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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묵상글 (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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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리어 구원을 피어나게 하라.”(이사45,8)
두려움과 불안중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정서인지도 모릅니다. 성서에도 365회나 나오는 말마디가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여기 요셉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말마디 또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입니다. 작금의 위기상황중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다(I AM)”는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 이름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위상의 파스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나다”에는 예수님은 “너희와 함께 있는 하느님(I AM with you), ”너희를 위해 있는 하느님(I AM for you)”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나다’에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가 꼭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제 여섯째 숙부가 오래전 선종시 임종전 꼭 잡고 산 성구가 바로 두려워하지 마라가 들어있는 성구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중 보속요 말씀 처방전으로 많이 써드리는 성구중 하나입니다. 어떤 분은 수십년을 보관하고 지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성구로 시작하고, 오늘 복음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는 성구로 끝맺음이 의미심장합니다. 이에 지체없이 “두려워하지 마라,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로 강론 제목을 정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이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들어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살다 보면, 간혹 “하늘이 도왔다.”라는 감격에 벅찬 고백도 듣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누구나에게 이런 구원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웠던 상황이 하느님의 개입이란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구원받았던 체험의 고백입니다.
한쪽 문이 닫혀 있으면 한쪽 문은 열려 있는 법입니다. 아주 예전에 삼국지에서 읽은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제천在天!”이라, 즉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사마의 사마염 사마소’ 삼부자가 불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찰라에 뜻밖에 하늘서 내리는 비로 살아나는 장면을 본 제갈공명의 탄식의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모든 일이 이뤄짐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고백이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면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의 하느님께 맡기는 믿음의 자세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도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바로 당대의 당신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미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비록 가장 작은 이라 할지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의 하늘 나라 삶이요 세례자 요한은 이런 구원의 경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요한은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하늘 나라는 계속 폭행을 당할 것이나 그런 와중에도 하늘 나라는 계속 성장 실현될 것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좌절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이 대림시기 우리에게는 좋은 모범이 됩니다. 재림의 엘리야 같은 세례자 요한과 함께 깨어 주님의 길을 닦는 회개의 삶에 충실함이 대림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은총의 대림시기와 더불어 하늘 나라의 실현도 분명해집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음은 물론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야, 경청해야 합니다. “들어라!” 역시 성서에 참 많이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침묵과 경청, 겸손과 순종의 믿음을 통해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깊이 깨닫고 회개의 삶이 더욱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시어 오늘 지금 여기서 생명과 빛의 하늘 나라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티토2,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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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2 03:57
- 큰 사람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며 큰 인물에 대해 말씀하시니
오늘은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큰 인물 하면 꿈과 비전이 큰 사람,
포용력이 있고 마음이 넓은 사람,
소탐대실하지 않는 사람 곧 작은 이익을 탐하다
큰 것을 잃지 않고 대의를 쫓는 사람 등이 당장 떠오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사람,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줄 수 있는 사람,
공동선이나 이웃 사랑을 위해 손해 볼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가장 큰 인물이라고 칭송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이런 사람이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가장 큰 인물이라고 한 맥락은 좀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폭행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둘을 연결하면 큰 사람은 이런 사람이 되겠습니다.
거대한 권력의 횡포에도 두려워하거나 졸아들지 않고,
담대하게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큰 권력 앞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처럼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느님의 사람은 이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초연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지녔기에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을 구별치 않고 똑같이 대하고,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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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러시아 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에서 ‘지니’가 나타나서 자기를 이 램프에서 구해줬으니, 농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농부는 말했습니다.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 우유를 생산했어요. 옆집 사람들은 남은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죠.”
농부 이야기를 듣던 ‘지니’가 “그러면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농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주세요.”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부러워하고 그래서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의 부족으로 그 사람처럼 되지 못하면,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농부처럼 그 사람이 망하길 바랍니다.
질투와 시기는 모두가 망하는 길입니다. 상대의 망함을 떠나 나부터 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고유함을 간직하면서 사는 노력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 고유함을 간직하는 사람은 질투와 시기에서 벗어나, 자기 안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듯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많은 이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사제인 즈카르야의 아들로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사람의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해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면서 겸손의 모습을 보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삶이 아닌, 자신의 고유함이라 할 수 있는 주님을 높이는 삶을 철저하게 살아갑니다.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고유함인 주님 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였던 겸손을 본받아, 자기보다 주님을 높이는 삶을 사는데 자기 고유함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인정받는 것이 아닌 주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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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특별한 기회를 기다리지 말라. 평범한 기회를 붙잡아 특별하게 만들어라(오리슨 스웨트 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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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 곧 ‘하늘나라’는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 ‘하늘나라의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그러니 누가 더 큰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다스리는 ‘새 시대’, 곧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하늘나라’는 거부되고 배척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박해당하고, 또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하늘나라’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된 엘리야라면(말라 3,23; 집회 4-10 참조),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된 구세주’심을 선포해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방치하거나 빼앗겨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입니다. 한갓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겨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끄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들어라”는 말씀은 ‘쉐마 이스라엘’을 떠올려 줍니다. 곧 ‘들어라’는 히브리 단어 ‘쉐마’는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보다, ‘마음의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하신 분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의 귀에 담아’, 그분의 말씀을 삶에 옮길 수 있도록 은총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당신의 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우상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게 하소서.
