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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竹嶺] 689m 경북 영주 / 충북 단양
산줄기 : 백두대간
들머리
위 치 경북 영주시 풍기읍 / 충북 단양군 대강면
높 이 689m
대재라고도 한다. 높이 689m이다.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삼국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대강면 용부원리(龍夫院里)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喜方寺驛)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m의 똬리굴(죽령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또 중앙고속도로 단양~풍기 구간이 죽령터널을 통과하여 나 있다. 용부원리 쪽 죽령터널 입구 부근에 제2단양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죽령폭포가 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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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竹嶺의 유래와 전설[네이버 지식in]
죽령은 영남 삼대관문 중 하나로 영주와 서울사이에 있는 가장 큰 재이며 우리는 천년동안 아니, 오늘도 이 고개를 쳐다보며 번영과 영화가 있기를 기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고갯길은 아달라왕 5년 서기 158년 3월에 죽죽이라는 사람이 개설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 되있으나 이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오고 있지 않다.
성덕여왕 11년 서기 642년 대야성 함락시 전사한 죽죽과 484년이라는 긴 세월의 치이가 있으니 동명이인이 분명하다. 촌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옛날에 이 잿 마루에 죽지랑과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수년을 두고 찾아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삼국유사 "효소왕 대 죽지랑"이란 대목의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진덕여왕 때 사람으로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지금의 춘천)가 되어 임지인 춘천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 병란이 있어 기마병 3천으로 호송케 했다. 도독 일행이 죽지령(죽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잿길을 닦고 있었는데 술종공이 보고 잘 생긴 모습과 하는 일을 칭찬했고 거사 또한 공의 늠름한 모습과 위세 당당함을 좋아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었다. 공이 춘천 소재지에 부임한지 한 달이 지나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그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꿈을 깨서 부인에게 물으니 꼭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괴상히 여겨 그 이튼날 사람을 보내어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곳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지 며칠이 되었다고 하였다.
보낸 사람이 돌아와서 거사가 죽은 것을 보고 하자 날짜를 따져보니 바로 꿈꾸던 날 죽은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도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이다"라 하고 군사를 보내어 거사를 죽령 북쪽에 장사 지내고 돌로 미륵불을 만들어 그 무덤 앞에 세웠다" 한다. 그 후 부인은 과연 꿈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매 죽지라 하였다. 이 아이가 자라 출세하여 김유신 장군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신무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 득오곡이라는 화랑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간 봄을 그림에 모든 것이 시름 이로다. 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 눈 돌이킬 사이에 만나 옵게 되오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을 길 쑥 구렁에 잘 밤은 있으니"
이와같은 설화는 전생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짓고 이세상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지었다는 김대성의 설화와 상통하는 이야기로 신라 사람들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죽령 젯마루에 두 개의 대나무 모양의 돌 기둥이 있어 옛 사당의 유물인가 했더니, 잿 마루에서 북으로 2킬로 가량 내려가면 보국사라는 신라통일기의 절터가 있는데 그곳에 마루의 돌과 같은 모양의 돌 기둥 두 개와 높이 10미터 가량의 미륵불상이 넘어져 네 동강 나 있고 주위에 많은 석조물의 파손된 돌을 보고 혹시 이곳이 삼국통일 후 죽지랑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전생의 거사의 묘앞에 불사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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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다자구할미가 지켜준 천년의 길... 영주/단양 죽령 689m
3년 전 꼭 이맘때 소백산 비로봉을 올랐다,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20도가 넘었던 혹독한 날씨. 그날 매스컴들은 소백산 눈꽃이 몇 년만에 한번 볼까 말까할 정도로 '환상적' 이라며 법석을 떨어댔다. 그때의 화려했던 눈꽃능선을 떠올리는 동안 내가 탄 차는 소백산 가슴에 또 하나의 상처를 내며 개통된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을 막 지나가고 있다. 이번 목적지는 죽령인데 새로 난 길은 고갯마루를 넘지 않는다. 이제 고갯마루를 볼라치면 터널을 빠져나와 일부러 올라야 한다.
영주시 풍기읍과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이자 백두대간 고개인 죽령(689m). 길이 열린 것은 아달라 이사금 5년(158년). 문경과 충주 사이에 하늘재(일명 '계립령') 길이 열리던 때와 같으니 나이는 1845살. 인간이 그와 같은 나이를 먹는다면 얼마나 고단한 세월을 살아야 할까 생각하니 문뜩 아찔해진다.
