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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집(俛庵集) 이우(李㙖)생년1739년(영조 15)몰년1810년(순조 10)자치춘(穉春)호면암(俛庵)본관한산(韓山)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의 문인. 김굉(金㙆), 남한조(南漢朝), 권방(權訪), 김종발(金宗發), 유범휴(柳範休) 등과 교유
俛庵集別錄下 / 丙寅日記 / 子秉鐸錄[丙寅正月]
二十八日。過昌平到光州拱北樓下秣馬。有柳生載文者。自言己丑名賢柳淸溪夢井來孫。而居羅州茅山村云。頗有愍勞之意。入南平縣。日尙高而前路無歇泊處云。止宿。夜雨達朝。愁憫不可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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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집 별집 제6권 / 행장(行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전라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行全羅道都事兼春秋館記注官) 조공(曺公)의 행장
공의 휘는 대중(大中)이고, 자는 화우(和宇)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일찍이 자호를 정곡(鼎谷)이라고 하였는데, 고려조의 부원군(府院君) 겸(謙)의 후예이다.
또 장차 호남(湖南) 5신(臣)의 원통함을 씻어 주려 하였으나 시일을 끌다가 미처 거행하지 못하였다. 연신(筵臣)과 대각(臺閣)이 전후로 번갈아 소장을 올리고 호남의 유생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러 온 나라의 공론이 된 지가 오래되었다. 인조가 반정하자 비로소 모두 신원하고 증직하였으니, 이른바 5신이란 곧 공과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이동암(李東巖) 형제, 지헌 유몽정이다. 공이 세상을 떠날 때 춘추가 42세였고, 모년 모월 모일에 화순현(和順縣) 지곡(智谷)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 뒤 모년 모월 모일에 동현(同縣)의 동철점(銅鐵店) 신향(辛向)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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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집 響山日記(한국사료총서 제31집) > 壬寅(高宗三十九年·光武六年·一九○二年) > 四月小辛卯朔 > 十九日
十九日
暘。禹友二人歸, 羅州柳淸溪夢井後孫, 求淸溪遺集散在者, 將爲改刊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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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정(柳夢井) (1529~1589)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유희저(柳希渚)의 손자로, 남원 현감(南原縣監) 등을 지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정암수(丁巖壽)ㆍ오희길(吳希吉) 등의 무고(誣告)로 인해 옥중에서 장사(杖死)함.
유몽정(柳夢鼎) (1527~1593)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유용량(柳用良)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성절사(聖節使)로 명(明) 나라에 파견되어 구원병을 요청하여 일을 성사시켰으며, 귀국 도중 병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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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고 제4권 / 서ㆍ단(書ㆍ單)
정 지사 세규 에게 올리는 별폭 기해년(1659, 효종10) 1월 〔上鄭知事 世規 別幅 己亥正月〕
요즈음 듣건대, 호남(湖南)의 고(故) 참의(參議) 안공(安公)이 일찍이 《오신전(五臣傳)》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오신(五臣)은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및 동암(東巖) 형제와 유몽정(柳夢井), 조대중(曺大中)을 가리킵니다. 이 다섯 신하가 억울하게 죽은 뒤에 호남의 사림(士林)이 누차 창합(閶闔 대궐)에 호소하여 무함을 입은 것을 변론하였는데, 안공은 그 설을 뒤집어 전(傳)을 지으면서, 곤재에 대해서는 무함하며 헐뜯은 것이 특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 의도는 대개 정철(鄭澈)이 선류(善類)를 장살(戕殺)한 죄를 덮어서 숨겨 주려고 한 것이니, 다섯 신하가 이 전(傳)에 들어간 것은 송신(宋臣)이 간당비(姦黨碑)에 들어간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중천(重泉)의 원한 맺힌 백골이 또 이런 무함을 입게 되었으니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그러나 동야(東野)의 말이 어떻게 천추(千秋)에 전신(傳信)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대개 그 무리가 자기들에게 누(累)만 될 뿐이요 정철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음을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 그 술책이 또한 엉성하니, 오히려 웃음이 나올 따름입니다.
그리고 길 주서(吉注書)는 백이(伯夷)의 맑은 절조를 지녔고, 또 기자(箕子)의 중도(中道)를 겸하였으니, 백이이면서도 속이 좁지 않은 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공은 길 주서가 소장(疏章)을 올려 사직(辭職)한 것은 백이의 이포역포(以暴易暴)의 노래에 미치지 못한다면서 비난했다고 합니다. 학문이 지의 지극한 경지〔知之至〕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경솔하게 언론(言論)을 발한 탓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영남(嶺南)의 선현(先賢)의 의논을 쓸어버리고 스스로 문호(門戶)를 세우려고 해서일까요. 그 말이 대개 이와 같으니, 변론할 가치도 없다고 하겠습니다.