세상이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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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 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려 일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고, 예수님께서 하늘이었지만,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제 욕심과 탐욕,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이웃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일입니다.
유혹 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권력의 횡포를 겪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과 인격을 우습게 여기는 욕망을 봅니다. 성을 상품화하고,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먹질이나 욕설만이 폭력이 아니랍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잘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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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관에서 사용하던 노트북은 배터리가 부풀어 올라서 고장났습니다. 컴퓨터를 잘 아는 형제님이 노트북을 가져가서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었습니다. 배터리도 새로 바꾸었고, 메모리 용량도 늘렸습니다. 한글 프로그램도 최신 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10년 된 노트북이 새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여행 갈 때 사용하던 노트북은 인터넷이 안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컴퓨터를 잘 아는 형제님이 노트북을 가져가서 인터넷이 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었습니다. 다만 인터넷이 될 수 있도록 커넥터를 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있던 노트북들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할 일입니다. 저의 사정을 아는 형제님이 새로운 노트북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2024년 신형 노트북입니다. 아무리 업그레이드를 시켰어도 2024년 신형 노트북의 기능과 성능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제가 노트북을 강론 쓰고, 인터넷 검색하는 용도로 쓰기에 새로운 노트북의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합니다. 서울에서 온 동창 신부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벤츠 타고 마트만 다니면 벤츠가 아까운 거 아닌가!’ 이참에 새로운 노트북의 기능과 성능도 배워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미리 준비한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본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십니다.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걸 기꺼이 허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아주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에게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였지만, 사실 우물밖에는 엄청난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구가 세상의 전부이지만 지구는 태양계의 부분입니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말씀을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중학생 때 제법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오니 상황이 달랐습니다. 저보다 잘하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공부는 외우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거였습니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손을 내미는 따뜻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인정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한문으로 ‘宗敎’라는 말은 으뜸가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영어로 'Religion'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엉켜 있다면 다시 풀어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엉켜 있다면 이 또한 풀어서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의 핵심은 ‘비움’입니다. 내가 집착에서 벗어날 때, 참된 평화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엉킨 실타래는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요? 이 또한 비움입니다. 내려놓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의 비움은 ‘회개’와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을 정하고, 순위를 정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있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양심을 따라서 살았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였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순위를 정해서 시험을 치르듯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쟁과 업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협력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사람과 봉사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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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그 칭찬이 장난이 아닙니다. “여자에게 태어난 이 중에 요한보다 더 큰이가 없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이래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를 통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그중 요한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칭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요한은 철저하게 하느님을 위해, 다가올 메시아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내 욕심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내 생각이 들어가기 마련이고, 내 의지가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내 것이 들어갈 때 상대방과 거리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나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달라지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충돌하고 그렇게 충돌하는 것이 미움과 시기와 다툼으로 번지게 됩니다. 이것이 보통의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요한처럼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산다면 미울 일이, 시기할 일이, 다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요한의 삶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뒷말은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까지 이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시더니, 한 줄 건너니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하늘나라는 누구부터 들어갔습니까? 주님부터입니다. 주님이 하늘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주님을 보고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모시는 사람,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고, 그들이 요한보다 더 크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먹고 마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보기에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주님과 함께 그분 안에서 당당히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둬!!!!! 하느님 하시게.
이렇게 되도록 도와주세요.
저렇게 되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어떻게든 들어주시려 하지 않으실까요?
이렇게 준비하고 저렇게 준비하고 있는데….
혹시 그때마다 우리 기도가 바뀌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손길이 끼어들 틈 없이
우리는 기도를 쏟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두세요.
두세요.
