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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사명당(四溟堂)의 유적과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 일대 탐방후기
2019. 8.. 20
밀양시 행정구역도
<사명대사기념관과 생가지(生家址)>
사명당(四溟堂)의 생가 복원된 모습
조선 중기의 고승(高僧) 사명당(四溟堂)의 사명대사기념관(四溟大師紀念館)과 사명대사의 생가지(生家址)를 찾게 되었다. 먼저 조성이 일천(日淺)한 사명대사기념관을 찾았다. 대사의 호국정신(護國精神)과 애민애족(愛民愛族)의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1999-2006년까지 넓은 부지면적에 사명대사 동상(銅像)과 사명대사기념관, 추모공원(追慕公園), 기념비(紀念碑) 등을 조성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특히 사명대사의 기념관의 내용물이 빈약하고 표충사(表忠寺)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명대사의 유품에 비해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그 외 전시 내용도 매우 빈약하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사용한 무기류는 활, 낫, 도끼 등 농기구류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명대사의 활약상 1
사명대사의 활약상 2
사명대사기념관(四溟大師紀念館)
승병이 사용했던 무기류 1
승병이 사용했던 무기류 2
승병이 사용했던 무기류 3
사명당의 유품
사명대사의 생가지(生家址)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즉 천리를 한걸음에 달려온 천리마가 목마름을 해소하기위해 물을 먹는 형상의 명당(明堂)이란다. 이 고을에서 사명대사는 풍천(豊川) 임(任)씨 수성과 달성 서(徐)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석장비문(石蔣碑文)에 의하면 어머니가 해산하던 날 꿈에 흰 구름을 타고 누런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대리고 만길이나 되는 높은 곳에 올라가니 그 위에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신선이 앉아 있으므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나서 사명대사를 탄생(誕生) 하였다고 한다.
사명대사의 생가지(生家址)에 복원된 생가
<사명대사>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으나, 그는 세속의 학문은 천하고 비루(鄙陋)하다고 생각하여 황악산 직지사(直旨寺)로 가서 신묵화상에게 출가하여 선문(禪門)에 들어갔다고 한다.
사명대사의 영정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명대사가 일본 교토에 회담하러 간 루트
스승 휴정의 격문(檄文)을 받고 의승병(義僧兵)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우리나라 사찰에 유일게 사당(祠堂)과 서원(書院)이 공존하는 곳은 밀양표충사(表忠寺) 경내에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서원(表忠書院)이다. 그만큼 승려이지만 훌륭한 학자이며 우국충정의 승군의 장수이기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표충비(表忠碑)> 임진왜란 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1544-1610) 충의(忠義)의 높은 뜻을 새긴 것으로 영조 18년(1742)에 대사의 5대법손 남붕(南鵬)이 건립한 것이다.
표충비각
표충비의 비문
이비는 재질이 검은 돌로 전면에는 사명대사의 행적을 후면에는 서산대사의 공덕과 기허대사의 사적을, 측면에는 표충비 사적기를 각각 새겼는데 그 높이가 380cm, 비신(碑身)이 275cm, 넓이98cm, 두깨 56cm로 그 모습이 장중(莊重)하다.
이 비석은 국가에 환란(患亂)이 있을 때 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여주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긴(民間)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憂國忠情)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고 이를 신성시하고 있는데, 이 땀방울은 외기(外氣)의 작용이라고 한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영남루(嶺南樓)와 천진궁(天眞宮)그리고 아랑사(阿娘祠)>
<영남루(嶺南樓)>
밀양 영남루의 위치도
조선시대의 누각(樓閣) 건물인 영남루(嶺南樓) :좌측- 능파각(陵波閣)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는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가의 절벽위에 위의 경관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조선시대의 누각(樓閣) 건물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목조 건물로 신라 경덕왕(742-765) 때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되었고, 고려 공민왕 때 밀양 부사인 김주(金湊)가 다락을 높게 하여 영남루라 하였다고 한다. 본루를 기점으로 좌측에는 능파각(陵波閣)을 우측에는 침류각(枕流閣)을 익루(翼樓)로 거느리고 있고,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다락형으로 웅장한 기풍을 가지고 있다.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평양 부벽루(浮碧樓)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名樓)로 꼽히고 있다.
영남루(嶺南樓):우측-침류각(枕流閣)
영남루에 올라가서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보니 과연 영남루라는 탄성(歎聲)이 절로 나온다, 루의 규모도 지금껏 보아온 것 중에서 제일 크다는 느낌이 든다. 루에서 그려지는 밀양강 주변의 풍광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하게 한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어 이곳이 최고의 납양지(納凉地)이다. 밀양 영남루의 상쾌한 바람을 한 아름 가득 담아간다. 밀양시민들은 이곳을 많이 이용하여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리라 본다.
