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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당집(九思堂集) 김낙행(金樂行)생년1708년(숙종 34)몰년1766년(영조 42)자간부(艮夫)호구사당(九思堂)본관의성(義城)초명진행(晉行)초자퇴보(退甫)특기사항이재(李栽)의 문인. 이상정(李象靖)과 교유
구사당집 제9권 / 제문(祭文) / 참의 유관현에게 드리는 제문〔祭柳參議 觀鉉 文〕
柳觀鉉 | 1692 | 1764 | 全州 | 用賓 | 陽坡 |
오호라, 슬픕니다 / 嗚呼哀哉
생각건대 영남은 / 維嶺以南
운기가 오래 막혀 / 運氣久否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 匪直逢遇
인재가 태어남도 그쳤습니다 / 生才是已
자고처럼 숨은 인물이 / 無澤子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 未知有無
그 세상에 드러남에 / 其見於世
바람을 실로 어찌 속일까요 / 望實豈誣
한 집안에 한 사람도 / 一家一人
이미 반드시 얻기 어려운데 / 已難必得
이웃 고을엔 여러 현자가 / 鄰里數賢
또한 숲을 이루었습니다 / 亦爲林立
마치 하늘이 사심을 가지고 / 若天有私
높은 가문에 인재 몰아 준 듯하니 / 鍾美高門
명현과 거인에 대해 / 名賢巨人
지난 일은 논할 것 없습니다 / 往矣無論
우리 선고의 벗으로 / 以我先契
훌륭한 간옹이 계셨으니 / 有偉澗翁
덕을 베풂이 넓었고 / 執德之弘
마음가짐이 공평하셨지요 / 宅心之公
공이 아울러 일어나 / 惟公並起
송기처럼 다리가 되었으니 / 津梁祁宋
총명함은 아주 빼어났고 / 聦明絶倫
국량과 슬기는 훌륭했습니다 / 器諝利用
이 형과 이 아우에 / 是兄是弟
집안 자제들이 또 뛰어나서 / 族子又儁
죽순을 쌓아놓은 듯 우뚝하고 / 葎崒筍廩
아름다운 구슬처럼 널렸습니다 / 錯落瑜瑾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 / 先後以進
명성이 선비들을 진동시켰고 / 名動三揖
복이 따라와 집에 모임이 / 福隨家集
세대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 無係世級
오직 저 순행하는 기운은 / 惟彼游氣
왕래함이 일정하지 않아서 / 往來不常
간옹이 세상을 떠나니 / 澗翁捐舘
범도 용도 다 가버렸습니다 / 虎逝龍亡
그래도 다행히 공이 계셔서 / 尙慰公在
삼산 집안을 인도하였지요 / 提挈三山
처음엔 자못 방탕하였지만 / 始頗留落
만년에 높이 뛰어 올랐으니 / 晩乃騰騫
순식의 정령이 음덕을 베푼 경사요 / 息精陰慶
포의 혼이 암암리 천거함이라 / 鮑魂冥擧
율관을 불어 꽃을 피우니 / 律吹花生
눈보라도 막지 못하였지요 / 風雪莫禦
다시 갑관으로 갔다가 / 更趨甲觀
번갈아 사간원에 들어가니 / 迭入薇垣
어찌 벗들만 기뻐했으리요 / 何但柏悅
기대함이 넓고 컸었는데 / 有覬灰然
어찌하여 영남에 운이 없어 / 無奈嶺運
끝내 오래 가지 못하였는지 / 終不久悠
잠깐 정승 지위에 다가가다 / 乍近台躔
갑자기 학주와 같이 떠나셨네 / 遽同壑舟
천지자연의 조화에 / 大專槃物
감히 원망과 유감이 있으랴만 / 敢有怨憾
그 애석한 것은 / 其所可惜
맡은 일을 다 하지 못함이라 / 未攄其擔
대개 공의 문장은 / 蓋公詞翰
여가로 하는 일이었으니 / 乃其餘事
어짊은 널리 사랑하기에 충분했고 / 仁足汎愛
밝음은 멀리 보기에 넉넉했으며 / 明足遠視
강함은 스스로를 지키기에 족하였고 / 剛足自守
용맹은 과감히 행하기에 족하였으며 / 勇足敢爲
말과 의론은 정밀하면서 절실하였고 / 言議精切
이치를 관찰함은 세밀하고 은미했습니다 / 綜理密微
부딪치지 않고 따라하지 않으며 / 不激不徇
세상의 처신에 마땅하게 하였고 / 宜於處世
어진 이를 좋아하고 재능을 아껴 / 好賢愛才
사람을 얻음에 살필 줄 알았습니다 / 得人可諦
무릇 이런 몇 가지는 / 凡此數者
천하를 다스리기에 넉넉했거늘 / 優於天下
하물며 이 후미진 한 지방 / 矧玆偏邦
작은 고을에 있어서랴 / 區區民社
잠시 북방을 다스려 / 暫試朔方
그 공을 이미 드러내었으나 / 厥功已叙
사람들이 그 작은 것만 보고 / 人見其小
그 큰 것을 알지 못합니다 / 未知其巨
또 가만히 논해보자니 / 又竊論之
어려운 것이 두 가지 일인데 / 難者二事
먼저 가난하다 뒤에 부유함에 / 先貧後富
의리를 좋아한 사람이 드물고 / 人鮮好義
심하게는 혹 금전을 아끼다가 / 甚或惜金
아우를 죽여 돌아오기도 합니다 / 以弟喪歸
듣자하니 공은 젊었을 때 / 聞公少時
푸성귀와 현미로 허기를 채웠다지요 / 蔬糲充飢
그 몸을 부지런히 하여 / 勤其四體
살림이 그럭저럭 갖추어지고는 / 旣有旣完
두와 구와 치수 정도도 / 豆區錙銖
마땅히 더 가지기 어려운 듯했습니다 / 宜若難攀
오직 그 의리를 중시하여 / 惟其義重
이 때문에 재물은 가벼이 여겼고 / 是以財輕
궁하고 급한 이를 구휼함에 / 恤窮周急
그 마음을 곡진하게 하였습니다 / 曲盡其情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 窮士得意
평소의 모습 지키는 이 드물지만 / 鮮守平素