하느님 하시게
그냥 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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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에 안기는 이>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2)
빈
하늘나라
찬 이는
들어갈 수 없지요
빈 이만
안길 수 있을 뿐
열린
하늘나라
닫힌 이는
들어갈 수 없지요
열린 이만
안길 수 있을 뿐
너른
하늘나라
좁은 이는
들어갈 수 없지요
너른 이만
안길 수 있을 뿐
새하얀
하늘나라
검은 이는
들어갈 수 없지요
새하얀 이만
안길 수 있을 뿐
해맑은
하늘나라
시커먼 이는
들어갈 수 없지요
해맑은 이만
안길 수 있을 뿐
따스한
하늘나라
차가운 이는
들어갈 수 없지요
따스한 이만
안길 수 있을 뿐
부드러운
하늘나라
거친 이는
들어갈 수 없지요
부드러운 이만
안길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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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요한 때”나 예수님의 때는 시간과 관련지어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듣는 이의 영혼의 상태에 관한 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때를 뜻하는 말이 분명합니다. 시편은 그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시대에 정의가, 큰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시편 72,7), 앞서 가르침을 받은 이가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될 때 와서,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곳에 길을 내듯 기초적인 사실을 알립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고 해서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비아제타이’는 ‘폭력을 가한다’는 능동적 의미가 아니라 ‘폭력을 당한다’는 수동적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과 예언자라는 교사와 관리인들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거저 주신다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는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이와 같이 사물의 핵 속에는 차이가 아니라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안다는 것은 관계를 안다는 뜻이다.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 됨을 알거나 순수하게 아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앎”이다. 복 있는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고 사랑한다. 그는 하느님 안에 있으며, 사물과 상호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 방법이야말로 우리가 장차 영생 속에서 누릴 복에 꼭 필요한 요소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삶의 열매다. 그것은 하늘이다. “하늘은 사물 한가운데 있다. 하늘은 모든 끝에서 똑같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변증법적 의식도 사물 한가운데 있다. 그것은 모든 끝에서 똑같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것은 양자를 아울러 생각하고, 양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변증법적 의식은 설교 12에서 언급한 차이들을 화해시킨다. 변증법적 의식이야말로 새사람,하늘의 사람이 되었다는 징표다. 실로, 변증법적 의식은 복된 의식. 복 있는 사람의 의식이다. 깨끗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깨끗함이 이원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면, 복은 이분법 - 이원론 - 의 끝장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신적인 은총의 바다에 푹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존재의 테두리”이기에, 엑카르트는 하늘을 가리켜 “둥근 존재” 라고 부르며,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둥글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영생과 어깨동무하고 다가오는 복은 둘 됨을 끝장내고 하나 됨을 시작한다.(29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이리하여 지상에서의 그의 꿈은 이루어쳤고 이제 남은 일이라곤 단 한가지 천국에 가서 사랑의 임금님이신 예수님을 온통 차지}하는 것뿐이었다. 천국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감추시지 않고 영광중에 몸소 나타내 보이실 것이다.
히야친따는 육체척 힘이 쇠진하는 반면 그 영혼은 정점 더 깊은 정신계의 신비에 철두철미하게 몰업되어 갔고 그 눈은 서서히 다가오는 영원한 세상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머지 않아 닥쳐 올 섭리적인 시련에서 스스로 져야 하는 고행의 십자가를 견디어 낼 힘을 하늘의 발현자께 간청하고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열이 오르는 때문인지 때때로 히야친따는 루치아에게 하소연을 하는 때가 있었다.
“난 머리가 많이 아파. 게다가 목이 말라. 그렇지만 죄인들을 위해 희생을 드리고 싶기에 물은 마시지 않겠어!”
또 어떤 사람이 무엇이 필요한지 말해라 했을 때 그녀는,
“고마워요. 그렇지만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라고 대답했으나 모두가 방을 나가자 루치아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정말은 목이 퍽 말라. 허나 또 한 가지 희생을 하려고 물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
다음날 어머니가 우유 한 잔을 가지고 왔다.
“엄마, 고마워요.”
하고는, 잔을 밀어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지 마시게 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얘는 아무것도 마시질 않으니.... 무얼 주어도 다 싫다고만 하는구나.”
하고 불쌍한 어머니는 한탄을 하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물러갔다. 루치아는 너무 안스러워서 앓는 친구에게 타일렸다.(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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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fisherpeter] 2024. 12. 12. 05:13 ㅣNo.178397
오늘 복음은 사실 어려운 부분입니다. 짧은 부분이지만 실제 이 내용은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의미의 공극이 큽니다. 예전에 언제 제가 오늘 복음을 개신교 성경을 인용해서 한번 설명을 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려고 다양한 영어성경과 주석을 봐도 명쾌한 설명이 잘 없습니다. 최대한 오늘 복음을 제 나름대로 자료를 찾은 걸 바탕으로 해서 묵상을 한번 공유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의 큰 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여자에게서 난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인물이라고 하시면서 그런 세례자 요한도 지상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한다고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미소한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더 낫다는 말입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표현으로는 하늘나라는 폭행으로 시달릴 상황에 놓여있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성경 번역이 틀렸다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뉘앙스가 원문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어성경 몇 권을 비교해 봐도 조금은 달리 표현하고 싶습니다. 딱 이 부분만 놓고 봤을 때는 개신교가 좀 더 잘 번역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전에는 그 근거를 제 언어적인 감각으로 봤을 때 이렇게 추론을 했는데 지금은 다양한 주석을 보고 추론을 하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실 천주교 자료에서도 명확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고 표현을 해 놓았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전반적으로 이해를 해야 오늘 복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자적인 의미만 보면 이해가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이 세상에 아무리 권세를 가지고 있고 한마디로 큰 소리칠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좀 더 강조하면 지상에서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라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과 비교하면 그 보잘것없는 사람이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용두사미의 반대 의미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하늘나라가 상대적으로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럼 더 좋다면 그곳을 가려고 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고 생각일 겁니다. 그냥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만 보면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구원의 의미를 보통 인용할 때 은총과 자비로 얻어진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물론 그 내용도 성경에 언급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전적으로 그렇게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오늘 복음이 또 보여줍니다. 제가 이 앞에 묵상글에서도 표현을 했지만 마치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함께 정의와 공정도 생각해야 한다는 게 바로 이 말 뜻입니다.
