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강. 알맹이와 껍데기 (롬 2:23-29)
롬 2:23-29=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26 그런즉 무 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 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 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지난 시간에 잠깐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에 대하여 상고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표면과 이면을 껍데기와 알맹이로 살펴볼까 합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씨의 자람으로 비유 하셨습니다. 씨를 땅에 심으면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된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처음에는 껍데기가 생기고 그 다음에 알맹이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곡식은 껍데기부터 먼저 생깁니다. 알맹이는 껍데기가 생기고 난 후에 생겨요. 그러니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와 알맹이는 한 몸이에요. 알맹이는 껍데기가 없으면 생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 껍데기와 알맹이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어요. 떨어지면 죽어요.
알맹이는 껍데기를 필요로 하고! 껍데기는 알맹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둘이 서로 상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갈라집니다. 농부가 바라는 것은 알맹이이지 껍데기가 아니에요. 알맹이를 다 얻으면 껍데기는 버려집니다. 그러니 알맹이와 껍데기는 한 몸이지만 버려지는 것이 있고 남는 것이 있게 됩니다. 껍데기는 버려지고 알맹이는 남습니다.
이걸 두 언약으로 말하면 껍데기 같은 언약이 있고, 알맹이 같은 언약이 있습니다. 즉 폐하여질 언약이 있고, 영원히 남는 언약이 있다는 말입니다. 폐하여질 언약은 옛 언약이라는 율법이고, 영원히 남는 언약은 새 언약이라는 은혜입니다. 그럼 율법은 껍데기와 같고, 은혜는 알맹이와 같습니다.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있듯이 율법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는 하나입니다. 그러면서 둘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고 있는 짝이에요.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율법 속에 은혜를 담아 놓았어요. 그러므로 율법도 귀한 것이고 은혜도 귀한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가볍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복음을 알면 율법을 버려도 되는 줄 알아요. 율법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온전히 세웁니다. 은혜를 은혜로 드러내기 위해서 열심히 율법이 정죄의 역할을 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은혜가 드러나게 되어요.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항상 같이 다녀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동일해요. 율법 신앙을 통해서 은혜로 얻어진 구원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 신앙이라 함은 율법을 지켜서 의(義)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의(義)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율법 신앙의 본질은 율법을 지킴으로서는 의(義)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신앙을 바로 알면 예수를 더 믿게 되어 있어요. 율법 신앙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율법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정의하기를 천사의 손을 빌려서 준 복음이라고 했어요. 왜? 율법을 복음이라고 합니까? 이는 율법이 복음 안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도록 역사하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를 만나요. 율법이 예수를 만나게 해 주는 길잡이에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율법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되어요. 복음을 곡해하는 어떤 자들이 율법을 폐기한 것으로 여기는데 아니에요.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만큼 율법이 할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은혜로 드러나게 하려고 율법은 끊임없이 살아서 죄를 고발해 주어야 합니다. 옛 언약인 율법이 정죄 해 주어야 새 언약이 복음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껍데기가 열심히 알맹이를 채우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는 껍질과 알맹이처럼 항상 하나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드러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은혜의 기쁨을 알 수가 없어요. 법과 은혜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에요. 법은 은혜를 드러내고, 은혜는 법을 드러내요. 그래서 바울은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 종노릇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복음에 기쁨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건 마치 배 고픔을 모르는 사람이 빵에 귀함을 모르는 것과 같아요. 배 부름의 고마움은 배 고픔을 겪어 본 사람이라야 알 수가 있어요.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에게 배 고픔이란 관념이 될 수가 있어요.
이와 같이 죄 사함의 기쁨은 죄 아래 있는 자들만이 알아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라야 죄 사함이 기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이 복음인 것은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는 자를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짜 복음을 아는 성도는 자발적으로 율법 아래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옛 언약 아래 있을 땐 하나님 말씀이 법으로 다가오지만! 새 언약 안에 있으면 말씀이 은혜로 다가와요. 옛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 말씀은 수고와 슬픔이지만! 새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 말씀은 감사와 쉼으로 다가옵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율법이 부담스러웠어요. 계속 우리의 한계를 지적을 하니 부담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새 언약 아래에서는 우리 죄가 지적당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더욱 더 드러나게 되어요.