공은 경조윤에 있을 때도 / 有尹京兆
가난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 不念龍具
바야흐로 공이 벼슬에 나갈 때 / 方公仕宦
예전처럼 농가에 있었고 / 依舊田家
역말이 문에 있을 때도 / 馹騎在門
전원에 농가 소리 있었으며 / 園有農歌
산으로 돌아가길 기약하여 / 還山之期
보리 파종을 지시하셨고 / 指以播麥
뽕나무와 삼을 이야기함에 / 談桑說麻
시골 농부가 자리를 다투었지요 / 野老爭席
풍치가 초연하여 / 風致超然
경박함을 경계할 만하니 / 可警浮薄
이것이 공의 높은 것인데 / 是公之高
사람들이 혹 살피지 못합니다 / 人或不察
생각건대 공은 나에게 / 惟公於我
의리가 있고 덕을 베풀었는데 / 有義有德
살아계실 때 보답하지 못하고 / 存不能報
돌아가시고 이 제문을 바칩니다 / 沒以言塞
이미 공적인 것을 서술했기에 / 旣述以公
사사로운 정은 버려야겠지만 / 私情可舍
그러나 그 사사로운 정이 / 然其私情
공의 덕에 관계된 것이니 / 係公德者
어찌 감히 진술하여 / 曷敢不陳
그 빠진 것을 보충치 않겠습니까 / 以補其遺
아, 우리 향당이 / 嗟我鄕黨
누군들 친지가 아니랴만 / 孰非親知
누가 공의 집안처럼 / 孰如公家
나의 선고를 사랑했겠습니까 / 愛我先君
천륜에 비교할 만하니 / 可比天倫
성씨만 달랐을 뿐입니다 / 但姓之分
간옹이 먼저 급제하니 / 澗翁先登
선친이 이에 기뻐하면서 / 先君乃喜
군자의 영달을 / 君子之達
자신의 이익처럼 보았습니다 / 如己利市
무신년 봄 / 涒灘之春
간옹이 창의하매 / 澗翁倡義
더불어 함께 죽고자 하였으나 / 要與同死
선군께 일을 맡기지 않았는데 / 先君不諉
선군이 근심하고 걱정하며 / 先君憂患
비로소 스스로 추천했지요 / 始自薦剡
간옹과 함께 두려워했지만 / 澗翁共懼
험난한 길을 나서셨습니다 / 已見途險
과거 공부를 달게 여김은 / 甘心科目
어쩔 수 없어서였는데 / 蓋不得已
을묘년에 서울로 들어가서 / 單閼西入
공과 고삐 나란히 하였고 / 與公並轡
함께 한 다섯 어진 사람 / 同人五賢
모두 은혜와 영화를 입어 / 齊被恩榮
서울이 매우 떠들썩하여 / 都下頗喧
휘정에 가까운 듯했습니다 / 似近彙征
선친이 처하신 지경이 / 先君所處
더욱 위태로움이 심했으니 / 臲卼特甚
기쁨이 아니라 근심거리로 / 匪喜伊憂
재앙이 막 틈을 엿보았지요 / 弩機方闖
선친이 두렵고 두려워하니 / 先君慄慄
공이 어찌 염려치 않았겠습니까 / 公豈不念
다만 주리고 배부름은 / 秖以飢飽
먹는 자가 징험할 수 있을 뿐 / 食者可驗
형세가 서로 따를 수 없어 / 勢不相須
가고 그침이 어긋나서 / 行止差池
공과 순공이 / 公曁淳公
먼저 말을 몰아 돌아가니 / 歸馭先馳
선친이 나에게 명하여 / 先君命我
행차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 使之隨行
긴 햇살의 영남 길에 / 遲日嶺路
초목은 서로 푸르렀고 / 草樹交靑
도착하는 우정(郵亭)과 객점에 / 所到亭店
빛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 輝光焜燿
허름한 옷 입고 뒤에서 / 短褐在後
모시면서 기뻐 웃었습니다 / 叨陪歡笑
혹 그 타던 말 바꾸어 주고 / 或換其乘
좋은 농담도 해주셨습니다 / 賜以善謔
지난일 생각하니 꿈같은데 / 追思若夢
말하려니 눈물이 흐릅니다 / 欲言淚落
그 뒤에 선친께서 / 伊後先君
세 번의 명에 공손했는데 / 三命循墻
신밀하지 않은 위태로움 무릅쓰고 / 不密之危
정사년에 소장을 올리니 / 疆圉封章
공과 간옹이 / 公及澗翁
다시 와서 말렸지만 / 更來止之
화와 복은 운명이 있으니 / 禍福有命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 人不可爲
천 리 길 편여를 타고 가니 / 千里箯輿
다섯 달을 감옥에 계셨습니다 / 五朔圜土
훌륭한 임금이 살리기를 좋아하여 / 聖主好生
죽은 풀에 은혜를 내렸으니 / 死草恩雨
해도와 강담의 유배생활 / 海島江潭
분수에 편안한 바였습니다 / 在分所安
공과 간옹은 / 公及澗翁
주려도 먹을 여유도 없이 / 飢不遑餐
산을 넘어 끊임없이 오가며 / 隔岑源源
일마다 보살펴 주셨으니 / 隨事調護
공적 사적 도움이 있었던 것도 / 公私出力
창의한 일이 있어서였습니다 / 有倡之故
상자 속에 가득한 서찰 / 札牘盈笥
주고받기를 수시로 하여 / 贈遺以隨
남으로 부치고 북으로 전하여 / 南郵北遞
대개 빌 때가 없었습니다 / 蓋無虛時
넓고 넓은 영해를 / 漫漫嶺海
필마로 외로이 가면서 / 匹馬孤征
비웃음을 사고 기휘를 저촉하며 / 犯笑觸諱
평생 잊지 않았고 / 不忘平生
열흘 동안 머물며 / 一旬淹滯
함께 풀숲 장기를 마셨지요 / 同飮茅瘴
마침 내가 부고를 듣고서는 / 會我聞喪
예를 바꿈이 맞는 일이지만 / 變禮是相
세모에 어정대다가 / 歲暮遲遲
차마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 不忍便决
애통하고 아픈 마음에 / 衋傷勤瘁
안색이 손상되었습니다 / 爲减顔色
간옹의 상사가 / 澗翁之喪
병인년이었는데 / 在丙寅歲
선친의 병이 / 先君之疾
슬픔의 눈물에 더 심해져서 / 病於悲悷
다음해 정묘년에 / 明年丁卯