우리 성경은 폭력을 사용해 하늘나라를 빼앗는다고 했는데 이 말을 좀 달리 의역해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그저 그냥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아주 쉽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공로로 들어간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강조하는 것은 “그냥 공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나마 좀 더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병행 본문을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16장 16절입니다. 루카복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표현한 폭력은 이런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전에 ‘침노’로 표현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제가 천주교로 개종 후 보니 그 침노가 바로 루카복음 16장 16절 병행 본문을 보면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침범은 원래 평화적인 게 아니고 부정적인 뉘앙스인데 당연히 우리도 폭력이라는 물리적 수단이 동원돼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면 오늘 복음이 좀 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달리 말하면 침범을 해서라도 하늘나라는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인 평화적인 방법으로 갈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에는 역설적인 뜻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좀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이젠 이 의미가 완전히 이해될 것입니다.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천국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천국이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접근하면 오늘 복음이 조금은 어렴풋하지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묵상이지 이게 맞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만 더 부연하자면 오늘 복음에는 이런 숨은 뜻도 있을 겁니다.
세례자 요한을 이 세상의 상징적인 큰 인물로 표현해 비교한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 세상 권세, 권력, 지위 이 따위는 그냥 들에 핀 꽃처럼 나중에는 시들어버리게 될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매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을 알아서 그곳에 갈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문맥적인 의미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최종 한 마디로 오늘 복음을 표현하면 하늘나라 가는 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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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소신이 없는 신앙의 끝
강만연 [fisherpeter] 2024-12-11 ㅣNo.178390
정치에 입문한 한 검사 출신의 차기 대권을 노리는 사람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 그 사람의 정당에 대한 호불호 없이 중립적인 자세로 요즘 그가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번 우리 자신도 이런 사람의 행동을 보며 성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공유를 하고자 합니다. 한때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자기 도취에 빠져 이상한 환상에 젖어 대권놀음에 완전 빠져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최근 보여준 행동에서는 이미 이제는 앞으로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며칠 사이에 그에 대한 신뢰도가 완전 붕괴된 것입니다.
며칠 전에 그가 보여준 행동이 야권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다가 그것도 처음엔 진정성이 있는 듯 보였는데 나중에 결과를 보니 진정성이 없었고 순간적으로 위기를 회피하려고 했으며 자기 이익을 계산해 행동한 것처럼 보여 이젠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여론의 향배가 짙은 게 사실입니다. 만약 처음에 자신이 취했던 행동을 초지일관 계속 밀고 갔더라면 그 결과에 상관없이, 당파에 상관없이, 국민들도 마찬가지로 당파에 상관없이, 정치적인 노선을 떠나 그나마 대권주자로서 자격을 판단할 때 조금이라도 좋은 점수와 신뢰를 줄 수 있었을 텐데 상황에 따라 변하는 정국의 추이에 따라 자신의 소신이 자꾸 번복이 되니 이젠 완전히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속한 정당에서조차도 이젠 배제시키려고 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그런 입장이 여론과 다른 매체를 통해서 감지를 했는지 또 다른 말로 국민과 당원들에 대해 이상한 논리로 사탕발림 같은 말을 하긴 하지만 이젠 그 사람들도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편에서도 그가 취한 행동이 대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겉으로는 대의를 위해서 하는 것 같은 모습을 취하지만 실제는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잔꾀를 사용하다가 자기 꾀에 걸려 넘어져 이젠 돌아올 수 없는 불신의 강을 건넜다는 것입니다. 이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본인 스스로가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걸 신앙에 한번 접목해 우리 신앙을 되돌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실제 말로도 하긴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도 묵시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외형을 취하긴 하지만 셰례 받고 난 후에 세례 갱신서약을 계속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서약에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명시적인 표현은 없지만 그 속에는 마귀와 죄를 끊어버겠다고 하는 선언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표현만 다르다뿐이지 실제 이면의 뜻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과 의미는 동일할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건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든 것입니다만 제가 앞에 정치의 한 단면을 사례로 든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처음의 마음을 초지일관 유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결혼을 할 때 결혼서약에서 평생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해도 그 다짐의 유효기간이 긴 사람도 있지만 길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백년해로 할 때까지 그 마음이 변치 않으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며 가는 신앙 안에서 우리의 마음도 위에 언급한 사람처럼 줏대없이 갈팡질팡한다면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마음은 어떨 것 같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아무리 하느님의 마음이 선하시고 자비하시다고는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마음 줬다가 또 엉뚱한 데로 향했다가 한다면 그 자식이 이뻐 보이겠습니까? 제가 봤을 땐 마지못해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한다고 하셔도 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부부가 있다면 여자가 남편이 남의 여자한테 눈길을 줬다가 자기한테 줬다가 하면 그런 사람을 남편이라고 남편 대우를 해주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런 자식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실지는 제가 하느님이 되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긴 하지만 제가 봤을 땐 아무리 하느님이시라도 그렇게 사랑스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는 인간이 나약해서 변덕을 부리거나 조금은 흔들릴 수는 있을 겁니다. 그 정도는 하느님께서 약간은 눈감아주시겠지만 허구한 날 그런 게 자주 반복된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언젠가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게 될 때 참으로 그런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나 제대로 들고 하느님을 바라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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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과 요한은 신구약 인수 인계자 /