야! 내가 이렇게 못난 자인데!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었구나!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신앙생활이 감사와 기쁨으로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더 많이 깨닫고 감사가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더욱 죄인 되게 하여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에 대한 감사가 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감사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쉼을 얻게 되어요.
그럼에도 어쭙잖게 복음 아는 자들이 율법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있어요. 마치 십자가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주접을 떨고 있어요. 이건 복음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복음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 말씀 앞에 복종케 하지 방종케 하지 않아요. 복음은 우리 죄를 합리화 시켜주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죄를 고발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몰고 와요.
그러므로 그 어떤 이유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경히 여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어요. 말씀이 무게가 무거울수록 복음이 더욱 빛이 납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감사가 되어요.
옛 언약이 없으면 새 언약도 없어요. 새 언약 안에서 옛 언약을 받으면 가벼워요. 쉼을 주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더 크게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말씀이라도 내가 어디에서 어떤 정신으로 그 말씀을 받느냐에 따라서 짐이 되기도 하고 쉼이 되기도 해요.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 법이 되기도 하고 은혜가 되기도 합니다.
알맹이는 껍데기를 귀히 여겨요. 절대로 경히 여기지 않아요. 왜냐하면! 알맹이는 껍데기를 통해서 보호 받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진짜 복음을 아는 성도는 율법 신앙을 귀히 여깁니다. 복음을 아는 성도는 “내 맘대로 살거야!” 로 나아가지 않고 도리어 내 맘대로 살지 않고자 해요.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고자 해요. 종으로서 복종이 아니라! 아들로서 아버지 말씀을 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종과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요. 종은 겉으로 받지만, 아들은 마음으로 받아요. 종은 의무로 받지만, 아들은 사랑으로 받아요. 그러니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이 나오지요. 표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하고,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하지요. 또한 육신의 할례가 있고, 마음에 할례가 있다고 하지요.
표면을 육신이라고 하고, 이면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표면이란 보이는 것을 말하고, 이면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해요. 이걸 육신과 마음으로 말합니다.
육신은 보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육신은 “껍질” 과 같고, 마음은 “알맹이” 와 같습니다. 표면과 이면 또는 육신과 마음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겉 사람”과 “속 사람” 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겉 사람은 “표면적 유대인” 이고, 속 사람은 “이면적 유대인” 이 됩니다. 이걸 할례로 적용하면 “육신의 할례” 는 겉 사람의 할례이고, “마음에 할례” 는 속 사람의 할례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고 마음의 할례가 할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으로서의 살아남을 상징합니다. 그럼 율법 아래서 난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이제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나는 죽고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사는 나는 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은혜로 사는 자에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요.
신약적인 의미에서 할례는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 해 봅시다. 우리의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살펴봅시다.
표면(表面)은 보이고, 이면(裏面)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표면은 껍데기이고! 이면은 알맹이라고 했어요. 육신은 겉이고! 마음은 속이라고 했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표면을 육(肉)이라고 하고, 이면을 영(靈)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겉 사람이고! 마음은 속 사람이고! 육신은 껍질이고, 마음을 알맹이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곧 한 사람 안에 존재 양식이 다른 두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둘이에요. 아담 안에서 난 내가 있고! 예수 안에서 난 내가 있어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아담 안에서 난 나는 표면적 유대인이고, 예수 안에서 난 나는 이면적 유대인이에요.
아담 안에서 난 나는 땅 사람이고, 예수 안에서 난 나는 하늘 사람이에요. 그러니 성도는 땅 사람이면서도 하늘에 사람인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흙에 형상과 하늘에 형상으로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고전 15:49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흙에 속한 자의 형상” 이 있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 을 입은 것 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을 입게 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 보세요. “흙에 속한 자” 가 있고! “하늘에 속한 자” 가 있지요. 그리고 그 형상을 입는다고 하지요.
