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강
강 문 석
경칩 지난 지 일주일이다. 하지만 아직은 북녘의 매서운 눈바람이 남쪽지방까지 불어와 옷깃을 여미게 한다. 오늘은 향년 87세를 일기로 이승을 등진 다니엘 선배를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다. 가까이 있던 선배들이 한 분 두 분 떠나는 걸 보면서 자신의 죽음도 진지하게 묵상해야 하지만 아직은 일을 당할 그때뿐이다. 믿음이 튼실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터이다. 다니엘 선배보다 5년이나 젊은 나이로 8년 전에 떠난 작가 박경리는 말년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더없이 편하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고 술회했다.
박경리의 장례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서로 절친했던 박완서 작가도 노년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완서는 말년에 주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았고 5년 전 79세로 우리 곁을 떠났다. 아차산 밑자락 작가의 전원주택을 방문하여 함께 카메라 앞에 섰던 날의 추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부활대축일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고 지금은 극기와 희생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다. 검정색 옷들을 차려입고 장례미사에 참석한 성당 교우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주례사제의 고별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의 거룩한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사제는 눈앞의 망자를 슬픔이 아닌 희망으로 바라보았다. 열심히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했다. 죽음을 늘 두렵게만 여기던 아내가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인 모양이다. 아침까지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장례미사는 혼자만 다녀오라고 했던 사람이 깨달음을 얻고는 달라진 반응을 보였다. 사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주님을 기리느라 만들어진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지만 10여 년 전 성지순례로 그 언덕길을 찾았을 때는 실망스럽게도 시장골목으로 바뀌어 성지란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생전의 다니엘 선배는 오뚝이 인생을 살았다. 그러면서 까마득한 후배에게 쏟은 사랑이 남달라 그랬던지 내겐 말을 놓지도 않았다. 하지만 짧지 않은 세월인데 어찌 따사로운 햇살과 감동적인 사랑만 있었겠는가. 선배를 만난 것은 1964년까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대전에서 부산에 전입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 회사에선 문화방송 악단을 초청하여 노래자랑을 열었고 무대에 함께 서면서였다.
진행자인 아나운서가 선배에게 물었다. “WBC 챔피언과는 동명이신데 본인은 김기수 선수와 어떤 점이 닮았다고 생각하느냐?”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서로 주먹이 닮았다”고 해서 강당에 모인 직원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다. 서른 중반이었던 선배는 당시 송전계에서 일하고 있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73년 봄에 노동조합을 맡고 있던 선배는 자신의 조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도심의 변전소에 발 디딘지 2개월밖에 안 된 나를 멀리 외곽에 위치한데다 설비가 복잡한 계통변전소로 내쳤다.
그 바람에 대용량 전력용변압기를 설치하는 공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변전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지만 기초체력이 약했던 탓에 과로로 인한 신장병인 신우염을 앓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본사에서 벌어진 전국분임토의대회에 출전했을 때는 직접 대회장까지 찾아와서 격려해주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겨우 장려상에 머문 우리 부산지점을 욕심에서 그랬던지 성적발표 전 우승으로 잘못 알려줘서 사람의 마음을 붕 뜨게 흥분시키기도 했다. 선배가 회사를 떠날 땐 55세 정년이었으니 1980년대 중반에 퇴직했음을 알 수 있다.
선배는 퇴직하자마자 전기공사업체의 전무이사를 맡아 제2의 직장생활에 매달렸다. 대학 강단의 겸임교수를 맡았던 때문에 전임교수 서너 명과 학생모집을 위해 그 업체를 방문했을 때 젊은 사장 밑에서 충실하게 업무에 매달리던 선배를 접하곤 놀랐다. 그 사장은 뒤에 대학에 입학하여 나와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선배는 정년퇴직한 직장의 7백여 명 규모의 친목단체도 맡아서 봉사했고 선배의 뒤에 3명이 3년씩 봉사하고 난 뒤 내가 맡았으니 15년 전에 지회장을 그만 두었다.