박윤식 [big-llight] 241211 19:46 ㅣNo.178392
우리는 이 대림시기에 세례자 요한을 자주 만난다. 앞으로 며칠간은 더 자주 만날 게다. 그가 머문 광야는 유혹을 떨치는 자리였고 그가 촉구한 회개는 진리를 향해 몸과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대림에 우리의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하겠다. “진실로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는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기에 위대하다. 처음에 모두가 그가 구세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단다. 그만큼 그의 말과 행동은 유다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삶은 엘리야 예언자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임박한 구세주 출현을 알리는 예언자이므로 구약의 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위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때로는 예언자들이 배척받고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의 수난을 예표하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낮추며 ‘작은 이’ 삶을 살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며 예수님 앞에서 정녕 작아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비우며 광야에서 살았다. 아마도 가장 낮은 삶을 살았으리라. 이제껏 우리도 세속에서 모든 이 중 나보다 잘난 이 없는 줄 알고 지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늘 나라의 삶을 살기로 한 이상, 그 누구보다 나를 낮추며 살자.
사실 요한처럼 준비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주인공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조연’들이다. 세상살이에 조연 없는 주연은 없다나. 그들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이 있기에 행사는 빛나고 성공을 거둔다. 사실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을 잊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증언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 태어난 이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늘 나라는 왜곡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시킨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폭력이 난무하여 마치 힘깨나 설치는 자들이 진리의 빛을 감추고는 정의를 짓밟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가 하늘 나라를 쉽게 다룬다. 죄짓지 않는 이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한다.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이들만 가는 곳으로 여긴다. 단지 그것은 우리들만의 생각일 뿐, 거기에는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이들만 가는 곳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기도하는 삶을 살자.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삶일지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판단이지 그분 판단은 아니니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더 크단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여전히 폭행을 당한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설쳐 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사실 요한까지만 해당된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예언서와 율법의 ‘한 점 한 획’도 소홀히 다루는 것을 삼가자. 귀 있는 이는 분명히 새겨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그는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다. 신약의 출발점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언급하신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자신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지는 해요, 예수님은 떠오르는 해였다. 자기에게 주어진 주님의 선구자 역할을 다한 뒤에 조용히 물러났다. 요한이야말로 주님을 돋보이게 하고, 자신은 주님의 배경이 된 안개꽃과 같은 이다. 그의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다. 그는 하늘 나라가 가져다 줄 구원을 미리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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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1,13-14).
여기서 ‘벌레’와 ‘구더기’는 비참함과 경멸을 뜻합니다(시편 22[21],7 참조).
이스라엘이 유배로 벌레와 구더기처럼 비천하고 경멸당하는 대상이 되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오른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여전히 그들을 잊으시지 않고, 포기하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구원으로 이끄시고자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마르 1,4)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증언한 예수님께서는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죄로 내 처지가 벌레나 구더기와 같아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음을 당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나아가 모든 죄인에게도 이 사랑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이 사랑이 ‘나에게만’ 이루어지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폭력으로 빼앗으려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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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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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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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 11)
하늘 나라를
듣고
보고 배우는
희망의
대림
시기입니다.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겨울 나무를
만납니다.
하늘 나라는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이들로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이들에게서
결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겁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태어나고
복음으로
다시
살아갑니다.
우리들의
삶으로
더욱 빛나는
하늘 나라입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호함과
진심어린
실천으로
우리의
하늘 나라는
우리의
생활이 됩니다.
누구에게서
태어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삶을 잃으면
하늘 나라도
잃게 됩니다.
잃었기에
다 찾는 것이
삶을 위한
진정한
회개입니다.
고통과
수난으로
다시
일어서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가
지켜주는
우리의
반가운
생활입니다.