바울은 지금 아담과 예수님을 대표로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란? 조상입니다.
그럼 흙에 속한 자의 조상은 누구인가요? 아담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흙에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흙에 속한 자의 조상이 됩니다.
그럼 하늘에 속한 자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에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자의 조상이 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속하였다” 는 말과 “입는다” 는 말입니다. “속하였다” 는 말은 그와 하나라는 뜻입니다. 같은 종류란 말입니다.
그리고 “입는다” 는 것은 입혀 준다는 말입니다. 이건 우리 노력을 배제하고 있는 말이에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입혀 주세요. 무얼 입혀 준다고 합니까? 형상이라고 하지요.
형상(形狀)! 그러면 퍼뜩 생각나는 말씀이 있지요. 창세기 1장이잖아요. 우리 인간을 창조 하실 때 형상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후 자식을 낳습니다. 이때 낳아지는 자식은 전부 아담의 형상으로 나아져요. 죄인으로 나아진단 말입니다.
이걸 바울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어요. 아담이 입혀 준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분을 보냈어요. 그 분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아담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세요. 그럼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요. 그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얼굴입니까?몸입니까?
예수님의 육신은 아담의 몸과 같아요. 우리 몸과 동일해요. 그럼 육신은 하나님 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아담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있겠지요. 그게 뭔가요? 하나님 마음입니다.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아담의 마음과 달라요. 아담의 마음은 죄(罪)가 장악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의(義)가 장악하고 있어요.
그럼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아담은 범죄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실했어요. 마귀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졌어요.
이걸 예수님이 오셔서 아담 안에서 난 땅 사람을 죽이시고, 예수 안에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세요. 흙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죽이시고, 하늘에 속한 예수님의 형상을 입혀 주십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심겨 졌어요. 이 하나님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하늘을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자연적으로 하늘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육신을 입고 땅에서 살지만 마음은 늘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땅 사람과 하늘 사람은 존재양식이 달라요. 가치관도 다르고 지향성도 달라요. 땅 사람은 육신의 가치로 살고 땅을 지향해요. 하지만 하늘에 사람은 영적 가치로 살고 하늘을 지향해요.
알다시피 겉 사람은 땅에서 낫고! 속 사람은 하늘로부터 났어요. 그러므로 겉 사람은 땅에 가치로 살고자 하고, 속 사람은 하늘에 가치로 살고자 합니다. 겉 사람은 땅에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속 사람은 하늘에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지향성(指向性)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한 몸에 있어요. 이 둘이 서로 싸웁니다. 그러니 성도의 몸에서 가나안 전쟁이 늘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싸우는 전쟁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겉 사람을 붙잡으라고 하고, 성령의 소욕은 속 사람을 붙잡으라고 합니다. 겉 사람은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 속 사람은 예수님의 가치 챙기기를 합니다. 겉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고, 속 사람은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요.
그러니 우리 겉 사람은 표면적 유대인이고, 속 사람은 이면적 유대인인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표면적인 육적인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에 할례의 흔적을 자랑하는 것은 겉 사람이 하는 짓이에요. 이걸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겉 사람의 흔적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흔적을 자랑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속된 말로 얼굴이 예뻐야 여자가 아니고 마음이 고와야 여자라는 말과 같아요. 마음이 하나님의 자녀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되었어요. 아브라함처럼 선택 되었단 말입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하늘로부터 났다고 합니다.