영남루에서 바라본 멋진 풍광의 밀양강
놀라운 것은 이 건물을 중수(1843-1844)할 당시 이인재(李寅在) 부사(府使)의 첫째 아들 이중석(11세)이 <嶺南第一樓>의 편액을, 부사의 둘째 아들 이현석(7세)이 <嶺南樓>를 썼다고 하니, 그들의 필력(筆力)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 외에도 여러 편액이 있는데, 귤산 이유원이 쓴 <교남명루(嶠南名樓:경상북도를 통틀어서 교남지방이라고 함>와 <강좌웅부(江左雄府:낙동강 좌측의 아름다운(큰) 고을) >, 용금루(湧金樓:높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 송화 조윤형이 쓴<嶺南樓>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부사 이인재(李寅在) 첫째 아들 이중석(11세)이 쓴 <嶺南第一樓>의 편액
이인재(李寅在) 둘째 아들 이현석(7세)이 쓴 <嶺南樓>의 편액
강성여화(江城如畵); 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울려 마치 그림과 같다
용금루(湧金樓)
<천진궁(天眞宮)> 천진궁은 단군(檀君) 이래 역대 8왕조 시조(始祖)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중앙 수좌(首座)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동벽(東 壁)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 고려시조왕의 위패를 모시었고, 서벽(西壁)에는 신라, 백제, 조선 시조의 위패를 차례로 봉안하고 있다. 매년 음력 3월15일을 어천대제(御天大祭), 10월 3일 개천대제(開天大祭)로 춘추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천진궁(天眞宮)
수좌(首座)에 봉안된 단군의 영정
신라 시조 왕위가 봉안된 위패
<아랑사(阿娘祠)>
조선조 명종 때 밀양부사의 외동 딸 동옥(東玉), 아랑낭자를 기리는 사당이다. 아랑전설은 우리나라의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장화홍련전>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아랑사안에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봉안(奉安)한 아랑영정(阿娘影幀)이 있다. 매년 음력 4월16일에 밀양아리랑 행사를 통해 선발된 규수(閨秀)들이 아랑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아랑사(阿娘祠) 봉안(奉安)된 아랑영정(阿娘影幀)
<무봉사(舞鳳寺)와 밀양읍성(密陽邑城), 밀양관아(密陽官衙)>
<무봉사(舞鳳寺)>
무봉사 위치도
무봉사는 신라시대, 신라의 5대 명사(名寺) 중에 하나였던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암자(庵子)로 법조(法照)라는 고승이 창건했다고 한다. 밀양강을 굽어 볼수 있는 강 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 잘 어울리는 운치 있는 사찰이다. 석대웅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石彫如來坐像:보물 제493호)은 통일신라시대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걸작이라고 한다.
무봉사 일주문
무봉사 대웅전
석대웅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石彫如來坐像)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안내문
<밀양읍성(密陽邑城)>
밀양읍성(密陽邑城) 위치도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읍성을 많이 쌓았던 때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 조선 초였다. 밀양읍성은 성종 10년(1479)에 만든 것으로, 다른 읍성들을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100년 이상 일찍 만든 것이다. 밀양읍성의 규모는 길이 2,1km, 높이 2.7m 였다고 한다.
밀양읍성(密陽邑城) 안내판
밀양읍성 성곽 능선 1
1902년 성이 헐리고 난 뒤 그 석재는 1934년 밀양교 가설과 1950년 한국전쟁 때 진지를 쌓기 위해 옮겨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무봉사 뒤에서 아동산(衙東山) 정상까지 복원되었고, 그리고 정상 무봉대(舞鳳臺)에서 서쪽으로 아북산(衙北山) 주릉을 따라 복원되었다.
밀양읍성 성곽 능선 2
밀양읍성 정상 무봉대(舞鳳臺)
<밀양관아(密陽官衙)> 관아는 예전에 벼슬아치들이 모여 나랏일을 처리하던 곳이다. 밀양관아(東軒) 는 조선초에 건립된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1612년 밀양부사 원유남이 중건했다고 한다.
밀양관아지 위치도
그 후 1894년에 일어난 농민항쟁 당시 습격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가 일제가 근대적인 관청을 짓는 과정에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밀양관아는 90년만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2010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관아 출입문인 응향문
동헌인 근민헌 1
납청당
동헌인 근민헌 2
태형대
매죽당
19위의 공덕비 공덕비안내문
밀양관아 입구에 세워져 있는 19개의 유허비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부사와 밀양을 관할하던 관찰사 등이 재임기간 동안에 베푼 선정과 애민정신을 잊지 않고 후세에 널리 알려 표상으로 삼고자 밀양부민들이 마을 어귀나 도로변등에 세운 비로 선정비, 유애비, 불망비라고 불리기도 한답니다.
<박시춘(朴是春)선생의 생가> 작곡가 음악셰계를 기리기 위해 옛집이 복원되었다. 작곡가 박시춘은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수많은 애창곡을 만들어 한국가요의 “뿌리와 가둥”이 되었다고 평가 받는 분이다
초가 지붕으로 된 작곡가 박시춘의 복원된 생가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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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Abnormal님 感謝합니다.
每月 올라오는 論文같은 글은 鄕土史學家다운 마음눈과 面貌가 있는 允重님이라, 모두에게 喝采를 받아도 마땅합니다. ^^
상세한 글과 함께 다시 한번 공부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많이도 조사 기록 하였네. 이런 논문을 쓰자면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수집해야 되는데 수고가 참 많았네. 덕택에 많은것을 공부하고 알게 되었네.
그리고 언제 수봉사와 밀양 읍성까지 갔다 왔능고? 계획세운 나도 포기하고 못갔는데... ㅎㅎ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