우리의 생활로
하늘 나라의
기쁨과 희망을
되찾는 은총의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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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두고 하신 말씀은 꽤나 아리송합니다.
우선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확 띄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세례자 요한은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어 바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내던지십니다.
그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들었을 때 엄청 기분 상하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예수님의 이 상반된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 말씀은 절대로 세례자 요한을 격하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무시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은 한 밤중에 등불을 켜든 시각 장애우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이 든 등불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앞길을 밝혀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시대를 정리하는 구약의 마지막 대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신약의 백성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는 오늘의 우리 역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 나라는 그야말로 멀고도 먼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다가서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입국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까마득한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 이후 하늘나라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늘나라 입국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건 아니다’며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백성들과 하늘나라 사이를 가로막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수천가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아닙니다.
엄청난 요구를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단 두 가지입니다.
이 땅의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서 제시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
이 간단한 방법을 통해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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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신다.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들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에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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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늘 나라는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것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시며 여자의 몸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에게서만 태어난 존재는 하늘나라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나야 하고 성령은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압니다.
이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여기서 폭행이나 폭력은 긍정적인 의미일까요, 부정적인 의미일까요?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하고 있다.”
저는 전에 하늘 나라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유대 지도자들이 그분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폭력’은 분명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도구로서 부정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해석을 읽어보니 대부분은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낮추고 버리는 이들이 하늘 나라를 쟁취한다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하늘 나라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이를 위해 폭력을 쓰게 하는 자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며 평화를 얻습니다.
이를 어머니에게서 배웁니다.
어머니는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구약에서 레베카 어머니는 야곱에게 에사우의 장자권을 강탈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겨우 불콩죽으로 말입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분이 어머니이고 교회이고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자녀의 지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자녀만이 아버지에게 이러한 종류의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창옥쇼 리부트] ‘아빠, 그동안 어찌 그렇게 사셨어요?’란 프로그램은 조금은 아빠를 고발하면서도 아빠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34년 만에 철든(?) 남편’에서 결혼 34년 차 아내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터뜨립니다.
“남편이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두 아이를 다 자연분만으로 낳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가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들이 한창 자랄 무렵 ‘아이가 왜 날 보면 우는 겨~?’
그 말에 저는 ‘모르는 아저씨라 우는 겨~.’ 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하여 큰딸이 34살, 아들이 32살이 되었는데 딸이 결혼해 손녀를 낳고서야 자신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홀했는지 남편 스스로가 느끼고 있습니다.
손녀가 예쁘긴 예쁜지 카톡 프로필에 사진 올리고 모임에서 자랑까지 합니다.
남편은 30년 전에는 왜 이 기쁨을 몰랐을까요?”
남편은 지금 와서 매우 미안해하면서 아내가 ‘골반’이 좋아서 잠깐 전화 받고 오면 아기가 태어나 있더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다 어이없어합니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골반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때 김창옥 씨가 말합니다.
당시 남편이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돌봐야 할 동생이 다섯 이나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분명 그때 걸려 왔던 전화는 일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섯 동생과 어머니, 아내, 두 자녀의 가장으로서 당시는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을 할 정도로 돈을 벌어야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하고 손주가 태어날 때쯤엔 아내는 ‘내가 필요할 때 없었던 남편’, 자녀들은 ‘우리가 자랄 때 없었던 아빠’가 되어있습니다.
아빠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은 너무 당연하기에 그것을 주장할 수 없어
그저 미안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아빠에게 폭행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들의 설문 조사에서 자신에게 고민이 생기면 먼저 이야기를 나눌 사람으로 ‘1. 엄마, 2. 형제, 3. 친구, 4. 선생님, 5. 아빠’ 라고 적습니다.
아빠는 자녀가 자신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50%이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4%만이 아버지를 대화 상대로 여겼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해 주는 것만큼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강탈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비가 오면 일을 가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돈 때문에 걱정을 하셔야 했습니다.
저도 아버지가 일을 나가지 않으면 불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오늘은 일 안 가?”라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서운하셔서 조금 화를 내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아들인 제가 돈 벌어오는 기계처럼 당신께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돈은 바로 성령과 같이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당해주는 분이 계신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린 양은 구약에서 폭력을 당하였습니다.
그 피가 문설주에 칠해지고 그 살이 그들에 의해 먹혔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먹히며 자녀에게 평화를 줍니다. 이것을 아는 자녀들은 가출하지 않습니다.
가출해서 살아봐야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사는 것보다 나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 부모에게 폭력을 가해서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사는 곳에 살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세례자 요한이 왜 ‘엘리야’와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렸습니다.
그때 바친 제물은 소였습니다.
제단에 바쳐지는 소는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하늘 나라가 폭력을 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아드님을 사르기 위해 성령을 불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불로 우리가 하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엄마를 통해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존재일 수 있음을 아는 게 하늘 나라입니다. 아버지에게 돈 벌어오라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당연히 아드님을 죽여 그 살과 피를 내어달라고 청할 수 있습니다.