성도는 하늘로서 난 자이기 때문에 육신의 가치를 자랑하지 않아요. 혈통을 자랑하지 않아요. 그러니 나 유대인이다! 나 할례 받았다! 자랑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근거로 제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몸에다가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울의 주장은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율법 아래서 태어난 나는 죽었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몸에 할례 행함만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건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행함을 붙잡고 있으면 표면적 유대인이고, 예수님의 행함을 붙잡고 있으면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내 겉 사람은 나를 신뢰하고, 내 속 사람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표면이다! 이면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겉으로 나타난 율법의 조문을 지키고 육신에 할례 행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나아오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하면 겉으로 나타난 인간의 조건을 의지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외적 조건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선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너희들이 율법대로 살았고 할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건 육신에 속한 것이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에 속한 것은 마음으로 율법에 의미와 할례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율법에 의미를 안다고 한다면 율법대로 산 것으로 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목적이 잇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진짜 율법 정신을 안다고 하면 율법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앞에 항복 하라고 율법을 주셨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서 항복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의 조항 몇 가지를 지킨 것을 가지고 나 잘했으니 상 주세요! 그러고 있단 말입니다. 회초리를 들고 때려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상을 달라고 하고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얘들아! 그건 율법의 껍데기를 붙잡고 있는 것이야! 그것은 표면(表面)이야! 알맹이는 주여 내가 죄인 맞네요! 율법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보니 내가 죽은 자이군요! 그러니 살려 주세요! 라고 하여야 이면(裏面)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할례 받았다고 난 다른 사람이다! 라고 하는데! 너희들이 진짜 할례를 받아서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 할례 받았다 자랑 할 것이 아니고! 주여~ 나는 죽은 자입니다! 라고 하여야 진짜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비록 육신의 할례를 행하였지만 그건 표면적인 의식이고! 실제적인 할례는 마땅히 저주 받고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바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바로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주장은 진정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은 나 율법 지켰다! 나 할례 받았다! 자랑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 외적(外的) 조건을 가지고 난 이방인과 다르다고 하면서 그들을 업신여기고 깔보고 정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너희들이 지금 그런 짓 거리를 하고 있지 않느냐! 어떻게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받았다! 고 하면서 그럴 수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너는 죄인이고! 너는 내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고 할례를 행하게 했는데! 너희는 도리어 그 의미도 모른 채 율법을 받고 할례 행한 것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이방인들에게 창피한 일이 아니냐?
이방인들은 율법도 없고 할례로 안 받았지만 그 양심으로 죄를 아는데 어찌 너희들은 죄인임을 알라고 거울을 주었는데도 모르고 있느냐? 어쩜 그렇게도 멍청하느냐?
내가 창피해 죽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들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감(感)이 좀 잡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어요. 신자 됨을 외적 조건에서 찾고자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들보다도 낫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아니에요. 우린 불신자보다 낫지 않아요. 그들은 율법이 없어도 양심상 바르게 살려고 해요.
이방인들은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을 알아요. 그래서 착하게 살려고 해요. 남에게 피해를 주면 본능적으로 아파하고 그러한 일을 하지 않고자 해요. 그러니 그들의 양심이 율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잖아요.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탐욕을 채우고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뻔뻔스럽잖아요.
우리는 신앙을 핑계로 영악하게 살고 있어요. 신앙이라는 핑계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 있어요. 잘못을 하고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죄인이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당당하잖아요.
물론 죄인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죄인이니까 그럴 수 있지! 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행실을 합리화 하고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죄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이러한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함이 일어나야 하고! 반면에 죄에 대한 미움과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는 사람은 죄인이 그럴 수 있지! 라고 자기 행위를 합리화 하고 자신의 행동을 항변하는 식으로 나아오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 나 죄인이다 어쩔래! 나 막 살거야!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비록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 갈 데가 없습니다! 주님의 피로서 날 정결케 하옵소서!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어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난 후 자신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모든 것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다윗이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는 말은 내 자체가 죄 덩어리라는 고백이에요.
다윗은 자신 자체가 죄 덩어리임에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서 밧세바와 간음하기 전에 우리야를 죽이기 전에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지 않았어요. 도리어 자기 착함을 근거로 죄인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건 마치 오늘 본문에서의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 것으로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과 같아요. 지금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책망하는 것은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하는 것과 동일해요.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실존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선과 악의 개념 자체가 몽땅 틀렸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나님은 다윗에게 야! 너는 죄를 지으나 안 지으나 죄인이라고 알려 주었어요.
