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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英陽) 입암(立巖) 서석지(瑞石池) 주실(注谷) 마을 일원 탐방 안내
☻ 금년 2015년 영양산마물축제는 5월 15일부터 18일 사이에 개최.
■영양 두들마을-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대공원역에서 154km, 2시간 3분, 인량마을에서 41 km, 59분]. 이곳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서 들어와 개척한 이후,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조선시대 1899년에는 이곳에 국립 병원격인 광제원이 있었다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는 석계 선생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 채를 비롯하여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 장씨 유적비,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겨 놓은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 유묵도 뚜렷하게 보인다.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영양읍 반대 방향인 석보면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이문열 작가의 고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마을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들어보면 그 오래되고도 독특한 이력이 인상적이다. 우선 한글로 된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 탄생된 곳이고 항일시인이었던 이병각과 이병철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된 ①석천서당과 석계고택 등이 남아 있는 전통 있는 마을이다. 또 얼마 전에는 ②한옥체험관과 정부인 장씨 예절관 등이 문을 열면서 지자체 차원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영양에도 이에 버금가는 유서 깊은 마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교통만 다소 불편할 뿐 문화나 전통 면에서는 오히려 앞선 점도 많다고 전한다. 입향선조인 석계 이시명 선생 이후로 현재까지 재령이씨 집성촌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마을 이름인 두들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실제 마을 내 집들은 이 언덕 저 언덕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보기에도 재미있고 어디에서나 마을 앞 들판이 훤히 보여 한눈에도 마을의 입지가 꽤나 좋다. 마을 내에 해설사가 상주하지는 않지만 입향선조 12대손인 이병태 어르신이 간단한 안내를 해주고 있어 마을 유래나 디미방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을 비롯해 여러 집들이 전형적인 영남의 반가 형태인 ㅁ자형 뜰집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 수백 년 된 집들이 보수를 거쳐 지금도 거뜬하게 서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자손들이 외지에 생활하며 불천위와 같은 큰 제사 때에만 모인다고. 한다.
어르신을 따라 정부인 장씨 예절관을 가보았다. 때마침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음식디미방 보존회 모임이 있는 날이라 유물전시관 관람과 함께 흥미로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보존회는 영양군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구단체로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음식을 시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두들마을을 문향마을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이문열을 들 수 있다. 그는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등의 소설 속에 그의 고향을 등장시켜 두들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문열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어릴 적부터 살던 곳이라 두들마을이 사실상의 고향인 셈. 마을 내에 현대문학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 관련 행사를 여는 광산문학연구소가 있다.
■영양(英陽) 서석지(瑞石池)-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조선 중기의 연못과 정자. [두들마을에서 13km, 19분]. 중요민속자료 제108호. 이 정자는 정영방(鄭榮邦)이 1613년(광해군 5)에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연못은 수려한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하였으며, 방지(方池)의 북단에 있는 3칸 서재인 주일재(主一齋)는 ‘雲棲軒(운서헌)’이라 편액하였다.
서단에는 6칸 대청과 2칸 온돌이 있는 규모가 큰 정자인 경정(敬亭)을 세우고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 두 채를 두어 연못을 중심으로 한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북단의 서재 앞에는 못 안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四友壇)을 축성하여 송ㆍ죽ㆍ매ㆍ국을 심었다.
연못은 동서로 길며, 가운데에 돌출한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을 이루고 있다. 연못의 석벽은 그 구축법이 매우 가지런하고 깔끔하다. 동북 귀퉁이에는 산쪽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내었고, 그 대각점이 되는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마련하였다.
이 연못의 이름은 연못 안에 솟은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다. 서석군은 연못바닥을 형성하는 크고 작은 암반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 있는 것으로 그 돌 하나하나에 모두 명칭이 붙어 있다.
돌들의 이름은 선유석(仙遊石)ㆍ통진교(通眞橋)ㆍ희접암(戱蝶巖)ㆍ어상석(魚狀石)ㆍ옥성대(玉成臺)ㆍ조천촉(調天燭)ㆍ낙성석(落星石) 등이며 20여개에 이른다. 이러한 명칭은 정영방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양읍 쪽으로 가다보면 ③서석지에 이르게 되는데 서석지는 영양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곳이다. 이름에서 연못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민가 연못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보길도 부용정, 담양 소쇄원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민간 정원으로 아담하지만 단아한 정취가 그만이다. 광해군 때 낙향한 정영방 선생이 조성한 곳으로 연못을 만들 때도 원래 있던 잡석을 그대로 이용했다고 한다. 연못 안에는 색깔이 허연 크고 작은 바위가 약 60여 개 있는데 수위에 따라 모습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등 자연과의 조화를 따른 점이 돋보인다.