죽령은 추풍령, 문경 새재와 더불어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인 요충지로 영남권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3대 관문의 하나로 각광받아 왔다. 경상도 동북 일대에서 서울 나들이를 가자면 죽령을 넘어야했고 그런 요츙지이기에 고갯길이 열린 후 고개 언저리에는 국사당 건물이 올려졌다. 나라에서는 1년에 두 번씩 제사를 올렸고 의식은 대대로 내려와 지금은 대강면 용부원리에서 그 맥을 잇고 있다. 고갯마루까지 가는 동안 생각해본다. 죽령처럼 이렇게 생명력이 긴 고개가 또 있는가를.
희방사 창건설화 얽힌 '유다리'와 '무쇠다리'
옛길 취재에 나서며 늘 궁금해하는 것이 두 다리로 걸어넘기 좋은 오솔길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는 점이다. 흔히 죽령 옛길을 걸어본 이들은 '걸어야 40분'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상 옛길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채 건넨 피상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대강면의 용부원리 이장을 지낸 최승배씨를 통해 단양의 죽령계곡을 따라 옛길과 유적이 건재함을 곧 알게 되었으니까.
취씨의 귀뜸은 옛길 취재에 신선한 의욕을 불어넣었다. 그가 일러준 보국사 터의 미륵불상과 용부원터, 죽령산신당까지 보려면 고갯마루에서 4km 남짓한 용부원리까지 답사거리가 늘어났다. 또 영주시청 문화관광과에 도움을 청한 결과 희방사 창건설화와 관련해 옛길 가에 있던 유(兪)다리와 무쇠다리 옛터가 남아 있으니 이쯤되면 40분 남짓 계획한 죽령길 여행은 서둘러 하루를 연장하는게 현명하다.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은 게 겨울 해인데 죽령으로 나선 시각은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였다. 길을 훤히 알고 있는 이유원씨(61세, 백두산악회 부회장)가 앞서고 강정화씨(43세, 영주시청 자원봉사원), 주춘옥씨(45세, 정선 노두산악회장), 채승문씨(30세, 태백 등산장비점 <사람과산> 대표) 등 나머지 일행들이 뒤를 따랐다.
날이 풀려 뿌옇게 흐려진 대기. 비로봉이 꼭 히말라야 설산처럼 아스라하고 남원천을 거슬러 고갯길 들머리인 수철리 주점골로 향한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는 창락역이, 서쪽에는 장림역에 속한 용부원이 있었고 주점골에는 예의 이름처럼 주점이 수두룩했으니 오죽 많은 길손들이 이 길 위에 흥청거렸을까 상상해본다.
주점골이 시작되는 희방사역까지 가서야 산행을 시작할 터이지만 두어 번 발목이 붙들리고 만다. 바로 그 두 개의 다리를 보기 위해서다. 풍기읍내에 있는 석조다리인 유다리와 희방사역 뒤의 무쇠다리 옛터를 둘러보고 주점골의 옛길 안내판 앞에 선 시각이 오후 4시.
주점골을 수놓는 주막터의 향수
눈은 발목께를 덮을 만큼 쌓였고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있어 반가움이 앞선다. 사과나무가 많은 풍기땅. 이 골짜기도 예외가 아니다. 너와집 흉내를 낸 건물 하낙 있고 '느티정' 이란 안내판이 세워진 옛 주막거리를 지난다. 길가에는 일정 간격을 두고 죽령 야생화, 으름덩굴, 도솔봉의 동삼 등 탐방객을 위해 마련해 놓은 각종 생태 안내판이 이어진다. 이유원씨가 "길은 우리가 내 놓았는데 국립공원에서 더 잘 꾸며 놓았다"며 그가 시청 근무 당시 죽령 옛길을 정비할 때의 얘기를 잠시 들려준다.
19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갯길이니 사연이 오죽 많았을까. 낱낱의 사연을 모르고 왔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이 안동에서 이 고개로 옮겨질 때 일어났다는 이변, 풍기 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충청감사 형온계를 이곳에서 맞이해 회포를 풀었는데 그 자리를 촉령대와 잔운대라 이름 붙인 것, 또 중종 때의 명신 농암 이현보가 낙향해 예안으로 가는 길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죽령마루에서 그를 맞이해 시와 술을 나누었다는 일 등 수백 년 전에 이곳에서 일어난 사연을 모롱이를 돌아설 때마다 나타나는 안내판이 친절히도 들려주는 것이다.
똑 또르르-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대고 골짜기에는 빛의 정적들이 몰려온다. 나무다리를 건너 숲길로 들어서자 이번엔 엄청난 규모의 대형 주막터가 나왔다. 이끼 옷을 입은 돌담과 음식 저장고 흔적 따위가 주점골의 가장 큰 집이었음을 알려준다. 주막집의 정서란 퍼질러 앉아 막걸리라도 들이켜야 하는데 일행은 따끈한 차 한잔으로 대신한다.
