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1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코 3,13-19
그리스도께 뽑히면 보장되는 행복: ‘지금’을 살게 됨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직접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한 점은 당신이 뽑은 사도들에게 “당신과 함께 머물게” 하는 특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특권일까요? 주님과 머묾이 왜 좋은 것일까요? 주님과 함께 머물면 자유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 그 고통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 쉬어도 불안합니다.
미래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려 지금을 소진합니다.
그렇게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뭐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며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소환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영화 ‘기억의 밤’(2017)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사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한 가족이 새집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재수생인 동생과 모든 것에 완벽한 형은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형이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이 조금씩 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을 해치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조금 이상합니다.
친부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가족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결국, 집을 빠져나와 경찰서로 도망칩니다.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신고합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신원조사를 해 보고 거울을 보니
자신은 20대 초반의 재수생이 아니라 이미 40이 넘은 아저씨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형이 꾸민 일이었습니다.
형은 사실 20대 초반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찾다가 결국 찾아냈는데 그 범인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 오는 중에 난 사고 이후의 모든 기억이 지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최면을 걸어 모든 것을 20년 전으로 돌려놓고 그 범인이 자기 부모를 살해한 것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꾸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은 조금씩 기억을 되찾게 되었고 결국 이들이 자신의 가족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자신은 착한 재수생이고 형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살인자였음을 알고는 자살합니다.
범인을 찾아 원수를 갚으면 속이 후련할 것이라 믿어 고생 끝에 범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는 했지만
결국 허무함을 깨닫고 형도 자살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허무하게 끝납니다. 과거에 얽매인 인생도 그러할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리고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분노가 끌어 오르는 일들이 그렇게 쉽게 잊힙니까?
혼자 힘으로는 잊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잊어도 괜찮다고 보증해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 누군가는 나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이여야 하고, 또 현재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밖에 없고, 성장하면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예수님과 있으면 과거와 미래가 사라집니다.
현재만 남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행복입니다.
‘첫 키스만 50번째’(2004)는 하와이 라이프 파크에서 근무하는 수의사 헨리와 루시의 엉뚱한 데이트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입니다.
헨리는 그냥 바람둥이였지만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루시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루시는 교통사고로 매일 교통사고 이전의 기억으로 되돌아갑니다.
잠들었다 깨면 모든 기억이 원위치가 되니 최대한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이 또 사라져버립니다.
그래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요?
헨리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매일 그녀를 유혹합니다. 물론 키스도 50번이나 합니다.
하지만 루시에겐 매일의 키스가 첫 키스입니다.
그래도 헨리는 청혼합니다.
하루에 키스하고 잠자고 청혼까지 다 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헨리는 매일 짧은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서 모든 사실을 한 시간 안에 다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루시도 매일 일기를 쓰며 아침에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둘의 사이는 좋아지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헨리가 자신을 위해 해마 연구를 하는 것을 포기하려 한다는 것을 알자 자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희생하는 헨리를 떠나보냅니다.
같이 추억을 공유할 수도 없고 결혼이나 아이를 갖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꿈과 생활까지 포기하며 곁에 있어 주려는 헨리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그간의 모든 기억을 불태우고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게 됩니다.
가끔 만나는 때가 있었지만 둘은 눈인사만 할 뿐이었습니다.
해마를 연구하기 위해 멀리 있는 길을 떠나는데 그의 가족들이 헨리를 붙잡습니다.
그녀가 헨리만 보면 기억은 못 해도 기뻐 노래하고 그의 얼굴만 그린다는 것입니다.
꿈에 헨리를 보는 것입니다.
헨리는 다시 그녀를 유혹하고 첫 키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 본 루시는 자신이 결혼하였고 딸이 있고 헨리가 남편이고 그와 함께 해마 연구를 위해 요트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행복해합니다.
예수님은 헨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내 기억이 다 사라져도 나를 사랑하여 옆에 있을 보증인입니다.
그러니 과거에 잊고 싶은 것은 잊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잊힌 기억들을 대신 책임져 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대로 그분 뜻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면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매일 새롭고 신비롭습니다. 매일 기쁩니다.
