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장군의 실종
사단장은 철수 본대의 출발을 확인 한 후 호위차와 함께 옥천 도로를 찾아 나섰는데, 앞섰던 호위차가 그 도로 입구의 교차점을 지나쳐 곧장 남쪽의 금산 도로로 잘못 들어서게 되었다.
사단장 일행은 그 분기점을 지나는 즉시 진로를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때에는 이미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차를 되돌릴 수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금산 도로를 따라 남하하다가 길을 다시 잡아 옥천 도로쪽으로 가기로 하고, 계속 그 도로를 따라 남하 하던 중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 낭월리 부근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적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차량과 부상병 수명을 보게 되었다. 사단장 일행은 부상병을 차에 분승시키고 다시 남하하던 중 기관총까지 거치한 적의 차단선에 걸려 진출이 저지되었는데 부관(Clark 중위)이 어깨에 적탄을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장은 그곳의 병력 17명을 수습하여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그 서쪽 고지로 우회하여 활로를 찾기로 하고, 어두워질 무렵 부상병을 부축하여 도로의 서쪽 고지로 올라갔다.
고지의 정상에 이르러 부상병을 응급 치료한 다음, 부관을 앞세워 남향길을 찾던 중 부상병들이 물을 달라고 하므로 사단장은 손수 수통을 들고 어둠속을 더듬어 물을 구하려고 계곡을 내려가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실신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사단장 딘 소장이 Clack 중위의 철수부대와 이탈하게 되었는데, Clack 중위는 앞서서 길을 인도하다가 뒤늦게야 사단장이 물을 구하려 간 것을 알고 발길을 멈추고 기다렸으나 자정이 넘고 그 이튿날 03:00가 넘도록 사단장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비로소 당황하여 사단장의 행방을 찾아 나섰는데 어둠속에서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Clark 중위는 그 이튿날 종일을 그 부근의 숲속을 더듬어 사단장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금산 도로를 건너 동쪽의 산길을 따라 영동쪽으로 발길을 옮겨, 23일에야 영동으로 탈출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사단장 딘 소장의 행방은 오래도록 미궁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한편, 사단장은 그날 밤 낭떠러지에 떨어져 몇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으나 어깨와 머리에 상처를 입어 운신이 어려웠던데다 야음이라 Clark 중위 일행과 만나지 못하고 그 이튿날 단신으로 산야를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중 대전을 떠난지 36일만에 8월 25일 친절하게 그를 안내하겠다는 한국인(한두규)이 북한 내무 서원에게 밀고함으로써 대전 남방 36km지점의 진안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되기까지 딘 장군은 낯선 땅에서 적에게 쫓기는 몸에다 언어마저 통하지 않아 음식물을 얻기가 어려웠고, 또 식성에 맞지 않아 36일동안을 거의 냉수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52세의 노구로써 체력을 유지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적에게 항거하였다고 하니, 그 초인적인 의지는 당초 86kg이던 그의 체중이 당시 58kg에 지나지 않았다는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은 그해 10월말 아군이 북진하여 평양 부근에서 사로잡은 한 북한군 병사의 진술에서 그 실마리가 풀려지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그의 생사여부를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마침내 생존이 확인된 것이다.
그리하여 미 의회는 그에게 Medal of Honer를 수여하였는데(1951. 12. 16부) 그로부터 3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친 뒤인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하여 귀환하게 되었다.
그 뒤 그를 밀고했던 한두규는 9. 28 수복 후 경찰에 체포되어 1954년 9월 23일에 "불법 체포죄"로 서울 지법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 서대문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는데, 이에 딘 소장이 그의 감형을 탄원하였다.
그리하여 한두규는 1957년 5월 21일에 좌익수 전향가로 감형되어 출소하였으니, 대인의 도량이 이러함을 알 수 있는 일이다.
