가 위임한 권세를 받은 자다.
백부장의 명령은 로마황제가 위임하였으므로, 로마황제의 명령과 같다. 이것이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는 방법이다.
이 명령체계를 예수님께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도 예수님에 대해서,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입은 분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는 질병을 일으키는 악령을 물리치는 힘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이스라엘은 병은 악한 영에 의해서 온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당신의 권세를 명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다.
굳이 당신이 더럽힘을 당하시면서, 내 집에 들어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명령만 하옵소서.
마태복음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었다.
그러나, 그 중 아무도 이 백부장이 가진 믿음의 깊이, 세심함과 배려, 겸손, 사랑, 인애를 보여준 자가 없었다.
백부장의 태도는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대한 이해로 빛이났다.
이 사람은 진짜 특별하다.
주님이 감탄하셨다.
[주님이 감탄하심]
백부장은 이방인이다.
이 사람은 메시야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대인보다 더 예수님의 입장을 명확하게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을 예수께서 보셨지만, 잔인하고, 무자비해야 하는 이방인 백부장에게서 믿음을 보셨다.
백부장의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새장을 열게 했다.
주님은 백부장을 보시고, 유대인에게 되지도 않는 것을 물고 늘어질 필요가 없이, 이방인에게서도 신실한 신앙인이 나올 수 있을 것을 보시는 것이다.
악에 물든 세상에서도 이런 자가 있다면, 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세계로 눈을 돌릴 시간이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감탄하셨다.
그래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중에 단 한명도 없었다.
진실로, 주님이 아멘하신 것이다.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굉장한 실망과 더불어, 이방인에 대한 기대를 가지시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지대한 관심을 증거하고 있다.
[천국의 권리는 이방인에게 빼앗기리라]
주님은 이스라엘의 기대를 꺾는 대선포를 하신다.
마태복음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서 잔치에 참여한다.
주님은 굉장히 흥분하신 상태로 계속 말씀하신다.
진리를 아는 것이 굉장히 부족함에도, 그런 자들이 동서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보다 더 복음에 대해 반응할 것이다.
복음은 물론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온다.
유대인들은 복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복음의 혜택인 구원과 천국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든, 야곱이든 그가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은 유대인의 마음을 완전히 깨뜨리는 말씀이다.
랍비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랍비들의 교육서를 보면, 천국에서 잔치가 있을 것인데, 이방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자기들이 유대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사도행전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기에 많은 이방인이 함께 있을 것이라 하셨다.
유대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이방인은 회개했다.
똑같은 회개의 기회를 주셨는데, 이방인은 반응할 것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굉장한 깨달음이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이방인에게도 회개를 주셨다고 깜짝 놀란다.
마태복음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원래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원래 그 나라에 속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쫓겨날 것이다.
많은 특권이 있었으나,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바깥 어두운 곳에 처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유대전통에 게헨나에 대한 개념이 있다. 그 지옥은 바깥 어두운 곳이다.
하나님과 멀기 때문에, 어둡다.
정죄받을 죄인은 이방인이 아니다. 죄인은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없는 자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잇점은 천국을 보장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24: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베드로후서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바깥 어두운 곳은 조금 안좋은 곳이 아니라, 지옥이다.
유다서 1: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신자라고 믿고 있지만, 신자라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이 아니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마태복음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기뻐하시면서, 하인을 치료하셨다.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을 갖자.
신실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자.
하나님을 닮아가자.
하나님 닮은 따뜻한 사랑, 신뢰하고, 배려하고, 헌신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믿음을 가진 자들 되자.
우리도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내 마음대로 내 종교를 만들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인해하신 마음에 화합되게, 우리 심령이 바뀌기 원합니다.
주님이 구원하기 원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 신앙을 주장하소서.
설교요지
하나님은
만유의 주시요
그가
또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히 11:2~3)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이가 병든 것을 고치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다(출 15:26)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믿음뿐이니
하나님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한다(막 9:23)
세상에 속은 경험 때문에 또 속는 줄 알고(요 8:44)
하나님을 의심하면 그것으로 죄인이 된다(마 14:31)
육체의 율례를 다 범하여도 사함 받으나(마 12:31)
하나님을 의심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마 12:32~33)
의심하는 자는 죽어도 영혼은 무저갱으로 간다
하나님은 믿음을 위하여 말씀을 주셨으니(눅 1:37)
우리의 신앙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창 15:6)
말씀이 부족하여 다른 것을 구한다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 영혼은 말씀이 필요하다(요 6:63)
말씀만이 살리는 영이요 생명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이 이것이니 곧 믿음이다(요 11:25~26)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이다
◎ 성령은 믿는 자에게만 들어오셨고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되
말씀으로 능력 되게 역사하신다
◎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영혼은 오직 말씀 곧 진리가 필요하다
그 말씀만이 능치 못함이 없다
◎ 말씀은 치료의 능력과 창조의 능력이 있다
말씀을 구하라 그리고 순종하라
말씀을 의심하지 말아야 능력이다
※ 기독교회는 계시의 종교 즉 말씀의 신앙이다
능력이 없는 것은 말씀이 없음이요
영혼에 말씀을 채우라 배불리 채우라 (視無言)
히브리서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마가복음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태복음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태복음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태복음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3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누가복음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