과거의 우울과 미래의 걱정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오늘 뽑힌 사도 중 가리옷 유다는 그리스도께 뽑혔음에도 자신을 잊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미래의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돌아가시게 하고 자신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좋은 점은 모든 것, 과거의 꿈과 기억과 소망까지도 그분께 다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으로부터 뽑히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할 일은 그분과 머무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이를 위해 그분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매일 같은 날이지만, 날마다 신비롭고 기쁜 하루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만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나를 부르셨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1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코 3,13-19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 안에 깃들어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을 눈여겨보십니다!
12 사도의 선발은 예수님 공생활 기간에 있어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 사도들의 합류로 인해 예수님의 공생활은 더욱 탄력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업은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제자들 한 명 한 명을 놓고 오랜 묵상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스펙’입니다.
스펙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겠지요.
취득한 자격증, 이수한 코스, 그간 받은 상장, 표창장, 감사장...
열두 제자의 스펙은 사실 보잘것없었습니다.
스펙이 보잘것없으면 성품이라도 무난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대기 좋아하는 제자, 성격이 불같은 제자, 드러내놓고 아부하는 제자, 당대 사람들로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받던 제자, 혁명으로 세상을 전복시키려던 제자...
공생활 기간 동안 제자들의 삶은 불을 보듯이 뻔했습니다. 때로 불과 불이 만나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겠지요.
때로 정치 성향을 달리하는 두 제자가 부딪쳐 불화와 반목을 거듭했겠지요.
때로 성숙과 극단적 미성숙이 만나 속병이 다 생겼겠지요.
한 두세 명은 참으로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충분히 배웠고, 도시물도 먹었고, 배경도 그만하면 괜찮았습니다.
나머지 사람 가운데 대여섯 명은 그저 그랬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놔두셨으면 한평생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온몸으로 뼈 빠지게 땀 흘려 근근이 먹고 살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두세 사람은 ‘사도단’ 가입이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부족한 사도단이었지만 인재 양성의 귀재 예수님을 만나면서
놀라운 변화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강도 높은 특별교육을 제대로 이수한 12 사도들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12 사도 각자 안에 깃들어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작은 사랑의 씨앗을 발견하십니다.
그 작은 가능성, 그 작은 사랑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12 사도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동일한 목적으로 똘똘 뭉칩니다.
굉장한 응집력을 발휘합니다.
상부상조, 일치단결하여 신명나게 공동 사목을 펼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다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니 다른 형제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바라보면 볼수록 하나같이 부족하고 나약합니다.
때로 형제들의 부족함, 이중성, 이율배반, 극단적 이기주의 앞에 크게 실망하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이게 뭔가 하는 생각도 끊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또 괴롭습니다.
그러나 요즘 와서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부족하니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심하니 형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약하니 나를 통한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이토록 부족한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시는 하느님께
그저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은혜롭게도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부족한 우리, 나약한 우리, 미처 준비되지 않은 우리를 그냥 쓰시지 않고,
당신의 합당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거친 황야로 내모십니다.
원치도 않은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오랜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정화시키십니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에로의 부르심,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에로의 부르심, 결혼에로의 부르심, 사제나 수도자, 혹은 평신도에로의 부르심, 오늘이라는 선물에로의 부르심, 봉사직에로의 부르심, 리더에로의 부르심, 병고에로의 부르심, 죽음에로의 부르심...
주님께서는 어제도 우리를 부르셨듯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때로 큰 사건 사고를 통해서도 우리를 부르시고, 때로 한 인간 존재를 통해서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모든 부르심 앞에 보다 합당한 응답의 태도는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야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다가오는 주님의 부르심에 보다 순수하게, 보다 올곧게 응답하기 위해, 더욱 우리 자신을 정화시키고 쇄신시켜나가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과 사람>
2022. 01. 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마르코 3,13-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하느님과 사람>
하느님이신
사람께서
하느님 닮게 하고픈
사람들을
당신 가까이
부르시니
하느님 닮고픈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사람께로
몸과 마음 낮추어
나아간다네
하느님이신
사람께서
하느님 닮게 하고자
사람들을
당신 곁에
지내게 하시니
하느님 닮기 위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사람 곁에서
몸과 마음 비워
머무른다네
하느님이신
사람께서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을
온 누리 모든 이에게
보내시니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이
하느님이신
사람과 함께
쉼 없이 힘차게
하느님나라 일군다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