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제 때 경성법전(현 서울법대 전신)을 졸업 하신 엘리트였으며 평생을 충남 도청에서 공무원으로 재직 하셨다.당시(1960년대)공무원이란
자리가 보직에 따라 상당한 부도 축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나 어린 나의 눈에도 아버지는 청렴 그 자체 이었던 것 같다.명절 때 사과 상자나 기타
선물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놓으신 어머니가 아버지께 질책 듣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었다.아버지는 선물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물건을 가져가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당시는 전화가 귀하여 동네에 전화가 있는 집이 몇 집 안되었는데,급한 일이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전화를 빌려 쓰곤 했으나 내놓고 가는 전화 요금을 돌려주시는 모습도 여러 번 보았다.
이러한 아버지의 삶의 철학으로 공무원 월급만 갖고 아홉 식구가 생활하던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이
된다.또 한 당시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엄격한 편이셔서 어쩌다 겸상(아버지 밥상은 대개 따로 차렸었다)이라도 하게 되면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소화가 잘 안될 정도였다. 밥 알을 흘리는 것은 물론 씹는 소리를 내거나,음식을 입에 문 채 말을 해서 입안의 음식물을 남에게 보여서도
안되었으며 밥은 열 번 이상 꼭꼭 씹어 먹어야 했다.또한 정해 놓은 귀가 시간을 어기게 되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곤 하셨다.
세월이 흘러 스물 두 살이 된 나는 군대에 가게 되었다. 70년대1월 초 어느날, 초등학교 운동장에 군입대 대상인 장정들이 오백 여명 정도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논산 훈련소에 가기 전 간단한
신체검사와 마지막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기 위해 운동장 바닥에 줄지어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
“다방에서
차를 배달해 왔나 봐……누구 아버지인가?”라는 말과 함께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4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때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오백
여명의 청년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사이로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중절모를 쓴 초로의 젊잖은 중년 신사 한 분이 뚜껑 덮은 찻잔을 들고 왔다
갔다 하며 아들을 찾고 있는 모습을……아버지였다!
당시 다방에서 제일 비싼 두향차(흰콩을재료로만든차로서더위나추위를많이타는사람에게적합한차)를 사서 초등학교 운동장까지
직접 들고 오신 거였다.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엄하시며 카리스마 있던 아버지께서 추운 겨울날 군 입대하는 세 째 아들에게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먹이기 위해 뭇 사람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나를 찾고 계신 중이었다.오백 여명의 장정들이 앉아서 지켜보는 가운데 유일 하게 홀로
서서 당신의 아들을 찾던 광경은 바로 거인의 모습이었다.이제는 뵐 수 없게 된 아버님은 1921년생(닭 띠)이니까
지금 살아 계시다면97세이다.
첫댓글 진정 강한건 여자가 아닌 어머니더이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란 말이 있죠.^^
*제인 님,하세요.
군대 어쩌구 하며 위로 할때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답니다.
청춘방 방문을 환영하며, 첫 인사 드립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이 보기에 항상 초연하고 대범 한 것 같지만,
어려울 때나 큰 환란이 와도 가족에게 잘 표현을 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 히려고 하십니다.
저도 아내와 함께 아들 군에 입대할 때 창원까지 내려 갔습니다.
막상 부대 정문을 들어가며 아들의 뒷 모습을 볼때 그 동안 참았던 숙연함을 감출 수 없었답니다.
사내 녀석이 뭐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맹호
겸상하면 소화가 잘 안될정도로 어려웠고,
평소 사적인 대화가 거의 없어 불편하기만 했던 아버지였는데......
군대 가는 날
따스한 차 한잔에 세째 아들에 대한 모든 사랑을 담았지 않았나...생각해 봅니다.
음악과 대화님 머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결 진장한 여자는 어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