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600명 길러낸 美 교수 '마지막 수업'
엔로 한동대 로스쿨 교수, 제자 100명과 환송식
윤상진 기자
“딘(Dean·학장) 엔로! 14년 만이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How are you)?” “지혜, 잘 지내(Are you doing well)?”
14일 오후 서울 선정릉역 인근의 120석 규모 행사장. 저녁 6시 30분 정장 차림에 ‘법무법인 OO’ ‘법률사무소 OO’ 등이 적힌 명찰을 목에 건 사람 100명이 모였다.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에서 20년간 법학을 가르친 미국인 에릭 엔로(52) 교수의 환송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엔로 교수는 최근 부모님의 건강이 악화돼 15일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의 귀국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환송식을 준비한 것이다. 이날 행사엔 한국뿐 아니라 미국, 중국, 네팔 국적 졸업생들도 참여했다. 엔로 교수는 지난 20년간 한동대 로스쿨에서 한국인 변호사 약 600명을 길러냈다.
한동대 로스쿨은 미국 로스쿨에 진학하지 않고도 미국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로스쿨이다. 학생 90%가 한국인이다. 졸업생들은 기업, 로펌, NGO(비정부기구) 등에서 국제 소송 업무를 맡는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로스쿨 교수 14명 중 12명이 외국인인데, 엔로 교수는 재미 교포 이희언 교수(22년 재직) 다음으로 오래 재직했다.
엔로 교수는 2004년 한동대에 오기 전엔 미국 로펌 변호사였다. 2002년 개원한 한동대 로스쿨이 교수를 충원하고 있을 때 당시 미국 출신 린 버자드 로스쿨 원장이 기독교 인맥을 통해 엔로 교수에게 교수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기독교 신자인 엔로 교수는 미션스쿨인 한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당시 자녀들이 6·4·2세로 어려 함께 외국으로 떠나기가 망설여졌다. 심지어 수도 서울이 아닌 포항이라는 낯선 도시였다. 주변 사람들도 “곧 전쟁이 일어날 나라”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가 한국행을 택한 건 가족들의 전폭적인 응원 덕분이었다. 아내는 바쁜 그를 대신해 혼자 일주일간 포항에 와 머물기 괜찮은 나라인지 알아봤다. 특히 여섯 살 큰딸의 응원이 결정적이었다. “아빠, 걱정하지 말고 그냥 가요(Don’t worry, Just go)!”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제자들은 엔로 교수를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스승’으로 기억했다. 그는 20년간 한 번도 안식년을 떠나지 않았다. 2018년엔 심근경색으로 응급 수술을 받았는데도 한 달 만에 다시 강단에 섰다. 엔로 교수는 “학생들과 떨어져 있으면 오히려 더 마음이 불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자 이용지(42) 변호사는 “경제적인 이유로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직접 알아봐 주고, 항상 학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준 스승”이라고 했다. 그는 시험 기간이면 학생들을 위해 쿠키를 구워주고, 영어 수업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겐 또박또박 천천히 질문하며 낙오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고 한다.
그는 2010년부터 올해까지 로스쿨 원장을 맡았다. 그는 원장 시절 ‘교수의 연구실 문은 항상 열어놓는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정해진 상담 시간 말고도 학생들이 언제든지 연구실로 찾아와 교수와 대화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독교적 가치관을 지닌 변호사가 되라고 항상 강조했는데, 기독교 정신의 핵심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이라며 “서로 알면 도울 수 있고, 남이 원하는 것을 아는 순간 같이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엄한 스승이기도 했다. 제자 황은상(43) 변호사는 “첫 수업 때 교수님이 들고 있던 수업 자료를 강의실 바닥에 던지면서 ‘법조인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신만의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아직까지 그 말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엔로 교수는 “법조인은 법조문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걸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년을 지내보니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이 가장 큰 축복이었다. 한국은 지리적 자원이 많진 않지만,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있는 게 가장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한동대는 엔로 교수를 기리기 위해 로스쿨의 모의 법정을 ‘에릭 엔로 모의 법정’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ㅡ 조선일보 2024년 6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