갈지 자로 흐르는 길을 따라 좌우로 집터가 연이어 다가왔다 지나간다. 솔가지에 몽글몽글 덮인 눈을 보면서 골짝 골짝에서 도란거리며 살던 옛사람들을 상상해본다. 길이 가팔라지는가 싶어 머리를 드니 마중왔다는 영주의 조경식 주재기자가 5번 국도에서 일행을 향해 손짓한다. 죽령 고개에 당도한 것이다.
통행량조차 급격히 줄어든 5번 국도는 제설 작업의 손길조차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행과 만나기 위해 차를 몰고 빙판길을 비틀거리며 힘겹게 올라온 고갯마루에는 살을 에는 바람만이 적막을 훑고 지나갈 뿐. 좀전까지 21세기 길손을 반겨주던 '죽령주막'도 '금일 일시 휴업'을 내건 상태고 화사한 주모도 간 곳이 없다. 시방 죽령은 애초에 길이 열리기도 전의 아득한 시절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인가. 멀리 풍기고을에 불빛이 하나둘 보이고 이내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진다. 나머지 답사는 내일로 미룰 수밖에.
보국사지 미륵불은 죽지랑과 무슨 관계?
다시 오른 죽령의 주막집은 여전히 '금일휴업' 이다. 사람이 갑자기 뚝 끊기니 주모는 퍽이나 낙담한 모양이다. 어찌했건 고개에 서면 기분이 좋아진다. 거침없이 뻗어가는 능선을 좇다보면 자유의 기운이 온몸에 배어들어 곧 날아 오를 것만 같고.
주막집에서 아스팔트길로 몇 발자국 걸으면 싱겁게 충북 단양 땅으로 넘어간다. 내리막길이 이어진 죽령천 골짜기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경은 반대쪽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도솔봉에서 죽령 너머 연화봉 쪽으로 이어지는 영주쪽의 산세는 좁고 가팔라 육중한 인상을 주는 반면 단양쪽은 너르고 완만해 마음을 이완시키는 구석이 있다.
단양 하산길에 꼭 들러볼 곳이 용부원리의 죽령산신당이다. 죽령에는 숱한 전설과 얘기가 전하지만 그 중 이 산신당에 얽힌 다자구할미 설화만큼 해학적이고 구성진 것은 없다. 설화 속에 얼핏 정치적인 풍자도 엿보이는 것도 그렇고.
둑령산성은 고구려가 축조했다고 전해지는데 고구려가 전성기였던 광개토대왕 시절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6세기 이후 줄곧 신라 땅이었다고 전한다. 일각에서는 다자구할미 설화 속의 도적떼를 고구려군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어쩌면 신라인들이 고구려에 대한 정치적인 비꼼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 바로 그것. 다자구할미 얘기는 용부원리에 가서 좀더 알아볼 일이고 고갯마루에서 몇 걸음 내려서자 비탈진 밭 사이로 한 채의 민가가 나온다. 버들밭이다.
눈은 의외로 많이 녹아 무릎가지 착용한 스패츠가 오히려 무색하다. 농가 부부가 일러주는 옛길은 마을길을 따라 이어지니 힘든 산행을 각오했던 일행들은 뜻밖의 여유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콘크리트길이 끝나는 곳에 널찍한 공터가 나와 궁금히 여긴 기부래 기자가 다가가보니 머리가 잘려나간 석조불상 한 기가 서 있다. 지형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는 제법 큰 절이었다는 보국사터였다.
불상은 머리가 없는 데도 높이가 4m나 되었고 오른손이 파손되었지만 옷의 주름이나 왼손 조각이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 불상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때 술종공이 만들었다는 미륵불일 가능서이 높다는 것이다. 보국사터는 버려진 밭뙈기를 보는 듯하고 불상 또한 노천에 버려진 상태와 다를 바 없는데 기록이 사실이라면 옛길 답사의 즐거움은 몇 배로 커질 것이다.
무거운 천문관측대를 머리에 인 연화봉이 2천년 숨결을 더듬어 가는 일행의 발길을 굽어보고 있다. 낮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단양의 산줄기가 중첩된 채 멀리멀리 흘러가고 발걸음은 어느덧 용부사로 향한다. 멋들어진 노송이 도열해 있어 오래된 길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오는 용부사 가는 길. 용부사 입구에서 길은 죽령계곡으로 바짝 붙어 이어지고 길 끝에 다다를 즈음 조령폭포가 나타날 것이다.