제가 상을 당하였으니 / 我罹荼毒
상여 모시고 돌아옴에 / 輤車之返
공이 와서 슬피 곡하였습니다 / 公來哀哭
장사로부터 대상에 이르기까지 / 自葬及祥
제문을 지어 잔을 올렸는데 / 操文以酹
그 정이 글에 나타나 / 情見于辭
눈물이 옷깃을 적셨습니다 / 淚濕襟帶
병자년에 흉년이 들어 / 丙子大無
팔도 백성이 신음할 때 / 殿屎八域
나는 늙으신 어머니 모시고 / 我扶老母
역병 피해 후미진 곳으로 갔는데 / 避癘投僻
어머니를 봉양할 계책이 없어 / 菽水無策
자주 공에게 달려가 고했더니 / 亟走告公
공께서 측은해 하시면서 / 公爲惻然
마치 자신이 병든 것처럼 하고 / 若癏在躬
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 曰吾有意
그대 마침 왔구나라고 하며 / 爾適來矣
이윽고 돈을 주시고 / 旣與之錢
또 쌀까지 더 주셨습니다 / 又益以米
여러 날 굶지 않았던 일은 / 數旬擧火
실로 여기에 힘입은 것이니 / 實惟是賴
공에게야 작은 일이겠지만 / 在公細事
나의 감동은 컸습니다 / 我感則大
무릇 이렇게 낱낱이 말함은 / 凡玆歷叙
한갓 번거로운 말만 허비할 뿐 / 徒費煩辭
어찌 공에게 보답이 되겠습니까 / 何以報公
은혜를 저버리고 저버렸습니다 / 負之負之
공은 세 아들이 있어 / 公有三子
동류들보다 빼어나니 / 秀出儕流
맏이는 행실이 도탑고 질박하며 / 伯敦質行
둘째와 막내는 학문이 넉넉합니다 / 仲季學優
선을 남기고 경을 남겼으니 / 錫善遺經
어찌 만금을 남길 필요 있으리요 / 何用萬籯
하물며 이 두 형이 / 矧伊二哥
이어서 침간정을 지킴에랴 / 嗣守澗亭
두 공의 뒷일이 / 二公後事
모두 적막하지 않으니 / 俱不寂寞
세한에 서로 기약함을 / 歲寒相期
거의 이에 의탁할 만합니다 / 庶斯可託
대상(大祥) 전날 저녁에 / 祥事前夕
와서 소박한 제물 올리니 / 來薦菲薄
정성은 물건에 있지 않고 / 誠不在物
말은 실로 가슴에서 나옵니다 / 言實由臆
오호라, 슬픕니다 / 嗚呼哀哉
[주-D001] 유관현(柳觀鉉) : 1692~176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이다. 유승현(柳升鉉, 1680~1746)의 아우이다.[주-D002] 자고(子高)처럼 숨은 인물이 : 자고는 백성자고(伯成子高)를 가리키는 듯하다. 자고는 요(堯)임금 때 제후로 요가 천자의 지위를 순(舜)에게 양위하자 관직을 사양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우(禹)가 자고에게 물으니,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상벌을 행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삼갔는데, 지금은 상벌을 행해도 불인(不仁)을 저지른다고 하며 “덕이 이로부터 쇠퇴하고 형벌이 이로부터 확립되며 후세의 혼란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대는 돌아가고 내 일을 방해하지 마시오〔德自此衰 刑自此立 後世之亂 自此始矣 夫子闔行耶 無落吾事〕” 하였다. 《莊子 天地》[주-D003] 간옹(澗翁) : 유승현(柳升鉉, 1674~1746)을 가리킨다. 유승현이 낙향하여 침간정(枕澗亭)을 지어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유관현의 형이며, 구사당의 아버지 제산 김성탁과 막역지우이다.[주-D004] 마음가짐이 : 원문은 ‘택심(宅心)’으로, 《서경》 〈강고(康誥)〉에 “너는 크게 상나라의 노성한 사람들을 멀리 생각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고 가르침을 알며〔汝丕遠惟商耇成人 宅心知訓〕”라고 한 말에서 인용하였다.[주-D005] 송기(宋祁) : 송(宋)나라 송기(宋祁)는 송상(宋庠)과 형제로 문학이 뛰어나 세상에서 대송(大宋)과 소송(小宋)으로 일컬어졌다. 이들이 어릴 때 한 호승(胡僧)이 “소송은 천하에 으뜸이 될 것이요 대송도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십여 년 뒤에 호승이 대송을 보고 “공의 풍신(風神)이 몰라보게 달라져 흡사 백만 명의 목숨을 구제해준 사람 같구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송이 “가난한 선비가 무슨 힘이 있어 많은 생명을 구해줄 수 있겠소.” 하고, “내가 사는 집 섬돌 아래 개미굴이 있소. 폭우가 내릴 때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개미들이 굴 주위에 모여 있기에, 내가 장난 삼아 대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 물을 건널 수 있게 해 주었소.”라고 하였다. 이에 호승이 “바로 이것이오. 이번 과거에서 소송은 장원할 것이고 공도 그보다 못지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類說》[주-D006] 선비 : 원문의 '삼읍(三揖)은' 사(士)를 뜻한다. 