한편 영양군에서 계획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선바위관광단지에는 고추홍보전시관을 비롯해 분재수석전시관, 민물고기전시관 등이 들어서 있는데 현재 40%의 완성률로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다. 그래도 놓칠 수 없는 곳이 바로 ④산촌생활박물관. 영양의 생활환경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 들러볼 만하다. 농촌이나 어촌과는 또 다른 생활방식을 지닌 산촌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전시물 대부분이 실제로 집안에서 사용되던 것들이다. 산업화로 인해 더 이상은 볼 수 없어 더욱 소중하다. 현재는 상설전시관만 운영 중이고 오는 12월 야외전시장을 개장할 예정이다.
숙박은 수비면에 있는 반딧불이생태체험마을로 정하기로 했다. 영양읍에도 여관이 몇 군데 있지만 천문대 관람과 이튿날 생태학교 등을 둘러보려면 이곳에 여장을 푸는 것이 좋다. 이 일대는 자연생태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다만 찾아가는 길이 초행자에겐 어려울 수 있으므로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오일도(吳一島) 생가(生家)와 오일도시비공원(吳一島詩碑公園)-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 [영양 서석지에서 7km, 10분]. 1991년 9월 6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오일도의 본명은 희병(熙秉)이요 일도(一島)는 아호(雅號)이다. 오시준 칠원현감(吳時俊 漆原縣監)의 10세손이며 오익휴(吳益休) 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901년(光武 5년) 영양면 감천동(甘川洞)에서 태어났다. 8세에 사숙(私淑)에서 6년간 한문을 배웠을 때에도 성적이 우수하였다. 1915년 3월 16세로서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년을 건너뛰어 1918년에 4학년을 졸업하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응시 합격하여 입학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의 입교(立敎)대학 철학부에서 학구(學究)에 정진(精進)하는 한편 시예술(詩藝術)에 심취해서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朝鮮文壇) 4월호에 처녀작 <한가람 백사장(白沙場)에서>를 발표하였다. 흰 갈매기 같은 우리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모여 흰 빛을 발하던 한가람(漢江) 백사장을 갈가마귀 떼가(왜인들) 차지했으니 한민족(韓民族)의 한(恨)이 서린 영탄(詠嘆)은 다음과 같았다.
[한가람 백사장은 흰 갈매기 놀던 곳
흰 갈매기 어디 가고 갈가마귀 놀단 말가.
교하(橋下)에 푸른 물은 의구(依舊)히 흐르건만
이처럼 변하였노]
오일도 시인은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근화학교[槿花學校-德成女中高의 前身]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었다. 1935년 2월 사재(私財)를 기울여 순수시지(純粹時誌) 시원(詩苑)을 창간(創刊)하여 조선문단의 시인들을 총망라(總網羅)하다시피 한 시 작품 발표기관의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시단에 끼친 바 영향(影響)이 크다.
오일도(吳一島) 시를 순수 서정시(純粹 抒情詩)라 일렀는데, 황량(荒凉)과 조락(凋落)이 주조(主調)를 이룬 그의 시에는 민족의 얼과 정과 한(恨)이 스민 민족시인이기도 하다. 오일도 시인의 고매(高邁)한 정신과 올곧은 절개는 끝내 변함이 없었다. 왜정말기(倭政末期)에 조선문인들 대다수(大多數)가 회유(懷柔) 또는 억압(抑壓)당함으로써 왜정(倭政)에 부동(附同)하는 친일문인(親日文人)으로 변조(變造)되었으나, 해방 후 1966년 임종국(林鍾國)의 친일문학론(親日文學論)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 가운데 너무나 많은 친일명사와 친일 무사들의 이름이 즐비(櫛比)하건만, 오일도시인의 이름은 그림자조차 없으니 이역(異域)만리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왜추(矮醜) 앞에 굴종(屈從)하지 않은 절개 있는 선비이기도 하다.
8·15 직후 민족반역인 좌익분자들이 광복 조국을 어지럽힐 때에 구국〔救國)의 뜻을 품은 선생은 민족 민주 진영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입당했으나 이듬해인 1946년에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2월 28일 맏아들의 가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46세의 애석한 나이였다.