토끼길이 끝날 무렵 철조망이 길을 가로막았다. 죽령계곡으로 출입을 금지하면서부터 만들어 놓은 것인데 철조망을 우회해 나선 곳은 철도청 죽령터널 휴양소의 주차장. 철길 위 초소는 1941년 중앙선이 개통된 이후 죽령 아래로 난 4.5km 길이의 터널을 관리하고 있는 곳이고 일행이 보리라 기대했던 조령폭포는 죽령굴 앞에 심드렁하게 동면상태로 누워 있다.
용부원리 김씨 노인의 소백한 바램
옛길 걷기는 죽령굴 앞에서 끝이 났다. 용부원리까지 15분 남짓 남았고 이제부터는 5번 국도를 따라 걸어야 했다.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에는 흡입기라도 달린 양 차량들이 질주해 들어간다. 마을원로 김성락(84세)옹은 "고속도로가 생겨 오히려 마을은 안 좋아졌어요. 국도로 버스도 잘 안 다니니 이건 옛날 산골로 다시 돌아간 거나 마찬가지지..." 라며 허탈한 표정을 내비친다.
일행은 김성락옹을 따라 죽령산신당으로 향한다. 역사학자나 답사팀을 위해 수없이 안내를 해주었다는 김 옹이 들려주는 진짜 다자구할미의 이야기는 이랬다.
나라에 바치는 세금으로 삼베니 무명, 엽전 따위가 죽령을 통해 넘어가는데 고갯마루에 숨은 도둑들이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빼앗고 헤치지만 관병도 이를 다스리지 못했다.
어느날 자신도 도둑에게 가산을 빼앗겼다는 할머니가 꾀를 내어 관병과 작전을 짜 도둑굴로 찾아드는데 이때 도둑들이 술에 곯아 떨어진 틈을 타 '다자구야'를 외쳐 마침내 도둑을 소탕하는 데 성공한다. 어느 해인지 모르나 을유년의 일었다.
그후 나라에서 할머니를 찾으려 애를 태우자 관리의 꿈에 나타난 할머니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산신이니 정 보답하고 싶으면 서울에서 연을 띄워 처음 앉는 자리에 사당을 짓고 1년에 제를 두 번씩 올려달라' 했다.두 번째 시도 끝에 지금의 터에 연이 내려앉았고 그 자리에 서있던 옻나무를 베어 산신당을 짓고 나라에서 하사한 사당 옆의 토지에서 얻은 곡식으로 국행제를 올리는 풍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옹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런데 김순재라는 면장이 부임하고선 그 땅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전부 분배해줘 버렸어요. 그래서 그 할마시(다자구할미산신) 재산은 없어졌지. 마을에서는 군수와 문화원에 사정해 돌려주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않고 그 후로 때마다 50만원씩 지원금을 받아 겨우 제사만 지내고 있어요. 헌데 한 달에 몇 번씩 교수네 방송국이네 하면서 찾아와 취재는 해가지만 그거 하나 돌려받게 해주지 못해요."
김 옹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 박힌다. 요즘 세상 어디 설화 따위가 중요한가. 하지만 김 옹에게 다자구할미를 받드는 일은 자신의 조상과 바를 바 없이 엄숙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마당 한켠의 기와 두 조각이 눈에 띈다. 처음 산신당을 지을 때 얹은 기와이다. 건물이 상할 때마다 보수했지만 기둥도 옛것 그대로다.
날씨가 따뜻해져 신당에서 돌아내려오는 길이 질퍽거린다. 문득 멀기만 한 봄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얼마나 턱없는 기대인가. 또 사과꽃 향기가 흩날릴 그때 죽령을 다시 찾으면 고갯길 산행은 제쳐두고 이 언저리의 숱한 옛얘기들을 좇아 다니며 해찰을 부리고 싶은 마음 역시.
*죽령 옛길 여행길잡이
썩 알려지지 않은 단양 옛길 매력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영주까지 서울 중부고속도로톨게이트에서 2시간30분으로 단축돼 당일여행지로 매력있다. 또 영주에는 부석사, 소수서원, 소백산국립공원 등, 단양에는 단양팔경이 가까이 있어 휴가철이나 주말에 즐거운 여행계획을 세워볼 만하다.
옛길 걷기는 영주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희방사역 앞에서 죽령 고갯마루까지 걷는 데 1시간, 고개에서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굴(철도청 죽령터널 휴양소 앞) 앞까지 2시간,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옛길 상세 가이드 본격 옛길 산행 들머리는 희방사역 앞. 희방사역에 세워진 옛길 안내판을 따라가면 곧 주점골 입구가 나온다. 고갯마루까지 중간 중간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길 잃을 만한 곳이 없다.