다윗은 지금까지 자기 행실을 근거로 착함과 악함을 구분하였어요.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나서는 자기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다윗은 이 때부터 죄관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하였어요. 그것이 압살롬이 반역을 하여도 용서하고! 거지같은 시므이가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조롱하여도 신하들이 저런 놈은 잡아다가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자 그만 두어라! 저것도 다 하나님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신하들을 타일렀어요.
신하들이 법을 들고 나오니까! 다윗은 은혜로 답을 했어요. 이게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만나고 난 후에 달라진 모습이에요.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자신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살고 있음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었어요. 그리하여 온 백성들이 법이 아니라 은혜로 살기를 바랐어요. 나라가 법으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용서로 통치되기를 소망했어요. 지금 우리들의 신앙으로 말을 한다고 하면 행함이 아니라 은혜에요.
법은 반드시 행위를 근거로 역사해요. 지키고 안 지키고를 가지고 판단해요. 너 말씀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말씀대로 산 사람은 살았다는 것을 근거로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해 버려요. 이게 법이에요.
예전에 어떤 분이 자신은 죄를 안 짓고 산다고 해요. 성도 안에는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가면 죄를 안 짓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이 시대 교인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는 다 가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말을 들어보면 자기만 옳아요. 나중에 천국에 가면 아마도 이 분 혼자 있을 것 같아요.
결국 이 분이 죄라고 하는 것이 다윗이 나단을 만나기 전에 알고 있는 죄관과 동일해요.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죄다 아니다 를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이런 사고가 바로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의 사고라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제가 그건 유대교 신앙이라고 하니까 게 거품을 물면서 악악거리는 겁니다.
이 분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대로 살면 지옥 갑니다! 라고 하니 펄펄 뛰는 겁니다. 말씀대로 살다가 지옥 간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저주한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그토록 책망하는 유대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에요. 너무도 말씀대로 잘 살았기 때문에 자기들 눈에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고 식사도 하고 술을 먹는 예수님은 이단으로 보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린 것을 이 시대 교인들의 행위로 생각해서 본다면! 누가 술을 먹고 죄를 지으면 어떻게 교인들이 술을 먹을 수가 있어! 어떻게 교인들이 죄를 지을 수가 있어! 그러는 것과 같아요.
예수를 믿어도 얼마든지 술을 먹을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어요. 아무리 성령 충만 한다고 하여도 자기 육신을 이길 사람은 없어요. 자기 본능을 이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성령 충만으로 성경을 기록한 바울도 죽겠다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우린 예수 믿어도 여전히 죄인의 몸으로 있어요. 그러므로 우린 늘 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잘못한 것이 있더라도 그 모습이 곧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긍휼로 대하여야 해요. 법이 아니라 은혜로 다가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저랑 시비를 한 그 분은 예수 믿으면 죄를 안 짓는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럼 그렇게 사시라고 했어요. 본인이 죄를 인 짓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립니까? 말리면 개처럼 물어요. 그러니 말리지 마세요.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이라고 해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만 천국에 간다고 했어요. 예수님을 위시하여 세리와 창기들을 물론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다 지옥으로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놈들을 지옥으로 집어넣었다니까요. 도리어 그 놈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던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보냈어요. 바리새인들은 지금도 지옥에서 이빨 갈고 있어요.
어떻게 나같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 자를 지옥으로 보낼 수가 있느냐! 어떻게 술 처먹고 바람 피운 저 창기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느냐고 하나님 앞에서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갈고 있어요. 그 이빨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잖아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을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하고 있어요. 아주 쉽게 말할게요.
표면적 유대인이란? 겉 사람의 행실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을 붙잡고 있는 것이에요. 이들을 일컬어 바울은 다른 말로 육체를 신뢰하는 할례당이라고 했어요. 육체를 신뢰하는 할례당을 일컬어 “개” 라고 했다니까요.
“개” 란?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이에요. 그러니 육체를 신뢰하는 자는 곧 이방인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열심이나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였는지! 예수님의 어떤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에 혜택을 보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셨어요. 홀로 다 이루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행위의 반대말이에요. 믿음이나 은혜는 모두가 우리 행위를 떠나 있어요. 그러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위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이걸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다른 보혜사가 오면 그가 나를 증거한다고 하잖아요.