영조 14년 무오(1738), 임금이 소대를 행할 때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講)했는데, 시독관 이덕중(李德重)이 글 뜻을 끌어대어 “삼대(三代) 이전에는 뭇 신하들을 예절로 부렸으니, 삼고(三孤), 경(卿)에게는 특읍(特揖)하고, 대부(大夫)에게는 여읍(旅揖)하고, 사(士), 상(商)에게는 삼읍(三揖)하였으며, 태복(太僕)과 종자(從者)는 곧 낮은 말단의 벼슬이었지만 임금이 또한 읍하는 예절이 있었습니다.”라고 아뢴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07] 삼산(三山) : 전주(全州) 유씨(柳氏) 세거지의 한 곳이다. 유씨는 경상도 안동 무실을 본산으로, 한들, 마재, 고래골 삼산(三山) 등에 취락을 이루어 살았다.[주-D008] 만년에 …… 올랐으니 : 유관현은 나이 44세 되는 영조 을묘년(1735, 영조11)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주-D009] 순식의 …… 경사요 :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이 죽을 때 신하 순식(荀息)에게 아들 해제(奚齊)를 부탁하자 순식은 죽음으로써 충성할 것을 맹서하면서 “신은 전신의 힘을 다하고 거기다 충정을 더하겠습니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시는 영령의 도움이고, 이루지 못한다면 따라 죽겠습니다.〔臣竭其股肱之力 加之以忠貞 其濟 君之靈也 不濟 則以死繼之〕”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제가 이극에게 살해되자 순식이 따라 죽으려 하다가, 해제의 아우인 탁자(卓子)를 세워 보좌하는 것이 옳다는 말을 듣고 탁자를 임금으로 세웠으나, 탁자가 또 조정에서 이극에게 살해당하자 순식도 마침내 목숨을 버렸다. 《春秋左傳 僖公 9년》[주-D010] 포의 …… 천거함이라 : 포숙아가 관중을 천거한 일을 말하는 듯하나, 포혼의 출처가 명확하지는 않다. “포숙아(鮑叔牙)가 받고 곡하기를 세 번 하니, 시백이 따라 웃으며 대부에게 ‘관중이 기필코 죽지 않은 것은 저 포숙이 참고서 현인을 욕보이지 않게 해서이니, 그 지혜가 어짊에 걸맞아 스스로 이루었다’고 하였다.〔鮑叔受而哭之 三擧 施伯從而笑之 謂大夫曰 管仲必不死 夫鮑叔之忍 不僇賢人 其智稱賢以自成也〕”라는 말이 있다. 《管子 卷8》[주-D011] 율관을 …… 못하였지요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추연(鄒衍)이 연(燕)나라의 곡구(谷口)에 있을 때, 땅이 비옥하면서도 기후가 썰렁하여 농사가 안 되는 것을 보고, 율관(律官)을 불어넣어 곡식을 자라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列子 湯問 鄒衍之吹律》 여기서는 유관현이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의 정사를 말한 듯하다.[주-D012] 갑관(甲觀)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이다.[주-D013] 갑관으로 …… 들어가니 : 왕세자 궁을 가리킨다. 유관현은 1753년(영조29) 함경도 경성판관(京城判官)에 등용되고, 이후에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제수 되고, 1758년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역임하였다.[주-D014] 벗들만 기뻐했으리요 : 본문의 백열(柏悅)은 벗이 잘 됨을 기뻐하는 것으로,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에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타면 혜초가 탄식하도다.〔信松茂而栢悅 嗟芝焚而蕙歎〕”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15] 학주(壑舟) :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골짜기에 배를 감추고 그 산을 다시 못 속에 감추어도 밤중에 힘센 자가 등에 지고 달아나도 어리석은 사람은 알아채지 못한다.〔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 有力者 負之而走 昧者不知也〕” 하였는데, 여기서는 깊이 숨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의미한다.[주-D016] 천지자연의 조화에 : 《주자대전》 권26 〈추사 왕겸중에게 보내는 차자〔王樞使謙仲箚子〕〉에 “다행히 만물을 완성하는 대자연의 흐름 속에서 도야할 수 있었습니다.〔幸有以陶冶於大專槃物之中也〕”라고 하였는데 대전(大專), 대균(大鈞)과 같은 말로 천지자연을 의미한다.