안공(安公)은 이름이 방준(邦俊)이다.
[주-D001] 동암(東巖) 형제 : 이발(李潑, 1544~1589)과 이길(李洁, 1547~1589)을 말한다.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때에 체포되어 장살(杖殺)되었다. 이발의 호는 동암(東庵)이라고도 한다. 이길의 호는 남계(南溪)이다.[주-D002] 간당비(姦黨碑) :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원년(1086)에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고 나서 왕안석(王安石)이 신종(神宗) 때에 실시한 신법(新法)을 모두 폐지하고 옛 법을 회복하였는데, 소성(紹聖) 원년(1094)에 장돈(章惇)이 재상이 된 뒤에 다시 사마광 등을 배척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으며, 휘종(徽宗) 숭녕(崇寧) 원년(1102)에 채경(蔡京)이 재상이 된 뒤에는 사마광ㆍ문언박(文彦博)ㆍ소식(蘇軾)ㆍ정이(程頤) 등 120인을 간당(姦黨)으로 지목하여 이른바 원우 간당비(元祐姦黨碑)를 세우고, 다시 사마광 이하 309인을 기록하여 원우 당적비(元祐黨籍碑)를 세운 뒤에 천하에 반포한 고사가 있다. 《宋史 卷19 徽宗本紀, 卷472 姦臣列傳 蔡京》[주-D003] 동야(東野)의 말 : 제나라 동쪽 야인〔齊東野人〕의 말이라는 뜻으로, 도청도설(道聽塗說)의 신빙성 없는 말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한 내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보인다.[주-D004] 전신(傳信) : 확실한 내용을 확실하게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5년에 “봄 정월 갑술 기축에 진후 포가 죽었다.〔春正月 甲戌 己丑 陳侯鮑卒〕”라고 하였는데, 《곡량전(穀梁傳)》에 “어찌하여 죽은 날짜를 두 개나 기록하였는가. 《춘추》의 원칙을 보면, 사건이 확실한 것은 확실하게 기록하고 의심되는 것은 의심되는 대로 기록해 두기 때문이다.〔卒何爲以二日卒之 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주-D005] 길 주서(吉注書) : 고려 창왕(昌王) 1년(1389)에 문하 주서(門下注書)를 끝으로 낙향한 길재(吉再)를 가리킨다.[주-D006] 백이이면서도 …… 자 : 맹자(孟子)가 “백이는 성인 가운데 맑은 분이다.〔伯夷聖之淸者也〕”라고 평하고, 또 “백이는 속이 좁은 면이 있다.〔伯夷隘〕”라고 평한 말이 《맹자》 〈만장 하(萬章下)〉와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각각 나온다.[주-D007] 이포역포(以暴易暴) : 포학함으로 포학함을 대체했다는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주나라를 떠받들었으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이를 부끄러워하여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만 캐 먹었는데, 급기야 굶어 죽을 임시에 “저 서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뜯노라. 포학함으로 포학함을 대체하고서도,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도다.〔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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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 제51권 / 묘갈명(墓碣銘) / 정곡 조공 묘갈명〔鼎谷曺公墓碣銘〕
나는 당론(黨論)을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늘 주자(朱子)가 원우(元祐)와 원풍(元豐) 때를 논하면서 “원우 연간의 사람들은 그저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들을 소인으로 여길 줄만 알고,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들이 꼭 전부 군자는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라고 한 말씀이 대현자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 정론이라고 여겼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에 분당(分黨)이 생긴 후로부터 상호 간에 모함하는 말에 대해서는 전부 꼭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정곡(鼎谷) 조공(曺公)의 행장을 보니, 살아서는 존경을 받고 죽어서는 애도를 받은 그분의 일생이 나로 하여금 곧장 머리털이 곤두서고 기운이 솟게 하였다. 이리하여 기축옥사(己丑獄事)는 한쪽의 선량한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는 일이었으며,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소인배라는 지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공의 휘는 대중(大中)이요 자는 화우(和宇)이다. 조씨는 본래 창녕(昌寧)의 성대한 씨족으로, 고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조겸(曺謙)의 후손이다. 높은 관직을 얻어 8대가 연이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휘 린(璘)이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이분이 휘 흡(恰)을 낳았는데, 흡은 병조 판서를 지내고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옥천은 순창(淳昌)의 옛 이름으로, 사는 곳에 근거해 봉지를 하사한 것이다. 이분들이 공의 6대조와 5대조이다. 증조는 휘가 온(穩)으로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고, 할아버지는 휘가 건(健)으로 사포서 직장(司圃署直長)을 지냈다. 아버지는 휘가 세명(世明)으로 능서랑(陵署郞 능참봉)을 지냈고, 직장 정도(鄭覩)의 따님이자 판서 정식(鄭軾)의 후손인 나주 정씨(羅州鄭氏)에게 장가갔다.