오일도의 생가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민족적 양심을 저버리지 않은 지사이자, 항일시인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1901~1946)이 태어난 집이다. 口자형 뜰집으로, 그의 조부(祖父) 시동(時東)이 고종 원년(1864)에 건축하였다. 솟을대문을 가진 전면 대문간채는 정면 5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문간채를 중심으로 좌측에 글방이 있고 우측은 사랑채인데, 사랑방이 수평으로 연접되는 일도의 거처방이 수직으로 연결되어 우익사를 만들었다. 또한 사랑채는 전면 중간문과 우측면 샛문간에 의해 구분하여 놓았는데, 이는 우리의 유교적인 남녀유별 사상에서 동선 분리를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간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방과 부엌을 두고, 좌측에는 외양간과 마굿간을 꾸몄다. 이 집은 크게는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되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7칸의 ‘ㅁ자형 뜰집’이고 대문채는 ‘一’자형이다. 이 집은 조선후기 경북 북부지방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살림집 형태를 갖추고 있다.
■영양 주실마을-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오일도생가에서 13km, 20분]. 주실마을은 1630년 호은공 조전 선생이 가솔들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며 한양조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된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조전 선생을 시조로 하여 스스로를 주실조씨라 부르고 있다. 한양조씨가 한양을 떠나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경위는 조광조의 기묘사화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조광조가 축출된 후 한양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피해 다니던 호은 조전선생이 마을 뒤쪽의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앉은 자리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매가 앉았던 자리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72호로 지정된 '호은종택'이다.
산아래 고즈넉히 자리 잡은 고택들이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주실마을의 입구에는 외부에서 보면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일명 '주실쑤'라는 숲이 있는데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시인의 숲'이라 불리우고 있다. 수령 100년의 소나무와 250여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또 느릅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시인의 숲'이라 불리우는 이유는 이곳 주실 마을이 바로 시인 조지훈 선생의 생가가 있는 조지훈 선생의 고향마을이기 때문이다. '호은종택'이 바로 조지훈 선생의 생가이다. 옛부터 이곳 주실마을은 붓을 닮은 문필봉이 있어 문필가나 학자가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호은종택'도 정면으로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곳에 터를 잡고 있는 고택이다. 이곳 작은 시골마을인 주실마을에서는 지금까지 14명의 박사가 배출 되었다고 한다.
숲이 시작되는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숲으로 걸어 들어가면 길을 따라 좌우로 쉴 수 있도록 벤치가 마련되어 있고, 시를 적어 놓은 비석도 놓여 있다. 천천히 시를 읽어 보며, 산림욕을 즐겨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숲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내를 건너는 다리가 앞을 가로막는데, 의외로 다리 크기가 커서 놀라게 된다.
주실마을에는 현재 약 50여 가구가 남아 주로 고추 농사 등을 지으며 생활하고 있으며, 조지훈 선생의 생가인 '호은종택'외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인 '옥천종택'이 있고, 마을내에 '조지훈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조지훈 선생이 수학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72호인 월록서당, 만곡 조술도 선생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지은 만곡정사 등의 문화 유적이 있다. '호은종택'과 '조지훈문학관' 사이의 길을 따라 걸으면 시공원에 이르게 되는데 조지훈 선생의 시 가운데 약 20여편이 돌에 새겨져 방문객 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주실마을에는 '옥천종택'에만 우물이 하나 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우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주실이라는 마을이 배 형상으로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생겨 가라 앉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이곳 '옥천종택'의 우물을 길어다 먹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주실마을의 우물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한다. 대신 50여리 떨어진 곳에 수도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옥천종택'은 '호은종택'의 왼편 위쪽에 자리한 경상북도 지방의 전형적인 한옥 가옥이다. '옥천종택' 뒤로는 '창주정사'라는 문중의 서원 역할을 했던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호은종택'의 오른쪽으로는 '월록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인근에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흐르고, 남이 장군이 토적 아룡 일당을 토벌했다고 하는 남이포가 있다. 남이포가 있는 인근 강변 일대에는 음악분수, 분재 전시관,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어 쉬어가기에 좋다. 또, 연당마을에 있는 완도 보길도의 부용정,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간정원으로 꼽히는 '서석지'나, '오일도 시인'의 생가가 있는 감천 마을, 경상북도 내륙에서 해와 달이 뜨는 광경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일월산을 들러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