[주-D017] 심하게는 …… 합니다 : 춘추 전국 때 월(越)나라 도주공(陶朱公)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는데, 주공의 장자(長子)가 금전을 가지고 장생(莊生)에게 가서 사면을 부탁하니 장생이 임금께 상주하였다. 장자는 동생이 풀려날 것이라 믿고 장생을 다시 찾아가니 장생이 또 금전을 요구하자 그의 집에 들어가 금을 가지고 가버렸다. 그러자 장생이 임금께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들 ‘도주공은 부자이고 또 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나라에 수감되자 그 집에서 금전을 가지고 왕의 좌우에 뇌물을 준다’고 말들을 합니다.〔道路皆言 陶之富人 朱公之子殺人 囚楚 其家多持金錢 賂王左右〕”라고 아뢰자 왕이 노하여 주공의 아들을 죽였으니 장자는 그 아우의 상사를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다. 《史記 楚王句踐世家 第11》[주-D018] 살림이 그럭저럭 갖추어지고는 : 《논어》 〈자로(子路)〉에 “공자가 위(衛) 공자(公子) 형(荊)이 집안을 잘 다스린다고 말씀하였는데, 살림이 잘 되기 시작하자 그는 ‘그럭저럭 어울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살림이 좀 늘자 ‘그럭저럭 갖추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살림이 부유해지자 ‘그럭저럭 좋게 되었다.’고 하였다.〔子謂衛公子荊 善居室 始有 曰苟合矣 少有 曰苟完矣 富有 曰苟美矣〕” 한 말이 있다.[주-D019] 두와 구와 치수 : 두구치수(豆區錙銖)는 양을 헤아리는 단위로, 4승이 1두이고 4두가 1구이다.[주-D020] 가난 : 원문은 ‘용구(龍具)’로, 우의(牛衣)를 가리키는데 가난과 질병이 겹친 것을 비유한다. 한(漢)나라 때 왕장(王章)이 병들었을 적에 집이 매우 가난하여 이불도 없어서 소의 언치를 덮고 누웠었다는 고사가 있는데 그 주에 안사고(顏師古)가 “우의는 마를 역어 만드는데 곧 지금 세속에서 용구라고 부르는 것이다.〔牛衣 編亂麻爲之 即今俗呼爲龍具者〕”라고 하였다. 《漢書 卷76 王章傳》[주-D021] 간옹이 먼저 급제하니 : 간옹은 유관현의 형인 유승현을 가리킨다. 그는 숙종 기해년(1719, 숙종45)에 증광문과에 입격하였다.[주-D022] 무신년 …… 창의하매 : 무신년(1728, 영조4) 이인좌(李麟佐)의 역변(逆變) 때 유승현, 김성탁, 권만 등이 창의하였다.[주-D023] 추천 : 원문은 ‘천섬(薦剡)’이다. 섬은 중국의 지명인데, 그 곳에서 종이가 생산된다. 옛날에 그 섬지(剡紙)에다 추천하는 글을 적었으므로 섬이 사람을 추천하는 문서의 대명사가 되었다.[주-D024] 을묘년에 서울로 들어가서 : 을묘년(1735)에 제산 김성탁은 증광을과에 입격하였고, 유관현은 증광문과에 발탁되어 서울로 갔다. 《霽山集 附錄 行狀》《陽坡集 附錄 墓碣銘》[주-D025] 휘정(彙征) : 《주역》 〈태괘(泰卦) 초구(初九)〉에 “띠 풀의 엉켜있는 뿌리를 뽑는 것과 같아 동류들과 함께 감이니, 길하다.〔拔芳茹 以其彙征 吉〕”라 하였고, 전(傳)에 “군자가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붕류(朋類)들과 서로 끌어당겨 마치 띠풀의 뿌리처럼 하나를 뽑으면 연결되어 일어나는 것과 같다. 여는 뿌리가 서로 연결된 것이므로 상으로 삼은 것이다. 휘(彙)는 동류이니, 현자가 동류들을 데리고 나아가서 뜻을 함께 하여 도를 행하니, 이 때문에 길하다.〔君子之進 必與其朋類相牽援 如茅之根然 拔其一 則牽連而起矣 茹 根之相牽連者 故以爲象 彙 類也 賢者以其類進 同志以行其道 是以吉也〕”라고 한 말이 있다.[주-D026] 재앙 : 원문은 ‘노기(弩機)’로, 화난(禍難)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後漢書 卷71 皇甫嵩列傳》[주-D027] 다만 …… 뿐 : 《논어》 〈향당〉 “때에 맞는 것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不時不食〕”라고 한 대목에 대한 ‘혹문(或問)’에 “음식은 주리거나 배부른 것을 절도로 삼는다〔食以飢飽爲節〕”라는 말이 있다.[주-D028] 순공(淳公) : 유정원(柳正源, 1702~1761)을 가리킨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백(淳伯), 호는 삼산(三山)이다. 저서로는 《역해참고(易解參考)》, 《삼산집(三山集)》이 있다.[주-D029] 세 …… 공손했는데 : 본문의 순장(循墻)은 공자의 6대조 정고보(正考父)가 송나라에서 3대의 제후를 섬기며 상경(上卿)이 되었을 때의 고사이다. 이 고사의 출전인 《좌전(左傳)》 소공(昭公) 7년조에는 그가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몸가짐을 더욱 공손히 하느라 ‘큰길에서도 담장을 따라 다닌다〔循墻而走〕’라는 뜻으로 써놓았다.[주-D030] 신밀하지 않은 : 원문은 “불밀(不密)”이다. 