■ 대전시내에 끝가지 남아 있었던 그는 적 전차가 시내로 진입하자 3.5"로케트포를 들고 다니면서 전차사냥을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 뒷날 그의 회고록 "General Dean's Story"에서 "유능한 하사관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술회하고, 그가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적의 T-34 전차가 시내에 진입시 제34연대 지휘소에 있었으나 통신 두절로 전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으며,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상황이 불명확하여 당황하고 있던 딘 장군은 대전 철수의 마지막 순간까지 부대를 지휘하고 18:00경 지휘소를 출발하여 대전에서 철수한 후 실종되고 말았다. 후에 딘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대전에 남아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첫째, 제34연대와 그 배속 부대 전투원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둘째,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지휘도의 시범을 보임과 아울러 한국군 부대의 전의를 앙양하게 하는데 기여하며,
·셋째, 북괴군의 전투 방식을 직접 관찰하여 차후의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무에 너무 접근한 탓으로 숲을 볼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딘장군이 파괴한 적전차 : 7.20일 파괴했다고 적혀있다.>
【보충1】세부내용(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1979년, 제 2권(대전부근전투) 부분 발췌)
【보충2】딘 장군 체험수기 : <죽음의 생활 3년>에서 포로가 될 때의 상황
【보충3】미 의회의 명예훈장을 받을 때 딘의 심리적 번뇌(신호상,『별은 잠들지 않는다』(딘 장군 실종 36일간의 행로), 아세아 문화사,p.72, 2000년 9월)
(My Three Years as a Dead Man, 김희덕 역, pp.43-45부분 인용문).....전투 중에 나는 몇 번씩이나 철수를 하였고, 나 자신이 그것을 수없이 원망하였다는 것, 또 한가지는 빼앗겨서는 안될 땅을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사실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과 또한 이것이 영웅적인 전투였다는 그러한 환상 속에 묻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밖에 나머지 이야기는 그만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누구나 의회의 명예훈장을 탈 때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고향 땅을 밟았을 때 나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훈장과 그리고 나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친절한 모든 일에 대하여 참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훌륭한 일을 하거나, 또는 그러한 일을 하다가 쓰러진 사람들이 아무런 포상이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미안하기 짝이 없다.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나'라는 인간은, 내가 한 그러한 일로서는 나무로 만든 훈장이라도 탈 자격이 없다고 느껴진다......
【보충4】지연전의 실패, 大田 함락(국방일보, 2003.7.3)
“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사단장 딘(Dean). 이것은 미 제24사단장 딘 장군이 마지막으로 타전한 명령이다. 최후의 일각까지 진두지휘의 모범을 보여준 지휘관의 마지막 명령.
대전의 군사적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금강·소백산맥 축선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는가의 관건이 되는 요충 중의 요충이었다. 그런만큼 대전 확보의 시한을 7월20일까지로 해 이 시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탱해야만 했다. 이는 포항에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이 증원될 때까지의 날짜를 고려한 시한이었다.
딘 소장은 일본으로부터 급거 파견된 1개 사단으로 북한군 최정예 3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 치열한 접전이 지속되면서 미군은 수적 열세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특히 북한군이 삼면 포위의 총공세로 나옴에 따라 시가전이 벌어지게 됐다.
심지어 딘 사단장 자신이 3.5인치 로켓포를 직접 메고 적 전차를 향해 사격하는 등 사력을 다해 싸웠다. 신속히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딘 소장과 부하들은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포항에서 달려오고 있는 미 제1기병사단의 구원만을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촉박했고, 결국 딘 소장은 시가전에 종지부를 찍고 최종부대인 제34연대의 철수를 명령했다. 때를 놓치면 영동으로의 철수로마저 차단당할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차로써 철수로를 확보하라!”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대전이 함락되고 미 제24사단이 붕괴됨에 따라 사단장 딘 소장도 철수하지 못하고 실종됐다. 그 후 딘 소장은 8월25일 실종 36일 만에 전북 진안에서 적에게 붙잡혀 3년여의 포로생활 끝에 1953년 9월4일 쌍방 포로교환시 다시 돌아왔다.
딘 소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2월부터 종전시까지 미 제44사단장으로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약 1년간 전투 중 제44사단에서 포로가 된 사람이 42명에 불과해 딘 소장은 이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겼다.
특히 그는 군인으로서 포로가 되는 것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장군이 한국전쟁에서 적의 포로가 됐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는 또 자신이 북한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기 때문에 스미스대대를 아무런 준비없이 출동시켜 죽미령 패퇴의 불명예를 자초했노라고 두고두고 자책했다. 부하의 잘못을 책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반성할 줄 아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딘 소장은 사실 한국과는 인연이 많은 군인이다. 미 군정기 후반의 군정장관으로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원조를 갈망하는 국군 수뇌부의 고충을 누구보다 이해해준 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