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곧 타자와의 교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받고 싶은 것은 잘 받아들이고
받기 싫은 것은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욕이나 모욕, 꾸중이나 비판은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시간과 노고, 마음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주고받음’이라는 놀이 속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한 가운데 떡 버티어 서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선사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존재의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곧 우리가 '거저 주어라'라는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거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늘나라를 '거저 받아들여야'만이
내 안에 하늘나라를 지니게 되고, 다름 아닌 바로 받은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자애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곧 우리가 만든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거저 받은 것’, 그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명확히 아는 일입니다.
이토록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포되고 증거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그릇되게 선포되거나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을 건네주어야 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되, 그분께서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목숨까지도 거저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