공자가 “난(亂)이 발생하는 데는 말이 계제가 되는 것이니, 임금이 신밀히 하지 않으면 신하를 잃고, 신하가 신밀히 하지 않으면 몸을 잃으며, 일의 기미를 보는 것이 신밀하지 않으면 해가 이루어진다.〔亂之所生也 則言語以爲階 君不密則失臣 臣不密則失身 幾事不密則害成〕”라고 한 말이 있다. 《周易 繫辭傳上》[주-D031] 정사년에 소장을 올리니 : 구사당의 아버지 김성탁은 정사년(1737)에 스승 이현일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주-D032] 다섯 …… 계셨습니다 : 김성탁이 소장을 올리고 투옥 되어 다섯 달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 뒤에 제주도로 귀양 갔다.[주-D033] 해도와 강담의 유배생활 : 김성탁이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광양으로 이배(移配)된 것을 가리킨다.[주-D034] 예를 바꿈이 : 원문은 ‘변례(變禮)’로,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부모님의 빈소가 아직 있는데 먼 형제의 상사를 들으면 비록 시마복의 관계라도 반드시 가며, 형제가 아니면 비록 이웃이라도 가지 않는다.〔有殯 聞遠兄弟之喪 雖緦 必往 非兄弟 雖鄰 不往〕”라는 경우를 말한다.[주-D035] 병인년이었는데 : 1746년(영조22)에 유관현의 형 유승현이 세상을 떠났다.[주-D036] 정묘년에 : 1747년 정묘에 구사당의 부친 김성탁(金聖鐸)이 세상을 떠났다.[주-D037] 제문을 …… 올렸는데 : 《양파집(陽坡集)》권2에〈제김제산문(祭金霽山文)〉이 실려 있다.[주-D038] 흉년이 들어 : 원문은 ‘대무(大無)’로, 대무맥화(大無麥禾)의 준말이다. 큰 흉년이 들어 보리나 벼 등의 곡물이 전멸 상태가 된 것을 말한다. 《春秋 莊公 28年》[주-D039] 백성이 신음할 때 : 원문은 ‘전시(殿屎)’로, 《시경》 〈판(板)〉에 “백성들이 바야흐로 신음하고 있거늘 우리를 아무도 헤아려주는 이 없다.〔民之方殿屎 則莫我敢葵〕”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40] 어머니를 봉양할 : 원문은 ‘숙수(菽水)’이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콩죽을 먹고 물을 마신다.〔啜菽飮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빈사(貧士)의 생활 가운데에서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려는 아들의 극진한 효(孝)를 받았다는 말에서 유래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는 말로 쓰인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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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世說新語] [382] 난자이사 (難者二事)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관현(柳觀鉉·1692~1764)은 1759년 필선(弼善)의 직책으로 사도세자를 30여 일간 서연(書筵)에서 혼자 모셨던 인물이다. '주역'을 가르쳤다. 사도세자가 죽자 여섯 차례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에 있을 때는 흉년의 기민(饑民) 구제 등 볼만한 치적이 적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김낙행(金樂行· 1708~1766)이 제문을 지어 보냈다. 길어 다 읽지는 못하고, 내용 중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難者二事)를 꼽은 대목만 간추려 읽는다.
'또 가만히 논하려니, 어려운 것 두 가지라. 가난하다 부자 되면, 의리 좋아하는 이 드물다네. 심하게는 돈 아끼다, 아우 죽여 돌아오지. 들으니 공께서 젊었을 때, 푸성귀와 멥쌀로 허기 채워, 부지런히 힘을 써서, 살림이 갖춰졌다네. (중략) 궁한 선비 뜻 얻으면, 평소 모습 지키는 이 드물다네. 공이 한성판관이었을 때, 가난을 괘념찮았지.
벼슬길에 나가서도, 농가에 그대로 살았고, 역말이 문에 서도, 농사 노래 들렸었네. 산으로 갈 기약 두어, 보리 파종시키셨고, 뽕과 삼을 말할 적엔, 시골 농부 앞다퉜지. 풍치가 초연하여, 경박한 이 경계로 삼을 만했네. 이것이 공의 우뚝한 점, 사람들은 잘 모르지(又竊論之, 難者二事. 先貧後富, 人鮮好義. 甚或惜金, 以弟喪歸. 聞公少時, 蔬糲充飢. 勤其四體, 旣有旣完. (…) 窮士得意, 鮮守平素. 有尹京兆, 不念龍具. 方公仕宦, 依舊田家. 馹騎在門, 園有農歌. 還山之期, 指以播麥. 談桑說麻, 野老爭席. 風致超然, 可警浮薄. 是公之高, 人或不察).'