명종 4년 기유년(1549)에 공이 태어났다. 성동(成童)이 되자마자 문절공(文節公)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문절공은 공과 경서의 뜻을 토론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이때 공이 지은 시가 한번 나오자 사인(士人)들이 모두 전하면서 외웠다.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당(唐)나라 사람의 시어이다.”라고 하였다.
임오년(1582)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에 배치되었다가 예문관에 뽑혀 들어가서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선조(宣祖)께서 공의 필한(筆翰)을 보고는 늘 칭찬과 격려를 하셨다. 공은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뵌 적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그 후에 사암(思菴) 박순(朴淳) 공을 만나서 말하기를.
“조 아무개는 참말로 박학다식한 학자입니다.”
하자, 사암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하니, 풍헌관(風憲官)의 자리에 두면 의당 볼만할 겁니다. 다만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 심하여 남을 포용하는 도량은 아무래도 부족하니, 재상의 그릇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조정에서 당론이 일어나 동인(東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며 분열되어 피비린내 나는 격렬한 싸움이 일어날 징조가 보였다. 공은 정철(鄭澈)을 매우 증오하여 급제하자마자 순창군(淳昌郡)으로 돌아가서는 문을 닫아걸고 외부 사람들을 들이지 않았다. 또 같은 배를 타고 금강(錦江)을 건넌 적이 있었는데, 침묵하고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김공희(金公喜)도 자리에 있었는데, 건너고 나서 공을 경계하기를 “이런 행동은 화(禍)를 취하는 길이네.”라고 하였다.
정해년(1587)에 병조 좌랑에서 외직으로 나가 전라 도사가 되었으니, 당인들이 사실상 외직으로 쫓아낸 것이다. 공은 여러 읍을 순시하며 재해로 인한 피해를 살펴보고, 가차 없이 규찰하여 적발하니, 탐관오리 중에 관직을 내려놓고 떠난 사람이 많았다. 보성군(寶城郡)에 이르러서 군적강(軍籍講)을 실시하였는데, 시험에 참관한 사람은 영광 군수 김공희와 담양 군수(潭陽郡守) 김여물(金汝岉)이었다. 당시에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죽고 토역 사문(討逆赦文)이 내려오자, 공은 “이 일은 나라의 경사이니, 잔치를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서 두 명의 시관과 술자리를 열고 풍악을 울리고서 파하였다. 이전에 정여립은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명예를 크게 도둑질하였다. 한번은 뜰 앞의 감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공자는 익은 감이요 율곡은 아직 덜 익은 감이다.”
하였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말하기를.
“정여립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면 망녕된 자로구나. 군자는 말 한마디에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정말로 이런 말을 내뱉다니, 어떻게 인벌(人罰)과 천벌(天罰)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율곡이 졸하자, 정여립은 또 이발(李潑)을 추종하며 율곡을 손가락질하는 데 매우 힘써서 심지어 ‘나라를 그르친 소인배’라고 하니, 공은 또 말하기를 “한 사람을 두고 처음에는 공자에 버금간다고 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배라고 하다니, 어찌 애증이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단 말인가.” 하며, 마침내 이발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호강후(胡康侯) 같은 현자도 오히려 진회(秦檜)의 간사함을 몰랐습니다. 지금 세상에 이런 사람이 없으리라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옛날 조조(曹操)가 여포(呂布)의 사형을 완화해 주려고 하자,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가 ‘명공(明公)께서는 정건양(丁建陽 정원(丁原))과 동 태사(董太師 동탁(董卓))의 일을 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하니, 조조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볼 때 똑같이 싫어하는 것이고, 맘에 들면서도 나쁜 점을 아는 것은 군자가 숭상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대개 정여립과 교분을 나누지 말라는 뜻이었다. 공이 간사함을 알아보는 지혜와 일이 생기기 전에 드린 충고가 얼마나 명확하면서도 간절한가. 공이 보성군을 순시하고 아직 떠나기 전에 관찰사가 역리를 보내서 공으로 하여금 문묘(文廟)에 쓸 위안문(慰安文)을 지어 보내게 하였으니, 대개 전주(全州) 대성전(大成殿) 상량문이 바로 정여립이 지은 것이라서 많은 사인이 싫어했기에 개축하려 한 까닭이다. 공이 즉시 지었는데, 위안문의 대략에 “성상의 위엄 덕분에 흉악한 무리를 토벌하였네. 역적 왕돈(王敦)은 무릎 꿇었으나 악당 왕망(王莽)이 지붕에 남아 있네. 올린 나무 불살라야 하지, 글씨만 깎으면 가볍다오.”라고 하였으니, 공이 엄정하게 징토하는 마음이 또 어떠한가.