이 위치란 얼마나 행복한 위치입니까? 하느님께 이러한 폭력을 쓸 줄 아는 존재만이 하늘 나라의 행복을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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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는 ‘구원의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1) 여기서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말라키서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말라키서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3-17).”
엘리야 예언자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하는 일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한 것은, 사람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일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다.’ 라고 강조하신 것으로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메시아의 구원을 잘 받으려면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대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회개하여라.”가 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입니다.
그렇지만 회개를,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나 대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시는 ‘자비’입니다.
<원래 ‘자비’는 어떤 조건도 없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무상으로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 자비에 대한 ‘응답’입니다.
‘혼인잔치의 비유’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 비유를 보면, 임금은 잔칫상을 차려 놓고서
사람들을 부릅니다(마태 22,2-4).
초대받은 사람들은 잔치에 참석해서 이미 차려져 있는 음식을 먹기만 하면 됩니다.
음식 값이나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예물을 가지고 가서 바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차려져 있는 잔칫상에 앉아서 잔치 음식을 먹는 것. 그렇기 때문에 ‘회개’와 ‘용서’도
‘구원’이라는 큰 은총에 포함되어 있는 은총입니다.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3)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주신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7-20).”
‘살길’을 알려 주고 그 길로 인도해도, 그것을 거부하고 ‘죽을 길’로만 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람은 구원하시지 못합니다.
권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서 강제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상황도 비슷합니다.
시민들은 ‘살길’을 알려주면서 그 길로 함께 가자고 호소하는데,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죽을 길’로만 가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회개’는 ‘살길’을 선택하는 지혜이고, 회개를 거부하는 것은 ‘죽을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고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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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11-15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정도나 상태가 고만고만한 것을 놓고 어느 것이 더 나으니, 이건 저것만 못하니 하며 다투는 모습을 두고 “도토리 키 재기”라고 합니다. 그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서로를 비교하며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겠지요. 우리 눈에 도토리가 그렇게 보인다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습이 그럴 겁니다. 자기가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부족한 이들을 도와줌으로써 함께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일진데, 그럴 생각은 안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돋보일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런 우리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도 참 마음이 답답하실 듯 합니다.
물론 부족하고 약한 우리 모습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키를 재는’ 일은 필요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잘 하는 게 무엇이고 잘 못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약하며 어떤 부분을 채워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문제는 키를 재는 기준점을 어디로 잡는가 하는 것이지요. 세상은 키를 땅에서부터 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곳이 바로 ‘땅’이라는 이름의 물질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키를 땅에서부터가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이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정한 규칙에 따라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을 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언급하시는 알쏭달쏭한 말씀이 지닌 뜻이 이해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땅’, 즉 이 세상을 기준으로 하면 그 누구보다 영적으로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평가의 기준이 ‘하늘’로 바뀌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세례자 요한이 죽기 전이었기에, 즉 그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전이었기에, 이미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성인’(聖人)들을 비교 대상으로 하면 그들보다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사람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게 한 그의 공로에 따라 ‘재평가’가 이루어지겠지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하느님 뜻에 철저히 순명했기 때문입니다. 그 겸손과 순명 덕분에 ‘하느님 나라’라는 복된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 뜻을 따르기보다 내 뜻을 이뤄달라고 강요하고, 내 소원을 이뤄주시지 않으면 그분을 믿지 않겠다는 협박의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억지로 뺏으려 드는 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이들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충만히 받으며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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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요한에 이르기까지 ”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하였습니다.
예언자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또 백성의 입장을 하느님께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예언자와는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예언자의 모델로 보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꼽는 것이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문서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역할이나 사상을 문서로
남기는 것인데 그들은 주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였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활동했던 예언자들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기원 전 9세기에서 8세기에
활동했다고 보는 호세아, 요엘, 오바디야, 요나, 미카,
기원전 7세기로 보는 나훔, 하바쿡, 스바니야가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 중에 활동했던 다니엘, 에제키엘이 있고 유배 후에 활동했던 요엘, 학까이,
즈카리야가 있습니다. 에제키엘과 더불어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대 예언자로 보고 있는데
이들의 문서의 양이 많기 때문이고 특히 이사야는 장구한 편집기간이 있기 때문에 그 양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예언자들이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과 그 문서를 편집했던 시기에는 차이가 있지요.