이 제문에서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로 꼽은 두 가지는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先貧後富, 人鮮好義),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窮士得意, 鮮守平素)'는 것이다. 없다가 재물이 생기면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줄 수가 없다. 낮은 신분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못 하는 짓이 없다. 결국은 이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참 쉽지 않다. 글 속에 돈을 아끼려다 동생을 죽여 돌아온다는 말은 전국시대 월나라 도주공(陶朱公)의 고사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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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大山集) 이상정(李象靖)생년1711년(숙종 37)몰년1781년(정조 5)자경문(景文)호대산(大山)본관한산(韓山)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이재(李栽)의 외손(外孫)이자 문인(門人). 김낙행(金樂行), 최흥원(崔興遠) 등과 교유한 남인학자(南人學者)
大山先生文集卷之五十一 / 行狀 / 通政大夫刑曹參議陽坡柳公行狀
柳觀鉉 | 1692 | 1764 | 全州 | 用賓 | 陽坡 |
公諱觀鉉。字用賓。柳氏本文化大姓。中世有掌令諱濕。始籍全州。子孫遂以爲貫。三世至諱義孫。仕我世宗朝。選入集賢殿。以文章儒雅名世。贈吏曹判書。二世至諱軾。弘文館典翰贈參判。又二世至諱城。贈司僕寺正。始卜居于安東之水谷里。生諱復起。從舅鶴峯金先生學。號岐峯。贈左承旨。生諱友潛。有隱德。號陶軒。於公爲高祖。曾祖諱橚。副護軍。祖諱振輝。成均進士。考諱奉時。以敦倫好義。重於宗黨。妣鵝洲申氏。通德郞以徵之女。以明陵壬申八月二十六日生公。幼俊邁聰穎。能日誦萬言。十三。赴山寺文會。屢居魁。處士公召而試之前。操筆立就。詞致不凡。己丑。丁外憂受學于伯氏慵窩公。公曰。維持門戶者必吾弟也。丙申。遭內艱。旣卒喪。兄弟不忍分異。共爨十餘年。伯氏性恬淡。不以家事經心。公代幹家務。百口賴以資活。
乙卯。中增廣文科。
영조 | 9 | 1733 | 계축 | 雍正 | 11 | 23 | 가을, 진사시에 합격하다.大山 |
영조 | 11 | 1735 | 을묘 | 雍正 | 13 | 25 | 3월, 東堂試에 합격하다. ○ 4월, 進士覆試에 합격하다. ○ 윤4월, 增廣試 文科에 丙科로 及第하다. ○ 5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겨울, 龜潭書堂에서 「綱目」을 읽다. |
乙丑。除成均館典籍。遷司憲府監察。時慵窩公以工曹參議赴朝。兄弟共處一舍。非公故不出入。日聯牀唱和。丙寅。移拜永禧殿令。慵窩公出守基川。未幾。慵窩公訃問至。公自直所徑出奔赴。朝廷悲其意不問。旣數月。僚官貽書促還。從兄上舍公元鉉涕泣勸起。公黽勉就道。行到鳥嶺。追思向年兄弟聯鑣唱和事。攬涕而還。聞者歎曰。公此事無愧呂子約矣。癸酉。除鏡城判官。鏡北邊巨鎭。俗尙弓馬。不務儒術。公選邑中子弟。儲之學舍。厚廩餼課藝業。勉勵訓飭。頗有興起者。暇日巡行田野。勸課農務。有不便於民者。一切蠲減。舊例。朔朢點閱男口。有擅出者罰紙布。公悉罷之。減巫布升數。蠲魚梁市廛行旅商賈征稅。省浮費節官用。數年之間。事簡財辦。官庫充溢。兵使與評事同住一城。供應煩劇。皆服公廉簡。多所減除。幕裨亦畏戢不敢誅求。乙亥歲大饑。北路尤甚。監司啓請善治守令加任一年。公秩旣滿不得歸。自備米穀一千餘碩。請營門又得若干碩。擇邑之勤幹者監賑事。至誠賙救。一境賴而全活。一日。監賑者請曰。南路饑荒。與關北無異。城主旣以俸祿活民命。又當仁及親族。已自賑廳有若干別儲。請急足送致。公曰。祿俸亦出於民。豈可視爲私財。先恤家族。遂不許。丙子春。解紱而歸。一府士民。擁路餞別。飢民受賑者各聚升龠。設餞路左。至不可行。行到鬼門關。飢民丁壯數十人隨後曰。無以報明府恩。願備籃輿卒。公曰。自有擔夫不須勞爾輩也。飢民擠擔夫爭先擔舁。出平途上馬。然後揮涕拜辭而去。戊寅。拜司憲府持平。再辭不允。移拜侍講院文學。病辭遞歸己卯。陞拜司諫院司諫。時王大妃祥事迫近。遂赴召。前此上下敎。以質實有文學者。擬春坊輔導之任。遂除公侍講院弼善。力辭不許。時宮僚久闕員。公獨侍書筵。僅一月講周易綱目。敷對詳明。東宮傾心開納。命取易書要旨。作圖以進。賜下食物丸藥。嘗因睿候違豫。久停講筵。進達辭曰。古人有病甚而學進者。靜攝之暇。親近書冊。涵泳義理。使緝煕之工。無少間斷。東宮嘉納焉。夏。呈由還鄕。遂遞。庚辰。除軍資正。趨肅呈病歸。尋除宗簿正司諫。並不赴。辛巳。拜侍講院輔德。辭不允。有旨促行。遂承召入都。見朝象潰裂。