이때에 이르러서 당인들은 역적 정여립이 이발에게 의탁한 일을 가지고 반대 당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이에 압객(狎客)인 백유함(白惟諴), 양천경(梁千頃), 정암수(丁巖壽) 등을 사주해 광주(光州)의 교궁(校宮)에 모이게 하고서는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상소를 날조하여 이발, 이길(李洁), 정개청(鄭介淸), 유몽정(柳夢井), 이황종(李黃鍾) 및 공을 모두 정여립의 당에 몰아넣었으니, 대개 모두 한쪽의 청류(淸流)이자 선사(善士)였기 때문이다. 공에 대해서는 “정여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소식(素食)하였다.”라고 적었다. 상소가 들어가자, 당시에 정언(正言)을 맡고 있던 추포(秋浦) 황신(黃愼) 공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만약 조 아무개가 올바른 사람이라면 반드시 역적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간사한 사람이라면 역적이 처형된 뒤에 어찌 사람을 마주하고서 눈물을 흘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상소는 말도 되지 않고 논리에 맞지도 않습니다.” 하였다.
공이 순시를 하다가 만경현(萬頃縣)에 도착했을 때 체포되어 옥에 갇혔는데, 보성에서 시험에 참관한 김여물 등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국청 대신이던 정철은 이들을 끝내 증인으로 쓰지 않고, 단지 보성의 지인(知印) 두 사람과 다모(茶母) 한 사람을 잡아들이게 하여 매우 혹독하게 고문을 하였지만, 세 사람은 모두 불복하고 죽었다.
공은 죽음을 앞두고 자기 형인 민중(敏中)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주상께서는 영명하시고 하늘도 알고 계십니다. 아우는 이제 타인의 모함으로 억울함을 품은 채 죽게 되었으니, 비록 부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는 실로 천명이지요. 죽은 뒤에 반드시 한 도(道)의 공론이 일어나겠지만 때늦은 일일 테니 우습습니다. 제 아들 순남(順男)이 꽤나 학문에 뜻을 두고 있다 하니, 죽는다 해도 위안이 되는군요. 부디 충분히 권면하여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시고, 제가 죽었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해이해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제 죽음은 그야말로 천명이니, 부디 말을 지어낸 사람들에게 잘못을 돌리지 말도록 해 주십시오.”
하였다. 마침내 옥중에서 목숨이 끊어졌으니, 경인년(1590, 선조23) 3월 13일이며, 향년 42세이다.
문충공(文忠公)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문사 낭청(問事郎廳)으로서 그때 일을 목격하였는데, 사람들을 마주하기만 하면 늘 공이 억울하게 죽은 상황을 극진하게 설명하였다. 공의 시신이 한양에서 화순(和順)의 옛집으로 돌아오면서 정읍(井邑)을 지나는 길에 당시 정읍 현감으로 있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제문을 지어 조상하면서 매우 애통하게 곡을 하자 사람들이 모두 불안하게 여겼다. 충무공은 “나는 조공의 죄명에 대해서는 모르오. 정을 가눌 수 없었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이 충무공의 행장을 지을 때 이 일화를 앞에 드러내어서 찬미하였다.