다른 보혜사란? 성령이에요.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성도 안에서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게 하시려고 성령이 오셨어요. 성령을 예수님의 행위를 붙잡으라고 해요. 성령은 예수님에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 행위를 붙잡지 못하게 하세요.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그럼 신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냐? 막 살아도 된단 말이냐? 라고 따집니다. 내 행위를 보지 말고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으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행위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막 살고 안 살고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졌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졌어요. 우리 행위로 흔들리지 않아요. 성도는 이 사실을 평생 믿고 살아가요. 그래 나는 내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 피로 구원받았어!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이 믿음으로 살다가 보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누가 잘못을 해도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라고 법으로 정죄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으로 죽여라! 죽여라! 하여도 성도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된단 말입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죽어 가면서 그랬다니까요. 저 놈들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용서하였어요. 이게 세상 사람과 다름이에요.
성령이 넌 다른 인간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이 성도 안에서 이렇게 간섭을 하세요. 이렇게 살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이렇게 살도록 간섭을 하세요.
그러므로 그 안에서 성령이 알려 주심이 있는 성도들은 누가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살아요. 설령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도 그것을 신앙으로 내어 놓지 않아요. 붙잡지도 않아요.
자신을 살게 하는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지 자기의 반듯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성도들은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자랑치 않아요. 자기 행위를 의지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주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나 죄 안 지을거야! 라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그렇다고 죄지으란 말이 아니에요. 제발 말 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제가 성도의 삶을 언급하는 것은 어떤 몰지각한 자들이 복음 알면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니라고 책망하는 의미에서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 하는 그 악함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의 주(主) 되심에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동원이 된 사건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진 자기 백성 구하기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 죄를 예수님의 희생으로 용서가 주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우리가 살아났어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았어요. 속된 말로 곰이 재주를 부렸는데 돈을 뙤국놈이 차지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 모독을 당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자들이 하나님 망신을 시킨다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이스라엘을 구원을 했는데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 이야기를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라는 말은 이미 예전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전에 기록된 것을 보아야겠지요. 바울이 그걸 인용하여서 말하고 있잖아요.
바울은 지금 예전에 어떤 상태를 가지고 여기에 인용하고 있는지 알아야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알 수가 있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기록된 바” 라는 말은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이에요. 그럼 예전에 이사야가 말한 기록된 바를 추적해 봅시다.
이사야 52장입니다.
사 52:1-15= “시온이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네 힘을 입을찌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2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찌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찌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찌어다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이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었고 앗수르 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 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8 들을찌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9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찌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11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12여호와께서 너희 앞에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여 행하지 아니하리라 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시온아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의(義)에 옷을 입혀 주신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어요. 지금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압제 하에 있습니다. 죽음에 가두어져 있어요. 더러워졌어요.
이스라엘이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어요. 이들이 이스라엘을 핍박을 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하면서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야~ 이 놈들아! 하나님이 있기는 있느냐? 하나님이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이렇게 이방인에게 사로잡혀서 조롱을 당하느냐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말과 같아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핍박하면서 하나님 있으면 나와 봐! 나와 보라니까!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자 그 아래서 니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한 번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는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은 동네 북이에요. 이 놈한데도 차이고! 저 놈 한데도 차이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무슨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렇게 포로로 잡혀 종노릇하게 할 수가 있느냐? 그것도 개 같은 이방인에게 핍박을 받게 할 수가 있느냐? 하나님이 있으면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왜? 그렇게 사느냐? 좀 반듯하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교회로 말하면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교회가 왜? 그 모양이냐! 좀 부흥해야지!
교인들조차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으면 조롱하고 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서 사람의 숫자와 복음을 비례하여 분석하고 있어요.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 하여도 첫 마디가 몇 명 모입니까? 입니다.