上章乞遞。移授司憲府掌令。力辭得遞。時再從姪正源辭免同副承旨。俱與南歸。自是六被召命。皆辭疾不赴。癸未。陛拜通政大夫刑曹參議。時公已寢疾。上章解職名。甲申二月十日。考終于正寢。享年七十有三。以四月己酉。葬于府東達施洞向卯原。公配淑夫人金氏。挹翠軒九用之女。柔惠勤儉。事姒婦如姑。同居數十年。人無間言。先公十四年卒。葬于府東砧谷。亦卯向。有子男三人。長通源。次道源進士。爲慵窩公后。次長源生員。出繼。通源三男。星休生員。川休爲長源后。龜休。二女。適金顯運進士金煕發。道源三男。範休洛休玄休。四女適李之恂李宜秀金坤壽。季未笄。長源子川休。二女。適金始吉金煕命。星休子晦文。川休子載文。有才行早死。餘並幼。公稟賦敦厚。才識敏達。勤儉質實。精審縝密。外和易而內堅確。發言慈詳而制行剛果。少時膂力過人。同類皆畏服。及長。折節爲恭謹。無復稜角。朋儕之會。情恕豁然。往往雜以諧笑。至是非棼爭之場。默然若無聞者。居家篤孝友。每以早孤不能奉養二親。爲終身之恨。事伯氏如事嚴父。每事必諮而後行。伯氏晩愛瓢溪水石。移家居之。公源源候問。得一美味。必先獻諸伯氏而後敢食。從兄上舍公家貧年老。公奉養視伯氏。一姊嫠居竆甚。公軫其飢寒。饋遺不絶。姊旣下世。撫恤諸甥。與同己出。每當春節。斗斛之饋無虛旬。公雖宦遊在外。淑夫人一如公在時。小婢短僮負戴相續。於是鄕里又知公之惠化行於家也。少時家甚貧。儉勤力穡。以立產業。凡係農務。雖卑賤之事。往往身親爲之。人或規其太苦。公笑曰。竆而食力。自是本分。庸何傷乎。及稍有贏餘。輒分諸竆族。待以擧火者甚衆。姊子金宇漢常曰。身營產業者。必嗇於財。而性喜施與者。惟見吾舅氏而已。辛壬之饑。擧族嗷嗷。公有一區田。來牟先熟。令至親最竆者。挼靑救急。諸家婢使逐日帶筐。如就己田。人稱其田曰義田。其御家衆。和而有節。威而有恩。子姓咸集。嬉笑懽怡。旋復斂容曰。吾家以勤儉質樸稱於世。近見兒輩稍失本色。諸婦入門。或尙華侈。余懼其墜失家風也。又謂小兒輩宜習苦淡。不許其食肉。新婦等亦令喫脫粟飯曰。此儞輩他日得力處也。門族有過失。諄諄曉諭。使有以自新。其貧無以自存者。心誠憂歎。思有以保接。有遘癘濱死者。親灌藥救療。親友死於癘疾。亦躳自斂襲。而病亦不染。親戚知舊。或遭患厄。必極力救拔。居官問遺。先及竆交。與霽山金公聖鐸友善。及金公竄湖南。相去且千里。公命駕往問饋。恤本家不絶也。公自奉儉約。不喜盛饌風樂。其在官。對方丈曰。不如鄕園𩶗魚煑耳。聽妓歌曰。不如聽隴畝農謳耳。罷官歸家。曳杖逍遙於田野之間。與老農劇談農桑。未嘗言朝廷事。子弟或言人過失。輒呵之曰。汝行事果能盡善乎。吾恐彼亦議汝之得失。不可徒責人而忘自反也。或語及財利事。輒戒之曰。天下之難制者。無如利欲。吾年二十時。不知錢穀爲何物。及後患家貧。留意產業。利心日長。時或警懼省改。而每覺利欲上分數多。爾曹宜知之。又曰。得失有命。不可妄求。家兄平生恬退而致位緋玉。吾亦未嘗向人求乞。而時蒙朝廷存錄。爾輩視此赴場屋。隨分應之而已。無求必得也。嘗赴召入洛。路遇知舊掌嶺試者。打話移日。其人曰。諸胤屢屈鄕解。誠可惜。公笑曰。渠輩不做工程。無怪其見屈也。終無所言。其人歸語人曰。柳某非所及也。筮仕以來。足跡未嘗及權門。吏判趙尙絅爲座主。因公事一見。致殷勤之意。公不復還往。大學士趙觀彬謫居北關。鄰邑守宰奔走饋遺。公絶不問。功曹屢以爲言。公曰。問不問。各隨其意。不必同也。大司諫申暐謫鍾城解歸。列邑皆出境送迎。廚傳甚豐。及到鏡城界。公命一官隷傳語。送數升糧數尾魚。申所帶官裨盛怒曳出。申知之。亟呼官隷受米魚。明日入東廂。致款而去。監司巡到鏡城。與諸邑宰置酒張樂。酒半。監司題給諸妓米布甚夥。命座中皆然。公默然坐一隅。引筆題一石蕎麥。兵使鄭汝稷曰。方今田野如赭。民且相食。主倅志在賑民而財不妄費。吾輩可愧也。一權貴外補鏡城。與公爲交承。頗致願交之意。公旣還朝。過門不見。其人大憾恨。投書絶交。亦不恤也。公聰明老而不衰。少時所讀。晩年往往背授諸子。諸子誦韓詩多有遺忘。公歎曰。汝輩聰明如此。何以成就。因擧南山詩不錯一字。直春坊時。進講綱目。一宮僚每當次請授於公。公擧輒誦數板。其人驚曰。老爺讀此巨帙。何其熟也。平生不自著述。不以文學自居。而日用應酬。皆精切簡當。尤長於詩律。李訥翁光庭權江左萬。以詩文伏一世。得公詩亟加歎賞。平居每有愛君憂國之心。嘗因亞諫除命。將上疏極言時事。旋以遞職不果上。辛巳之退。蓋出於觀象玩占之意。六被召命而終不出。優游田廬以畢世。其出處之際。中有所守而旣不輕以語人。人亦鮮有能識之者。
象靖以鄕里後生。偶忝同年之分。
영조 | 9 | 1733 | 계축 | 雍正 | 11 | 23 | 가을, 진사시에 합격하다. 李象靖 |
영조 | 11 | 1735 | 을묘 | 雍正 | 13 | 25 | 3월, 東堂試에 합격하다. ○ 4월, 進士覆試에 합격하다. ○ 윤4월, 增廣試 文科에 丙科로 及第하다. ○ 5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겨울, 龜潭書堂에서 「綱目」을 읽다. |
荷眷愛甚深。亦嘗受一言之規矣。愚蒙觝滯。不克奉以周旋以卒承嘉惠。近又猥託昏好。與諸胤君嗣爲兄弟。懷仰德義。益切悼歎之私。乃者諸胤君授以家牒一通。見責以紀實之狀。自惟淺劣。何敢輕犯不韙之罪。徒以事契深重。有不敢自外。且感諸胤君之誠孝。謹据家牒。略加點掇。以備立言君子者之考信裁幸焉爾。謹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