공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시 한 수를 짓기를,
일편단심 누가 알아주랴 / 丹心一片有誰知
깊은 억울함 풀지 못하니 더디 죽음이 한스럽네 / 未吐深冤恨死遲
지하의 비간을 따라간다면 / 地下若從比干去
외로운 넋은 미소 짓고 슬퍼하지 않으리 / 孤魂含笑不須悲
하였는데, 간신배 최황(崔滉)이 시의 위 구절을 빼 버리고 아래의 한 구절을 가지고 상 앞에서 외워 아뢰기를 “조대중(曺大中)이 이미 비간을 자신에게 비유하였으니 임금을 누구에게 비교했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상을 격노하게 하자, 극형을 추가하여 화가 저승에까지 미치고, 처첩(妻妾)과 자서(子壻) 및 제질(弟姪)은 모두 체포되어 심문이 매우 성화같았다. 이에 정철도 공론에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차율(次律)로 처벌하기를 청했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정철이 또 의견을 아뢰기를 “조대중의 흉악한 정황은 이미 시구에 드러났습니다. 다만 역적을 비호한 이들에게 원래 해당하는 법률이 있으니, 처첩들에게 압슬(壓膝)을 가한다는 것은 신의 생각에는 실로 타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자, 상이 정철의 말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였고, 공이 가형(家兄)에게 보낸 편지와 옥중에서 지은 시의 위 구절 및 전주 대성전에 쓴 위안문을 보고 나자,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서 친속들을 풀어 주고 적몰한 가산도 돌려주라는 명을 내렸다.
최황이 시구를 외워 아뢰며 죄를 덮어씌울 적에 문간공(文簡公)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대중의 시는 본래 대단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하여 조정하지 않으시오. 이는 칭념(稱念)의 옥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듬해인 신묘년(1591)에 상이 크게 뉘우치고 “간신배 정철에게 모함을 받아 배척된 사람이 있다면 모두 거두어서 서용하라.”라는 하교를 내렸다. 양천경 등을 모두 엄히 국문하라는 명을 내리자, 양천경 등은 정철에게 사주받았다고 자복하고 장형(杖刑)을 받아 죽었다. 전(前) 현감 권유(權愉)가 제일 먼저 발론하여 기축년(1589)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자, 상이 또 하교하기를,
“정암수 등이 나라에 역적들이 일어난 변고를 틈타 감히 남을 모함하는 술수를 부리고는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고, 간사하고 음흉한 상소를 몰래 아뢰어 어진 재상과 이름난 경 들을 모조리 손가락질하여 기어코 나라를 공허하게 만들려고 했으니, 이들은 모두 간사한 사람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
하고는, 기축년의 위관(委官) 정철을 강계부(江界府)에 안치(安置)하였다. 이로부터 벼슬아치와 유생 들이 연명 상소를 올려 호남 지역 다섯 신하들의 신원을 청하니, 승정원이 상소문으로 거의 꽉 찰 지경이었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뒤를 이었을 때도 여전히 상소를 올려 청하였다.
인조가 개옥(改玉 반정)하고서 첫 정사에서 서둘러야 할 일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 묻자, 연평(延平) 이귀(李貴) 공이 “정철을 신원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보덕(輔德)을 맡은 윤지경(尹知敬) 공이 홀로 “정철을 신원하는 일이 급선무가 아니라 기축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제일 우선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대신(大臣)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이고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공이 뒤이어서 “윤지경의 말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의견을 수렴하라고 명하시자,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과 좌의정 윤방(尹昉) 및 우의정 신흠(申欽)이 기축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먼저 신원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이리하여 공 및 이발, 유몽정 등이 모두 관작을 회복하였으니, 아, 천도(天道)가 이로 인해 안정되었다.
공의 부인은 참봉 김응성(金應星)의 따님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수정(守正)이고 차남은 수헌(守憲)이다. 장녀는 유함(柳涵)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부윤(府尹) 이정건(李廷楗)에게 시집갔다. 내외 자손들은 약간 명이다. 공의 장지는 화순현(和順縣) 서쪽 세양동(細陽洞) 좌묘(坐卯)의 언덕에 있는데, 김씨가 여기에 함께 묻혔다.
당초에 공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제들은 4명이었다. 공의 어머니는 성품이 엄정하여 자식들 교육에 법도가 있었기에 결국 모두 인재가 되었고, 효성과 우애로 향리 사람들을 감복시켰으니, 가정에서 수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조정에 이름을 떨칠 수 있었겠는가.
《용학구결(庸學口訣)》 1권과 문집 2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금오랑(金吾郞)이 수색해 가지고 가서는 결국 잃어버렸다.
호남의 사림들이 공을 매우 독실하게 경모하여 공의 5대조인 공희공(恭僖公)의 역정사우(櫟亭祠宇)에다가 나중에 배향하였으니, 이 점이 그 당시 많은 사람의 상심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으리라.