저는 많은 전화를 받아요. 많은 분들이 묻는 것이 몇 명 모입니까? 에요. 특히 울산에 있는 분들은 열이면 아홉은 다 이렇게 물어요. 혹간 교회에 오시는 분마다 첫 인상에 실망해요. 몇 명 모이지 않으니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미리 말합니다. 몇 명 모이지 않는다고 해요. 그럼 안 와요. 전화 하시는 분들의 생각은 복음 전하는데 왜? 안 모이느냐? 입니다.
이게 결국 복음을 세속적 가치로 판단하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그러니까 적다고 하니 안 오는 겁니다. 이런 분들은 복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단체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복음 복음하여도 결국엔 자기가 편안하게 놀 수 있는 둥지를 원하지 복음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핑계이고 자기 쉴 곳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육적인 가치관으로 이해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어 있어요.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서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이 그런 마음이에요. 스스로의 처지를 보면 한탄 할 수 밖에 없어요. 현실을 보면 자신들이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도리어 종노릇하고 있잖아요.
자기들 스스로 생각을 해도 하나님이 진정 살아 있다고 한다면 이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한숨만 쉬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실망 할 수밖에 없어요. 패배주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서 위로합니다. 너희들이 잠시 후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내 이름을 이방인의 목전에서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이방인들이 보는 목전에서 멋지게 구원을 해 낼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티끌 속에 가두어져 있는 형국입니다. 티끌이란? 무덤이란 말과도 같습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죄와 사망가운데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 나올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의에 옷을 입을 때가 왔다고 합니다. 이제 좋은 소식을 가져 오는 자가 곧 당도한다고 합니다. 메시야가 온다는 말입니다.
그가 와서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가 오면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보지 못하던 아주 기이한 일들이 벌어 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와서 너희를 티끌 가운데서 구출 해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종의 노래를 불러줍니다.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를 합니다. 52장에서는 깰지어다 하고서는 53장에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어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이사야 53장입니다.
사 53:1-1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사야가 말하는 복음은 자기 백성의 죄를 여호와의 종이 와서 대신 담당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이 와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신 목숨을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백성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 같은 죄인인데! 자기 백성은 여호와의 종이 와서 죄 값을 대신 치루어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이방인으로부터 조롱당하던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봐라! 이 이방인 놈들아! 너희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면서 하나님 백성이나 자기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고 매 일반이라고 조롱을 하였는데! 나는 내 백성들에게 내 종을 보내서 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구원을 해 내어서 너희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업신여기던 것을 단 숨에 역전을 시켜줄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죄 아래서 죽지만! 내 백성은 그가 살려 낼 것이다! 그래서 너희와 내 백성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내 백성들을 핍박하면서 조롱하던 것이 결국엔 너희 머리로 돌아가 영영히 저주로 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놀라야 하는 것은 똑 같은 죄인인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겐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둘 다 저주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겐 은혜를 베풀어 용서가 주어지고 이방인은 법대로 저주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에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라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부어지게 되어서 원수 같은 이방인들 목전에서 상을 베푸는 형국이 됩니다. 봐라! 나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고 반드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해 내는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사야가 말하는 예언에 담긴 속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쓰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 유대인들에게 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유대인의 형국이 이사야가 예언하던 형국과 동일해요. 유대인은 로마의 식민지로 있어요. 또한 그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율법 속에 가두어져 있었어요.
이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이 사실을 바울이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사야가 말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된 바” 에요.
이게 믿어지면 이면적 유대인이고 안 믿어지면 표면적 유대인입니다. 믿어지면 믿어지는 대로 감사하고 살고! 안 믿어지면 유대인들처럼 자기 행위에 의지하고 거드름을 피우겠지요. 각자 행하는 것이 그의 신앙입니다.
스스로를 확증해 보세요. 난 지금 무얼 의지하고 있는가! 나는 무얼 믿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없으면 버리운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신 성도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내어 놓게 되어 있습니다. 내어 놓은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부디 모두가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내어 놓으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를 예수님의 대신 피 흘려주심으로 용서 받음을 감사합니다. 끝날까지 이 고마움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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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 산 목 양 교 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낙원
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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