예언자로서의 활동했던 나탄, 사무엘 등은 왕권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고 문서보다는 중재로서의
활동을 했던 것이 후대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도
학자들 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당신을 기준으로 예언자로서 신분이 마감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마태 11,12-13)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주님께서는 엘리야와 비교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다시 재림하리라는 메시아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위대한 인물로 꼽으면서도
하늘나라에서는 그보다 그곳에 있는 이들이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심으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올려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세례자 요한의 예언직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시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세례자 요한도 순교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을 위해 길을 닦은 세례자도 위대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취하시는 의미를 뜻하는 것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자 요한은 준비자이고 사실은 당신의 예언자로서의 삶이 이스라엘 모든 예언자를
마감하시며 그들이 외쳤던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박해를 받으셨던 대로 당신도 생명을 바쳐
이 예언자의 소명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는 다 예언직의 소명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예언직이라 하겠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또 실천해야 의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원리를 갖고 있지요.
한번은 교회의 장상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 말씀이 나이가 들면서 바른 소리보다는 아부하는 소리가 더 좋아지니 큰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비판하는 것보다 칭찬하는 소리를 더 좋아하지요.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아요?
‘말이라도 고맙다! 자기에게 이로운 말은 누구나 좋아하게 되어 있지요.
아주 친한 친구가 많지 않은 것은 사람은 바른 말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나 부부의 맞는 말도 얼마나 듣기 싫기에 ‘잔소리’로 밀어 버리겠어요.
사실은 맞는 말이고 나에게 도움을 주는 말인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나에게 바른 말로 거슬리는 사람은
돌을 다듬을 때 튀어 나온 것을 정이 쳐내듯, 사람도 내치게 되어 있거든요.
이스라엘 왕들과 그 측근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협하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우리도 때로 외롭고 힘들더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 바른 말을 하고서도 미움을 받고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더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은 하기도 힘들고 듣기도 참 힘듭니다.
겸손하고 덕이 있는 사람만이 바른 말에 귀 기우리고 또 그 말을 이웃에게 전하지요.
비위에 맞추는 아부하는 말은 하기도 좋고 듣기에는 좋지만 언젠가는 사실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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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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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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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2.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말씀의 다림줄에 자신을 재어보는 삶
<2024.12.12> 아침을 여는 묵상 (암 7:1~9절)
❝말씀의 다림줄에 자신을 재어보는 삶❞
❚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과 구원의 다림줄이 되십니다.
✔ 말씀의 다림줄에 재어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말씀의 다림줄에 자신을 재어보아서 거듭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1~3절).
당시 먼저 난 풀 즉, 첫 번째로 수확한 곡식들은 모두가 왕의 몫입니다. 그리고 다시 움 돋기 시작한 풀은 일반 백성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메뚜기로 하여금 그 곡식의 새순을 다 먹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왕궁은 제외하고 일반 백성들에게만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에 아모스는 불쌍히 여겨 달라 하나님께 중보 합니다.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2절b).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택함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에게 임할 심판이 너무나 커서 완전한 멸망의 불행만큼은 면하게 해 달라는 중보입니다. 거듭된 죄악으로 인해 반복되는 심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그들은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데, 아모스는 이러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구합니다.
아모스의 간절한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십니다(3절). 거듭된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계획된 징계를 철회하실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미루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는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말씀의 다림줄에 자신을 재어보아서 거룩한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4~6절).
하나님은 두 번째로 불이 큰 바다와 육지까지 삼키려고 하는 환상을 보여주십니다(4절). 불은 메뚜기를 통한 재앙보다 훨씬 더 강한 재앙을 의미합니다. 아모스는 불의 심판에 대해서도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5절). 이에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두 번이나 응답해 주십니다(6절). 아모스의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막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히 12:29절). 더러운 것들을 태우는 불처럼 우리 영혼의 더러움을 태우시는 소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태우시므로 순금으로 우리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 그리고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라도 할지라도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은 임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에도 탐심과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자라나고 있는 탐심과 욕망을 살피고, 그것들을 담대히 끊어 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으로 돌이키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말씀의 다림줄에 자신을 재어보아서 순종의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7~9절).
하나님은 다림줄을 손에 들고 아모스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질문하십니다. 아모스는 ‘다림줄’이라 대답합니다(7~8절a). 다림줄은 무거운 추를 달고 있는 줄로 건물을 지을 때 수평이나 수직을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는 참되고 정확한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8절b).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당신의 공의의 기준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심판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 이삭의 제단을 흉내 내며 각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9절). 이들은 조상의 선한 믿음까지 변질시키고 하나님 말씀을 자의대로 해석했습니다. 이렇듯 거짓 믿음들이 사람들을 미혹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용서하고, 또 용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다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닫지 못하고 어긋난 길로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과 채찍을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우리는 순종의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주님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의 다림줄이 되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을 때 주님은 완전한 심판의 다림줄이 되실 것입니다. 심판의 다림줄을 손에 들고 어느 날 우리 앞에 서실 주님을 기억하며 깨어 있어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구원의 다림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침 받음으로 심판의 자리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심판의 다림줄로 손에 들고 우리 앞에 서실 주님을 기억하여 죄악의 자리에서 거룩과 순종의 삶으로 돌이킬 수 있기를(암 7: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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