이제 공의 6대손인 희순(喜淳)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천 리 너머 한양에 와서는, 나에게 한마디 말을 빌려서 비석에 새기고자 하였다. 그의 표정이며 말투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니, 어찌 감히 늙었다고 해서 거절하랴. 이에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당고의 화 전해지니 / 黨錮有傳
천고에 한이 쌓였네 / 千古恨積
지조 지켜 세상에 아부 않으니 / 道不阿世
거룩하셔라, 정곡 선생이시여 / 韙哉鼎谷
누가 알았으랴, 성군의 시대에도 / 孰謂聖世
오늘이 옛날 같을 줄을 / 視今猶昔
공의 마음 단사처럼 붉고 / 其心如丹
공의 피는 벽옥과 같았네 / 其血之碧
영혼은 비간을 따르고 / 魂隨比干
이름은 하늘과 땅을 덮었다 / 名被天壤
슬픈 바는 나라이니 / 所悲家國
붕당이 재앙의 빌미라오 / 禍祟朋黨
누가 눈이 공정하여 / 誰能眼公
우리 역사에 쓸 수 있으랴 / 修我簡策
징험하고픈 자들은 / 有欲徵者
이 비석을 보시게 / 視此刻石
[주-D001] 원우 …… 못했다 : 이 말은 《회암집(晦庵集)》 권28 〈여유승상서(與留丞相書)〉에 나오는 구절의 일부이다. 원래 내용은 “원우 시대로 말하자면, 그 잘못이 자기와 의견을 달리한 자를 군자가 아닌 줄로만 알았고 자기에 동조하는 자라 해서 소인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로, 번암이 인용한 구절과 약간 다르다.[주-D002] 호강후(胡康侯) …… 몰랐습니다 : 호강후는 호안국(胡安國)으로 송(宋)나라의 명재상이고, 진회는 북송 말부터 남송 초기에 걸쳐 28년간 권력을 독점했던 인물이다. 처음에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로 끌려갈 때 진회가 따라갔는데, 몇 년 뒤에 돌아와서 자신을 감시하던 금나라 군사들을 다 죽이고 배를 타고 도망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명성을 떨치고 재상 자리에 올랐다. 호안국은 평소 진회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그의 이러한 행동을 매우 훌륭하게 여겨 크게 칭찬했는데, 호안국이 죽고 난 뒤 진회가 도리어 금나라와의 관계를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화의(和議)를 주장하고 악비(岳飛)와 같은 명장을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宋史 姦臣列傳 秦檜》[주-D003] 조조(曹操)가 …… 하니 : 여포는 후한 말기의 군벌로, 처음에는 정원 밑에 있다가 정원을 배신하고 동탁에게 투항했다. 그 후에 동탁의 시녀와 간통한 일이 들통날까 두려워하던 차에 왕윤(王允)이 여포를 끌어들여 동탁을 죽였다. 유비가 조조에게 한 말은 조조와 유비가 힘을 합쳐 여포를 공격해 사로잡은 뒤에 한 말이다. 《後漢書 呂布列傳》[주-D004] 택당(澤堂) …… 찬미하였다 :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권10에서 이식이 지은 〈시장(諡狀)〉에 보인다.[주-D005] 有誰 : 《갈암집(葛庵集)》 별집 권6 〈통훈대부행전라도도사겸춘추관기주관조공행장(通訓大夫行全羅道都事兼春秋館記注官曺公行狀)〉에는 ‘鬼神’으로 되어 있다.[주-D006] 조대중의 …… 아닙니다 : 《우계집(牛溪集)》 권4 〈여정좌상철별지(與鄭左相澈別紙)〉에 보인다.[주-D007] 호남 …… 청하니 : 호남의 다섯 신하는 정개청, 이발, 이길, 조대중, 유몽정을 말한다. 전라도 유생 최홍우(崔弘宇)가 기축옥사에 연루된 다섯 명의 신원을 청하고자 상소를 올렸다. 《宣祖實錄 40年 6月 11日》[주-D008] 공의 피는 …… 같았네 :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군주는 자기의 신하가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지만, 충성스러운 신하가 반드시 신임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자서(伍子胥)는 부차(夫差)에게 충간(忠諫)을 했다가 그에게 죽음을 당해서 말가죽 부대에 담겨 강물에 버려졌으며, 장홍(萇弘)은 참소를 당해 추방되어 촉(蜀)으로 돌아가서 죽었는데 촉 사람들이 그 피를 담아 보관하니 3년 만에 변하여 벽옥(碧玉)이 되었다.” 하였다. 이후로 혈벽(血碧) 또는 벽혈(碧血)은 충신의 억울한 죽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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