고갯마루에서 5번 국도를 따라 단양으로 넘어간 다음부터는 죽령휴게소 화장실 뒤 골짜기로 옛길이 이어진다. 골짜기 바로 아래에 보이는 민가 한 채가 버들밭. 민가를 향해 곧장 내려가 마을길을 따라간다. 용부사로 이어지던 옛길은 절 입구에서 오른쪽 죽령계곡을 끼고 간다. 철조망이 나오면 산행 종착지인 죽령터널 휴양소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는 5번 국도로 걸어나와 용부원리까지 약 15분 걸어간다. 산행시간은 총 3시간 가량.
*옛길과 관련해 볼 것들
유다리와 무쇠다리 풍기읍내와 희방사역 뒤에 각각 있다. 희방사 창건설화에 얽힌 두 개의 다리로 옛길의 남원천 옆에 있었다는 유적. 석조인 '유다리'는 창락리 풍기주유소 옆에 있고, 쇠로 만든 '무쇠다리'는 희방사역 뒤 옛터에 비석이 있다.
신라 선덕왕 때 서라벌의 유석이란 사람이 호랑이로부터 딸의 목숨을 구해준 희방골 스님 두운조사에게 감사의 표시로 희방사를 창건한 후 개울에 놓아 주었다고 한다.
보국사터 미륵불 고개에서 대강면 샛골로 내려가는 길가 오른쪽 언덕 위에 있으며 머리가 없는 불상이 한 기 서 있다. 신라 때 신라 술종공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단양군에서 펴낸 <단양의 향기를 찾아>에 소개된 바로는 신라 술종공이라는 신하가 죽지령(죽령)을 넘다 한 거사와 만나게 되는데 서로의 위풍과 자태에 매료된다. 훗날 이 거사의 죽음을 전해들은 술종공이 연화봉 기슭에 미륵을 만들어 그를 애도하고 아내가 아이를 낳자 고개 이름을 따 '죽지랑' 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죽지랑은 신라 화랑 득오가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 속의 주인공이다.
죽령산신당 용부원3리애에서 중앙고속도로 건너편 언덕에 있다. 마을에서 김성락(84세)옹을 찾으면 산신당에 얽힌
얘기는 물론 산신당 안내도 해준다(043-422-7387).
*교통
들머리 희방사역까지는 풍기나 영주가 기점.
승용차편 중앙고속도로 풍기IC에서 나와 죽령고개(5번 국도) 쪽으로 가다가 희방사 전 용머리식당 앞에서 왼쪽 내리막길로 들어가면 희방사역이 나온다.
기차편 희방사역에 내리면 곧장 걸어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으나 이곳에는 무궁화호가 하루 1번(청량리 15:00 출발) 서니 불편. 따라서 풍기역에 내려 희방사행(06:30~19:00 30분 간격) 시내버스(풍기시외버스터미널 054-636-3848)를 이용.
버스편 영주까지 간 다음 희방사행 시내버스(06:16~18:30 하루 13회, 054-633-0011 영주여객)를 이용한다.
날머리 용부원리 중앙고속도로 단양IC에서 가깝고 대강면 소재지를 지나간다. 용부원리까지는 단양에서 시내버스가 하루 5번 다닌다. 용부원~단양 출발시각은 07:35, 09:20, 13:30, 16:15, 18:25.
*잘 데와 먹을 데
영주 시내 깨끗한 여관(황제모텔 054-633-0494)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영주 시내 전문등산장비점 소백산악(054-635-2558) 맞은편 골목에 별난버섯집(633-9666)의 아욱을 넣어 끓인다슬기 뚝배기 해장국이 일품이다. 1인분 4,000원.
희방사역 앞에 이층민박(636-6354/011-818-8944) 등 몇 곳의 숙박지가 있지만 겨울철에는 마땅히 묵을 곳이 없다. 따라서 영주나 풍기 읍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
죽령고개에 죽령주막(011-812-0421)과 죽령휴게소 등 두 개의 쉼터가 있다.
맛집
풍기인삼돼지갈비 풍기에서 단양가는 길에 능금조합 가까이 있다. 풍기 특산물인 인삼을 넣어 하루동안 숙성시킨 갈비로 고기 특유의 냄새를 없애 맛이 깔끔하며 천연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아 건강식으로 권할 만하다. 반찬으로 곁들여 나오는 인삼주와 인삼 튀김이 별미. 1인분 5,000원. 054-637-4830.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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