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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미6:1-8절)
유대인 잠언집에 인생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잠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현재 당신이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절대 사랑의 대상이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저명한 신학자 마틴 부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려면 성공 그 자체보다는 사랑에 먼저 관심을 가져라.’ 옳은 말입니다. 성공하려면 사랑해야 합니다.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생을 불태울 수 있다면 이미 그 결과에 상관없이 행복한 사람이요 승리자인 것입니다. 시골 사람 미가는 이스라엘의 도시 특히 예루살렘의 타락을 보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한 요구가 무엇인가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자기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미가의 이 호소는 물질로 타락한 우리 시대의 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1.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과거도 축복받은 민족이요, 미래도 축복받은 민족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과거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미6: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내었느니라.
출애굽 사건에 대한 회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 관계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이 사건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과 그의 크신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사63:12-14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장래에도 축복받은 민족입니다.
*미5:7-8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는 여러 나라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들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그가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이스라엘은 이렇게 과거에도 축복받은 민족이요. 장래에는 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입니다. 그들의 현실은 불의하게 재산을 모으며 저울은 부정하고 부자는 강포하며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고 그들의 혀는 간사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인생이란 내 힘과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살아가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며, 해야 하는 일은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 어둠의 세력입니다.
빛이 없는 이 흑암의 세력 때문에 우리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좌절과 파멸을 당하게 됩니다.
2) 불안의 세력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반에서 성적도 2, 3등 하는 데도 두려움 때문에 어느 날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노트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무섭다. 친구끼리의 경쟁이 두렵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3) 영적 갈증입니다.
목마름입니다. 배고픔입니다. 어느 신문에 이렇게 실렸습니다. ‘비만증은 정신병이다.’ 공허하니까 자꾸 먹게 됩니다.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은 결국 비만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절대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4) 죄악된 옛 습관입니다.
삼대를 도박으로 내려오다가 망한 가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4대째 내려온 아들에게 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랄 일은 그 소년이 자라서 청년이 되었을 때 그는 발가락사이에 화투를 끼고 도박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죄의 힘입니다. 내 의견하고는 관계없이 나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권세인 것입니다.
5) 마귀의 역사입니다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어린애를 유괴해서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수사 과정에서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모르겠어요. 내 안에서 소리가 들려서 정신없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귀에게 붙잡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미국의 과거는 영적 축복이 넘쳤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처음 발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항해의 목적이 황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콜롬부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 천지에 심어야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항해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신세계로 향한 청교도들은 마음이 좁고 신앙적 자긍심이 그 동기라고 비판하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그들은 정말 죽음을 무릅쓰고 항해를 했고, 미개지에 도착한 그들의 삶의 모습이 그들의 동기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국부라고 불리는 조지 워싱턴을 범신론자라 하고 건국의 목표보다는 개인적인 명예욕이 강했던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께 헌신된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남긴 기도문이 증명해 줍니다. “영화로운 아버지여, 제발 먼지 같은 이 죄인을 기억해 주옵소서.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무지하게 살아온 적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주를 경외하는 이 마음을 그리스도의 희생 보혈을 보시고 받아 주시옵소서. 주여, 나의 생각과 말과 나의 일을 주장해 주시옵소서. 내 죄는 어린양의 피로 씻겨 주시고, 내 심령은 성령님께 사로잡히게 해 주옵소서.’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뉴욕을 전 지구의 하수도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2.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본인 신학자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20대에 꼭 해야 할 일을 말했습니다.
1) 하고 싶은 일을 분명히 정하라. 자신의 은사와 특성을 살려 결정하라.
2) 인생의 시간표를 작성하라. 인생의 계획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훗날 엄청난 차이가 날 것이다.
3) 현장에서 먼지 덮인 아침밥을 먹어보라.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4) 기력의 완전한 탈진을 경험해 보라. 기력을 분출하는 것은 곧 쾌감이다. 기력을 다해 일을 해보라.
5) 정상에 있는 사람을 만나보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사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라.
6) 가슴이 찢어질 듯이 사랑에 빠져보라. 사랑을 하지 않고는 인생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도 없고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이자 무한한 자기희생이다.