난 6년 동안 서울의 본회행사에 참석하다보니 선배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선배 연배들로부터 시작하여 한참이나 후배들까지도 선배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성화였다. 단체의 3년 임기를 마치고 후임을 못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도 역대 지회장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준 사람이 선배였다. 직접 발 벗고 나서서 후보자를 찾아가 나눈 얘길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전부들 몸을 사린 때문에 성과는 없었다.
3년 전 어느 날 선배가 사무실에 나타났다. 제2직장으로 일했던 업체 대표의 부정을 사회에 폭로하겠다고 했다. 난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그 업체에서 받은 은혜와 교회가 가르치는 용서 같은 걸 선배에게 들먹였다. 선배는 눈을 감는 시점에 지금 써놓은 고발장이 3개 메이저신문사에 보내지도록 조치를 해놓았다고 했다. 퇴직금에서 누락되었다는 수당이 불과 150만 원 정도인데 그렇게 했다간 세상이 누구 욕을 하겠느냐는 말을 선배에게 해주었다. 그러곤 바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업체 면허가 없던 햇병아리 시절을 떠올렸던지 내 말을 고분고분 들었고 쩔쩔매는 시늉까지 해댔다. 그러고 바로 그 돈을 청산하겠다는 말까지 하는 걸 선배가 옆에서 들었다. 선배의 배필인 베로니카 자매님은 믿음이 굳건하고 인정이 많은 분이다. 성당 행사 때마다 베로니카 자매가 단술을 만들면 선배가 차를 운전해서 성당으로 날랐다. 그러니 선배는 아내 말을 잘 듣는 착한 남편으로 알려져 교우들에게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성당 홍보분과를 맡아 상당기간 소식지를 매월 내손으로 만들었다.
매번 마감을 하면 원고분량은 모자라서 글 같지도 않은 분과장의 신앙체험이나 묵상 글로 지면을 채우게 되자 선배는 아내가 그 글을 읽고 칭찬을 하더란 얘길 자주 했다. 신문사 수석논설위원을 지낸 후 대학의 신방과 교수로 가있는 프란치스코 사위는 권위 있는 소설가상을 여러 차례 받은 스타작가이다. 그의 소설집을 장인인 선배가 직접 나에게 전해주었고 출판기념회까지도 함께 참석하여 축하한 일도 있다. 선배는 노년에 들어 어려운 중국어를 배우면서 그 발음을 가지고 고민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함께한 수강생 중엔 직장의 후배들도 들어있어 그들 소식까지도 나에게 전해주면서 면학에 힘을 쏟았다. 선배는 자신의 그늘진 삶도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땐 서른이 넘었는데 병역미필로 회사를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렵사리 전차승무원으로 취업하여 생계를 꾸려야했던 과거지사도 숨기지 않았다. 선배는 집에서 형광등이나 주택을 손질하다가 의자나 사다리가 넘어져 갈비뼈나 팔을 골절당하는 사고로 깁스를 한 채로도 우리 사무실에 모습을 보이곤 했다.
지병으로 마지막 입원했던 병원에서 재활에 열심히 매달리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곳에서 얼굴이 잘생긴 간병인을 만나 가족이나 친척인가 했는데 그가 조선족이었다는 사실은 조문하면서 선배의 사위로부터 듣고 알게 되었다. 역대지회장으로서 선배가 은퇴자단체에 협찬금을 한 푼도 내지 못한 것은 생활이 그만큼 곤궁하여 신산한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 같다. 선배 부부와 선배의 딸 부부는 모두 천주교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두 아들 가족은 그렇질 못했다.
장례미사 끝에 장남은 마이크를 잡고 미사 참례자들에게 세례를 받겠다는 다짐을 했다. 온천성당을 떠나온 지 20년 세월이 넘어서 이젠 잊힐 만도 한데 멀리서 찾아왔다고 그러는지 반색을 해주는 교우들이 반갑고 고맙다. ♪오늘 이 세상 떠난 이 영혼 보소서. 주님을 믿고 살아온 그 보람 주소서. 주님의 품에 받아 위로해 주소서♬ 침통한 표정으로 교우들이 흐느끼듯 합창하는 위령성가가 성전 안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화장장을 거쳐 구포의 양지 바른 산자락 한 그루 수목 밑으로 돌아갈 선배의 유해는 말없이 영구차에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