7) 일 년에 백 권의 책을 독파하라. 일주일에 두 권 이상 읽어야 한다. 어느 분야건 최고가 된 사람의 한 가지 공통점은 자기 분야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확실한 지식과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한 가지 진리를 믿고 있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아키히로의 이 주장은 인본주의 사상에 기인한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옳은 이야기 같습니다만 인간의 삶이 이런 주장에 의해 좌우된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한낱 학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생각과 환경과 성품과 신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검사의 입장에 서서 피고인 이스라엘과 쟁변을 벌이시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산과 견고한 땅을 재판장에 출두할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에발산과 그리심산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백성들은 아멘 했습니다. 그때 산들과 땅들이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변론하다’라는 말 ‘이트오카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사법적인 개념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다. (사1:18)’ 라는 뜻인 재판과 관련이 있는 것과, 또 하나는 긍정적인 비판이나 권면을 뜻하는데, 전체의 뜻은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그의 백성들의 죄를 법적인 측면에서 밝혀내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도록 권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선지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미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공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의 도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자란 무엇입니까?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모든 친절하고 자비로운 행위입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대 왕 사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좋은 재물만 많이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정반대였습니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리고는 하나님의 요구를 말씀하셨습니다.
*사1:16-17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공의와 인자를 행하려 하여도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공의도 인자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에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의롭게 행하여도, 아무리 뜨겁게 사랑을 하여도, 아무리 고생의 떡을 먹어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신자의 최소의 상품입니다.
*벧전 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은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내가 겸손하게 산다.’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이미 겸손은 없습니다. 한 학생이 반에서 가장 겸손하게 행동했기에 금 핀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선생님은 그 금 핀을 떼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금 핀을 자랑스럽게 가슴에 달고 왔기 때문입니다. 언제 정말 겸손의 성품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창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기 때문에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은 우리가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겸손에는 변덕이 없어야 하고 꾸준해야 합니다.
*눅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에 아멘 하고 충성하다가도 어느 날은 탕자의 형처럼 대문 밖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이미 받았던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섬긴 것에 대한 보상을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불평이 생겼습니까? 이 맏아들은 겸손히 아버지와 동행하는 일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이라.’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 대신 ‘네 하나님과 함께 걸으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기도의 고개를 숙이는 것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미국 빌라델비아 교회에 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어느 날 복권을 샀는데 200만 불의 상금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신문과 메스콤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인데 다음날 회사에 출근을 해보니 동료들이 야! 얼마나 좋아. 그 돈을 다 어디에 쓸거야 하며 매일 자기를 부러운 듯이 바라봅니다. 그 일이 그만 부담이 되어서 직장에 사표를 내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깡패들이 찾아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합니다. 너무 무서워 밤에 짐을 챙겨 야밤에 도주를 했습니다. L.A.로 도망쳐서 이름도 바꾸고 숨은 듯이 죽은 듯이 숨도 잘 못 쉬고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집사님이 처음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에는 복권 당첨이 인생의 축복이 아니라 최대의 위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더라면 공포도 사라지고 평안을 누릴 것이지만 부자 청년처럼 재물이 아까워서 손에 쥐고 있다 보니 평생을 숨어 살면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불행한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가가 ‘너희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희 하나님’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당시의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어진 말씀이요, 들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알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 하나님에 대하여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2-3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사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면 너희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남아프리카의 한 다이아몬드 광산업자가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를 발견했습니다. 레몬 만한 크기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런던으로 수송하기 위하여 가장 신임하는 부하에게 네 명의 호위병을 붙여 수송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은행 금고로 직행하여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속에는 석탄 덩어리 한 개가 달랑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부하는 너무 놀라 당황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며칠 후 런던의 사무실로 일반소포가 우체부에 의해 배달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광산업자가 생각한 것은, 가장 안전한 운반 방법은 평범한 우편 소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보내심으로 겉으로는 가장 평범한 소포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 세상 모든 보화를 다 합해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비열함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 우리는 교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우리 자신의 비열함을 안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두 가지 균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다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예배당 정면에 현수막이 걸렸는데 DO! (행하자!) 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굉장한 집회 제목이었습니다. 실천하고 행동하자는 취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가 공의를 사랑하지 않으며 누가 인자를 사랑하지 않으며 누가 겸손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잘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잘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네가 이렇게 할지니라.”가 아닙니다. 그 대신 “내가 주노니”입니다. 복음은 ‘행하라’가 먼저가 아니라 ‘받으라.’ 가 먼저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일을 시키는 사장이 아니라 내가 약할 때 도와주고 나를 강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반대이십니다.
*사41:17-18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먼저 동행해야 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그분의 공의와 인자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헐벗은 산에 강을 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골짜기 가운데 샘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광야가 못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마른 땅이 샘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현실만 주목하고 그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이제 눈을 들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상상을 초월한 이적과 기적이 매일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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